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전체 명칭 Club Atlético de Madrid, S.A.D.
별칭 Los Colchoneros (매트리스 제작자)
Los Rojiblancos (적백)
Los Indios (인디언)
El Atleti (알레티)
리그 라리가
창단 1903년 4월 26일
구단주 미겔 앙헬 힐 마린 (52%)
엔리케 세레소 (20%)
왕잔린 완다 그룹 CEO (20%)[1]
소액 투자자 (8%)
회장 엔리케 세레소
감독 디에고 시메오네
경기장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수용 인원 67,703[2]
웹사이트 공식 홈페이지
2018-19 2위
최근 시즌 파일:Soccerball current event.svg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20-21 시즌

클루브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Club Atlético de Madrid), 혹은 아틀레티코(Atlético)로 알려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lético Madrid)는 스페인 마드리드를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으로, 라리가에 소속되어 있다.[3] 아틀레티코는 1996년의 라 리가와 코파 델 레이 더블을 비롯하여 10차례 라 리가를 우승하였고, 코파 델 레이를 10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1번, 그리고 코파 에바 두아르테를 3번 우승하였다. 유럽대회에서는 1962년에 UEFA 컵 위너스컵을 우승하였고, 1974년에는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거두었으며,[4] 2010년과 2012년에는 UEFA 유로파리그를 두 차례 우승하였고, 같은 해에 모두 UEFA 슈퍼컵을 우승하였으며, 인터콘티넨털컵도 1974년에 한 번 우승하였다.

2017-18 시즌부터 7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완다 메트로폴라타노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전에는 54,9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에서 홈경기를 치치렀다.[5]

아틀레티코의 홈 유니폼은 적색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로 된 셔츠와 청색 바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말은 청색과 적색으로 되어 있다. 이 조합은 1911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현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유니폼은 나이키에 의해 제조되며, 주 스폰서는 plus500 이다 클럽은 스페인 내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서포터 수를 지니고 있다. 또한 65,000명 이상의 시즌 티켓 소지자가 존재하며, 소시오 (유료 회원) 수 기준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클럽의 역사로 인해, 클럽은 여러 가지 별칭이 붙었는데, 그 중 하나인 매트리스 제작자들 (Los Colchoneros) 은 홈 유니폼의 색상과 줄무늬가 구형 매트리스의 색상과 동일해서 붙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아틀레티코에 인디언 (Los Indios) 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는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가 철회된 후 몇 명의 남미 선수들을 영입한 것에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의견에 대한 반론도 많은데, 이 별명이 붙은 데에 경기장이 만사나레스 강 제방에 "주둔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디언 (Los Indios) 들이 전통적으로 백인 (Los Blancos, 백색과 중의) 들과 적대 관계였는데, 공교롭게도 백색 (Los Blancos) 은 같은 연고지의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의 별명이었다.[6]

여담으로 스페인의 현 국왕인 펠리페 6세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팬이며, 클럽의 명예 회장이다.

역사

창립과 초창기 (1903-1939)

