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5월 1일부터 1978년 11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아이누 공화국의 공기업이었다. 1962년 정부의 시베리아 현대화 정책으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와 이후의 불황 등으로 인하여 막대한 누적 적자를 안게 되었고, 철도성은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1973년 부터 1978년 국유화 직전까지 한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노사관계 악화로 인한 파업 등 노동 쟁의가 빈번해졌고, 철도성의 재정은 인플레이션까지 더해진데다 해외귀환자들의 고용 등으로 인하여 극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1977년 10월 26일에는 정부에 경영 개선과 사업 계승 및 운영을 위한 새 철도 회사의 공기업의 설치를 요구하여 사실상 철도성의 국유화가 확정되었다. 곧 11월 4일에는 〈아이누국유철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약 1년간의 준비 끝에 1978년 11월 30일에는 공공기업체 아이누 국유철도가 발족하게 되어 철도성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아세나 0계

1965년 프랑스영국의 지원을 받아 원래 3년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와 디젤기관차를 일부 휴차시키고 고속철 개발에 뛰어들었다. 3년간의 연구 끝에, 아세나라는 열차의 프로토타입 제작에 성공했다. 아이누어로 '새롭다'의 아설과, '빠르다'의 에나라는 단어를 합성시켰다. 하노야 - 카요토 시운전 때, 최고속도 시속 243km를 찍으며 연구원들과 기관사들 사이에서 이 열차에 '탄환열차'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이 열차의 도입으로, 기존 증기기관차로 하노야 - 카요토를 달리면 12시간 남짓을 달려야 하지만, 아세나 열차는 그것보다 10시간 정도 더 빠른 2시간 6분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1968년 8월 22일, 마지막 시운전을 거치고 바로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 각각 아이누어로 '낮다'의 노칸급 열차, '높다'의 누마급 열차로 운행을 시작하였다. 열차는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생산되었으며, 아이누 철도성이 생산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속열차였다. 그러나 아세나 0계는 21세기의 빛을 보지 못 하고 1999년 7월 11일, 0계의 최후기형인 0291편성 열차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퇴역 당시, 유일하게 역무원과 승객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떠난 열차로써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