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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그 나치독일 때문에 망했다고!

SUR 에서 SRU(Soviet Russia Union)/RSU(Russia Soviet Union) 으로 명칭변경

소비에트 러시아 연합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1922년현재
국기 국장
표어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러시아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가 인터내셔널 (1922년 ~ 현재)
소련 찬가 (1944년 ~ 현재)
수도 모스크바 55°45′N 37°37′E
정치
공용어 러시아어, 기타 다수
정부 형태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
일당제 공산주의 국가
국가원수: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

1922년 – 1946년(초대)
1988년 – 1990년(말대)
2000년 – 년(현대)
정부수반:
인민위원평의회 또는
각료평의회 주석
1946년 – 1953년(초대)
1985년 – 1991년(말대)
당료 총수: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22년 – 1952년(초대)
1985년 – 1991년(말대)



미하일 칼리닌
미하일 고르바초프
레빗 푸틴



블라디미르 레닌
니콜라이 리즈코프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고르바초프
역사
 • 설립
 • 해체
 • 재설립
1922년 12월 30일
1991년 12월 26일
2000년 1월 1일
지리
1990년 면적 16,000,000km² (2위)
인구
2017년 어림 145,261,000명 (3위)
기타
통화 루블 (SRU) (руб)
이전 국가
파일:Flag RSFSR 1918.svg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Flag of Transcaucasian SFSR.svg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Flag of the Ukrainian SSR (1927-1937).svg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Flag of the Byelorussian SSR (1919).svg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Flag of Latvia.svg 라트비아 제1공화국
파일:Flag of Lithuania (1918-1940).svg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파일:Flag of Estonia.svg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UR 총책임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러시아어: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소유스 소베츠키흐 소치알리스티체스키흐 레스푸블리크 / 에스에스에스에르[*], 문화어: 쏘베트공화국련맹,러시아), 약칭 소비에트 연방(러시아어: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소베츠키 소유스[*]) 또는 소련(蘇聯, 문화어: 쏘련)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2017년 현재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다. 소련의 영토 면적은 무려 22,402,200 km² 이며,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덮는 이 면적은 북아메리카 전체에 비견할 만하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남쪽으로는 페르시아에 달한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는데, 이는 지구를 1바퀴 반 돌 수 있는 길이이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현재까지 소련의 국경은 페르시아, 대량국, 위구르스탄,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몽골, 대한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아나톨리아연방와 접하였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링 해협으로 이락합중국알래스카와 마주보고 있으며 요국과도 접해 있으며, 북극해를 두고도 이락합중국과 접한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백군을 쳐부수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독소 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여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이락합중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락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냉전상태가 완화되어 현재는 자유로운 상태이다.

종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러시아어: Совет)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소련이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성립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이다. 결국 지금은 공산주의 이며 지도자는 토끼다.

국기

소련의 국기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1이다. 바탕의 색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한다. 1955년에는 낫과 망치의 모양이 기존의 크기보다 조금 작아졌으며, 1980년에는 국기 배경색이 진홍색에서 조금 연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국장

소련의 국장1923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빨간색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역사

러시아의 역사
История России

러시아 혁명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특히 독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 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레닌의 지도 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프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1]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세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하였고, 이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독일어: Lebensraum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중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승리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이락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 제국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던 애국주의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소련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2] 그리고 기존에 국교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를 국제공산당가인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면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깨뜨렸다.

냉전

헝가리 봉기부다페스트로 입성하는 소련군 (1956년)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또,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였다.

또한, 1956년에 소련은 부다페스트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이락과는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이락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리처드 닉슨 이락 대통령과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이 양국간 과학 기술 협정 동의서에 조인하는 모습 (1972년)

1964년에 실각한 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후, 식료품이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다. 1968년 8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다.