파일:Enrique Allende.jpg
1903년 창단 이래의 초대 회장 엔리케 아옌데

이 클럽은 마드리드에 유학중인 3명의 바스크인 학생들에 의해 아틀레틱 클루브 데 마드리드 (Athletic Club de Madrid) 라는 이름으로 1903년 4월 26일에 창단되었다.[7] 이 창립자들은 새 구단을 그들의 유년 시절의 클럽인 아틀레틱 빌바오의 유소년 팀으로 취급하였다.[7] 1904년, 레알 마드리드의 반대 세력이 클럽에 합류하였다.[8] 초창기의 아틀레티코 유니폼은 아틀레틱 빌바오와 유사한 청색과 백색이었으나, 1911년에 아틀레티코는 현재의 적색과 백색 줄무늬 유니폼을 도입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적색과 백색 줄무늬 유니폼이 도입된 데에는 침대 매트리스를 제작하는데 쓰이는 조합의 색과 동일하며, 잉여 옷감을 쉽게 축구 유니폼으로 바꿀 수 있음에 따라, 가장 저렴하게 유니폼을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덕이라고 알고 있다. 이 저렴한 유니폼 제작법의 발견은 유니폼 색상의 변경으로 이어졌고, 마드리드 클럽이 매트릭스 제작자 (Los Colchoneros) 라는 별명으로 인지되도록 하였다. 또다른 신빙성이 있는 요인으로는 아틀레틱 빌바오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모두 잉글랜드 블랙번 로버스로부터 유니폼을 구매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된다.[9] 1911년 한때, 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선수이자 보드진 일원인 후아니토 엘로르두이는 잉글랜드로 두 팀의 유니폼을 구매하기 위해 떠났었다. 그는 블랙번 로버스 유니폼을 찾지 못하고 사우샘프턴의 적색과 백색 유니폼을 대신 구매하였다. 아틀레틱 마드리드는 적색과 백색 상의를 도입하였으나, 블랙번 로버스의 청색 바지를 사수하였으며, 그에 따라 적백 (Los Rojiblancos) 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틀레티코의 첫 홈구장은 론다 데 바예카스로, 도시 남쪽, 동명의 노동 계층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1919년, 마드리드의 지하 소통 시스템을 운영하던 콤파니아 우르바니사도라 메트로폴리타나 (Compañía Urbanizadora Metropolitana) 가 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1921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모 구단인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독립하였다. 스포츠 경기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인 에스타디오 메트로폴리타노 데 마드리드의 일부로써, 아틀레틱은 35,800석의 홈구장을 가졌다.[10] 메트로폴리타노는 1966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홈구장을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으로 이전하였다.[11] 이전 후, 메트로폴리타노는 철거되었고, 그 터에는 대학 건물과 ENUSA사의 사무실동이 세워졌다.

1920년대에 아틀레틱은 캄페오나토 델 센트로(Campeonato del Centro)를 세 차례 우승하였고, 1921년에는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거두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에 모구단 아틀레틱 빌바오를 상대하였고, 1926년에도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 기록에 따라, 1928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라 리가의 초대 시즌에 합류하였다. 라 리가 데뷔 시즌 당시 감독은 프레드 펜틀랜드였는데,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의 2시즌만에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강등되었으나, 1934년에 잠깐 라 리가로 복귀하였다. 이후 1936년에 펜틀랜드의 뒤를 이어 주제프 사미티에르가 사령탑을 잡은 후 또다시 강등되었다. 운이 좋게도 매트릭스 제작자들 (Los Colchoneros) 은 레알 오비에도의 홈구장이 스페인 내전의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강등이 취소되었다. 아틀레틱은 강등이 취소되면서 세군다 디비시온의 우승팀 오사수나와 플레이오프를 치르었고, 승리하였다.

아틀레틱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 (1939-1947)

1939년, 라 리가가 재개되었을때, 아틀레틱은 사라고사아비아시온 나시오날 (Aviación Nacional) 과 병합하면서 아틀레틱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 (Athletic Aviación de Madrid) 가 되었다. 아비아시온 나시오날은 1939년에 스페인 공군에 의해 창립되었다. 아비아시온은 1939-40 시즌에 프리메라 디비시온 합류에 합의를 보았으나 RFEF에 의해 거절되었다. 그 합의에 따라 스페인 내란을 통해 8명의 선수를 잃은 아틀레틱과 병합하였다. 이 팀은 1939-40 시즌에 레알 오비에도를 대신할 팀으로 참가하였다. 전설적인 리카르도 사모라의 지휘 하에, 이 클럽은 이 시즌에 첫 라 리가를 우승하였고, 1941년에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영향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선수로는 1931년에 라싱 산탄데르에서 합류한 헤르만 고메스 주장이 있었다. 그는 적백 (Los Rojiblancos) 소속으로 1947-48 시즌까지 8시즌 연속 활약하였다.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 배치되어 마친과 라몬 가빌론도와 함께 전설적인 중원으로 구축되었다. 1941년, 프랑코가 제시한 정책에 따라[12] 팀명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됨에 따라 클럽명이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 (Atlético Aviación de Madrid) 로 개칭되었다. 1947년, 군 단체가 클럽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현재 클럽 명칭인 클루브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 (Club Atlético de Madrid) 로 정착하였다. 같은 해, 아틀레티코는 메트로폴리타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격파하였으며, 이 승리는 현재까지 아틀레티코의 지역 더비 최다 점수차 승리이다.[13]

