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시오의 역사

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Flag of Akishio.png

개요

시대별 분류

선사 시대

아키시오에 인류가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은 종래의 15세기설이 제일 유력하였으나[1], 2008년 북방의 하마사카 시 일대에서 최소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그 연대가 앞당겨졌다.[1][2] 2010년대 이후 정립되고 있는 가정은, 아키시오가 일본 열도 및 한반도와 붙어있던 시대, 즉 토카이 지각대변동[주 1] 직전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가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나카아키시오 산지 중심부의 산악 지대에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수렵 생활과 토속 신앙을 유지하던 부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선사 시대에 넘어와 거주하던 선주민의 후손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국민당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과 동화 교육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고 일본계와 동화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국민당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되겠다.[1][3]

식민지 시대

석기시대 유적의 발굴로 아키시오에서 최초로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앞당겨졌지만, 인류가 대규모로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은 확실히 15세기 이후가 맞다.[4] 후지시로, 엔카이 등 여러 네임드 도시들은 이 시기에 정착민들이 건설한 "진사이"(陣砦, 진채)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문에 최초의 일본인 유배인들이 출항한 1394년부터 후지시로와 나사(那佐) 사이의 첫 대회전이 벌어진 1512년의 나사 호수 전투 (那佐湖の戦い)까지를 진사이 시대, 그 이후를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식민지 시대라는 명칭이 통용되나, 아키시오 사학계 내부에서는 "식민지"라는 단어의 사용을 기피하여 일반적으로는 진사이 시대라고 호칭한다.[4]

이 시기는 아키시오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전쟁 이후 해안선 일대의 정찰을 하던 어가인(御家人)[주 2] 호조 무네우지 (北條宗氏) 일행이 표류하여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4]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정기적인 탐사를 시행하였으나, 당시에는 "산지가 험준하고 화산 폭발이 잦아 사람이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지은 사람들 등 흉악범들의 유배지로 쓰였다.

무로마치 시대 중반기에 들어, 아키시오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난보쿠초 시대를 종식시키고, 두 왕실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시카가는 물론, 국왕 고코마쓰 덴노까지 남조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겼으며 실제로 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는 북조의 고코마쓰 덴노가 "국왕 자리를 남조, 북조 두 왕실이 번갈아가면서 즉위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하자 불만을 품어 남조 부흥 운동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는 후환을 제거하기 위하여, 1394년부터 1399년까지 몇차에 걸쳐 남조 소속 슈고 다이묘들 산하의 농민들과 무사들을 죄수들과 함께 강제로 배에 태워 아키시오로 보냈다.[4] "시마오이" (嶋追い)라 불리우는 이 정책은 정작 다이묘들과 고위 무사들, 유력자들은 제외하였는데, 이들까지 직접 송환하면 통제력을 갖춘 이들이 집단으로 반기를 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4][5]

이들은 우선 지금의 후지시로 일대에 정박하였는데 후지시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해안선이 단조롭고 지대가 낮아 선박의 정박이 용이하며, 한편으로는 양 옆의 시바우라 곶(芝浦岬)과 카나우라 곶(金浦岬)이 방파제 역할을 하는 등 천혜의 요지였다. 유형자들은 지금의 후지시로 항에서 동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고지까지 이동하여 진채를 건설하였으며, 그 진채와 항구를 중심으로 하여 약 1리 (약 4km) 떨어진 지점까지는 집을 짓고 자유롭게 살도록 허용하였고 그 바깥으로는 나무와 돌을 섞은 장벽을 쳐서 출입을 통제하였다. 한편으로 시바우라 방향 해안에서 카나우라 방향 해안까지의 성곽 중 5곳의 주요 거점에 방어탑을 건설하였는데 철검대 시대에 조선식 성곽으로 증축되면서 봉수대를 겸하게 되었다. 증축 과정에서 수원 화성공심돈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다섯 개의 별과 같다 하여 오성곽(五星廓, 고세이카쿠)이라 부르게 되었다. 닛초 전쟁 중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1970년대에 복원하였고, 신시가지가 형성된 오늘날에도 성곽은 편의를 위해 도로를 개설할 수 있도록 개조된 점을 제외하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일반적으로 1512년 나사 호수 전투 때부터를 센고쿠 시대 (戦国時代)라고 호칭한다. 오닌의 난에 대한 소식이 아키시오로 넘어오면서, 아키시오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이 허수아비가 된 막부에 반기를 들고 독립적인 영지를 구축해나갔으며, 이들은 곧 한정적인 영토와 식량을 더 확보하기 위해 다른 다이묘들을 치기 시작한다. 후지시로의 영주였던 미치노쿠 카츠노리(陸奧勝紀, 세이와겐지 방계 귀족. 성씨는 도호쿠 (미치노쿠) 지방 출신인데서 유래)와 나사 성의 영주 나사 겐포 (那佐元法)[주 3]가 충돌한 나사 호수 전투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들 간의 난전이 벌어진다.