페레스트로이카

미하일 고르바초프로널드 레이건의 회담 (1985년)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죽고 안드로포프를 승계한 콘스탄틴 체르넨코마저 1985년 3월에 죽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련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소련 공산당 1당 독재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 국가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한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대부분은 무혈 혁명이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유혈 혁명이 일어나 1989년 12월 25일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석 재판에서 총살당하였다.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89년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이락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해체

고르바초프는 유럽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소련 영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91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던 부시조차도 그에게 다시 폭력이 발생하면 경제 관계가 동결될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경고하였다.[3]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소련 공산당을 해산하였지만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4] 하지만 예전의 실패를 생각하며 2017년에 재설립 되며 이름은 Soviet Russia Union 으로 변경되었다.

지리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있는 콤무니즘 봉, 1989년.

소련은 유럽 대륙의 동부와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영토의 대부분은 북위 50도 이북에 있었다. 또한 소련은 22,402,200 km² 의 면적을 차지하여 세계 제1의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그 면적은 지구의 육지 면적의 1/6에 달하였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는 한대, 아한대로부터 아열대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다. 면적의 11%는 경작지, 16%는 초원지대, 41%는 숲, 32%는 (툰드라를 포함한) "기타"로 분류되었다.

소련 서부의 그단스크 만칼리닌그라드로부터 동부의 베링 해협에 있는 라트마노바 섬 사이의 거리는 1만km가 넘었으며, 소련 서부와 동부 사이의 시차는 11시간에 이르렀다.

1991년 당시, 소련은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아나톨리아, 페르시아, 대량국, 몽골, 대한국과 육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공화국

소련은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헌법,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다.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 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고,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다.

1.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도 가맹연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 1922년
틀:나라자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 1922년
틀:나라자료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민스크 1922년
틀:나라자료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슈켄트 1924년
틀:나라자료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슈하바트 1924년
틀:나라자료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두샨베 1929년
틀:나라자료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예레반 1936년
틀:나라자료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바쿠 1936년
틀:나라자료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알마티 1936년
틀:나라자료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비슈케크 1936년
틀:나라자료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트빌리시 1936년
틀:나라자료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탈린 1940년
틀:나라자료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가 1940년
틀:나라자료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빌뉴스 1940년
틀:나라자료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시뇨프 1940년

주요 도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블라디보스토크

정치

붉은 광장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대중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의 서기장들은 최고 간부 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니키타 흐루쇼프 (1961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77년)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내각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면서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역대 소련의 총리는 다음과 같다.

정치국

정치국(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원만 출마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하향식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5]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비에트 최고 회의

소비에트 최고 회의(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법을 만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회의 간부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 회의(연방원)과 민족 회의(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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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소련의 50코페이카 동전

소련은 세계 2위(1985년 GDP 2조 2천억 달러,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1990년 기준, 세계 31위)에 달했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6] 경제력에 관련해서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그 규모가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는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으나, 1965년 이후부터는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소련 경제를 피폐화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가 안정된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 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소련의 중앙당국 재경 간부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경제계획당국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에는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공산주의적인, 경영인 위주의 단위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7]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소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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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차 라다(ЛАДА) 1200

군사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GUM) 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무역

소련의 서방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 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

그에 비해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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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의 댐 건설, 1934년.

이오시프 스탈린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소련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

소련의 농업은 대부분 소프호스(Sovkhoz)와 콜호스(Kholkoz)를 통해 이루어졌다. 소프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소비에트 농장)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소프호스의 농작물 생산은 정부의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하는 농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 시작된 스탈린의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정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집단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국경일

국경일
날짜 한국어 이름 러시아어 이름 변경 사항
1월 1일 새해 Новый Год
2월 23일 소련군의 날 День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 Военно-Морского Флота 1918년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의 창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Международный Женский День
5월 1일 국제 노동자의 날 Первое Мая - День Солидарности Трудящихся
5월 9일 승리의 날 День Победы 1945년 나치 독일의 항복
11월 7일 ~ 11월 8일 10월 혁명 Седьмое Ноября 1917년 10월 혁명; День Примирения이라고도 불림.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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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혁명 축하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이락을 필두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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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는 소련군 병사, 1988년.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또한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대립하였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여,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소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장갑차까지 동원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과학

