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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개요

아침해의 원유관 세계관의 주요 사건들과, 시간에 따른 일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사건의 경우, 사건 문서에 각 사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는 식으로 분업되어있다.

일부 시간대의 일들은 개인작이라는 한계상 조금 부정확할수도 있으니 유의.

 16세기
  • 1559년:불의의 사고로 원균이 변소에 빠졌고, 뒤늦게 건져졌으나 얼마 못 가 세균성 감염으로 사망하였다. 아스트랄하지만 아침해의 원유관 세계관의 1번째 분기점이다(...)
  • 1592년:조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며 더 격렬해진 출병 반대 의견에도 불구, 기어코 히데요시는 5월 23일 출병을 감행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의 점령을 완료하였으나 봉원군의 봉화피우기가 제대로 성공한두번째 분기점으로으로 발생한 역사개변으로 인해, 부산 일대의 영토를 조선군에게 다시 빼앗겼다. 연말이 되자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여 보급에도 서서히 문제가 생겼고, 해양에서 왜군 함대를 박살내기 시작한 이순신과 조선 육군의 빠른 봉쇄로 인해 전선 진행이 더뎌지기 시작했다.
  • 1593년:부산에서의 왜군들이 진격을 위해 출항할 조짐이 보이자, 이순신은 이 전함들을 꾀어내고 박살내는 식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공성전 끝에 부산으로 조선군이 다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 1594년:일부 군대의 철군이 시작될 정도로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장기화 되어 막심한 손해를 본 다이묘들의 불만이 폭주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강화를 체결할것을 요청하여 명과 조선의 사신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조선 팔도 중 4도를 넘겨달라는 일본의 무리한 요청으로 인해 이 협상이 결렬되었고, 4달 후인 1595년부터 전쟁을 다시 재개하겠다는 의사를 일본이 표명했다.
  • 1595년:예상과 달리, 히데요시로 인해 큰 손해를 보아 분노한 다이묘들이 오사카성을 야밤에 습격하여 주위를 점거, 히데요시를 포위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들로부터 부산포 해전 참패와 쓰시마 영유권의 위기로 할복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결국 다이묘들이 직접 오사카성 안으로 들어와 히데요시를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관백 자리가 공석이 되자, 히데요시 살해를 주모한 다이묘들은 1살 남짓한 히데요리와 히데츠구를 우선 그대로 자리에 유지시키느냐, 아니면 아예 새로운 관백을 들이느냐를 두고 다시 한 번 내분을 시작하였다. 이무렵, 철수하던 일본군들을 격퇴하고 아예 추격을 시작하면서 한반도 내의 일본 세력이 사라졌다.
  • 1596년:일본의 내분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은 명과의 합동작전으로 제 1차 쓰시마 해전을 감행, 혼란한 틈을 타 쓰시마를 점거하는데까지 성공하였다. 만력제는 조선이 번국으로서 일본 견제를 위해 대마도의 일부통치해주길 희망했고, 이 시기의 쓰시마의 동남부를 '조선령 대마도'라고도 부른다.
 17세기
  • 1602년:도쿠가와 가문의 세력이 일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한 조선은, 조정에서의 논의 후 그들에게 투자용으로 수군 등 해양 방면에서의 지원을 하였다.
  • 1605년:히데요리를 확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일본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에도막부는 조선에 화친할 뜻을 밝혔고, 조선은 쓰시마 할양과 기타 요구사항들을 조건으로 화친요청을 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각 조선통신사와 왜관이라는 교역처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재임기간의 절반 정도를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극도로 불안정해진 일본 정계 정상화에 사용해야 했다.
  • 1608년:이연이 붕어하였으며, 사후 묘호는 쓰시마를 정복하고 일본을 몰아세운 점, 전쟁에서 이겨 전란을 평정한 점 등이 고려되어 장조로 결정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인 광해군 이혼이 대를 이었다.
  • 1618년:누르하치의 후금이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동시에 조선도 명나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만주 지역을 기점으로 후금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 1622년:대륙과 만주에서의 치열한 접전 끝에 누르하치가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후금은 대륙에서의 퇴각을 시작하였다. 승전 축하를 위해 북경에 당도한 조선의 사절단은, 명나라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란과 호란을 모두 조기에 막아냈다며 조선을 치하한 만력제는 상으로서 점령한 남만주 지역의 일정 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허락받았다.
