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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족천고(1219)

요족천고(遼族遷庫)는 요국 학계에서 부르는 사건의 명칭으로, 1219년 후요가 원나라에게 멸망하자 이들 씨족과 유민 8만명이 사할린 섬으로 본거지를 욺긴 걸 가르켜 이리 칭하였다. 요족천고는 遼(거란족을 뜻하는 요), 族(부족 족), 遷(욺길 천) ,庫(사할린을 뜻하는 고혈도의 '고')로 이루어진 사자어(四字語)로, '거란 부족이 그 씨족을 사할린으로 욺겼다'라는 말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시라무렌 지역(요동)에 본거지를 틀고 북중국을 호령하던 거란족이 원나라(몽골)와 금나라(여진)에게 밀려 변두리 섬으로 쫒겨난다는 굴욕적인 사건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요족천고(遼族遷庫)야 말로 거란족을 멸족(滅族)에서 구해낸 일생일대의 운이라는 의견도 있다. 특히 후에 이들을 몰아낸 금나라(여진)과 원나라(몽골)이 어떻게 됬는지 보자. 아마 사할린으로라도 천고(遷庫)하지 않았다면 거란은 중국에 동화되어 흔적도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근 요국 학계에서는 오히려 이 요족천고(遼族遷庫)를 굴욕적인 일로 보기보다는 거란 씨족을 연명(延命)시킨 최후의 한수라고 보는 평가가 더 우위에 오르고 있다. 그래서 요국 역사교육에서도 부정적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행운'이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편이다.

요족천고(遼族遷庫)의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고려 고종 3년(1216)에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몽골에게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쇠멸하자, 거란의 남은 종족인 금산왕자 야율시부(金山王子 耶律厮不)·금시왕자 야율걸노(金始王子 耶律乞奴)가 스스로를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컫고 연호를 천성(天成)이라고 정하여. 동만주에 후요를 건국했다. 그리고 이들은 곡식수탈과 미래농경지를 위해 고려를 공격하였고, 결국 3년 뒤 이들은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어 1219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게 된다. 이후 발생한 8만명의 거란 난민들은 후요의 상장군이었던 소해구의 지휘에 따라 원나라의 추격을 피하여 라페루즈 해협을 건너 사할린 섬으로 피신이주하였다. 1220년 소해구를 대장군(大將軍)으로 후요의 마지막 왕 야율함사(耶律喊舍)가 신요(新遼)를 건국하였다.

개국(1220)

1219년 후요(後遼) 혹은 대요수국(大遼收國)이 원나라(元)에게 복속되어 멸망하자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8만의 유민이 고려에 귀속되거나 원나라에 동화되었다. [1] 후요(後遼)의 마지막왕 야율함사(耶律喊舍) 8만의 후요(後遼) 잔당과 유민들을 이끌고 동부로 이동하여 얼려진 라페루즈 해협을 건너 사할린 섬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북부 오하 구네프테고르스크 구 근방에서 나나이족나브히족을 복속시키고 사할린 섬 북부를 점거하는데 이르른다. 1219년 10월, 난생 처음 겪어보는 북부에 혹독한 추위와 눈바람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야율함사(耶律喊舍)는 다시 8만의 유민들을 이끌고 고지가 1,000미터에 이르는 동사할린 산맥을 넘어 넓은 초원이 펼쳐져있는 지금의 프로나이스크 구 근방에 도달하였다.

이곳에서 유목활동을 하며 살던 오로크족은 야율함사(耶律喊舍)와 그 무리들을 보자마자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야율함사(耶律喊舍)와 그 무리들은 이곳이 말을 키워내기 좋고 큰 강(프로나이 강)이 있으므로 식수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문제는 그곳 역시 몹시 추운 기후였다. 특히나 12월이 되던 해, 툰드라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강과 바다어구가 꽁꽁 얼고 빙산이 이르자 야율함사(耶律喊舍)와 그 무리들은 혹독한 추위때문이라도 이곳에서 떠냐아한다고 생각하였다. 야율함사(耶律喊舍)는 마침내 8만의 유민들로 하여금 남부로 향하여 서사할린 산맥을 넘어 마침내 산봉우리 사이에 길게 펼쳐져 강이 흐르는 평야에 이르렀다.

