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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雲帝国
세이운제국
국기 국장
표어 천변만화 (千變萬化), 천리동풍 (千里同風), 그리고 승평세계 (昇平世界)
국가 기미가요 (君が代)
수도 도쿄(東京), 사이쿄(西京)
정치
공용어 야마토어, 조선어, 한어, 광둥어, 만주어
지역어 야마토어, 조선어, 류큐어, 객가어, 한어, 만주어, 영어, 포르투갈어, 제주어, 상해어 등
타이코 (太皇)
칸파쿠 (関白)
내각총리대신
내각관방장관
혼노미야 아사코
이희
시이 가즈오
고이케 아키라
역사
 
 • 아즈마노고카미(東之五神) 강림 1923년
 • 일본 신민혁명 발생 1923년 10월 23일
 • 다이쇼 덴노 퇴위 1923년 11월 15일
 • 쇼와 덴노 퇴위 1924년 7월 1일
 • 세이운제국 건국 1924년 7월 2일
 • 식민지 자치권 인정 1926년 4월 8일
 • 태평양 전쟁 발발 1940년 12월 7일
 • 제2차 세계대전 승전 1947년 8월 15일
 • 1997년 버블 경제 붕괴 1997년 10월
 • 제3차 세계대전 발발 2008년 11월 13일
지리
면적 8,535,861㎢ (식민지와 보호국의 영토는 미포함, 직할 영토 기준) (6위)
시간대 TST (UTC+8, +9, +10)
인구
2016년 어림 약 573,000,000명 (3위)
경제
GDP(PPP) 2017년 어림값 어림값
 • 전체 23조 9,830억 달러
 • 일인당 47,286$
HDI 0.989
통화 세이운 엔 (SEY) ()
기타
도메인 .se
국제 전화 +81

개요

세이운제국은 1924년 12월 3일에 건국된 국가이다. 또한 동아시아에 위치하였으며,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가 혼합된 형태의 신정 연합 제국이다. 세이운제국은 기본적으로 신이 강림하여 세워진 신의 나라이다. 그리고 세이운제국은 야마토 왕국(大和), 조선 왕국(朝鮮), 화동 공국(華東), 광동 왕국 (広東), 만주 왕국(満州), 대만 후국(台湾), 극동 대백국(極東), 이 7개의 군주국들이 연합하여 결성된 제국이다. 세이운제국의 황제인 타이코(太皇)는 야마토 왕국의 왕을 겸한다. 영토는 8,535,861㎢로서 도이치합중국보다 근소하게 작은 수치이다. 제국의 영역은 야마토 열도 전 지역과 조선 반도 전 지역, 만주 전 지역과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 대륙의 극동 지방 전 지역, 대만 섬과 광동 지방과 화동 지방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나머지 중국 대륙은 세이운의 보호국인 중화연방이 통치하며, 북미 대륙 서부는 세이운의 캘리포니아 민주 공화국에서 통치하고 있으며, 그 외의 대양주 지역 등은 태평양 연안 연방이 점령하고 있다.

인구

현재 세이운제국의 인구는 약 573,000,000명이다. 현실 세계 기준으로 3위 규모의 인구이다. 많은 인구가 각 군주국들의 중심, 핵심 광역권에 모여서 살고 있으며, 특히 오에도오사카, 경성, 홍콩 등의 중심 지역에는 더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거주하고 있다.

역사

1923년의 가을 혁명

" 이제는 혁명적이며, 새로운 시대입니다. 모든 신민에게 자비를, 평화를, 사랑을. "

1923년 9월 1일,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 그리고 시즈오카 현 등의 지역에서 괴멸적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그렇다. 관동 대지진이다. 관동 대지진은 일본을 완전하게, 그리고 절망적이고 그 어떠한 희망도 없이 뒤흔들었다. 그렇게 제국 수도 도쿄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메이지 유신(어일신/御一新, 고잇신) 이후, 당시 일본의 자본주의와 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1868년부터 1900년까지 공업 생산량은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특히 공장식 공업이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그 결과 일본은 광물 채굴, 철강 생산, 운송, 제조 등의 면에서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도시 노동자 수도 더불어 증가해 1868년에는 얼마 되지 않는 매우 적은 수치였으나, 20세기 초에는 수 십, 아니 수 백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상관없이 사회의 중위계층 아래의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였다. 최저 임금도 없었고 노동시간 제한도 없었다.