  • 1623년:만력제가 붕어하였다.
  • 1627년:얀 얀서 더벌터브레이가 제주도로 표류하였고, 조선에 잔류하여 병기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 1628년:후금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명나라에서 이자성의 난이 발발하였다. 조선은 해당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했으나 우선 중립정책을 고수하였다.
  • 1630년: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입성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나름 상태가 멀쩡했던 북경에 진입하기 위해 벌인 수많은 살육으로 정통성에 대한 의구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 또한 인의를 져버린 이자성을 천자로 볼 수 없다며 순나라의 중화제국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 1633년:정권의 명분 확보를 위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던 이자성에게 독이 든 차가 올라갔다. 이자성은 차를 마시고 피를 토한 뒤 즉사하였다.
  • 1634년:이자성의 동생 이자경이 황위를 이어받았고,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파병을 취소하려고 시도하였다. 이후 이 건에 대해서 내분이 일어나다가 결국 지방 세력들의 반란과, 티베트의 선공으로 순나라가 다시 분열기에 접어들었다. 정국이 서서히 안정화된 일본에서 데지마가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 1636년:순나라의 멸망으로 중국이 분열되자, 조선은 중립적인 자세를 우선적으로 취하며 대기했다.
  • 1650년:조선이 황해 근처에서 악명이 자자하던 중국 출신 해적들을 토벌하던 도중, 중국무역을 끝내고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던 네덜란드 함대의 도움을 받아 해적들을 격퇴하였다. 이 때 네덜란드에 대한 정보가 조선에 처음으로 전해졌으며, 첫 조우 당시 의사소통은 중국어로 이루어졌다. 이후 배에 실린 총에 대한 보고가 올라가자 조선 조정은 차후 만주에서의 치안 관리와 요동 지역 통제를 위한 병기 무역을 할 의사를 표했고, 이에 동방 무역으로 돈을 벌 방법을 찾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부산에 네덜란드인 거주지인 '화관'이 설치되었다. 일본이 네덜란드에 무역제제를 가해 반발하려 하였으나,중국 무역이 극히 어려워진 상황에 섬나라인 일본이 무역적자를 보는 것이 치명적인 타격이었던 상황에서 결국 일본은 조선의 네덜란드 무역을 허용하였다.
  • 1658년:공식적으로 요동과 그 일대의 땅이 조선의 일종의 영토로서 취급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 효종은 이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을 보내 통치하도록 했다.
 18세기
  • 1735년:여진족이 만주 내에서 일부 지역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만주에서 조선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조선의 승리로 전투는 끝을 맺었고, 이로 인해 남만주에 대한 여진족의 영향력이 줄기 시작했다.
  • 1740년:재수복된 후금이 연해주, 몽골 일대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일부 성공하였다.
  • 1754년:길림촌에 정착한 조선 농민들을 시작으로 농지를 원한 농민들에 의한 남만주 개척이 시작되었다.
  • 1775년:중원에 후송과 대순,후평이 자리잡은 3강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이들은 세력의 붕괴를 염려한지라 서로에 대한 교전을 꺼렸다.
  • 1788년:네팔 왕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였고 이 과정에서 티베트의 국력이 약회되었다.
  • 1797년:정국을 뒤흔들만한 변화를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리에 상인 세력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서서히 확대한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농민들을 남만주로 보내 자국 내 잉여인구를 분산하는 활동이 더 가속화되었다.
 19세기
  • 1804년:위험요소라고 간주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이 사태에 대한 대처로 조선 내에서의 선교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주요 서학 지식인들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방침을 따르면서 서학의 세가 아예 사그라들어버릴 위기를 면했다.
  • 1808년:위험요소라고 간주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이 사태에 대한 대처로 조선 내에서의 선교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주요 서학 지식인들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방침을 따르면서 서학의 세가 아예 사그라들어버릴 위기를 면했다.
  • 1812년:함경북도에서 홍경래의 주도 아래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안동김씨 세력은 이 사태에 대한 진압을 성공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진압으로 서서히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1825년:제물포의 화관이 대마도 화관의 영향력을 흡수하면서 대마도 시장의 가치가 미미해졌다.동시에 중국에서는 후송이 후평을 집어삼키고 순나라와 함께 마지막 안정기를 누렸다.
