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야마 저택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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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야마 저택 전투
(일본어: 篠山 邸宅の戦い)
Shinoyama.jpg
저택을 급습하는 경찰들의 모습
사건 정보
참가세력 붉은 바람 붉은 바람
야에야마 야에야마 경찰청
장소 야에야마 야에야마 규자키국 시노야마 시
날짜 1969년 9월 11일 ~ 17일
사망자 경찰관 3명
민간인 5명
부상자 경찰관 11명
민간인 15명
보도관계자 2명
결과 - 붉은 바람 조직원 7명 체포
- 인질 3명 구출

시노야마 저택 전투 (일본어: 篠山 邸宅の戦い, 시노야마 테이타쿠 노 타타카이)는 1969년, 야에야마 규자키국(宮崎国)[1]시노야마 시(篠山市)에 위치한 저택에서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의거한 국제 혁명을 지지하던 학생운동조직,[2] 붉은 바람(赤い風)이 저택을 점거하면서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68 혁명(Mai 68)에 흐름에 동조하던 학생 중심의 저항 운동은 붕괴되고 야에야마에서 왕성히 활성하던 극좌 세력의 와해를 초래하는 등 야에야먀에서 진보 세력의 몰락을 야기하였다.

저택 점거까지의 배경

붉은 바람일본적군(日本赤軍, 후에 연합적군으로 결성)의 모택동 사상(毛澤東主義)에 심취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이른바 신좌파 도시 게릴라 중 하나였다. 본래는 무장투쟁이라는 기치 아래 레닌주의와 볼셰비즘을 채택했던 팔공맹(八共盟, 야에야마공산주의연맹)의 극좌파 계열 중 하나였으나, 팔공맹 내에서도 우익적 성격을 띄었던 주도 세력, '정장파'(情暲派)와 치열한 갈등과 대립 끝에 분리 선언으로 독립적인 무장 단체로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곧장 분리독립 후에 일부 붉은 바람 출신의 요원들을 중심으로 야에야마항공 457편을 공중 납치하려 했던 457편 하이재킹 사건(457便 イジャック事件) 등의 국제적인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등 전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 보던 야에야마 정부측에서는 '폭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신좌파 조직에 대한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기 시작하면서 이들 붉은 바람도 곤경스러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나 붉은 바람의 중심인물이자 지도자였던 다카미야 다케시(高宮武)가 정부측 공안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들의 집중감시 하에 신좌파 활동자들은 사소한 경범죄(길거리 침뱉기 혹은 무단횡단 등등)가 발각되었을 시 이런저런 명목적인 죄목을 대면서 체포하였기에 신좌파 계열 사이에서는 "좌익라는 이유만으로 체포한다!"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으며, 이러한 정부의 강압적인 행동은 언론과 좌파 세력들에게 정부에 대한 비난이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도리어 이러한 정부의 일련한 탄압이 민간에게 체포된 좌익 운동가들과 게릴라들을 순교자의 이미지로 씌워버리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붉은 바람 내에서도 국내에서 지속적인 무장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적군파와 연계하여 이른바 'PBM 작전'에 합류하려는 계획에 나섰으나, 사실상 무산됨에 따라 산발적인 민간인 혹은 민간 점포 습격과 농촌 사회에 대한 혁명 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에 거주하는 성인들과 어린이들을 납치하는 등, 그들의 혁명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내부분열에 대한 위기에 붉은 바람은 '조직의 결집'을 이유로 조직 내 일원들을 집단 린치하고 살해하는 등의 기이한 행각을 벌이고서 시노야마 시(篠山市)의 총포점들을 습격하여 상당수의 총기를 탈취한 뒤, 인근 산 중턱에 위치했던 저택을 도피처이자 거점으로 잡을 것을 계획하고 강제로 침입한 뒤 저택의 거주하던 민간인 다수를 인질로 잡게 되었으며, 잇따른 총포점 습격 소식을 들은 규자키 국 경찰[3]이 붉은 바람의 경로를 파악한 뒤, 저택을 에워싸기 시작하였고, 이에 붉은바람은 농성체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농성과 진압작전

여담

전투가 벌어진 해당 저택은 수리 후 영업을 재개했다. 사건 후 약 수 년 동안은 전투 현장의 치열함을 눈으로 보려 하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뤘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잊혀지게 되었지만 건물은 아직도 당시 전투 현장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운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외관이 깨끗한 것을 보아서는 관리가 계속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로 개인의 총기 소지를 허락하던 규자키국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지역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지역 의회를 거쳐 총기소지를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인해 현재까지 규자키국은 야에야마에서 유일한 총기 소지를 규제하는 쿠니(国)가 되었으며, 외부 지역에서 총기 반입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유일한 총기 규제 지역이라는 점에서 인터넷 상에서는 야에야마에서 총기 관련 사고나 사건이 발생하면 규자키는 오늘도 1승(宮崎は今日も1勝) 드립이 유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미국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이 드립은 흥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에 있다. 이번 가와타바 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Kch에서는 규자키 드립으로 전 게시판이 도배되었다고 한다. 규자키의 선견지명은 도대체...

사건이 발생한 뒤, 인터넷 상 (특히 Kch)에서는 이 사건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에서 비롯하여 시노야마 시죽음의 산(死の山)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나, 시노야마 시에서는 해당 멸칭에 대해 엄격히 법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내놓고 있는 중.

각주

  1. 본래 한자 명칭은 '九崎'였으나 덴케이 혁명에 규자키 출신의 막신들이 대거 참여한 공로로 황실의 거주지나 인근 지명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宮'을 지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시작이다. 때때로 '미야자키'라고도 불리나 같은 발음과 한자를 사용하는 미야자키 시(宮崎市)가 있기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규자키'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2. 초기에는 팔공맹에서 분리된 운동권이었으나, 점차 신좌파를 신봉하는 20대 도시 게릴라들의 조직으로 변모했다.
  3. 야에야마미국의 주 경찰과 같은 형식으로 각 쿠니(国)에게 고유의 치안관리 및 이를 집행하고 통솔할 치안기관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