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회 가입국
대회 창설국
미합중국 연합왕국 프랑스 소련
대회 이사국
일본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한민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도 공화국 호주
신성 로마 제국
Holy Roman Empire
국기
국장
국가 정보
위치
국가 황제 찬가
정부 형태 선거군주제
수도 (자문회의 1497년 ~ 1806년, 1946년 ~)
쾰른 (의회 1949년 ~)
뉘른베르크 (대법원 1953년 ~)
레겐스부르크 (의회 1663년 ~ 1806년)
베츨라어 (대법원 1689년 ~ 1806년)
공용어 라틴어
독일어
체코어
이탈리아어
주요 사건
제1제국 (800 ~ 1806) 800년 프랑크 국왕 카를 1세의 대관식
962년 독일 국왕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
1356년 금인칙서 발포
1618년 ~ 1648년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발렌 조약 체결
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
제2제국 (1946 ~ 현재) 1946년 카를 프란츠 1세의 황제 대관식
1949년 금인칙서 발포
2006년 카를 프란츠 2세 즉위
정치 정보
황제 카를 프란츠 2세
제국의회 의장 앙리 드 나사우
대법원장 프란츠 폰 바이에른
그외 정보
국토 면적 650,785.7Km²
시간대 UTC +1
인구 101,095,292명(2015년)
GDP $
1인당 GDP $
ISO 3166-1
국가도메인 .hr
국제전화번호 +
통화

개요

중부유럽에 존재하는 제국이다. 그 성립 연도에 대해서는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받은 것을 기원으로 보기도 하고,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게 대관식을 받은 962년을 본격적으로 출발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1962년의 금인칙서로 962년의 대관식을 출발로 여기게 되었다.[1]

구성국

  • 7개의 변경백령, 27개의 자유시, 6개의 라인백령, 7개의 선제후국, 24개의 제국백령

정치

황제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막강한 권력이 주어지는 군주정 국가이다.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겠지만, 전쟁도 일으킬 수 있고 법안을 발의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의원을 제적시키거나 제명, 재판 또한 할 권리가 있다. 삼권분립을 완전히 초월하는 초헌법적 존재이다. 다만 황제는 공식적으로 10년에 한번 선제후들에 의해 선출되는 절차를 거친다.

이 절차라는 것이 까다로운데, 각 구성국은 구성국 중 하나를 선제후를 선출하는 투표를 하게된다. 1차적으로 구성국의 주민들이 어떤 구성국에게 투표를 할 지 정한다. 한사람당 한 선제후 후보만 선택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이 1차 투표에서 각 구성국에서는 1등부터 꼴등까지의 호감도 순 선제후 명단을 확정하게 된다. 이 때부터 구성국의 지도자인 변경백 등이 참여하는 2차 투표는 해당 호감도 순 선제후 명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선제후

제국의회

역사

제1제국

제2제국

제국의 부활

벨기에 주권회복 전쟁

1946년 신성 로마 제국이 수립되고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가입하자 오스트벨기에와 벨기에령 룩셈부르크에서 신성로마제국 가입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1948년에는 벨기에 수도인 브뤼셀에서 독립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9년 벨기에 정부는 분리주의 선동세력의 유혈 진압을 경고했고 그해 7월 룩셈부르크 주와 오스트벨기에인 거주지가 무단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신성 로마 제국 의회인 쾰른에 특사를 파견하여 가입의사를 전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7월 17일 벨기에는 군을 동원하여 오스트벨기에를 점거했고 시위자들을 체포·유혈 진압하였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프란츠 1세가 벨기에 정부에 공문을 통해 7월 26일 해당 국가들의 신성 로마 제국 가입을 허가함을 통보했고, 벨기에가 신성 로마 제국에 주권회복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벨기에 주권회복 전쟁이 발발한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7월 29일 첫 전투인 신성 로마 제국령 룩셈부르크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전쟁은 벨기에의 전략과는 다르게 장기화되었다.

당시 벨기에 사령부는 막 수립되고 종교 문제로 시끄러운 신성 로마 제국의 병력을 과소 평가중이었고 빠르게 룩셈부르크를 점거하고 쾰른 제국 의회를 장악해 평화조약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벨기에 사령부는 당장 룩셈부르크가 직전까지 독립국이었으며 독자적인 군대가 운용중이었음을 간과했다.

결국 갑작스러운 전쟁에 놀란 미국이 NATO 기술전수 및 전후복구자금 압박을 통한 평화협정 강요로 벨기에는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평화협정을 통해 오스트벨기에인의 거주지는 모두 신성로마제국에 오스트벨기엔 자유시로 편입되었으며, 벨기에령 룩셈부르크는 니더룩셈부르크 변경백령으로 각각 편입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카를 프란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인기는 크게 치솟는 결과를 낳았다.