  • 1840년:영국이 순나라와의 교역문제로 제 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 1843년:조선 수군에서 판옥선과 함께 네덜란드의 배를 일부 사용하는것으로 편제를 변경하였다.
  • 1850년:태평천국의 난이 순나라와 송나라 국경 지대에서 발발하였다.이로 인해 송, 순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1853년:에도 막부에 흑선내항 사건이 발생하였다.
  • 1855년:왜관의 인원들이 대규모로 철수하는 등 무언가 이상한 일본의 상황에 의문을 품은 조선이 일정보다 조금 일직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 1856년: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순나라의 국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 1857년:연해주 강탈등의 문제로 강경해진 금나라의 본격적인 쇄국 정책이 시작되었다.
  • 1860년:프랑스가 베트남으로의 원정을 가속화하였고, 불과 2년만에 베트남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정보까지 받고 난 조선 내부에서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개화파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 1866년:파리 외방정교회를 자신들의 권위에 위협이 될것이라고 판단한 안동 김씨 일가가 국왕의 동의 아래 천주교 신도들을 탄압하고 이 소식이 프랑스 본국에 전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조선에 파병을 실행할것을 지시하였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으로 조선을 압도적으로 격파한 프랑스는 조선에게 통상조약을 요구하였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안동김씨는 우선 프랑스라도 끌어들여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약을 수용하였다. 프랑스는 제물포 개항과 양국의 화친, 최혜국 대우 및 자유무역 등을 요구했고, 급하게 화관을 통해 중국에서 벌어진 조약과 대조해본 조정은 우선 울며 겨자먹기로 조약을 수용했다.
  • 1867년:에도막부는 조선에 프랑스가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조선통신사를 재개할것을 요청, 이에 조선이 수락하여 조선통신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보신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렇게 선발된 통신사가 일본에 고립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 기간동안 통신사는 에도성에서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로 생활해야 했다.
  • 1868년:개항을 통한 서구 문물이 조선에 서서히 유입되었고, 이 때 조선 최초의 증기기관차, 공장 등의 인프라들도 유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안동김씨의 세력이 더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미 프랑스의 조선 내 세력권도 에도막부 지원문제로 인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 1869년:보신전쟁이 종결되었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다. 다만, 프랑스에 의해 개항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정한론자들의 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편, 조선통신사 중 일부의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국교 정상화 문서가 일본에서 전달되었으나 조선은 우선 보류하겠다는 답신을 내놓았다.
  • 1871년:프랑스가 보불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자, 안동김씨를 몰아내자는 의견이 개화파와 근왕파로부터 대두되었다. 그러는 한편 전임 이조 판서 이항로가 왕의 친정을 부탁하는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당시 안동김씨 집안의 자제 중 하나에게 처형당했고, 이로 인해 안동김씨 세력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결국 근왕파 세력의 손을 훗날의 고조인 이현이 들어주면서 임식사화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7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한 안동김씨의 권세가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이후 새롭게 들어선 근왕정부가 차후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한다며 보빙사를 파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주변 인물을 위시한 전통적인 사대부 세력과 개화파 세력이 각각 선발되어 파견됬다.
  • 1872년:송나라와 순나라와의 국교관계의 재개편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송은 우선 기존 외교관계에서 형제의 국가로 내려오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순나라는 사대관계를 계속 요구, 심지어 최익현을 비판함과 동시에 고조의 양위를 요구하면서 마침내 왕의 허가로 세도정치를 척결한 조선 내 반중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기존 5군영 체제가 개편되어 조선군이라는 하나의 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 1873년:전통적 세력인 사대부들이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고조도 이에 동의하면서 조선 내 모든 계층들에게 서양에 대한 정보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 정보와 신문물들의 의미를 알게 된 조선 내부에서 일본과 같은 문명개화론이 비상하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헌법 초안 작성을 시작으로'임신개혁'이라 불리는 서구화 정책이 서서히 시행되기 시작되었으며, 농민들이 이미 진출해있던 남만주 지역 일부가 2개의 도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한편, 이 소식이 전해진 일본에서 임진왜란때와 같은 공격 실패를 우려한 여론과 문명개화에 대한 긍정감이 합쳐지면서, 정한론이 사실상 사멸했다.