1570년대에 들어서면 영세한 다이묘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이른바 센고쿠시치유(戰國七雄, 전국칠웅)[주 4]이라 불리우는 일곱 센고쿠 다이묘가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다. 서쪽에서 동쪽 순으로 키타오쿠 국(北奧國; 지금의 하마사카 현)의 키타미 씨, 타네 국(多寧國)의 오오무라 씨, 벤조 국 (弁藏國)의 벤조 타케다 씨[주 5], 시라노 국 (후지시로)의 이케다 씨[주 6], 아즈키 국코모로 씨 (小諸氏), 호제 국카나야마 씨 (金山氏), 엔카이 국엔카이 무라노 씨 (村野氏)가 이 센고쿠시치유였는데, 쌀 생산 환경이 척박했던 키타오쿠 국은 감자 생산량으로 대신 계산한다 치더라도 모두 평년 식량 생산이 8,000석을 넘었다. 그러나 개중 제일 돋보이던 세력은 단연 무라노 씨와 이케다 씨였다. 무라노 씨가 무력을 통해 주변 다이묘들을 무너뜨린데 반해 이케다 씨는 가까운 다이묘들은 공격하거나 재력으로 끌어들이고, 먼 다이묘들에게는 정략 결혼을 통해 우호를 도모하였다.

1586년, 이케다 마사아키라

이케다 철검대 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엄밀히 말하면 교회 소속의 예수회)는 이케다 철검대의 주요한 지원군 중 하나였다. 17세기 초에 일본을 경유하여 후지시로에 들어온 카를로스 디아스의 예수회 선교단은 지금의 후지시로 성에서 서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의 빈 집을 사들여 선교를 시작하였다.[주 7]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교는 신분 차별을 반대하고 만민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옆동네 일본에서 가톨릭 교회가 에도 막부의 집중 탄압으로 갈려나간 반면, 철검대 진영은 에도 막부에 저항할 목적으로 가톨릭과 예수회를 우방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처음에 예수회는 이들 또한 타파의 대상으로 여겼으나 일본에서 교회가 통치 세력과 척을 진 결과를 제대로 눈여겨본 뒤였고, 결정적으로는 철검대 진영이 "철검대장은 나라에서 당신들이 말하는 왕(王)이다. 우리에게 협력하며 신기술을 제공하면, 왕으로서 포교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며 설득한 것이 컸다. (그리고 당시 철검대장 이케다 마사이에는 이후 세례까지 받았다) 이런 타협에 따라 예수회는 "닥치고 모두 평등"에서 "왕은 남기고 우리끼리 평등하게 지내자"라는 온건한 노선으로 선회하였고 그 대가로 철검대는 예수회의 선교 활동을 철저히 묵인해준다.[주 8] 에도 막부는 사신을 보내 철검대장에게 참근교대 동참과 함께 가톨릭 교회의 박멸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조적으로 지정, 공격하겠다고 경고하였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사신의 잘린 수급이었고, 막부는 경고한 대로 철검대를 조적으로 지정, 임진왜란 이후 근 40년 만에 전쟁에 돌입한다.