파리 협정

1949년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확장은 당시 전후 민족주의가 만연한 유럽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프랑스만은 끝까지 벨기에의 뒤에서 군수지원을 통해서 신성 로마 제국과의 평화협정을 반대했으며, 1950년에는 해당 영토를 반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알레르기성 대응은 바로 알자스-로렌 지방의 독일인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알자스와 로렌은 독일과 프랑스가 빼앗고 빼앗기는 지역이었으며, 당장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알자스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다음 확장의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예측과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알자스와 로렌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전후 복구를 위한 자체적인 경제 정책의 수립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블러핑이라고 생각한 프랑스 정부는 당시 알자스-로렌 지역에 벨기에 사태와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을 곳곳에 배치하였으며, 시민자유를 제한하고, 자주 군사훈련을 벌이는 것으로 표출하였다. 당연하게도 알자스-로렌 지역의 사람들의 불만은 커졌고, 오히려 프랑스의 억압적인 조치가 같은 프랑스인임에도 차별받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분리주의 세력에게 명분을 주게 되었다. 1955년의 엘자스-로트링겐 분리주의 사태가 그것이다.

1955년의 프랑스는 말 그대로 패배주의에 빠져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무기력하게 물러났고, 1954년에는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터져 막는데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자스-로렌의 사람들은 병력으로는 동등하게 차출당하는데, 독일계라는 이름으로 많은 권리와 자유를 제한당한지 무려 5년이 넘어가자 대대적인 분리독립 운동을 벌인다. 당시 알자스-로렌 지방의 사람들은 1956년 쾰른 제국의회에 독립 지원을 보냈지만, 당시 쾰른 의회는 1956년 예정된 선제후 선거 때문에 알자스-로렌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결국 독립운동은 프랑스의 강경진압으로 무산되게 되었다. 그러나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2년간 진행된 진압 작전에서 1957년 9월 프랑스군의 진압 도중 독일계 아이가 맞아 죽은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죽은 아이를 라인강에 던져버리는 장면을 찍은 지역신문이 대서특필하면서 다시한번 분리주의 운동이 벌어진다.

프랑스 NATO 정예군 귀환을 전해듣는 카를 프란츠 1세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자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전쟁에서 활약하던 NATO파견 정예군의 일부를 다시 본토로 불러들여 알자스에 파견하게 된다. 알자스-로렌은 1957년 10월 13일 각각 독립을 선언하여 엘자스 공국과 로트링겐 공국으로 독립하였으며 프랑스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진압을 선언하였다. 그 해 10월 15일 쾰른 제국의회에 엘자스 공국과 로트링겐 공국의 신성 로마 제국 가입을 선처하는 엘자스-로트링겐 시민 10만명의 서명이 담긴 테레지아 서한이 전달되자, 카를 프란츠 1세가 17일 승인하고 프랑스에 엘자스와 로트링겐의 편입을 통보하였다.

이 테레지아 서한으로 프랑스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여론이 심각히 나빠졌으며,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르네 코티는 나치의 부활이라며 신성 로마 제국에 알자스-로렌 수호 전쟁을 선포한다. 미국은 전쟁이 선언되자 바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에의 전후복구자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으며,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지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국가를 압박하였다. 이 선언 이후 1957년 11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보호를 명분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미국의 자금지원 중단으로 경제적으로 곤람함에도 1957년 10월 20일에 발발한 알자스-로렌 수호 전쟁은 양국의 전쟁 열정으로 인해 무려 2년이나 이어졌으며, 1959년 1월에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연합군에 의해 엘자스-로트링겐 지방이 완전 장악되고, 파리까지 진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알제리 전쟁 등으로 반전여론이 높아진 프랑스가 먼저 평화 협정을 제안하였다.