  • 1874년:헌법 제정,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 학제 개편 등의 근대화 과정 중 일본 메이지정부의 칙서가 도착하였다. 논란 끝에 우선 분쟁방지를 위해서 수락하기로 결정한 정부였으나, 이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뒤쳐졌다는 열등감, 명색이 황제국인 순나라와 송나라의 실정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면서 황제국을 향한 열망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한성에 최초의 거대 재판소가 완공되었다.
  • 1875년:칭제 요구가 빗발쳤으나 회의적인 여론도 많던 상황에서, 우선 조선은 외왕내제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는 한편, 이 때 일본제국과의 국교가 수립되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및 조선의 생존을 위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한 한성과 개화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완공되어 임식개혁 단행의 성과를 알렸다.
  • 1876년:조정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박영효를 위시한 유학 변화를 통한 보존론을 가진 이들을 필두로, 새로운 유학 시스템인 국체유학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한편 일본에선 세이난 전쟁이 발발했고, 한국은 수교한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였다.
  • 1877년:순나라의 재상 이홍장이 금나라와 밀착관계를 시작하며 조선을 압박하는 정책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서는 총리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김홍집이 초대 총리대신으로 집권하였다. 이 시기 조선이라는 국호가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해 대한국으로 개명되었다. 세이난 전쟁의 종료 후, 일본 내에서 친한 감정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여론을 의식한 정부는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 내지 보류, 차선책으로 한국을 동맹으로 삼고 남방에서 더 많은 영토를 취하는 방법을 고려하게 된다.
  • 1878년:수많은 논의 끝에 더 이상 시대에 적응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송나라가 대한국을 승인하였고, 동등한 외교조약을 체결할 의사를 표명했다.
  • 1880년:태극기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완흥군 이재황의 디자인으로 발탁되었다.
  • 1885년:한국의 통상 요구가 거절당하자, 한국은 남만주 일대에 군을 파병하여 사격하는것으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금은 저항을 더 할 수 없었고, 결국 간도 조약으로 후금은 한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 1890년:대한국 헌법이 반포되었으며, 한국의 정체성을 입헌군주국이라고 정의하는 동시에, 국교는 아니지만 국가의 주요 이념 중 하나를 유교라고 명시하였다.
  • 1893년:일본의 순나라 남양함대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결과는 조일동맹의 승리로, 조선은 간도를 비롯한 추가적인 남만주 지역을, 일본은 대만과 푸젠성 일대의 영토를 얻어냈다. 한편, 일본에게 대마도 조차지를 다시 반환하기로 전후에 합의가 체결되었다.
  • 1894년:환구단에서 칭제건원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직후부터 국호는 대한제국이라고 불리게 되어 기존의 대한국 헌법도 대한제국 헌법으로 개명되었고, 연호는 광무로 정해졌다. 한편, 제 5대 총리대신으로 부임한 김옥균은 임식개혁의 성과에 쐐기를 박는 갑오경장을 진행, 이 과정에서 선거제도의 일부 개편과 노비의 완전한 해방, 새로운 신분제인 사족제도 확립과 한국어 사전 편찬 등이 이루어졌다.
  • 1895년:러시아를 계속 끌어들이던 예허나라 힝전을 경계한 한국이 야밤에 기습을 감행, 후금 일대를 점거하고 심양궁에 불을 질렀다. 혼란을 틈타 덕종 아이신기오로 자이탼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 예허나라 힝전은 심양궁 깊숙한곳에 한국에 의해 유폐되었다가,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 당시 만주에서는 변발에 대한 제한령이나 신분제 폐지 등 한국이 주도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 1896년:만주로 다시 돌아온 아이신기오로 자이탼이 칭제건원을 감행, 국호를 대청제국(다이칭 구룬)으로 바꾸고 근대적 개혁인 '광서개혁'을 감행하였으나 기존 만주 내 귀족들의 반발에 격렬히 부딛혔다. 한편, 태자의 비가 사산된 황태자에 이어 새로운 적장자인 이영을 출산하였다.
  • 1899년:창경궁에서 간병을 받던 광무제 이현의 병세가 악화되어 그가 붕어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로 정해졌고, 이후 황태자 이훈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연호는 융희(隆熙). 또한, 의화단의 난에 10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였다.