이곳은 오늘날의 수수야 강 유역이며 북부와 동부에 비해 기후가 비교적 따뜻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대적으로 기름진 땅이었다. 야율함사(耶律喊舍)는 마침내 제장소를 찾았다 생각하여, 이곳에 궁전을 건설하고 도시를 건설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이름은 신요(新遼)라 하고 연호는 '새로운 나라를 열다'라는 의미로 신국(新國)이라 하였다. 특히 916년 세워진 요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명을 똑같은 '요'라 칭했다.『대요사기(大遼史記)』에 의하면 '초창기 신요(新遼)의 인구는 2만 1,305호요 그 군사는 기마병 1만명에 이른다' 하였다. 나라는 유목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수수야 강 유역에서는 농경도 실시되었다. 거란족은 이미 요나라 시절부터 농경기술을 몸에 베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농경국가로서 기틀을 잡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야율함사(耶律喊舍)는 후에 자신을 요황제(遼皇帝)이라 칭했으며 훗날 키탄의 역사가들은 요 조조(遼 祖祖)라 부르게 되었다.

요 조조(1220~1245)

요 조조 문서 참조

요 회종(1245~1277)

요 회종 문서 참조

요 현종(1277~1309)

요 현종(遼 顯宗) 야율함조(耶律含趙)은 1277년 칸 자리에 올라 신요 제 3대 황제가 되었다. 요 현종 야율함조(耶律含趙)는 원 통치의 압박으로 특별한 일을 행하지 못하다 1309년 재위 32년만에 사망하였다.

요 현조(1309~1345)

요 현조(遼 顯祖) 야율덕문(耶律德文)은 1309년 칸 자리에 올라 신요 제 4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요 회종(遼 懷宗) 야율전수(耶律戰隧)의 조카로 1309년 요 현종 이해신이 죽자 칸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309년부터 원이 쇠약해져, 새로이 강성하는 명나라에게 위협을 받게되자 국제정세가 크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은 신요 세종기 여전히 사할린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아이누족과 오로크족, 나나이족,나브히족 그리고 거란족(신요)를 모두 통괄지배하였다. 요 현조 이해문은 약 36년간 칸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일을 해왔는데, 우선 원의 쇠퇴기를 틈타 3,000의 군사를 일으켜 서남쪽(지금의 슈미트반도)를 평정하여 사할린 남부를 사실상 장악했다. 또한 요 현조는 1343년 원의 중앙정국 혼란을 틈타 원에 대한 조공을 줄이고,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요 회조(1345~1395)

요 회조 문서 참조

요 건종(1395~1436)

요 건종 문서 참조

요 경종(1436~1508)

요 경종(遼 景宗) 야율염간(耶律廉刊)은 야율해우(耶律海宇)의 둘째동생으로 신요의 제 7대 황제가 된 인물이다. 요 경종은 명나라 문화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매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면서도 그곳을 사신으로 하여금 그곳을 탐문하여 자신에게 듣고 본것대로 말하게 하였다.

요 경종은 특히 장수(長壽)하여 재위기간이 무려 72년에 달한다. 특히 경종은 예술을 좋아해서, 요나라식 목예품이나 서예, 그림등을 즐겼다. 『대요사기(大遼史記)』에 의하면 서기 1500년 기준 경종때의 신요 인구는 10만호 정도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45만~52만명 정도 된다. 또 경종은 수도 수수야 강의 이름을 수경(水京)이라 하였는데 물이 흐르는 곳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후 경종은 재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1508년에 죽게 된다.

요 영종(1508~1554)

요 영종(遼 永宗) 야율곽사(耶律藿社)은 야율해우(耶律海宇)의 둘째아들로 신요의 제 8대 황제가 된 인물이다.