황금기 (1947-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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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에레라는 아틀레티코 임기 동안 두 차례의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엘레니오 에레라의 임기 동안, 라르비 벤바레크의 도움을 받아, 아틀레티코는 1949-50 시즌1950-51 시즌에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에레라가 1953년에 클럽을 떠난 후,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게 남은 1950년대동안 뒤쳐지기 시작하였고, 그 기간동안 아틀레티코는 아틀레틱 빌바오와 스페인의 3인자 자리를 놓고 경합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의 2인자 자리를 크게 위협하였다. 1957-58 시즌, 페르디난트 다우치크는 아틀레티코 감독직에 올라 라 리가 준우승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 결과, 아틀레티코는 라 리가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챔피언임에 따라 1958-59 시즌유러피언컵에 진출하였다. 브라질인 중앙 공격수 바바엔리케 코야르에 힘입어, 아틀레티코는 드룸콘드라, CSKA 소피아샬케 04를 물리치고 대회 준결승전에 올랐다.[14] 준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는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다. 레알은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에서 2-1로 이겼고, 2차전에서는 아틀레티코가 메트로폴리타노에서 1-0으로 이겼다.[15] 합계에서 두 팀이 동률을 이룸에 따라, 사라고사에서의 재경기에서 레알이 2-1로 승리하였다.[16]

그러나, 아틀레티코는 호세 비얄롱가 전 레알 마드리드 감독의 지휘 하에 1959-60 시즌1960-61 시즌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두 시즌 연속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며 복수하였다. 1962년, 아틀레티코는 피오렌티나와의 결승전에서 재경기 끝에 3-0 승리를 거두고 컵 위너스컵 우승을 거두었다.[17] 이 업적은 레알 마드리드가 유일하게 획득하지 못한 트로피가 컵 위너스컵임에 따라 매우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그 다음 시즌인, 1962-63 시즌에도 같은 대회의 결승전에 도달하였으나, 잉글랜드토트넘 홋스퍼에 1-5로 패하였다.[18] 엔리케 코야르[19]는 이 시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선수로 자리를 잡았고, 미드필더 미겔 호네스나, 중원 플레이메이커인 아델라르도와 함께 맹활약하였다.[20]

아틀레티코 팬들에게는 불행히도 황금기가 거함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와 겹쳤다. 1961년과 1980년 사이, 레알 마드리드는 14차례 라 리가를 우승하며 스페인 축구를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 아틀레티코만에 레알의 대항마로 견줄만 하였는데, 1966년, 1970년, 1973년에 라 리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또한 1961년, 1963년, 1965년에는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또한 코파 델 레이에서 1965년, 1972년, 그리고 1976년에 세 차례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하였다. 1965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라 리가 타이틀 경쟁 끝에 준우승을 거둔 후, 아틀레티코는 8년만에 처음으로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잡은 팀으로 기록되었다.

