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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Korean Empire
(1897년 10월 12일) ~ (1947년 5월 3일)
태극기 국장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가 애국가(愛國歌)
파일:대한국가.ogg
국호 광명천지(光明天地)[1]
정치체제 독일식 전제군주제 [2]
국화 무궁화
국가 애국가
건국 건국 : 1897년 10월 12일
멸망 :
위치 한반도
간도 [3]
면적 222,300mi²[4]
수도 한양(한성/서울)
황실수장 1대 고종광무제
2대 순종융희제
의정대신 심순택(沈舜澤)
김병시(金炳始)
윤용선(尹容善)
조병세(趙秉世)
이근명(李根命)
조병식(趙秉式)
박제순(朴齊純)
이완용(李完用)
민영규(閔泳奎)
조병호(趙秉鎬)
공용어 한국어
화폐단위 양(兩) (1897~1902)
원(圓) (1902~1910)




개요

19세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제국주의를 표방한 독일식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한반도 최초로 대외적으로도 황제국이면서, 근대국가이기도 했다. 1897년 조선국에서 건국되어 1905년까지 자주국이었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부턴 사실상 일본 제국의 번국(蕃國)으로서 사실상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1947년 5월 3일 미 군정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

국호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국명은 ‘대한’(大韓)이다. 이것은 '삼한(三韓)'에서 유래한 것으로 과거 중국 당나라 에서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를 통틀어서 삼한이라 불렀는데, 그 삼한이 통일 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 한다.[5][6] 여기서 대한제국의 국호의 어원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마한, 진한, 변한은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10세기의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뒷 문장에 마한, 진한, 변한이 고려에 이르러서 통합되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하였기에 ‘제’(帝)가 더해져 대한제국이 되었다. '대한'이란 국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도 이 무렵 국호 대조선국(大朝鮮國)이 보이기도 하므로, 이런 용례에서도 대한제국의 국호 원류를 상고할 수 있다. 일례로,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다운 법전 명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한국이나 대한국을 대한제국이라고 한 표기에는, 민족다운 자긍심을 참작한 측면도 일부 있다. 왕국이었던 조선 시대와 달리 국격(國格)이 제국으로 높아진 ‘대한제국’이 되었기에 수도를 대상으로 한 관용스러운 별칭도 ‘황제가 임하는 제국의 수도’라는 뜻에서 ‘황성'(皇城)이라고도 하였다.[7]

제국의 성립

제국 수립 배경

을미사변아관파천을 위시한 외세로 말미암아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독립협회의 고종 환궁요구와 조선의 자주독립 주장에 힘입어 대한제국이 성립되게 이르렀다.[8]

제국 선포

1897년(광무 원년) 2월 20일 고종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에서 상제(上帝)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제정 러시아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9]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에 사대하던 관계를 상징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서 입법기관인 교전소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더불어 박정양이완용, 서재필, 탁지부 고문 영국인 존 브라운, 법부 고문 샤를 르장드르를 위시한 외국인 고문관들을 교전소 부총재와 위원으로 배정했다.

근대화 개혁 추진(광무개혁)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대한제국이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수구파정부 형태 문제로 대립하여 갈등했다.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데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의 참정권을 주장했고 국회의 설치로 국민 대표자를 뽑자고 요구했으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참정권 주장과 국회 설치 주장을 반역으로 규정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광무 2년) 11월 중추원 관제 개편을 공포했으나 수구파는 이에 익명서 사건을 명분 삼아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탄압하였으며 조병식을 중심으로 수구파 행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절파(折破)가 결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이 수구파 행정부에 가담하여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게끔 권고하자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고 곧이어 보부상들이 주축이 된 단체인 황국협회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여 독립협회는 1898년(광무 2년) 12월 해산되고 만민공동회1899년 12월 이후 불법화하였다.

광무개혁과 근대화 추진

이렇게 수립되어 집권한 수구파 행정부는 구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신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시정 방향을 제시하고 갑오개혁을미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면서 점진으로 하는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어서 법률과 칙령 개정안을 마련하려는 황제 직속 특별입법기구인 교전소를 설치하였다. 1899년(광무 3년) 오늘날의 헌법과 같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황권의 절대성을 명시하였다. 이어서 태황제는 국정의 주요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전제군주제 강화를 추구하였고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이어 토지개혁을 이루고자 양전 사업을 시행하고 지계(地契)를 발급하여 근대의 특징이 될 만한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였고 상공업 진흥책[10]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 하였다. 여러 상공업 진흥책으로써 근대의 특징이 될 만한 공장과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대한천일은행(오늘날의 우리은행)과 한성은행을 위시한 여러 은행을 설립하였고 교육 진흥책을 추진하여 기술학교와 사범학교와 관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교통, 통신, 전기, 의료를 위시한 근대 시설을 도입하였다.