소련은 1950년대 이후 이락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또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일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으며,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여 거대과학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소련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의 병기공학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소련의 전투기로는 수호이, 미그를, 항공기로는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리며 독일군이 두려워한 카츄샤 로켓도 개발하였다. 또한 스텔스에도 중요한 이론적 영향을 주었으며, 테트리스 등의 컴퓨터 게임도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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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미르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하여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일도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소련은 아카뎀고로도크 같은 과학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외국으로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여 과학 시설이 밀집한 일부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도시가 되었으며, 이들 도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노동운동

소련은 공산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시기인 1989년 말 이후를 제외한 모든 시기 동안 자유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노조는 당에 소속이 된 상태로 운영이 되었다. 또한, 산업노동자들이 패권을 잡은 사회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능동적 노동운동[8]보다는 정부의 생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용 노동운동이 주를 이었다. 당은 해당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를 수여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알렉세이 스타하노프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목표초과달성과 노동생산성향상 노동운동이다.

문화

소련의 헌법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는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다. 모스크바볼쇼이 극장에 소속된 볼쇼이 발레단과 레닌그라드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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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주거정책의 상징인 흐루숍카 아파트

소련 성립 당시 초기의 연당 평균 실업률은 0.7 ~ 1.3% 였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는 0.1% 미만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세계 최초로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유럽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10시간 내지는 일 14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내전기에서 1930년대 후반까지 이러한 것들이 소련 내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9] 1968년에는 주 35시간 근로제로 바뀌었다. 또한 해고 과정이 매우 까다로워, 해고율이 매우 낮았다.[10]

1920년대 후반부터 고성장을 해온 소련 경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선 본격적인 복지 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엔 지식·문화·예술에 관련된 복지 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다. 각 공동체엔 문화예술 시설과 도서 시설이 들어섰다. 이 당시 소련은 서적 출판율이 세계 1위에 달할 만큼 높았으며, 독서량은 1960년대에 들어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빈부의 차 없이 거의 모든 계층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거나 또는 감상할 수 있었다. 소규모 교육 제도도 발달하여, 추가 교육을 받고싶은 노동계급은 여유 시간을 내서 학점을 이수해 추가적인 학력증진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모두 무상이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0년까지 대부분 이어졌다.[11]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가지를 보장해주는 사회적 임금이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주거 복지의 경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짓기 시작한 호당 평균 18평 짜리 5 ~ 7층(층당 평균 8호)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쇼프카로 해결했으며[12] 이 아파트들은 무상배당되었다. 식량의 경우는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인 1918년부터 각 소행정단위마다 존재하는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 식량을 배급했다. 이러한 배급은 1921년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부터 다시 폐지되었고, 1929년에는 식량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1935년에는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소련은 1947년부터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내걸지 않았지만, 의류, 옥수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의 경우는 배급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러한 정책은 소련이 붕괴하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13]1988년까지는 이러한 복지 시스템이 어느정도 유지가 되었지만,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자본주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가지 사회적 복지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공산주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국가가 되었다.[14][15]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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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한 소련 학생들, 1985년.

러시아 제국의 교육은 무료가 아니었으며, 하층 계급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1910년대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75% 이상 85% 이하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소련의 교육 위원회 초대 위원장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문맹 퇴치를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글을 가르쳤다. 짧은 기간 동안 문맹률을 낮추어 1940년에는 문맹률이 1% 미만으로 낮아졌다.

소련의 의무교육은 11년제(초등학교 4년, 중학교 7년)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 ~ 6년제였다. 교육비는 무료였고 모든 학교는 정부가 관리하였다. 1960년에는 모든 소련 청소년들이 무상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대학 과정도 무료다.

의료

모든 국민은 건강 보호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소련의 모든 의료 기관에 무료로 입장할 권리가 있다.