유러피언컵 준우승 (1965-1974)

이 시대의 주요 선수로는 베테랑이 된 아델라르도와 골잡이 루이스 아라고네스, 하비에르 이루레타, 그리고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가 있었다. 후자의 선수는 피치치를 1969년, 1970년, 1971년에 3차례 차지하였다. 1970년대에 아틀레티코는 몇 아르헨티나인 용병들을 고용하였는데, 그들은 루벤 아얄라, 파나데로 디아스, 그리고 라몬 "카초" 에레디아와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감독이었다. 로렌소는 징계, 경고, 그리고 상대 경기의 방해를 기본으로 삼았다. 논란이 수반되었으나, 그의 방식은 1973년에 라 리가를 우승하고, 1974년에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며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21] 아틀레티코는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갈라타사라이, 디나모 부쿠레슈티,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그리고 셀틱을 격파하였다.[22] 셀틱과 맞닥뜨린 준결승 원정 경기에서, 아틀레티코는 난투 끝에 아얄라, 디아스, 그리고 교체선수였던 키케를 모두 퇴장으로 잃었으며, 대회의 의도적인 반칙에 대한 최악의 사례로 회자되었다. 이 고의적인 반칙으로 난무한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이어지는 홈경기에서 가라테와 아델라르도의 골로 2-0 승리를 쟁취하였다.[23] 그러나, 헤이젤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는 패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 제프 마이어, 파울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 그리고 게르트 뮐러를 보유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아틀레티코는 우위를 점하였다. 아얄라, 디에스, 그리고 키케가 징계로 결장함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7분 남은 상황에서 연장으로 끌고 갔다. 아라고네스는 결승골이 될 뻔한 놀라운 곡선 프리킥으로 득점하였다. 그러나, 경기 막판에 바이에른 수비수인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가 22미터에서 미겔 레이나 아틀레티코 골키퍼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동점골을 득점하였다.[24] 이틀 뒤, 헤이젤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아틀레티코는 회네스와 뮐러에게 각 2골씩 실점하며 바이에른에게 0-4로 완패하였다.[24]

아라고네스의 임기 (1974-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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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아라고네스는 아틀레티코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며, 클럽의 감독을 4차례 역임하였다

유러피언컵 준우승 이후, 아틀레티코는 그들의 베테랑 선수인 루이스 아라고네스를 감독으로 내정시켰다. 아라고네스는 1974년부터 1980년, 1982년에서 1987년, 1991년부터 1993년, 그리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감독직을 네 차례 따로 역임하였다. 그의 임기에서의 성공은 바이에른 뮌헨이 바쁜 일정으로 인터콘티넨털컵에 불참하게 되면서 찾아오게 되었고,[25] 아틀레티코는 바이에른을 대신하여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상대는 아르헨티나인디펜디엔테로,[25] 원정에서의 0-1 패배 이후, 홈에서 하비에르 이루레타루벤 아얄라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다.[26] 아라고네스는 팀을 1976년에 코파 델 레이 우승, 1977년에 라 리가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라고네스는 그의 두 번째 임기 와중에 1985년, 라 리가 준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룩하였다. 그는 19번 리그 득점을 기록하여 피치치를 획득한 우고 산체스의 득점을 받았다. 산체스는 코파 결승전에서 두골을 삽입하며 아틀레틱 빌바오를 2-1로 제압하였다. 그러나, 산체스는 클럽에 더 머무르지 않았고, 이후 도시 건너편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산체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아라고네스는 산체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1985년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우승하고 1986년컵 위너스컵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아틀레티코는 디나모 키예프에 0-3으로 패하며 3번째 유럽대항전 결승전 패배를 기록하였다.[27][28]

헤수스 힐 회장의 임기 (198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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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년팀 졸업생 페르난도 토레스는 2001년에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지도 하에 데뷔하였다.