요 복종(1554~1578)

요 복종(遼 福宗) 야율유귀(耶律由貴)는 야율곽사(耶律藿社)의 조카로서 신요의 제 9대 황제가 된 인물이다.

요 릉종(1578~1615)

요 릉종(遼 陵宗) 야율안민(耶律安民)은 야율유귀(耶律由貴)의 아들로서 신요의 제 10대 황제이다. 이가 곧 그 유명한 대요사기 삼요시대의 비운의 왕 이왕(李王)이며, 야율대굴(耶律大窟)에게 암살계획이 발각나 왕의 자리에서 파직되고 남부 슈미트반도로 유배보내져 살다가 음유시인으로 활약했다.

요 연종 (1615~1653)

요 연종(遼 延宗) 야율연호(耶律聯浩)는 신요의 제 11대 황제로 요 릉종 야율안민(耶律安民)을 몰아낸 야율대굴(耶律大窟)의 손자이다.

요 강종 (1653~1708)

요 강종(遼 康宗) 야율부사(耶律夫社)는 신요의 제 12대 황제로 야율연호(耶律聯浩)의 아들이다.

요 함종 (1708~1754)

요 함종(遼 咸宗) 야율적린(耶律迪璘)은 신요의 제 13대 황제로 야율연호(耶律聯浩)의 조카이다.

요 소종 (1754~1798)

요 소종(遼 紹宗) 야율수은(耶律水恩)은 신요의 제 14대 황제로 야율적린(耶律迪璘)의 둘째 딸인 여황제(女皇宰)이다.

요 숭종 (1798~1834)

요 숭종(遼 崇宗) 야율난초(耶律蘭椒)는 신요의 제 15대 황제로 야율수은(耶律水恩)의 동생이자 요나라 역대 3번째 여황제(女皇宰)이다.

요 천종(1834~1886)

요 천종(遼 天宗) 야율소고(耶律炤高)는 신요의 제 15대 왕으로 야율난초(耶律蘭椒)의 조카이다. 왕 재임내내 일본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특히 요 천종이 즉위한지 11년이 되던 해인 1845년, 일본은 일방적으로 사할린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신요를 속국으로 삼으려 하였다. 1885년 시모다 조약[2]이 발표된 이후에는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일본이 분할하여 통치하게 되어 요 천종이 있는 남쪽은 일본이 신요를 속국으로 삼았고, 신요의 50도 평행선 이북은 러시아가 강제점령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요 종종(1886~1907)

신요의 마지막 왕
요 종종(遼 終宗) 야율을지(耶律乙地)는 신요의 제 16대 황제로, 907년부터 지속된 요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요 종종의 임기 내내 신요는 1885년 시모다 조약[3]의 영향으로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05년에는 포츠머스 조약 [4]에 따라 일본 제국의 남사할린 지배권이 국제사회로 부터 완전인정되면서 마침내 1905년 9월 5일 일본 제국, 가라후토 민정서(樺太民政署)를 수경부에 설치하여 지배의 기틀을 다잡고 1907년 3월 15일 「가라후토 민정서」에 따라 수경부의 이름을 도요하라 시로 바꾸고 가라후토 청을 설치하므로서 신요는 요 조조 이해구가 터를 잡고 건국한지 538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가라후토 청이 실시한 1907년 인구조사와 호구조사에 의하면 남사할린에 위치한 신요의 호구수는 20만호, 총 인구는 100만명에 다다른다고 했다. 당시 수경부의 호구수는 10만호, 총 인구는 40만명 이상이라고 하였다.

야율몽주의 독립활동(1910~1993)

야율몽주(耶律蒙姝)는 신요의 마지막 공주이자 17대 추존여황제이며, 일본 제국가라후토 청 식민통치 시기 공주로서 요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인물이다. 1910년 출생하여 1993년 사망하였다.

요 예종 (2007~ 현재)

요 예종(遼 叡宗) 야율토후(耶律土厚)는 신요의 제 18대 황제이자 요국의 현재 황제이다. 야율몽주(耶律蒙姝)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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