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일본 제국이 패전한 후에도 조선과 대만 두 식민지를 유지한 세계관이다.

역사

일본군부가 폭주하고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며 태평양 전쟁까지 벌이는 것은 똑같이 진행된다.

역사 변곡점은 1943년 카이로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중국의 장제스는 실제와 같이 조선 독립과 대만 반환을 주장하지만,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자국 식민지에 위험이 갈 것을 우려하여 조선과 대만 해방을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 또한 장제스가 동아시아에서 너무 큰 세력을 형성할 경우 감당할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중국과 일본이 서로 대등하게 견제하며 유지되는 국제질서를 구상하였고 전전복귀 원칙에 따라 전후 일본의 영토를 1931년 만주사변 직전의 영토로 두기로 결정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영구히 무산된다.

시간은 흘러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7월에 포츠담 선언이 발효된다. 포츠담 선언의 내용은 현실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일본의 영토를 4개 열도에 더해 조선, 대만까지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과 대만 유지에 안도했으나 포츠담 선언에 천황제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묵살하였고,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개입해 만주를 공격하자 항복하게 됐다.

소련은 본래 기세를 몰아 한반도를 공격하려 했고 관동군은 궤멸됐으나 맥아더가 일본은 자신의 관할이라고 비난해 포기,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만을 공격했다. 이후 한반도는 온전히 일본에게 유지된 채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맞이했다.

항복 이후 1945년 9월 2일 일본에 진주한 GHQ는 일본의 비무장화, 민주주의 도입, 천황의 실권 박탈, 군국주의자 전범 처벌 등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조선과 대만을 유지하는 대신 일체의 제도적 차별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가 그해 10월 폐지되었으며, 모두 일본의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하나의 일본으로 묶이게 되었다. 더해서 조선과 대만에도 일본과 같은 의무교육의 실시, 헌법 및 법률 적용, 참정권 전면 부여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대신 일본은 이들에 대해 일본어 상용 등의 동화정책은 유지하겠다고 희망했고 GHQ도 이것은 수락했다.

아직 심리적 괴리감이나 간극이 큰 상황에서 연합군 점령군에 의한 내외평등 및 통합 조치는 일본 열도에서의 반발을 불러왔으나 점령당한 상황에서 이에 대해 반박할수 없었다.

이후 1946년 조선인과 대만인도 참여한 첫 중의원선거가 거행되고, 1947년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소련이 점령한 만주를 공산당에 넘겨주고 장제스의 국민당 측에서 1946년 3월 국공내전을 재개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전례없는 특수를 보게 되었으며 농업국가화 계획이 철폐되며 기적을 맞이했다.

1949년,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며 일본은 중국과 국경을 맞댄 국가로서 냉전의 최전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