1987년, 논란의 정치인이자 사업가인 헤수스 힐이 클럽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2003년 5월에 사임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하였다.[29]

아틀레티코는 리그 성공에 대한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10년간 라 리가 우승을 거두지 못하였다. 힐 회장은 취임하자 지갑을 열었고, 거액의 이적을 성사시켰는데, 그 예로 포르투갈 윙어이자 포르투에서 갓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파울루 푸트레가 있었다.[30] 수 차례의 거액 이적에도 불구하고, 1991년과 1992년의 코파 델 레이 2연패에 그쳤고, 리그 타이틀 획득에 고전하였다. 아틀레티코는 1990-91 시즌에 우승에 근접하였으나, 요한 크라위프바르셀로나에 10점차로 밀리며 준우승에 그쳤다. 그 과정에서, 힐 회장은 클럽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인해 무자비함으로 명성을 날렸다.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론 앳킨슨, 하비에르 클레멘테, 토미슬라브 이비치,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알피오 바실레는 물론 클럽 레전드인 루이스 아라고네스까지 선임과 경질을 반복하였다. 힐은 1992년에 유소년 아카데미를 해체하기도 하였으며,[31] 당시 15세였던 라울이 도시를 가로질러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세계적인 명성을 쌓으면서 이 결정이 치명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32]

1994-95 시즌에 클럽은 최종일 무승부로 간신히 강등을 피하였다. 이 일로 인해 1995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또다시 감독 교체와 선수 대 방출로 이어졌다. 예상과 다르게 1995-96 시즌에 라도미르 안티치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하고, 잔류를 선택한 토니, 로베르토 솔로사발, 델피 헬리, 후안 비스카이노, 호세 루이스 카미네로, 디에고 시메오네, 그리고 키코와 새로 영입한 밀린코 판티치, 류보슬라프 페네프, 산티 데니아, 그리고 호세 프란시스코 몰리나가 오랜 기간동안 노리던 리그 타이틀 사냥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아틀레티코는 이 시즌에 라 리가/코파 델 레이 2관왕을 이룩하였다.[7]

다음 시즌인 1996-97 시즌, 아틀레티코는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하였다. 기대와 야망 속에, 여름 이적시장에서 후안 에스나이데르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적하였고, UEFA 유로 1996에서 체코의 준우승 주역이었던 라데크 베이블이 팀에 합류하였다. 두 대회에서 활약하는 아틀레티코는 일찍이 라 리가 우승 경쟁을 접었고,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는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약스에게 패하였다. 1997-98 시즌을 앞두고, 크리스티안 비에리주니뉴의 대형 이적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힐의 전략에 변화를 불러왔고, 안티치는 감독직은 3시즌간 유지하였으나, 1998년에 아리고 사키가 안티치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후 사키는 겨우 6개월만에 경질되었다. 안티치는 1999년에 잠깐 돌아와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대신해 시즌 잔여 기간동안 감독직을 맡았다. 1999-2000 시즌은 아틀레티코에 있어서 대 참사로 평가되는 시즌이었다. 1999년 12월, 힐과 그의 보드진은 클럽 재정의 오용으로 영업 정지령이 내려졌고, 수사 작업이 착수되었으며, 정부가 임명한 행정가인 호세 마누엘 루비가 아틀레티코를 운영하였다. 헤수스 힐 클럽 회장과 보드진이 빠지면서, 클럽은 곤경에 빠졌고, 선수들은 끔찍한 성과를 냈다. 라니에리는 클럽이 20팀 중 17위에 랭크되어 강등권의 수렁에 빠지자 사임하였다. 안티치가 복귀하여 3번째 감독 임기를 역임하였으나 불가피한 결과를 막는데 실패하였다. 코파 델 레이 결승 진출에도 불구하고, 아틀레티코는 강등되었다.[33]

아틀레티코는 2001년에 간신히 승격이 무산되고 2002년에 세군다 디비시온을 우승하며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2시즌을 보냈다.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그의 아틀레티코 4번째이자 마지막 임기에 팀을 다시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올렸다.[34] 그는 그 다음 시즌에도 팀의 감독을 맡았으며, 페르난도 토레스를 라 리가에 데뷔시켜 주었다.[35]

재건 (200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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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의 아틀레티코 팬들