 20세기
  • 1901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푸젠성과 중국 해안의 추가적 영토를 할양 및 조차받았고 내몽골 일부는 한국에게 할양되었으며, 득의양양해진 일본 해군을 시기한 일본 육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동시기, 한국 또한 북만주의 패권을 언젠가는 독점해야 한다는 인식이 발생하였다.
  • 1902년: 제 7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집권했다. 동시에,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각각 육지와 해양을 담당해줄 한국, 일본과 한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 1903년: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이 본격화되자, 비밀리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한 한국과 일본의 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 1904년:한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남만주에서 육전을 대패, 사할린에서 해전을 대패하자 3국의 제정적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이 '블라디보스토크 조약'을 중재하였다. 전쟁 결과로 한국은 북만주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은 사할린과 할양받았다. 한일 2개국이 모두 점령한 연해주는 '연해주 공동자치령'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이 통치하는 형태로 결정되었다.
  • 1905년:제 2차 한만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으로 대청제국의 외교권과 주권 대부분이 박탈되었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한편, 한국은 동양철도 주식의 지분을 미국에 일부 넘기는 것을 대가로 사실상 만주를 독식하는것을 인정받았고, 일본에게도 지분을 내어주면서 사실상 거칠 것이 없어졌다.
  • 1906년: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이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의화단 전쟁 당시와 같이 조계지 내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명분을 들이세워 일본측의 중국 조계지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이 요구에 대해, 장시성의 지역 일부는 추후 중국에 반환한다는 조건 아래 나머지 조계지의 보존을 묵인하기로 합의했다.
  • 1907년:제 2대 청국통감 이완용이 하얼빈에서 저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이완용이 중태에 빠지자 박영효 총리는 강경파의 손을 들었고, 결국 1909년 한만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청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 1910년:전봉준의 주도로 농민계층들의 민권운동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박영효 내각이 강경진압을 체택하였다.
  • 1911년: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일본 육군 파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만 근방의 중국 조계지들이 완전히 합병되었다.황손 이임이 출생하였다.
  • 1912년:일본에서 다이쇼(大正) 시대가 시작되었다.
  • 1913년:박영효의 대처로 한국 내에서 호헌운동이 대두되자 결국 반발을 이기지 못한 박영효 내각은 책임을 지고 사퇴, 본격적인 대한제국 민주주의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시작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의 막이 열렸다.
  • 1915년: 영한일동맹의 의무를 명분으로 대한제국, 일본제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이들은 각각 육상과 해상에서 독일을 점령하였으며, 키아우초우와 독일령 뉴기니 일대를 점령하였다.
  • 1918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내전이 시작되었고, 한국은 로마노프 황가에게 황실 명의로 밀서를 전달, 로마노프 황가의 자손들을 구조하는 '금관작전'을 실행했다.
  • 1918년:동맹국의 해산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 1919년: 전후, 미국의 제안으로 국제 연맹이 결성되었다. 같은해 6월 연해주 공동자치령에 백러시아 망명정부가 들어섰고, 로마노프 가의 황손들을 우대하는 공화국임을 명시하였다. 이 때 만주 공화국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 1920년:적백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종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건국되었다. 동시에 백러시아 망명정부는 극동 공화국으로 국호를 교체했다.
  • 1921년: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연말에 정식으로 건국되었다.
  • 1922년:일본이 장시성 문제로 영일동맹을 종료하였다.한편, 만주인들의 보통선거권이 명목상 통과되었다.
  • 1923년:한국이 청도 문제로 영한동맹을 종료하였다. 대한백의단이 한국 정치계의 음지에서 창당되었다.
  • 1924년:상하이에서 연설하던 대한제국 대신들이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폭탄 사태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갈구한다는 명분으로 제국 치안법이 새로 개정되었다.
  • 1925년:일본령 후쿠슈(푸젠)에서 명목상 중국인들의 보통선거권이 통과되었다.
  • 1926년:대중국 동맹에 의거한 한일동맹이 새로이 체결되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정부청사 앞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공산당 인원들과 부딛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 1928년:검은 목요일로 인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으며, 한강 집단 투신사건이 발생하였다.
  • 1929년:융희제 이훈이 붕어하였다. 한편, 태자 이연이 새로히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성덕(聖悳)으로 정해졌다.