아키시오에서는 훗날 신앙 전쟁이라 부르게 되는 이 전쟁은 막부군이 2번에 걸쳐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차 원정대(1646년)는 악천후를 맞아 병력의 반 이상이 날아간 상태에서 아키시오모토지마의 서해안에 당도하였으나, 마에시라즈 절벽[주 9]에 막혀 정박지를 찾지 못하다가 2개월 반이 지나서야 후지시로 근교의 시바우라(芝浦)에 정박한다. 그리고 오랜 항해로 굶고 지친 상태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일대에서 숙영하다가 야간 기습을 당해 전멸.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공격대장 우라소에 사콘(浦添佐根)[주 10]은 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귀순하였다.[주 11] 우라소 정벌대가 개털리고 대장이라는 작자가 귀순하면서 끝나버린 1차 정벌에 관한 전갈은 1년이 지나서야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서 에도 막부에 도착했다. 막부는 우라소에의 가족들을 전부 참형에 처하고,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끝에 소성조(小姓組) 무관 출신의 마쓰다이라 히데미츠(松平英光)를 대장으로 임명해 2차 정벌을 보낸다. 이 사람은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도쿠가와의 방계이고(이에야스의 원래 성씨는 마쓰다이라였다), 이에야스가 철검대와 동맹을 맺었을 당시 아키시오에 파견을 가서 많은 전투를 경험했기에 지리에도 밝아서 2차 정벌대(1650년)는 2주 만에 시바우라 시에 도착하여 후지시로로 진격, "칼을 들고 있는 자, 십자가(묵주를 가리킴)를 쥐고 있는 자들은 죄다 죽이라"는 방침을 정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점령지에서는 당연히 가톨릭 신자를 가리기 위해 후미에를 시행하였고, 신자를 밀고하는 이들에게 공물을 하사하며 철저하게 가톨릭 신자들을 말살해나갔다. 그러나 예수회는 봉사 활동과 식량 자선 등으로 이미 현지 주민들의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적으로 돌린 것은 정벌대의 큰 실수였다. 처음에는 조정의 군대가 왔다하여 멋모르고 환영하던 농민들도 이웃들이 학살당하자 저항하기 시작, 정벌대의 점령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보급도 끊겨서 겨울에 들어서는 궤멸 위기에 놓인다. 후지시로 근교에 성채를 짓고 해를 넘기며 곤궁히 버티던 와중에, 당대 쇼군 이에미츠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쇼군의 장례와 새 쇼군의 책봉에 참석해야했기 때문에 마츠다이라는 철수를 선언, 2차 정벌도 실패로 끝난다[주 12] 우라소에와는 달리 마츠다이라는 나름대로 전공을 거두었고, 철수한 것도 쇼군의 사망으로 인한 것임이 참작되어 전쟁 영웅으로서 식읍을 받았고, 이후 식읍이 있는 고향 이바라키로 내려가 원로로서 조용한 여생을 보낸다.

두 번의 정벌이 모두 실패한 이후, 새로 쇼군에 오른 이에츠나가 문치 정책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양안 관계도 개선의 조짐이 보였다. 이에츠나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주선하였고, 철검대에서도 이에 응하여 철검대장과 에도 막부 대표 호시나 유키사다(당대의 네임드인 호시나 마사유키의 사촌) 사이에 등나무의 맹이 체결된다. 이 등나무의 맹에 따라 아키시오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를 비롯, 아키시오의 사정에 대해 에도 막부는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기로 하였고, 대신 철검대는 조정(과 막부)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매년 무역선 편으로 공물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참근교대 참여도 3년에 한 번, 세 달 동안(근 100일 간) 입조하는 것으로 대체하게 허락하였다. 이것 또한 18세기 들어서는 "해적들이 들끓고 천재지변이 잦아 왕래가 까다롭다"는 이유로 공물을 더 얹어보내는 것으로 대체. 참근교대가 에도 막부가 엄격하게 수호하던 제도임을 감안했을 때 에도 막부에 상당히 불리한 조항이었지만, 많은 국력을 동원해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사실상 패한 상황이었고 지리적 거리도 상당해서 어쩔수 없이 들어준 것이 컸다.

이케다 철검대는 다이묘들의 난립에서 교훈을 얻어 중앙집권통치를 추구하였다. 에도 막부의 통치 방식을 본따 후지시로 성을 제외한 나머지 성들에 대해 철폐 조치를 내렸다. 대신 조선의 관아에 해당하는 지사부(地司部)와 호민소(護民所)를 설치하였다. 지사부는 지금의 현청과 동급이었고, 호민소는 시청 및 군청과 동급이었다. 현지사(縣知事)에 해당하는 지사(地司)와 시장·군수에 해당하는 호민관(護民官)은 중앙에서 직접 문관 출신으로 임명하여, 2년에 한번씩 임지를 바꾸도록 하였고, 상피제를 적용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는 임관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지역 토호들과 지방관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조세 제도의 통합과 개혁도 이루어졌다. 이제까지는 각 영지의 다이묘들마다 제각각이었으나, 1608년 《오석령》(五石令)을 지정하였다. 모든 공물과 조세는 1년마다 쌀로 통합해서 납부하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논밭의 크기를 정하여 100석 미만의 농민들은 쌀 5석, 1,000석 이상의 대농들은 20석과 같이 차등하여 세금을 부과하였고, 쌀이 자라지 않는 북방 지대에서는 보리, 고구마나 감자 등으로의 납부를 허용하였다. 땅이 없는 소작농들의 경우에는 지주가 통합해서 대납하도록 하였으나, 지주들이 조세 시기가 다가오면 장부를 고쳐 소작농들이 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며 소작농들이 지주와 관청에 2배 이상의 세금을 내야하는 일도 자주 발생하였다. 가혹한 쌀 납부 강요와 생활고에 지친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가서 화전민, 산적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타치바나와 카미가와의 반란

