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uveau Socialiste
누벨 소셜리스떼
벨포르어명 Nouveau Socialiste
약칭 NS
한글명 신사회당
창당일 1949년 8월 13일
전신 정당 사회당
이념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파
당색 붉은색
제1서기(당수) 에두아르 카즈뇌브
제2서기(원내총무) 알프레 두망
국민의회 의석 550석 중 320석, 1961년 기준
상원 의석 348석 중 80석, 1961년 기준
당원 5,567,220명

신사회당(벨포르어 : Nouveau Socialiste)은 벨포르 공화국의 사민주의 정당으로, 과거 1860년에 창당된 사회당의 후계정당이자 원내 제1당으로 여당인 민주정의동맹과 동거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IS)에 가입되어 있다.

역사

창당, 그리고 비상

신사회당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19세기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787년의 무정부 시기의 여파로 인해, 벨포르의 좌파 정파는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자잘한 정당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중산층은 정의동맹이나 급진당, 39동맹을 지지했고, 노동자계급과 좌익세력은 정부참여, 중도세력과의 연대 등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04년에 이르러서야 SBIO(Section Belfort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노동자 인터내셔널 벨포르 지부)이라는 이름의 단일정당으로 힘을 합치게 되는데, 이 정당이 사실상 오늘날 신사회당의 모체다. 이름을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SBIO는 본디 국제적 사회주의 정당 연합체였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벨포르 내의 노동계급-좌익세력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기간동안 SBIO는 주로 리버럴 정파와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SBIO는 1차 대전쟁을 거치면서 좌-우파로 분열된다. 결국 1920년대 당내 좌파는 벨포르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가고, 반쪽이 된 SBIO는 기타 중도좌파 정당들을 흡수합병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당명을 사회당(Parti Socialiste)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던 1932년 재보궐 선거에서 사회당은 드디어 급진당, 공산당 등과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한다. 이 때 사회당의 당수로 재직하던 앙드레 마르몽(Andre Marmont)이 좌파로서는 최초로 총리에 선출된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정당들의 연정은 유지되기 힘들었고, 중도파와 좌파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2차 대전쟁으로 인해 우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공중분해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벨포르 제4공화국 시기

2차 대전쟁이 끝난 이후, 제3공화국의 정국을 주도하였던 중도파와 전시 정국을 주도하였던 우익 정파의 세가 염전주의로 인해서 급속히 쇠락하였고, 벙커파와 공산당의 세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1946년에 벙커파가 연정불참 선언을 하고 공산당이 연정에서 배제되면서, 공화국의 정국은 삼당주의(Tripartisme)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새로운 대연정이 주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 삼당주의의 삼당은 39동맹(Alliance 39; 중도우파), 사회당, 정의동맹이었다. 이때 좌파 세력의 제1당은 공산당이었지만 공산당이 연정에서 배제되고, 대연정이라는 정권의 성격상 사회당은 큰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었고 복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독립 위기와 경기 침체로 인해 삼당주의는 유지되지 못하고, 결국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게다가 넓은 스펙트럼의 대연정 성격상 정권 교체가 잦았던 터라, 국민들은 점차 강력한 카리스마를 갈구하기 시작했고 사회당은 공산당과 통합된 우익 정파(당시 민주공화당, 후일 민주정의동맹)에게 지지를 빼앗기고 만다.

결국 당시 사회당 제1서기였던 조제프 마리에르는 이대로는 버틸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 신사회당으로 재창당하게 된다.

신사회당, 그리고 마리에르 내각

조제프 마리에르
당시 신사회당 제1서기

신사회당으로 재창당한 후,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그랑제콜 출신 인사들의 입당이었다. 좌파 전반과 공감대를 같이 하면서도, 우파적 정책에도 익숙했던 그랑제콜 출신 인사들이 입당하면서, 신사회당은 좌와 우를 모두 아우르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쌓게 된다. 이 인재영입은 신사회당의 대중적 지지를 높히는데 도움을 준다.

이후 당권을 잡은 마리에르는 당의 정책을 정통적 사회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접목된 사민주의로 트는 것과 동시에, 공산당 등 기타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를 추구함으로서 집토끼와 들토끼를 둘다 잡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49년 총선에서 종전의 150석에서 50석이 늘어난 200석을 얻으며 신사회당의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당시 우익 정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민주공화당이 230석을 가져가자, 신사회당은 어쩔 수 없이 39동맹, 공산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조제프 마리에르 내각)

하지만 이런 연정은 정당 간의 이합집산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결국 1950년 대선에서 신사회당은 민주공화당에게 참패하고 만다. 이에 마리에르의 당내 리더십은 큰 타격을 입고 만다. 더군다나 1952년에 마리에르 총리 측근의 리베이트 의혹이 터지자, 결국 마리에르 총리는 비난 여론 속에 굴복하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해 치뤄진 총선에서 신사회당은 550석 중 138석 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1]

벨포르 제5공화국

그러던 와중, 국민투표를 통해 기존과는 달리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대선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당시 제1서기였던 장클로드 파비에조제프 마리에르 전 총리가 대선 출마선언을 했고, 그 이외의 경선 후보가 나오지 않았던 관계로 인해 신사회당은 바로 결선 투표에 들어갔다. 투표 결과, 79%의 지지율로 마리에르 전 총리가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이 과정에서 마리에르 전 총리에게 앙금이 쌓인 파비에 제1서기는 민주정의동맹에게 마리에르의 측근이었던 전 총리실장 조제프 샬롱니에르의 리베이트 의혹에 관한 자료를 우익 언론사에 넘겼고, 이 때문에 결국 마리에르는 1차 투표에서 39동맹필리프 보방에게 밀려 낙선하게 된다.[2]그리고 14대 대통령 선거민주정의동맹의 승리로 귀결된다.

에두아르 카즈뇌브의 등장, 그리고 동거정부 구성

에두아르 카즈뇌브
현 공화국 내각총리

당내 분란을 일으킨 장클로드 파비에와 그 계파가 몇 년에 걸쳐서 축출되고 난 뒤, 그 뒷수습과 1960년의 총선을 이끌 사령탑으로 선출된 것은 마리에르 내각과 보방 내각에서 각료로 있었던 에두아르 카즈뇌브였다. 카즈뇌브는 제1서기 자리에 앉은 직후부터, 당내에 포진해 있던 그랑제콜 출신 인사들을 포섭하여 당을 규합했고, 민주정의동맹의 창당으로 인해 소외된 39동맹, 벨포르 공산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하였다.

마침 탕헤르 위기로 인해,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당시 총리였던 프랑수아 메스메르가 당내 반대파에 의해 정치적 공격을 받으면서 우익의 역량이 흩어지는 상황이 조성되면서, 그에 질린 국민들은 질서정연하게 운영되는 것 같은 신사회당을 비롯한 좌파연합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신사회당은 1960년 벨포르 공화국 총선에서 320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며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에 따라 카즈뇌브 제1서기가 총리에 임명되면서 제5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좌우동거정부가 성립된다.

역대 제1서기

대수 성명 취임 퇴임
1 조제프 마리에르 1949년 1월 1일 1954년 6월 14일
2 장클로드 파비에 1954년 6월 16일 1956년 10월 14일
3 막시밀리앙 레마르크 1956년 10월 20일 1959년 12월 23일
4 에두아르 카즈뇌브 1959년 12월 24일 현직

각주


  1. 여담으로 1952년 총선은 39동맹, 급진당, 정의동맹의 연정을 통한 필리프 보방 내각 구성으로 끝난다.
  2. 그 후, 장클로드 파비에는 신사회당에서 출당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