 
1977년 소련 헌법 제42조

러시아 제국의 의료 서비스와 국민 건강 상태는 매우 뒤쳐진 상태였다. 혁명 이후 1918년에 정부는 "의료는 국가의 관리 하에 둘 것이고, 의료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명 이후 소련의 평균 수명은 증가하였다. 소련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평균 수명 증가율보다 높다.

스포츠

소련의 스포츠는 모두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운동선수가 프로모터가 기획하는 운동 경기에서 나감으로써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윤을 얻는 상업적 스포츠(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소련의 운동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소련은 축구, 농구, 배구, 하키, 아이스하키, 기계 체조 강국이었다. 소련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소련은 스포츠 강국 동독이락을 크게 앞서며 55개의 금메달로 압도적인 1위를 하였다.

1980년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이락을 필두로 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락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였다(표면상의 불참사유는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소련은 월드컵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언론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고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2,000,000부가 넘는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은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다.

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 관제를 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됬다.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게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했다.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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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인구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다. 그 국경 내에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소련의 인구는 1990년 291,000,000명으로 대량국, 인도에 이어 세계 제3위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조지아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차 낮아져 갔다.

언어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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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외무부 청사

소련은 유엔의 원년(元年) 회원국이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다.

위성 국가

이들 위성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위성 국가가 된 몽골은 제외).

대한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대량국과의 관계

티베트와의 관계

나치독일과의 관계

공산주의같은 사상을 만들어 발전이 없고 인민을 굶겨 죽이는 소련의 아니꼬운 행태에 독일시민의 분노와 함께 반소련이 강하다. 독일에서는 소련을 통일해서 발전없는 소련을 구원하고 아시아쪽에 있는 자치공화국들을 파시즘 아래 해방시켜서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고 싶어하는 여론이 많으며, 이는 파시즘의 뜻을 받지 않는 다른 유럽국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출국

출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출국은 불가능했다. 또, 자본주의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위성국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 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다.

종교

소련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레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대다수는 기독교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다수이다. 로마 가톨릭개신교도 존재했으며, 개신교는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교파들이 있다.

치안

소련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중범죄자에 대해 재판 과정없이 총살형을 시행하는 국가였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보장정책이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소련 사회에서 자연인이 범죄인으로 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소련 사회는 범죄율이 매우 낮고, 치안이 강한 사회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고르바초프자유주의, 자본주의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정부 통제력에 상당한 손실이 왔고, 그 결과 치안력이 약해져 범죄 문제에 시시각각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소련 말기에 일어난 범죄율 급증의 이유로 고르바초프의 개혁주의 정책으로 인한 범죄 통제력 약화와,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나타난 빈부격차, 사회 불안정을 든다.[16] 1989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목적대'를 설립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 소련 내의 범죄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 2017년에 이르러서 재설립이 되고 치안은 완벽해졌다.

[17]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는 소련이 국민들의 공산주의적 애국심을 키우기 위하여서 만든 일종의 이벤트다. 프로파간다를 위하여 소련은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을 이용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선구적인 것으로, 몽타주 이론이나 전위파 등이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소련의 주요 인물

각주 및 참고자료

  1. Julian Towster. 《Political Power in the U.S.S.R., 1917–1947: The Theory and Structure of Government in the Soviet State》Oxford Univ. Press, 1948. p. 106
  2. 김학준(2006), 《러시아사》 개정 2판, 서울 : 대한교과서
  3. Goldgeier, p. 27
  4. Gaddis, 2005, p.256–257.
  5. JOHN N.HAROAD의 《소련법률제도》 참조
  6. 소련 관련 법
  7.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참조
  8. 흔히 말하는 노동 복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운동
  9. 《통합노동법》참조
  10. 《Hoeffding (1958–59)》, page 396
  11.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 100》참조
  12. http://web.archive.org/web/20070206132350/http://www.ukraine-observer.com/articles/228/993
  13. 《과학 좌파》참조
  14. 장하준의 《경제학강의》참조
  15. http://www.ajunews.com/view/20140117155241737
  16. 소련 치안 문제
  17.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2800289104006&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89-09-28&officeId=00028&pageNo=4&printNo=424&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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