나다노 제도 남부와 신페이 제도은 오랫동안 불모지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다이묘들이[주 13] 세력을 이끌고 도피해 정착하였다. 이 중 가장 돋보이는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족임을 주장하던 도요토미 사다하루(豊臣貞治)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히데요리가 죽자 스스로를 "태합의 정통 계승자"로 칭하며 지금의 야타마 시 일대에 나카야마 성을 건립, 나카아먀 막부의 창건을 선언한다. 그러나 막부의 설치나 정이대장군 관직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덴노가 허락하는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역사계에선 "사칭" 막부, 즉 나카야마 사칭 막부라고 부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통 일족들은 사실상 끊겼다고 보아도 무방하였고, 이미 덴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이대장군직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이는 어그로 끌기에 불과하여 되려 조적(朝敵)[주 14]으로 지명되기에 이른다. 결국 2대 쇼군인 카미가와 하루토키(上川治時) 대부터는 도요토미라는 성씨를 쓰지 않게 된다. 그러나 조적 지명이 철회되는 일은 없었다... 신앙 전쟁 이후 등나무의 맹을 체결하면서, 에도 막부는 철검대의 존재와 아키시오 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를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나카야마 막부를 공격해주기를 요청하였고, 이케다 철검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에도 막부의 바람과는 달리 손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케다 철검대에게는 나카야마 사칭 막부 외에도, 나카야마 막부로 공격해가는 길목에 있던 엔카이 지방의 타치바나 세력 또한 17세기의 큰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타치바나라는 성씨는 흔하지만[주 15] 아키시오사에서 제일 유명한 타치바나 씨는 단연 엔카이 부엔카이 시를 본관으로 하던 엔카이 타치바나 씨(延海立華氏)일 것이다. 1691년 지방관으로 파견된 쿠사노 마사오키(艸野正興)는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통제가 잘 닿지 않던 엔카이 지역에서 근무하였는데, 당대에는 산적들이 들끓어 후지시로를 오가기 위해서는 가도로 직접 다니기보다는 바닷길로 돌아서 가는 것이 나았을 정도이다. 쿠사노가 이런 한직으로 밀려난 데에는 문관들 사이의 권력 암투에서 진 것이 컸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쿠사노는 당시 똑같이 촌뜨기 취급을 당하며 무시당하던 엔카이 주민들을 선동, 무장 봉기를 하면서 성씨도 타치바나 씨로 바꾸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를 타치바나의 난이라고 한다. 당연히 철검대에서는 진압대를 보냈는데 영 좋지 않게도 태풍에 역관광당하며 실패, 오히려 "하늘도 우리를 도우고 있다"는 타치바나의 선동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타치바나 마사오키는 엔카이 일대를 장악하고는 정벌을 그만둔 이케다 정권의 묵인 하에 천수를 누리다 갔으며 6대에 걸쳐 사실상의 독립 국가로서 이케다 정권과 나카야마 막부 사이의 중간 무역을 통해 떼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1836년 나카야마 막부 쇼군 계승 전쟁에서 싸그리 갈려나간다. 타치바나 가문은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며 폐서인되어, 평민 일족으로의 강제 입적을 통해 사실상 멸문당했고[주 16], 나카야마 막부는 철검대와의 정략 결혼으로 인해 허수아비 세력으로 전락했다. 이 때부터 나다노 제도와 신페이 제도에 대한 아키시오의 실질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타치바나 씨의 족보는 등서(騰書; 사본) 1부만을 남기고 전부 태워졌는데 그 사본은 후지시로 성을 개조한 대통령궁 옆의 역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타치바나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타치바나 씨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불명.