1959년 1월부터 진행된 평화 협상은 프랑스의 제의로 시작되었음에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들어줄 수 없는 알자스-로렌 수호 전쟁 이전의 무조건 평화를 프랑스가 주장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전쟁은 계속되어 1959년 5월에 센 강 동부까지 연합군이 진격하자 파리 조약을 통해 결국 엘자스 공국과 로트링겐 공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하였으며, 엘자스 공국이 엘자스 변경백령으로, 로트링겐 공국이 로트링겐 변경백령으로 각각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의 완전한 승리였지만, 이것은 신성 로마 제국 설립을 주도했던 연합국들의 여론이 비대해지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면서 영국과 신성로마제국의 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하지만 카를 프란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이 전쟁은 독일계 스위스인의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스위스 내전

1959년의 신성 로마 제국의 승리가 가지는 의미는 확실했다. 독일계 시민은 모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재통합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대독일주의 사상이 다시 퍼진 것은 스위스에게는 재앙이었다. 1499년 독립한 스위스는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프랑스계가 모두 융합된 국가였지만 독일계의 발언력이 가장 강했고 그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스위스가 추가되기를 원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스위스는 대독일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을 뿐이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고 중립을 고수했던 것 같이 독일계의 인식은 그대로 일 것이라는 것이 당시 세계적인 시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소속감이라는 명분보다는 그저 독일계로써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치 독일에 찬동하지 않은 것은 당시 장군인 앙리 기상(Henri Guisan)이 영세중립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위스 행정부는 앙리 장군과의 시각과는 굉장히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앙리 장군은 1960년 사망했다.

앙리 장군의 사망과 함께 스위스의 신성로마제국 가입은 각 칸톤마다 뜨거운 주제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어떤 칸톤도 스위스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앙리 장군의 연설 때문에 쉽사리 가입을 제안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62년의 취리히 칸톤에서 발의된 취리히 주의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입안건이 통과되면서 각 칸톤들이 모두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헬베티카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을 선처한다는 의결이 1962년 9월 연방 의회에서 가결되었다.

제네바 대공세의 성공 소식을 전해들은 카를 프란츠 1세

이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뇌샤텔, 쥐라, 제네바, 보, 프리부르 주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티치노 주는 즉각 반발하였다. 하지만 티치노 주의 반발 수준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며 나오는 불만은 이탈리아어권인데 왜 신성 로마 제국이냐 정도였다. 이러한 주장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국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남부지역이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는 것으로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어권의 5개주는 10월 헬베티카 연방을 탈퇴하여 헬베티카 서부 혈맹을 결성한다. 헬베티카 연방 평의회는 탈퇴는 있을 수 없다며 탈퇴를 막기 위해 헬베티카 서부 혈맹에 전쟁을 선포한다.

스위스 내전은 당연히 헬베티카 연방의 싱거운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샤를 드 골 대통령이 프랑스 민족주의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체주의적 확장으로부터의 유럽 방어를 근거로 헬베티카 서부 혈맹의 동맹으로 참전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 전쟁을 패배로 마무리하는 수순이었고, 식민지보다는 본토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한 참이었다. 또한 3년 전의 엘자스-로트링겐의 치욕적 패배를 잊은 프랑스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프랑스의 본래 목적이 스위스를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두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당시 스위스 내전을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 헬베티카 연방의 신성 로마 제국 가입 선처는 이미 1962년 9월 19일에 쾰른 제국의회에 도착했었지만, 내전에 참전하기에는 프랑스의 영토를 전쟁을 통해 뜯어낸 신성 로마 제국에게 당시 유럽의 인식이 별로 좋지 못했다. 그래서 제국의회는 안건의 승인을 차일피일 미루던 차였던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참전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회원국 보호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으며, 스위스의 내정 문제에 개입하는 프랑스에 대한 유럽의 인식이 나빠지는 결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프랑스가 참전한 1962년 12월 15일로부터 일주일만인 12월 22일 쾰른 제국의회가 헬베티카 연방의 신성 로마 제국 가입을 허가했으며, 12월 25일 성탄절을 지난 26일에 프랑스에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보호를 위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카를 프란츠 1세의 25일 성탄절 바티칸 미사에 직접 참여하여 교황과 여러 이야기를 나눠 이뤄낸 성과이기도 하였다. 당시 교황인 성 요한 2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쟁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지만, 스위스의 카톨릭 교도들이 처한 상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참전 당위성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성 요한 23세가 추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교황의 의견에 대한 완전 지지선언도 그가 전쟁 참여시 파문이라는 칼을 빼지 않도록 억누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이 참여하면서 전쟁은 다시 프랑스 - 신성 로마 제국의 전쟁으로 커졌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지만, 전쟁이 지속될수록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으며 결국 제네바 방어 작전에서 참패함으로써 1965년 초의 취리히 조약을 통해 헬베티카 연방의 해체와 연방 구성주의 자유시 선언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의 샤를 드 골의 지지율은 이 전쟁의 패배를 기점으로 급락했지만, 당시 프랑스 대선에서는 승리하여 55% 대 45%로 거의 간신히 승리하였다. 이 무렵 각종 외교무대에서 성공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프란츠 1세는 140년 만에 부활한 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인식되게 되었다.

