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일본의 침공

1938년 6월 29일 오전 9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하였고 뒤이어 소련도 한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소련은 투바와 만주전선에 10만 대군을 동원하였고 일본군도 동래에 15만 대군을 상륙시켰다. 해군의 약체화로 인해 대한국은 일본군의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으나 대소련 전선에서는 7월 1일부터 7월 7일까지 이뤄진 첫번째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소련군을 돈좌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한국은 전열을 재정비한뒤 공세에 나서 8월 1일에 소련군 방어선을 붕괴시켰고 전투 끝에 소련군이 5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한국군은 8월 9일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진격하였다. 8월 12일 소련 극동군은 항복하였고 한국은 그리고리 시테른 극동군 사령관과 강화조약을 맺었으며 한국군은 소련 영토로부터 전면 철수하였다. 결국 소련은 한국 침공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 전선에서는 한국은 일본군에게 연패를 거듭했는데, 일본군의 수가 예상밖으로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청천 소장과 김홍일 중령은 5군단을 이끌며 밀양 부근에서 무려 6배가 넘는 병력을 상대로 45일이나 지연전을 수행했다. 이 전투 덕분에 경상도 남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국민들이 피난을 갈 시간을 벌었으며 남부에 있던 군수물자와 병력이 온존하여 한강 이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밀양 전선은 일본군에게 돌파되었고 조선반도 남부는 전쟁 말엽까지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게다가 이승만 총리의 오판으로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이 일어났고 약 7만명의 병력중 2만명만이 그야말로 ‘몸만 빠져나와’ 평양에 당도했고 5만명의 병력은 포로가 되거나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전력에서 이탈해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내각 내부에서는 이승만에대한 그야말로 엄청난 책임론이 불었고 10월 7일에는 세조가 직접 그를 총리직에서 해임한다.

한국의 반격, 그러나 교착되는 전선

일본은 해군 전력을 상당수 상실한 한국을 무시하고 조선반도 동해안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으나 한국은 이미 해안선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한 뒤였고 일본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으며 상륙전을 포기한다. 그러나 총 40만명의 일본군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한강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 한국군은 개성 부근에서 끈질기게 지연전을 지속했고 동해안과 백두대간 전역에서는 일본군을 격퇴하거나 유격전을 벌이는등 일본군의 전력을 꾸준히 소모시켰다. 개전 초반에는 일본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제공권도 수천기의 한국 전투기로 인해 밀리기 시작하여 사실상 작전 가능 지대가 남부에만 한정되었다.
어떻게든 일본군을 막아낸 한국이었지만 그럼에도 섣불리 공세로 전환할 수가 없었는데 남부에서 황급히 철수한 터라 군대 전체가 재정비되지 못했고 붕괴되어버린 5군단의 악영향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국이 미처 전열을 재정비 하기 전에 일본은 중국 대륙 서부 해안을 따라 60만명의 대군을 앞세워 중국을 침공하였고 국부군을 차례차례 박살내기 시작했다. 반장제스 군벌들은 기회를 엿보다 일본에 협조하길 택했고 이로인해 허베이성부터 저장성까지 모조리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에게 베이징 방면과 조선반도 방면의 양면 전선을 강요하여 전력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 또한 양면전선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1938년 10월 9일, 중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고 장제스는 한커우를 거쳐 충칭으로 후퇴하였으며 다음날에는 한국과 중국은 동맹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