군사 분야에서는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게끔 원수부를 설치하였고 서울의 제국군과 지방의 진위대를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한 여러 정책은 경제, 교육, 시설 면에서 근대화와 남에게 보호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끔 국력을 증강하려는 노력이었으나 이런 여러 개혁 정책은 복고주의 성향과 집권층의 보수 성향과 개혁의 미미한 성과와 열강 세력에 간섭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단발령 재개

단발령김홍집 내각 때인 1895년 12월 30일(고종 32년 음력 11월 15일)에 유길준정병하가 한 건의를 황제 고종이 받아들여 실시하였으나 전국에 걸쳐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발과 시위와 상소와 대중집회로 단발령은 결국 고종이 직접 철회 성명을 발표하고서야 사태가 진정됐으나 고종광무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단발령을 재공표하나 국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단발하면서 단발령은 자연스럽게 보급되었다. 1897년 민영환영국공사로 갔을 때 '런던에 도착하여 각국 사자(使者)들을 보니 모두 하나같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지 않는가.[11] ' 하였다. 민영환은 유독 자기만 상투를 달고 한국식 의복을 입은 차림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도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바꿔 입었다.[11] 이것은 자발 하는 단발로 귀국 후 사대부들에게 비판받는다.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일찍부터 조선은 아직 상투를 자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 모습을 구경하고자 민영환을 불러들였다.[11] 그러나 여왕 빅토리아가 한 기대와 달리 런던에서 며칠간 체류하던 민영환은 단발하였다. 민영환윤치호 외에도 외국을 다녀온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단발령에 동참하자 고종1900년을 기해 단발령을 재공포한다.

일부 성리학자는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이라 하여 목이 잘리더라도 머리는 내놓을 수 없다고 맞섰다. 죽동궁(竹洞宮) 민영익(閔泳翊)의 첫 양자로 들어갔던 민정식(閔珽植)은 양어머니인 대방 마님의 노여움을 받고 파양 당해 쫓겨났다.[12] 민정식이 대방 마님에게 파양 당해 쫓겨난 이유의 하나도 '상투를 잘랐다'는 사건 때문이었다.[12] 단발을 최초로 권고한 것이 고종이 아닌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은 당시 사회상 반감의 이유였다.

신교육과 단발령의 확산

조선의 신교육은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본격화하였다.[13] 일설에는 '만약 그 신교육과 '머리털 수난'을 함께 실시하지 않았던들 신교육은 더 이른 시일에 적극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으리라.[13]'라는 견해도 있다. 고종이 단발을 결심한 배경에는 유길준정병하가 한 건의 이전에 서양인 선교사들이 위생에 편리하고 머리 감기가 쉬운 이유를 들어 고종에게 단발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단발령 시행에 협조하라고 주문한다.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선교사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신교육을 받을 수 없게 하겠다고 하여 백성의 단발을 유도하였다.

결국, 신교육의 보급 요람인 신식 학교에 가려면 먼저 머리를 깎아야 했으므로 신교육 자체가 국민에게 많이 저항받았다. 행세하는 가문에서는 그 머리털 자르는 일 때문에 자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13] 이런 일은 실제로 경상북도 대구의 일등 거부이던 장길상의 집안에서도 일어났다.[13] 장길상은 자기 아들 하나가 신교육을 받고자 대구에서 한성으로 올라와 상투를 자른 일을 두고 '불효'와 '난봉'으로 취급해 학비 조달을 중단해 버렸다.[12] 또 그 사람은 영남학회를 위시한 교육단체에 20원인지 30원인지 기부하겠다고 하고서 자기의 상투 머리가 잘리자, "이제는 상투까지 잘렸으니 그런 기부도 그만두겠다."고 상투 시위를 벌인 일도 있었다.[12]

박중양의 단발령 보급

관찰사를 지낸 박중양단발령이 시작될 무렵 일부 인사들과 함께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이것을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사람들은 단발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구한말에 경상북도관찰사가 된 박중양영해(寧海) 지방에 들어가 한 고을의 수천 백성의 상투를 꾀를 써서 잘라 버린 사건이 있었다. [12]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박중양영해군으로 초도순시를 가고서 그 잘하는 연설로 백성에게 감명을 주고서 선언했다.[12]

