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리에 테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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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에 테루야
東江照屋
아가리에 테루야.jpg
야에야마제9대 연방총리대신
임기 1887년 1월 21일 ~ 1889년 3월 26일
전임: 모리모토 다카시(제8대)
후임: 세키 마사마에(제10대)

신상정보
국적 야에야마 야에야마
출생일 1829년 6월 7일(1829-06-07)
출생지 야에야마 야에야마 미야기 번 츠난 현
사망일 1904년 7월 11일 (75세)
사망지 야에야마 야에야마 규자키 국 미난 시
정당 헌정당, 자유연맹

아가리에 테루야(일본어: 東江照屋, 1829년 6월 7일 ~ 1904년 7월 11일)는 야에야마(八重山)의 신막부 시대(新幕府時代)와 덴케이 시대(天慶時代), 다이켄 시대(大建時代) 초반에 활동했던 정치인으로서, 1870년대부터 활발했던 입헌민권운동(立憲民權運動)의 중심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최초의 정당 정치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근대 초기에 야에야마에서 서구식 정당정치를 도입하려 노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대 아시아주의를 신봉했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총리 재직

오랜 기간 막후에서 활동했던 아가리에 테루야는 뒤늦게 모리모토 다카시(森本敬) 총리[1]가 이끌던 입헌민의당(立憲民義黨)이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을 두고 내부 분열을 겪으면서 내각이 전면 총사퇴하고 모리모토 총리 역시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자유연맹(自由聯盟)을 위시하고서 '정당정치의 연속화'를 주장하여 파벌 및 번벌 형태를 띈 '나카구치 연합'(中口聯合)을 상대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어 새로이 연방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아가리에 테루야가 이끈 당시 내각의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가리에 내각을 참조.

아가리에 테루야는 총리 재직 동안 모리모토 다카시의 뒤를 이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고 노력했으나, 청일전쟁(淸日戰爭), 러일전쟁을 통해 열강으로 진입했던 일본과는 달리 야에야마영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에 있어서 단순히 서구적 근대화를 모방한 중진국 정도로만 인식했었기에 개정 자체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개정 및 불평등조약 폐지 노력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나서야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외에 당시 '군부대신 문관제'를 법안으로 통과시켜, 현역 무관들이 내각의 관여하여 군부를 주도로 한 전횡을 일으키는 것을 예방하고자 했다. 이에 일부 청년파(靑年波)를 비롯하여 중앙 정치에 관여 및 간섭을 시도하던 장교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봉성 사건(鳳城事件)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제국이 군부의 좌지우지된 것과는 다른 반(反)군국주의와 정당정치를 유지하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1889년의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총리직을 사임함에 따라 내각총사퇴가 이루어졌고, 후임 총리는 세키 마사마에(関正前)가 임명되었다.

조선의 팔중시찰단 파견

1880년대부터 조선(朝鮮)은 김홍집(金弘集)을 주도로 했던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제국(日本帝國)에 파견하는 등 주기적인 외래 문물 수용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때 조선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던 야에야마의 외무관, 야마시타 간조(山下莞徐)가 당시 행수원부유수로 좌천되었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 정부가 개화를 위한 시찰단을 다시끔 편성해 야에야마에 파견할 것이라고 전했으며, 이에 아가리에 총리는 혼쾌히 응답한 뒤, 당시 다이켄 덴테(大建天帝)에게 해당 소식을 전달하고 윤허를 받았다.[2]

아가리에 총리는 아시아주의자로서 일본, , 조선과 함께 야에야마의 사국(四國)이 동양의 근대적 발전의 협력하고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지켜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신봉했는데, 그의 뜻대로 일본제국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매수하여 친일파로 변절시켰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의 근대화를 돕기 위한 심산으로 시찰단에 대한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조선의 개화에 대한 암담하고 차가운 시선과 쇄국적인 태도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고 하며, 팔중시찰단이 찾아 온 후에 자신의 저서인 '동방평화론'에서는 "조선은 이전 혁명에서의 실패를 딛고 다시 계몽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국가"[3]라며 일본의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말년에 조선에 대한 강도 높은 막말과 비난을 했던 것과는 대비되듯, 동양의 국가들의 근대적 발전에 대한 노력을 통해 계몽국가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상적 평가

대체로 야에야마인들은 아가리에 테루야를 근대시기의 정치인이자 위인으로서 가볍게 여기며, 근대 정치 및 역사학에서나 다뤄질 만큼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나, 그의 저서였던 '동방평화론'(東方平和論)은 당대 아시아주의가 변질되기 이전의 본질적 의미와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높은 가치를 지녔을 만큼, 그의 아시아주의적 사상과 흥아론(興亞論)은 현재까지도 근대 사상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의 반성과 동양의 연대에 대해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동방평화론'은 대체적으로 안중근(安重根)의 '동양평화론'과 함께 팔한중일(八韓中日)의 사국의 공동연대를 통한 일종의 유럽연합(EU)의 형태를 강조하였다. 그외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국인 일본에 대해 "정부의 역사는 있어도, 국민의 역사는 없다."[4]고 했던 것에 반해 아가리에는 야에야마에 대해 "정부와 민중의 역사는 공존해 왔으며, 이는 현재도 유효하다."고 발언했는데, 근대를 맞아들인 야에야마에서 입헌민권운동과 자유주의 사상을 펼쳤던 그에게 있어서 정권과 정책은 민중의 요구와 움직임에 바뀐다라고 확신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는 총리 취임 이전의 벌어진 청일전쟁(淸日戰爭)에 대해서도 "다들 의롭다 하지만, 동양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이번 전쟁이야 말로 추악하고 의롭치 못한 전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으랴."라고 했다. 일본의 만화가로서 아시아주의와 손문사상(오족공화)의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도 "그가 일본인이었더라면, 아마도 그 위선자와도 흥미로운 언쟁을 오갔을 것"이라며 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답했다. 야스히코의 작품, 왕도의 개(王道の狗)에서도 짤막하게 등장하여 "그렇게 동양의 연대를 중요시 해오던 그 작자께서 어찌 이리도 답답한 위선자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라면서 당대 일본의 여러 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각주

  1. 이름인 '敬'의 경우에는 '사토시' 혹은 '케이'로 읽는 경우도 있다.
  2. 다이켄 덴테는 아가리에 테루야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주의 사상가들을 측근으로 등용하여 형식적이긴 하나, 만족공화(萬族共和)를 국가 외교 정책 방침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3. 사실 여기서 아가리에 테루야가 잘못 알고 있던 점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단순히 메이지 유신 혹은 쇼에 개화 같은 개혁이 아닌, 오늘날로 치면 외환죄에 해당되는 반역에 해당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야마시타 간조갑신정변에 대한 내용을 왜곡하여 전달해준 점도 있다.
  4. 근대에 들어 유럽미국에서 많은 정권이 민중에 의해 바뀌거나 민중의 요구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걸 보면서 한 말이라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