  • 1930년:한성부 거리에서 반공 사적폭력조직인 대한백의단에 의해 한성 진군이 발생하여, 주도자인 김창암이 성덕제로부터 '구국자'자리를 인정받았아냈고, 정식으로 대한호국회로 이름을 바꾸어 정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 1931년:대한호국회가 대한제국 내각에서 집권당으로 거듭났다. 이후 헌법 개정으로 대한호국회 외 모든 정당은 불법으로 선언되었으며, 한편, 일본은 병사의 실종을 명분으로 일본령 후쿠슈 북부를 기점으로 장시사변을 일으켰다.
  • 1932년:한국이 공산주의를 제제한다는 명분으로 몽골에 파병을 감행하였다. 일본의 괴뢰국인 대명제국이 건국되었으며, 황제는 명 황실의 후계자인 주자홍으로 선출되었다.
  • 1933년:이탈리아, 대한제국에 이어 히틀러의 파시즘 정당인 나치당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 또한, 극동 공화국의 국명이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한국과 독일,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할것을 선언하였다.
  • 1934년:예케 몽골 울루스가 몽골 지역 일부를 기반으로 건국되었다. 동시기에 한국은 영향권에 있는 국가들을 해동성맹이라는 연합체에 귀속시켰다.
  • 1935년:총리에 임명된 김창암은 앞으로의 난국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황제와 다른 대신들의 제가를 받아 총리직을 해체, 황제의 명령에 대한 전달권과 기존 총리의 권한, 군대 지휘권등을 합친 '제국대호국경'직을 신설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올랐다.
  • 1936년:한국이 방공협정에 가입하였으며, 소련과의 국경에 병력이 증강되었다.
  • 1937년:중일전쟁이 발발하였으며, 한국군에 의한 칭더 대학살과 일본군에 의한 난징 대학살이 발생하였다.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김창암 한국 제국대호국경이 회담을 가졌다.
  • 1938년: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고,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시작되었으며, 이르츠쿠르 일대에서 러시아 차르국 선박이 소련 전함에게 격침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 1939년: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 1940년:한국령 만주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이 공표되었다. 미합중국이 한국에 대한 석유 가격 인상조치를 공표하였다.
  • 1941년:미합중국이 한국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모두 금지하였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한국은 3월에 할힌골 사변을 일으켜 독일과 함께 동서로 소련에 대한 압박을 시작하였으며, 일본이 진주만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해 7월, 한국 공군과 일본 해군항공대가 알래스카에 폭격을 성공시킴으로서, 최초이자 마지막인 미국 본토 폭격이 이루어졌다.
  • 1942년:전반적으로 추축국의 전선이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소련 영토에 대한 분할안이었던 신천지 계획의 달성을 위해 설원속방 작전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진격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소련은 바이칼 호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미국은 과달카날 해전에서의 승리로 서서히 전세를 기울였다.
  • 1943년: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 1944년:연말의 새해 축하 행사에서 김창암의 친위 세력인 청년한국단의 폭동이 시작되었다. 폭동 도중 영친왕 이은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곧이어 양연군 이현이 설날 선언을 공표하면서 한성 내부에서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 1945년:이후 내전 끝에 남아있던 김창암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대마도로 도주, 총리제도가 다시 복귀되었다. 성덕제의 옥음으로 해동성맹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으며, 한국은 추축국을 탈퇴하였다. 김창암이 대마도에 일본의 지원을 받아 공화제 괴뢰정부를 일시적으로 조직하였다. 선덕제가 공식적으로 양위를 발표하였고, 황실 내 압도적인 지지와 미국의 선호, 태자의 사망과 지친 선덕제의 변심으로 인해 양연군 이현이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으며, 연호는 태시(太始)로 정해졌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투하로 최후의 추축국인 일본이 항복하였다. 대한제국 전 제국대총리 김창암이 수송되다가 도주 중, 파고다 공원에서 시민들에게 총격을 맞고 사망하였다.
  • 1946년: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잔당 일부가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다시 재기하였다.
  • 1947년:대한제국의 국호가 대한국으로 변경되었다. 대만 게릴라 세력을 상대로 다이호쿠 협의가 체결되었다.
  • 1948년:일본국이 수립되었다. 마다가스카르 왕국에서 대규모의 반프랑스 시위가 시작되었다.
  • 1950년:중국 공산당의 선공으로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동시기 동래부에서의 조약으로 대한국에서 연합군 통감정치가 종결되었다.