독립 전쟁과 제1공화국 건국

'구로후네' (黒船)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에게 익숙할 매슈 페리 제독의 함대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1853년이었다. 그러나 1852년에 미국이 파견한 정찰대가 먼저 아키시오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예수회, 스페인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아키시오를 옛날 마르코 폴로가 말한 '지팡구' (Jipangu)로 여기고 있었다.[6] 아서 빌링슬리 중위가 이끄는 정찰대는 1852년 10월 2일 후지시로항에 도착하였다.

1884년 아키시오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아키시오 독립 선언문)

제2공화국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16일 일본군 (북양군)의 기습적인 공습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하였으며, 이로써 닛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초창기 나치 독일의 전격전 전술을 모방하여 후지시로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거점들만을 빠르게 점령해나갔으며, 1942년 1월 하순에는 후지시로에서 20km 떨어진 지점인 키츠네 고개(きつね峠)에 이른다.[주 17] 아키시오 또한 15만명에 이르는 육군과 민병대를 동원하여 각지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키츠네 고개에 이르러서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결국 일본군에게 진로를 내주고 만다. (키츠네 고개 전투) 키츠네 고개에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될 즈음, 아키시오는 청야 전술을 택하여 후지시로 일대에 대한 소개령을 선포, 후지시로 및 근교의 시민들을 동북쪽으로 250km 정도 떨어진 미야하라로 피난시키고 피난에 필요하지 않은 잉여 식량과 물자들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일본 제국이 건국절로 기념하는 날이었던 2월 11일, 일본군은 마침내 후지시로에 입성하였고, 수색 작전을 벌인 끝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와토 후미오(岩戶文央) 시장과 20명의 시민군을 붙잡았다.

당시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마츠이 사부로(松井三郞) 중장은 전 병력을 통제하여 약탈, 방화, 살인, 겁탈을 비롯한 일탈 행위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이와토 시장에게 일본군이 끌고 오는 전쟁 포로들을 자치적으로 관리하며 후지시로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4월에 엔카이 시, 마츠오카 시를 점령하였고, 미야하라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키리바시 고개까지 진격하였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도조 히데키의 눈 밖에 나서[주 18] 본국으로 송환되어 강제 예편당했다.

일본군의 점령지에는 북양청 산하 아키시오 개척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아키시오는 내지의 일부로 편입되어, 개척사령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개척사령부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시민들과 전쟁 포로들을 상대로 후지시로 대학살, 카만카타 해안 죽음의 행진을 비롯한 온갖 전쟁 범죄와 가혹 행위를 자행하였고, 처음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던 일부 대일본주의자 사상자들까지 이반하여 레지스탕스로 들어가는 등 일본군은 극심한 저항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투자를 받지 못해 허술했던 육군이나 민병대와는 달리 아키시오 해군은 전력을 온존한 상태에서 북양함대와의 교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아키시오 전선은 점차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1943년 후반, 알류산 열도 전역에서 승리한 미군이 아키시오 전선에 뛰어들었다. 무기대여법 시행으로 아키시오군에는 엄청난 물량의 군수품 지원이 이루어졌고, 미 해군의 일부 병력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북양군은 거점마다 방어선을 구축하여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1944년 8월 아키시오군은 나다노 제도, 신페이 제도, 아키시오모토지마 섬을 전부 수복하였다. 미 해군의 병력이 철수한 후 아키시오 해군과 해군 육전대 (현 아키시오 해병대)가 단독으로 참전한 니시아키시오 제도 전역이 1945년 7월에 거의 종결되면서 아키시오군은 일본 본토 침공 계획을 세웠으나,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침공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키시오는 연합국의 승전국으로 분류되어,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점령했던 중부 태평양의 히카사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및 GHQ에 일부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현대

제3공화국 성립

신페이 내전과 수정헌법

개혁당-사회당 내각 이후

기타: 아키시오 설정 변천사

아키시오는 2008년 신진제도 남쪽에 섬이 발견되었다는 설정에서 출발하여 많은 설정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참고 문헌

각주

  1. 1.0 1.1 1.2 길봉준 (2011년), 9쪽 ~ 11쪽.
  2. <아키시오서 간석기 外 각종 유물 발견...사학계 "충격">,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 2008-02-22
  3. 《그들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51쪽, 박미영 (2009), 신다산출판사(북웅파 계열의 출판사이다)
  4. 4.0 4.1 4.2 4.3 4.4 길봉준 (2011년), 12쪽 ~ 15쪽.
  5. 볼턴·모레노 (2014), 35쪽 ~ 36쪽.
  6. 《미 합중국 해군 서해 파견대 정찰기록》 (1861), 1951년 공개, 사우스패서디나 대학에 사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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