이러한 체제는 메이지에서부터 다이쇼 초기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가 되었으나, 다이쇼 데모크라시 체제를 거쳐 서서히, 결국에는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변모하고 만다. 그렇게 체제 붕괴의 위협은 서서히 아래에서부터 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시계는 1923년 9월 1일을 가르키고 있었다. 운명의 시계는 다가가고 있었고, 그것은 가토 토모사부로 내각총리대신의 사망으로 더 빨라지고 있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시계가 멈췄다. 제국의 자랑, 위대한 도시이자 제국의 꽃이라고 불리우던 늦여름 더위가 남아있던 가을의 도쿄는 그렇게 파멸이라는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이 불러온 파멸 뒤에는 더 잔혹하고 끔직한 인간들 그 스스로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지진의 원인은 지구의 급속한 지각 활동으로 인해 발생한 게 아니라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노동자들이 일본 열도를 열심히 밀어서 발생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주동자가 없는 폭동, 피해자가 없는 폭동, 흔적이 없는 폭동이 이미 신문사의 윤전기 소리에 맞추어 조작되고 있었다. 곧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때 도쿄의 하늘은 하염없이 맑았다.

바야흐로 혁명의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때였다.

고잇신(어일신), 우리가 흔히 아는 메이지 유신과는 또 다른 부류의 개혁, 그러나 아래서부터 시작되는 혁명. 가을 혁명은 그렇게 폐허 위에서 폭풍전야와 같이 시작되고 있던 것이다.

10월 2일의 아침 해가 밝았다. 후지산에서 왠 괴인이 강림했다. 그의 이름은 혼노미야 테루아키(本宮 照明)였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고, 난리통의 일본에서 그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전국의 승려들은 그를 보려고 후지산에 올랐고, 승려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개로 갈렸다. 가짜가 맞는가, 진짜가 맞는가. 하지만 그 상황에서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새로 나타난 이 신과 그 종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했고, 정부와 군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비상게엄 하에서 정부와 군은 그를 체포하고 싶어했으나, 그건 끝내 이룰 수 없는 소원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추종자들은 점점 늘어날 뿐이었다. 그리고는 4명의 괴인이 더 강림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아즈마노카미(東之神)라고 이야기했다. 초자연적 현상과 함께. 그건 인간의 것으로는, 적어도 우리 상식 선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첫 번째 괴인은 1923년 10월 2일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시간에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쿠마모토의 아소에서, 그 다음에는 해가 마치 수평선 같은 인상을 주는 지평선을 넘어가는 시간의 시가 현의 비와 호 물가에서 괴인이 나타났다. 10월 5일에는 세 번째 괴인이 강림했는데, 홋카이도의 소야미사키에서 강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오모리의 사루가모리 모래 언덕 한 가운데에서 또 다른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그러나 사람에 가까워 보이는, 아니 오히려 형체는 사람이지만 능력은 다른 기묘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이 기묘한 사람들, 그러니까 5명의 괴인들은 자신들이 신이라고 주장했고, 신이었으며, 곧 신이라는 존재가 되었다.

한편, 10월 23일에는 2356명의 사람들이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운집했다. 비상계엄 체제 하에서 학살당한 조선인, 사회주의자, 좌익, 그리고 지방 출신의 저임금 노동자와 승려를 중심으로 한 아즈마노카미의 추종자들이 모여 데모를 일으킨다. 군과 경찰, 그리고 관공서의 전 인력이 비상계엄 속 특별근무 체제 아래에서 강경한 진압을 시도했으나, 완벽한 실패. 결국 오전 10시에 시작된 데모는 오후 3시, 파국으로 치닫는다. 전환점이었다. 경찰이 데모 현장 근처를 지나가던 임산부를 '폭동'의 주도자라고 이야기하며 총검으로 그녀의 배를 찔러 죽인 것이다.