로마 조약

1965년의 신성 로마 제국의 승리, 스위스의 편입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로마인의 후예인 우리는 로마 제국의 일원이 아닌가?

이것은 연합국이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과 독일 제국을 떼어놓으려는 조치였다. 이탈리아는 1960년대 말부터 북부 접경지대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하자는 리유니피카치오네 운동이 일어났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 제국당(Impero Romano)이 만들어지고 1968년 이탈리아 총선거에서 북부를 싹쓸어 하원 630석 중 172석, 상원 315석 중 63석을 얻으며 제2당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특히 북부는 남부에 비해 매우 소득과 인구집중이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기독교 민주당과 연합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교섭을 1969년부터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이 이상의 영토 확장은 반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특히 파리 협정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제국 편입을 삼가한다는 조항이 있어 만약의 사태에도 참전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더이상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장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살레지아를 제외한 신성 로마 제국의 GDP는 자본주의 진영에서 미국 바로 다음에 위치한 경제 대국이었고, 여기서 더 커진다는 것은 유럽의 지역패권을 완전히 넘기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이탈리아 정부에 신성 로마 제국 가입 재고 사절단을 1969년부터 거의 매년 보내고 유럽의 각국 정상들이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뜯어 말리는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한 독일 영토를 양도하여 세워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에 어떤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가 없었다는 것에 분노하고있었다. 당시 소련은 신성 로마 제국의 초기 헌법안에 사상과 체제를 아우르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문구를 끼워넣은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어떤 국가도 전후 공산주의로 전향하지 않았고, 미국은 마셜 플랜을 통해 전 제후국에게 현금 공세를 한 것이다. 이 와중에 이탈리아까지 집어삼키려고 하자 소련은 남부 저개발 지역에 1970년 붉은 여단을 수립, 이탈리아 정부군과 교전하도록 부채질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받은 CIA는 이탈리아 정부군을 도와주어 신성 로마 제국을 확장시키기 보다는 친미국적 새로운 민족주의 정부를 세우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중이었다. 따라서 오르디네 누오보나 국민전선 같은 극우 세력들에게 무기를 지원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사회정치적 혼란속에 1972년 총선에서 로마 제국당은 과반수인 331석을 차지하며 단독 의결을 통해 이탈리아 공화국의 신성 로마 제국 가입 선처 공문을 쾰른 제국의회에 송달한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1972년 7월 이탈리아 공화국의 경제적 역량이나 정치적 고도화를 볼 때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하여 보호를 받을 이유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이탈리아의 선처를 반려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심화되어가는 내부 교전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치체제가 필요함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가 1972년 11월 자유화 선언을 통해 각 지방자치 정부들에게 3권을 부여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은 그저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써만 기동하게하는 헌법안을 발의, 1973년 5월 국민투표에서 59%의 찬성률로 가결되게 된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공화국, 사보이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 우르비노 공화국, 몬테라트 공화국, 루카 공화국, 페라라 공화국, 만투아 공화국, 로마 공화국으로 나누어졌으며 1974년에는 대부분의 공화국 사상과 이념에 따라 독립을 선언하게된다.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들은 빨리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기를 기대했고 북부의 각 공화국들은 쾰른 의회에 가입 선처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가입시키기에는 아직 이탈리아 정부가 존속하고 있었고, 내부 교전역시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 문제를 끌고오는 것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한으로 처리를 유보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나폴리 공화국이 공산주의 혁명을 선언하며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을 신청하려는 움직임이 서방에 알려지면서 문제는 커졌고, 이탈리아에는 소련군과 NATO군이 모두 진주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장 북아프리카국가들은 모두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의 공산화는 유럽의 공산화를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성 로마 제국이 중재를 시도하여 미국과 소련, 신롬, 비잔티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로마 조약을 합의한다. 북부 이탈리아 공화국들은 신성 로마제국에 가입하고, 남부 나폴리 공화국은 비잔티움 제국에 편입되는 대신,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NATO군이 진주할 수 없고 이탈리아 공화국을 정식으로 해체하고 로마 공화국을 교황령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폴리 왕국과 북부 이탈리아 사이에는 교황령이라는 완충지대가 생겼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공산주의 정권은 유지되게 되었다. 1975년 말에 신성 로마 제국은 무기한으로 연기처리한 가입 선처를 모두 승인하였다.

역대 황제

비고

  1. 그럼에도 800년의 대관식 역시 국가주관 행사로 남아있으며, 역사책에서도 같은 비중으로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