  • 1951년:러시아 차르국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1952년:샌프란시스코 협정으로 구 추축국들에 대한 적국조항이 폐기되었다.
  • 1954년:중국 내전이 휴전되었다. 동시기, 대만에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이 건국되었다.
  • 1955년:대한국 내에서 여운형과 조병옥이 사회당과 개화당의 합당을 진행하던 도중, 급진 공산주의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였다.
  • 1956년:만주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박정희 육군대신의 비밀 핵개발 밀서가 공개되면서 논란이 발생하였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콘스탄틴 로자옙스키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그를 섭정으로 하는 군사정권시대가 개막했다.
  • 1960년:중화민국에서 민주화 시위가 발발하였다.
  • 1961년: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하였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정부의 주도에 따라 대규모 개혁이 시작되었다.
  • 1962년: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제국에서 대숙청이 거행되어 주석의 권력이 확고해졌다. 대약진 운동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 1963년:마오쩌둥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해 8월 숨을 거두었다.
  • 1964년:중국 공산당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지지를 받은 류샤오치가 차기 주석으로서 임명되었다.
  • 1965년:일본에서 신칸센이 개통되었다.
  • 1967년:애신각라왕 푸이가 대련시의 애신각라씨 저택에서 숨을 거뒀다. 이를 끝으로, 황제를 겸임한 애신각라 왕조의 직계혈통은 단절되었다.
  • 1968년:구 대한제국군의 장교 김좌진의 후손이자, 정치폭력 조직이었던 구 대한민족 청년단의 지도자 김두한이 그의 저서 [피로 물든 북진론]을 집필한 뒤 출간했다.
  • 1972년:사회당-입헌당 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추원 오물투척사건의 주도자였던 김두한이 고혈합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1973년:개화 100주년 행사가 한국에서 진행되었다.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가 폭탄테러로 인해 숨을 거두었고, 러시아 차르국에서 신민들의 대규모 시위에서 나온 요구를 차르와 내각이 승낙할 것을 발표하면서 군사정권 시대가 종식되었다.
  • 1974년:한국에서 한성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휴전되었고,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점령지를 기준으로 국경이 정해졌다.
  • 1975년:중화민국 총통 장제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었다.
  • 1979년: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석유파동이 발생하였다.
  • 1980년: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한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보수공사가 시작되었으며,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에서 특별보안법이 새로 개정되었다.
  • 1981년:한국 정부에서 간도의 날이 지정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서브컬쳐 및 애니메이션에 대한 법률이 개정되었다.
  • 1982년:재개된 공사 끝에, 성공리에 한일해저터널이 개통되었다. 신칸센과 KTX가 주요 차량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10월 부터 정식 운행을 시작할 것이 예고되었다.
  • 1983년:히로히토 천황이 한국에 방한하여 태시황제 이현과 만남을 가졌다. 이 방한은 한일 역사상 최초로 현직 군주 둘이 만난 사건으로 기념되었다.
  • 1985년:플라자 합의가 독일, 한국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만주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민주화를 선언, 대금민국으로 국호가 교체되었다.
  • 1986년:소련 측에서 홀로도모르 사망자들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 1987년:대한국 전 육군대신 박정희가 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대금민국에서 최초로 공산당 시대와 무관한 정당이 집권 여당으로 거듭났다.
  • 1989년:쇼와 천황 히로히토가 붕어하고, 일본에서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었다.
  • 1990년:소비에트 연방이 러시아 차르국과의 수교를 정식으로 체결하였다. 동시기, 미국과 소련은 각각 '10년계획'을 발표, 2000년이 찾아오기 전까지 냉전을 완전히 끝내자는 합의를 본 뒤, 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1991년:서중국 충칭시 인민대례당 앞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으나, 중국 공산당 당국에 의해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 1992년:일본의 경제침체가 시작되었다.
  • 1993년:한국의 경제 또한 성장세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 1994년: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제국이 사회주의 노선 차이와, 핵무장에 대한 관점 차이를 이유로 소련과의 수교를 단절시켰다.
  • 1995년:주요 유교 인사들과 정치인들간의 많은 논란 끝에, 김영삼 총리대신에 의해 대련에 설치되어 홍범도를 배현하던 용무사의 파묘가 결정되었다.
  • 1996년: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개봉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에서만 역대 한 해 흥행 수입과 관객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였다.
  • 1998년:대금민국에서 한국 문화,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정책이 본격화되었다.