2006년, 아틀레티코는 포르투갈의 미드필더 코스티냐마니시와 함께 아르헨티나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에로를 영입하였다. 2007년 7월, 페르난도 토레스는 £26.5M의 이적료에 리버풀로 이적하였고,[36] 루이스 가르시아는 토레스 이적과 무관하게 리버풀에서 아틀레티코로 이적하였다.[36] 클럽은 또한 우루과이 국가대표이자 전 유러피언 골든슈/피치치 수상자인 디에고 포를란비야레알로부터 약 €21M에 영입하였다.[37] 그 외로 벤피카에서 포르투갈 윙어인 시망을, 아스널에서 윙어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12M에 영입하였다.[38][39]

2007년 7월, 아틀레티코 보드진은 마드리드 시와의 합의를 통해 경기장을 매각하고 시가 소유한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새 홈구장은 2016년을 기점으로 클럽이 소유하게 될 예정이다. 마드리드는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를 신청하였으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게 개최지를 내주었다.[40]

2007-08 시즌은 근 10년 중 가장 성공적인 시즌임이 증명되었다. 클럽은 UEFA컵의 32강에 진출하였으나, 볼턴 원더러스에 패하였다. 아틀레티코는 코파 델 레이 8강에 진출하였으나 이 시즌의 챔피언인 발렌시아에 패하였다. 가장 중요한 라 리가에선느 4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1996-97 시즌 이래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하였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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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시즌동안 디에고 포를란은 라 리가에서 32골을 득점하며 스페인과 유럽의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2009년 2월 3일, 하비에르 아기레는 2009년에 6경기 무승으로 끔찍한 시작을 끊은 것에 대해 해고당하였다. 그는 이것만이 요인이 아니였으며, 경질이 아니라 상호 계약 해지로 클럽을 나갔다고 훗날 주장하였다.[42] 그의 해임에 대해 아틀레티코의 본질적 문제는 그에게 없었다는 여론으로 디에고 포를란 선수를 비롯하여 공개적인 분개가 있었다. 포를란은 "하비에르를 해임한 것은 쉬운 해결책이나, 문제는 그가 야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진하여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선수들이 비난의 대상이다."라며 전 감독을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아틀레티코의 신임 감독으로 아벨 레시노가 취임하였다.[43]

아틀레티코의 성공은 시즌 후반기에 계속되었으며, 리그 테이블에서 4위에 랭크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공격수 디에고 포를란은 아틀레티코의 32골을 득점하며 피치치를 획득하였고, 유러피언 골든슈도 그의 몫이 되었다.[44] 아틀레티코는 국내에서의 성공으로 다음 시즌의 챔피언스리그를 위해 스쿼드 보강의 기회를 잡았다. 아틀레티코는 베테랑 골키퍼인 레오 프랑코와 결별하고, 유소년팀에서 다비드 데 헤아를 승진시켰으며, 유망한 유망주인 세르히오 아센호레알 바야돌리드에서 영입하였다. 아틀레티코는 레알 베티스의 수비수이자 스페인 국가대표인 후아니토를 공짜로 영입하였다. 대형 클럽들이 아틀레티코의 슈퍼스타인 아구에로와 포를란을 영입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였으나, 아틀레티코는 강력한 득점원인 이들 둘을 잔류시키며 다음 시즌의 희망을 키웠다.

2009-10 시즌은 그러나 다수의 패배와 다수의 실점으로 형편 없이 시작하였다. 10월 21일, 아틀레티코는 잉글랜드 클럽 첼시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4-0으로 짓밟혔다.[45] 이 대패로 아틀레티코 보드진은 아벨 레시노의 해임을 공식 발표하는데 이르렀다.[46] 전 덴마크 선수인 미카엘 라우드루프를 부르는데 실패한 후, 아틀레티코는 잔여 시즌을 키케 플로레스와 함께하기로 결정하였다.[47][48]

유럽대항전 성공과 디에고 시메오네 (2009-)