소문, 아니 진실은 생각보다 더 빨리, 마치 광명이 천지에 닿는 것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6시. 시민들은 우에노 공원 시노바즈 호수에서부터 우에노 역전의 광장까지, 아니 오카치마치까지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진압이 불가능해지는 완벽하게 시점이었다. 이제 군의 최정예 부대가 이 '폭동'을 진압하려 하고 있었으나, 데모대는 기존의 입장을 관철, 분노한 시민들은 '살인경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마루노우치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민들은 폐허 속에서 깃발을 흔들며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희생과 함께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은 적어도 거리에 나온, 그리고 분노한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지옥이었다. 단풍은 핏빛으로, 주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투쟁의 아침이 밝았다. 햇빛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윤전기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었다. 군부는 어제의 임산부 살해에 대해 군과 경찰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덴노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 불경한 행위이며, 그 행위를 하는 자는 불령선인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군부의 실수였다. 그리고 때는 늦었다. 지나간 막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군부는 그 막차를 그날, 완전하게 놓쳐버렸다. 이미 마이니치 신문에서는 그 임산부는 데모 참가자가 아니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퍼즐이 맞춰졌다.

오사카에서, 이 충격적인 조간신문을 받아든 젊은이들과 아녀자들, 그리고 모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는 외쳤다.

"내가 바로 그 불령선인이올시다."

이른바 그 불경한 행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평범한 시민이었다. 도쿄와 오사카의 다른 구역으로 데모가 확대되어, 총 20만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붉은 단풍, 노란 단풍, 갈색의 단풍까지. 수많은 단풍이 있었고, 그 단풍은 제복을 입은 악마들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색이 더 진해졌다. 그 제복을 입은 악마들은 단풍이 가장 강렬해지는 온도인 섭씨 0도를 유지해주는, 이파리 저마다의 색을 갖게 해주는 최적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하이라이트가 밝았다. 10월 26일 아침, 동맹 휴교, 휴업과 파업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사거리에 있는 생선가게 사장님도 오늘은 문을 닫았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나가지 않았으며, 기계는 멈췄다. 어제 기름칠한 기계의 톱니바퀴 위로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이제 데모는 혁명이 되었다. 그것은 단 한 명의 신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다섯 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원하는, 그리고 세상이 뒤엎어져서 바뀌기를 원하는 단풍 이파리들의 민란이며, 데모요, 항거이자, 혁명이었다.

혁명의 과정에서 그들은 평범한 민중이었으나, 그 민중을 감회시켰던 건 아즈마노카미의 사상이었다. 자비, 평화,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념은 이 시대에 오기까지 일본에서 보기 힘든 사상이었다. 그들은 마치 현인과 같이 미래를 보았으며, 남들보다 한 걸음, 아니 열 걸음은 앞섰다. 그들을 한 번이라도 조우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더라도 그에게 감회되었다.

그렇게 민중은 새로운 신과 종교에 빠져들었고, 혁명은 곧 아즈마노카미와 일체가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숭배해서 일으킨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일어난 투쟁이자 혁명. 그것을 돕기 위해 강림한 신들. 이 모든 것은 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전진해나가고 있었다.

10월 27일, 파업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총파업 체제로의 돌입이었다.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의 경찰서 수 곳은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경찰관들은 모두 도주했다. 윤전기의 소리가 멈췄다. 전차는 이제 운행하지 않는다. 이제 민중의 수는 군경의 수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양 측의 충돌은 격화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자위권을 행사한다. 스스로 적은 수의 무기라도 갖추어 미약하고 조악하며 비전문적인, 그러나 분노한 민중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누르려는 총칼에는 총칼로 맞대응했다.

다음 날 오전은 참으로 평온했다. 폭풍전야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리는 조용했고, 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의 평화는 총검을 가려주는 거대하고 더러운 술수이자 장막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군은 무너진 만세이바시역 앞의 광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사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선제 발포했다. 시위대는 대응 사격했으나, 계속해서 진격하는 군인들에게는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발포를 저지하기 위해 마츠나가 미노루 중령이 부하들을 이끌고 마루노우치 진압 작전지휘부로 향해 반란을 선언했으나, 무장 해제 되고 말았다. 이 날 해가 넘어간 뒤부터 29일 새벽까지, 모두 300명이 넘는 혁명 주동자들이 체포되었으나, 아즈마노카미는 체포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은 박명을 돌파하여 힘차게 달려나갔다.