나에게 따로 인사하고 싶은 사람은 이 연설회가 끝나고서 군청 내아(內衙)로 들어오시오.[12]

도백(道伯)이 자기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 인사받겠다는데 감지덕지한 유지 기관장급들은 좋다고 하고 내아로 줄을 지어서 들어갔는데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이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상투가 잘려나갔으니 내아는 금세 통곡 바다를 이루었다.[12] 이후 박중양은 위생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단발령을 권고했고 호응이 적은 곳은 직접 찾아가 순사들을 매복시키고서 단발을 강행한 후 단발령은 전국 각지로 확산하였지만, 보수 경향이 있는 유학자와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은 격렬히 반발하였다.

군수 삭발령

단발령이 일시 중단, 자율화에 맡겼다가 1900년에 재실시되자 한성부와 각 아문, 경기도를 위시한 대다수 관리와 지방의 관찰사급 인사들도 머리를 깎아 이에 따랐으나 지방에서는 백성은 물론 당시 제주 군수 정교(鄭喬)를 위시한 많은 관리가 머리를 깎지 않자 1906년(광무 9년) 광무개혁을 추진하던 조정에서는 단발령을 재공포하면서 당시 관료들에게 강제로 머리를 깎으라고 지시했다. 1906년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은 각 도에 명령을 하달하여 군수, 참서관, 주사(主事), 서기를 위시한 관리들에게 삭발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정교는 관직을 사임하고 물러났고 1907년 곡산 군수로 부임한 정교는 끝내 머리 자르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1906년 이지용이 한 상주를 받아들여 군수 삭발령을 실시, 공직자들을 강제로 삭발시킨다.

군사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 1893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을 강화도에 설립하였으며 영국 해군 대위 코렐과 부사관 허치슨이 강화도에 들어와 해군 생도들의 근대적 군사훈련을 맡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한국의 신식 군대가 편제, 계급과 군복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1894년 10월 4일 칙령 제10호가 반포되면서 군대 계급을 장교부사관, 병졸로 크게 나누고 장교는 대위, 부위, 참위의 위관급과 정령, 부령, 참령의 영관급, 그리고 대장(大將), 부장(副將), 참장(參將)의 장관급으로 다시 구분하고 부사관은 참교, 부교, 정교의 3등급, 병졸은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의 3등급으로 나누었으며 그 외에 무관생도가 있었다. 대장(大將)은 총리대신급과 같고, 부장(副將)은 대신급, 참장(參將)은 차관급이었다.

고종은 1899년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皇帝)였다. 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이며 대원수인 고종이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899년 6월 22일 반포된 원수부관제는 “대황제 폐하께서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시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하신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라고 규정했다.

대한제국 황제는 대원수로 군기(軍機)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統領)하며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옷이 바로 대원수 군복이다. 고종 32년(1895) 4월 한국에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에 따라 고종은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었고, 검은색 군복의 오얏꽃(자두꽃) 문양 단추는 대한제국 군복의 복제이며,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 조칙(詔勅)을 통해 옷깃의 별 5개는 대원수 군복에 부착하였다.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구축함 기본모델인 양무호(揚武號)급 구축함 (1881~1905)

대한제국 융희호급 구축함 (1914~1947) 일제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대한제국 해역 안보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한제국 한성급 구축함 (1914~1947) 일제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대한제국 해역 안보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한제국 기획 전투순양함이였던 대한호(大韓號)

고종은 1903년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구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양무호는 길이 105m, 무게 3천 톤, 총 배수량이 3,432톤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이었으며, 1904년 또 다른 근대식 전함을 구매하는데, 그것은 바로 광제호(光濟號)였다. 광제호는 총 배수량 1,056톤으로 최신식 3인치 대포 3문을 3개 장착하고 있으며 태극기를 달고 운항했다.[14]

1915년과 1916년 각각 기존의 중형군함이던 양무호(揚武號)와 광제호(光濟號)를 리모델링하여 근대적 구축함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했으며, 1907년 당시 연호였던 융희(隆熙)의 이름을 따 순양함급 수송함인 융희함(隆熙號)을 만들었다.