  • 1999년:러시아 차르국의 제 3대 차르 드미트리 게오르기가 섭정 정치를 시작할것을 발표하였다.
  • 2000년:크렘린과 백악관에서 새천년 기념 행사가 동시에 일어났으며, 공식적으로 냉전이 종료됬음을 공표하였다. 타이완에서 2차 숙청이 발생하였다. 애플이 아이폰을 공개하면서 전세계적 스마트폰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20세기
  •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쌍둥이빌딩이 붕괴.
  • 2002년: 남베트남, 북베트남의 통일이 진행되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 2003년: 전 농상공부대신 노무현이 내각총리대신에 당선되어 노무현 내각이 시작되었다.
  • 2004년: 일본 인터넷 유저들과 러시아 차르국 유저들 사이에서 사이버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한편,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대히트를 이루었다.
  • 2005년: 한일 수교 130주년 행사가 개최되었다. 한국의 간도의 날이 제정되면서 대금민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자리에 올랐다.
  • 2006년: 타이완 정부가 본격적인 핵실험을 시작하였다. 대금민국과 소련의 경제교류 정책인 불곰정책이 3차를 맞이하였다.
  • 2007년: 러시아 차르국의 정교중동전교회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를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탈레반 게릴라들과의 교전 끝에 인질들 대부분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했다.
  •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였다. 숭례문에서 방화 시도가 있었으나, 당시 황실 행사가 거행되던 중 수행요원이 이를 적발하여 미수에 그쳤다.
  • 2010년: 태시제 이연이 붕어하였다. 적장자인 이순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명화(明和)로 결정되었다. 슈퍼셀에서 최초의 성공작 클래시 오브 클랜을 출시하여 흥행을 이끌었다.
  • 2011년:중화민국에서 건국 100년 기념 행사를 시행하였다. 한국에서 발견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가습기로 인한 파동이 일었으며,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파되었다.
  • 2012년: 초대 주석의 후손 시정취가 제 4대 타이완 주석에 등극하였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전임 주석 시진핑이 50퍼센트의 지지율을 받고 다시 주석에 재당선된 해였다.
  • 2013년: 훈민정음의 날이 다시 한국의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제 3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 2015년:중화민국의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자살률이 일시적으로 세계 최고점을 기록하였다.
  • 2016년: 박근혜 방위대신이 개인 행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민주당 출신의 힐러리 클링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트럼프 후보의 지지자들에 의해 미국 국회 습격사건이 발생하였다.
  • 2017년: 소련에서 혁명 100주션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가 월드와이드 9억 달러 돌파, 북미 3억 8천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전편을 뛰어넘는 대흥행에 성공하였다.
  • 2019년:웹툰 원작 한국 애니메이션 '하나의 하루'가 한국 아카데미상에서 우수 애니메이션상, 최우수 음향상을 수상하였다.
  • 2020년: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신종 전염병 코로나 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 내각총리대신 이낙연이 사임할것을 발표하였다. 스타워즈:더 파이널의 대흥행을 끝으로 스타워즈 시퀄 트릴로지가 성황리에 완결되었다.
  • 2021년: 안철수 의원이 내각총리대신에 당선되어, 더불어국민당과의 연합을 통해 대한사민당이 다시 재집권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의 탈파쇼화를 명분으로 특수군사작전 이라는 이름의 침공을 시작하였다. 모두의 예상을 뚫고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러시아 차르국 총리에 당선되었다.
  • 2022년: 소련에서 건국 100주년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한국 이태원 거리에서 역대 최대의 할로윈 행사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러시아 차르국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에서 연속적인 묻지마 칼부림 사고가 발생하였다.
  • 2023년:이재명 탁지대신이 대련도청을 시찰하던 도중, 그의 행실에 앙심을 품은 괴한의 칼에 맞아 과다출혈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졌다. 세계 민간기업 최초로 무인기기를 이용한 미국 테슬라 그룹의 달 착륙이 성공하였다.
  • 2024년: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토중 전쟁 지원문제로 인해 한국 내각의 연립여당이였던 더불어국민당의 표가 선진민주당에게 따라잡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추가적인 제제를 위해 티베트의 PPT 가입이 가결되어, 티베트 왕국이 공식적으로 태평양 의정서 동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대금민국에서 개고기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현재 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