29일 아침, 우에노와 신주쿠에 파견되어 있던 1사단 1, 3, 49, 57연대가 장교 4명을 살해한 뒤 반란을 선언, 근위보병 2, 3연대와 오사카의 4사단 8, 61, 70연대도 동참했다. 병사들이 감옥과 구치소의 정치범들을 해방시키고, 전날 밤 체포되었던 인원도 전원 석방 처리했다. 재판소는 불타버리고,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 4만 5000정, 권총 2만 8000정을 탈취했다. 오후 4시에는 근위보병 1연대도 이 군사반란에 동참함을 선언했고, 장갑차 부대와 교토의 16사단, 센다이의 2사단이 지지 선언을 했으며, 우츠노미야의 12사단 2, 15, 59연대가 군사반란 진압 지원 출동 명령을 무시하고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어서 히메지의 5사단과 우츠노미야의 12사단 50연대가 진압을 위해 출동하나, 도중에 해체되고 만다.

10월 29일 정오, 오후 3시, 오후 4시에는 계엄군과 정부로부터의 안내방송이 모두 3차례 있었다. 바로 덴노의 육성으로 중요한 방송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예고였다.

오후 6시 정각, 기미가요와 함께 가라후토부터 도쿄, 오사카, 키타큐슈, 케이조(경성), 푸산(부산)에 이르러 일본 내의 모든 라디오에서는 히로히토의 육성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본인은 대일본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 일본 전역에서 황실과 제국의 내각의 과오로서 폭동과 분노가 이어지고, 오늘 박명에는 황국 군인들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 하지만 모두 거국일가 자손이 서로 전하여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황국의 충성스러운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 더욱 미래로 일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황태자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월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기차는 이제 막 절정을 지나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거리의 광장에서는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승리의 그날까지, 진군하고 진격하자!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제국 정부에서는 유럽과 미국 등 열강의 제국 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지지 선언을 호소했으나 이미 내부 소식통을 통해 소식을 들은 각국의 정부는 장님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걸 자신들 스스로 확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11월 3일, 혼노미야 테루아키와 히로히토, 스스로 신이라 자부하고, 신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서로 만났다. 장장 14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다음 날 미명에는 전국에는 긴급 전보와 유인물이 뿌려지고 있었다.

승리의 날이다. 1923년 11월 4일. 황실 전범이 개정되었으며, 11월 15일에는 다이쇼 덴노가 명목상 자진 퇴위하고 히로히토 황태자가 덴노에 즉위하였다.

그날 오후에는 우에노 공원에서의 혼노미야 테루아키의 연설이 있었다.

"사랑하는 시민, 승려, 노동자 여러분! 나는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을 생각하면 무척 기쁩니다. 여러분은 전 세계 시민과 하늘의 군대의 전위입니다. 군국주의적인 군부의 패악질은 전 동아 내전의 시작입니다. 이제 일본제국의 광기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붕괴될 것입니다. 이 가을, 이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그렇게 혁명은 무사히 종착역에 도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1923년 12월 1일, 도쿄에는 3개의 권력기관이 탄생했다. 신일본 임시정부,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위원회, 그리고 아즈마노카미의 아즈마붓쿄 지도자 협의회였다. 여기에서 신일본 임시정부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는 일본제국의 후계자이자 적통인 정부였으나 사실상 혁명으로 실권을 덴노와 내각이 상실한 상태에서 이 정부는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위원회 (이하 혁명위), 아즈마붓쿄 지도자 협의회 (이하 협의회)의 비공식적 회동 경로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의의가 있는 편이다.

일본은 이렇게 1917년의 소련처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해하고 있었고, 이 소용돌이, 아니 태풍은 언제, 어떻게 끝날 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말이다.

새로운 제국

대동아 투쟁의 서막

미국의 패망, 세계의 양분

위대한 경제의 시대

그리고 현재

  1. 굵은 글씨는 각 계열의 종주국이거나,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다 또한 세계국가회의에도 공식적으로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