그와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은 1939년부터 시작된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로, 당시 대한제국의 종주국이었던 일본 제국이 공고급 전함을 시작으로 여러 기라성같은 전함들을 만들어내자 그 여파를 받아 시행되었다. 당시 순종융희제는 비밀리에 독일 출신의 선교사들에게 자문을 받아 일제의 슈퍼드레드노트급 전함 설계도를 비밀리에 구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대한제국 최초의 슈퍼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대한호'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대한호는 만재배수량 34,950톤으로서 총 건조비가 오늘날 원화기준 6,500억원으로 예상될 정도로 규모가 큰 함정이었다. 보호국으로서 전락한 대한제국 황제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보여질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로서 건조가 이뤄질 뻔 했으나 막대한 예산 문제와 더불어 보호국으로서 늘 대한제국을 감시하던 일제가 이를 눈치채고 끝내 방해하므로서 전함프로젝트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외교

대외 정책

틀:출처 필요 문단 대한제국은 해외교민보호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해삼위 통상 사무기관을 설치하였다.

1899년에는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이 맺어졌는데, 청나라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이 청나라와 맺은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간도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토인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간도 관리사를 설치하여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독도는 대한제국 선포 이전 1884년에 울릉도 개척령을 내려 쇄환 정책을 폐기하고, 울도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대외 정책은 '자주적 중립외교'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수교한 국가

대한제국과 수교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수교일 단교일 조약 한자 단교 이유
틀:나라자료 일본제국 1876년 2월 27일 1910년 8월 29일, 1945년 8월 15일 강화도 조약 江華島條約 경술국치 & 8.15 광복
미국 미국 1882년 5월 22일 1905년 11월 17일 조미수호통상조약 朝美修好通商條約 을사조약
틀:나라자료 대영제국 1883년 11월 26일 조영수호통상조약 朝英修好通商條約
틀:나라자료 독일제국 1883년 11월 26일 조독수호통상조약 朝獨修好通商條約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1884년 6월 26일 조이수호통상조약 朝伊修好通商條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1884년 7월 7일 조로수호통상조약 朝露修好通商條約
틀:나라자료 프랑스 제3공화국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 朝佛修好通商條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1892년 6월 23일 조오수호통상조약 朝墺修好通商條約
청나라 청나라 1899년 9월 11일 한청통상조약 韓淸通商條約
벨기에 (동음이의) 벨기에 1901년 3월 23일 조백수호통상조약 朝白修好通商條約
덴마크 덴마크 1902년 7월 15일 조정수호통상조약 朝丁修好通商條約


훈장 제도

1900년(광무 4년) 4월 17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가 반포되면서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대훈위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 태극장(太極章), 자응장(紫鷹章)이 제정되었다.[15] 1901년(광무 5년) 4월 16일에 칙령 제10호로 조례를 개정하여 팔괘장(八卦章)이 추가되었다.[16] 1902년(광무 6년) 8월 12일대훈위서성대수장(大勳位瑞星大綬章)이 추가되었다.[17] 1907년(광무 11년) 3월 30일에 칙령 제20호로 조례가 개정되어 서봉장(瑞鳳章)이 제정되었다.[18]

최대 판도

오늘날의 한반도, 베트남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있었으며 총 인구는 본토가 1700만명. 월남이 1200만명 총 2900만명 정도였다.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大韓帝國 愛國歌)는 대한제국국가였다.

독일 제국의 해군 소속 음악가였던 프란츠 에케르트가 한국 민요 "바람이 분다"의 선율에 의거하여[19] 작곡하였으며, 1902년에 국가가 되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국가를 작곡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국기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역사

  1. 모든 땅에 밝은 빛을 내리리다
  2. 의회가 있으나 황제로의 권력이 집중됨
  3. 완전한 합병상태는 아니며, 일종의 '점령' 상태였다
  4. 점령지인 간도를 포함하지 않음
  5. “我邦乃三韓之地而國初受命統合爲一 今定有天下之號曰大韓未爲不可” (《고종실록》 제36권. 고종 34년 10월 11일.)
  6. “及高麗時呑竝馬韓辰韓弁韓 是謂統合三韓 … 定有天下之號曰大韓” (《고종실록》 제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7. 황실용어 제대로 쓰자 동아일보 2005-07-25
  8. 일본이나 타국의 학설, 한국의 소수설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말미암아 조선이 독립하였기에 비로소 대한제국이 성립했다는 견해가 있다.
  9. 《한국의 황제》, 이민원 엮음, 대원사, 2002년, 24쪽.
  10. 식산흥업정책
  11. 11.0 11.1 11.2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293페이지
  12.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292페이지
  13. 13.0 13.1 13.2 13.3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291페이지
  14. 문화재청 대한제국 군사제도 전시를
  15. 틀:웹 인용
  16. 틀: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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