파일:Diego Simeone - 01.jpg
2011년부터 감독을 맡고 있는 디에고 시메오네
파일:Atletico Madrid-Fulham 2010-05-12.svg
2010년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 선수 명단

키케 플로레스의 감독 취임과 함께, 아틀레티코는 행운의 기회를 획득하였다. 라 리가의 2009-10 시즌을 9위로 마무리하면서 뒤쳐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아틀레티코는 2009-10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 리그 3위로 탈락하였으며, 2009-10년 UEFA 유로파리그의 32강에 진입하였다. 2010년 5월 12일, 아틀레티코는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준결승전에서, 풀럼을 함부르크의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꺾으며 2009-10년 UEFA 유로파리그를 우승하였다.[49][50][51] 디에고 포를란은 이 경기에서 두 골을 득점하였는데, 2번째 골은 116분에 터졌으며, 아틀레티코가 이 경기에서 2-1로 이겼다.[52]

이는 1961-62년 UEFA 컵위너스컵 이래 아틀레티코가 차지한 첫 유럽대항전 타이틀이었다. 그들은 2010년 5월 19일에 바르셀로나의 캄 노우에서 열린 세비야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도 진출하였으나, 0-2로 패하였다.[53] 유로파리그 우승으로, 그들은 2010년 8월 27일, 모나코에서 열린 2009-10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인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2010년 UEFA 슈퍼컵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아틀레티코는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세르히오 아구에로의 연속골로 2-0으로 이기며 첫 슈퍼컵을 획득하였다.

아틀레티코는 코파 델 레이 8강 탈락, 유로파리그 조별 리그 탈락, 그리고 라 리가 7위로 2010-11 시즌을 상대적으로 실망스럽게 보냈다. 그 결과 키케 플로레스가 시즌 종료 전에 팀을 떠나게 되었고, 전 세비야 감독이었던 그레고리오 만사노가 후임으로 취임하여 아틀레티코에 마지막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안겼다. 만사노는 2011년 12월에 라 리가에서의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디에고 시메오네가 부임하였다.

시메오네는 팀을 유로파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3년만에 두번째 우승을 거두었는데, 2012년 5월 9일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라다멜 팔카오지에구의 쐐기골로 아틀레틱 빌바오를 3-0으로 이겼다.[54][55] 유로파리그를 또다시 우승하면서 2012년 8월 31일에 모나코에서 열린 2011-12년 UEFA 챔피언스리그의 우승팀 첼시와의 2012년 UEFA 슈퍼컵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아틀레티코는 팔카오의 전반전 해트트릭에 힘입어 4-1로 승리하였다. 2013년 5월 16일, 아틀레티코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양 팀이 10명으로 싸운 끝에 2-1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에서의 승리로 아틀레티코는 14년간 25경기 엘 데르비 마드릴레뇨 무승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2012-13 시즌에 아틀레티코는 1년을 약간 넘은 기간동안 3개의 트로피를 획득하였다.[56][57] 2014년 5월 18일 38라운드 캄프 누에서 열린 FC 바르셀로나와의 리그 마지막경기에서 디에고 코스타아르다 투란의 부상과 바르샤의 알렉시스 산체스에 전반 32분 골로 선제골을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 3분 디에고 고딘 의 골로 1:1 무승부, 승점 90점으로 18년만에 리그 최정상에 올랐다. 또한 그 해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준우승을 달성하였다.

엘 데르비 마드릴레뇨

파일:Pepe y aguero.jpg
2010년, 아틀레티코와 레알의 경기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대조되는 정체를 띤 클럽으로 매우 다른 운명을 따랐다. 역사적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에스타블리시먼트 클럽으로 간주되어 왔다. 반면, 적백 (Rojiblancos)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정권 초기에 더 선호되는 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반항 정신 (sentimiento de rebeldía) 으로 간주되었다. 아틀레티코는 공군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Atlético Aviación) 으로 개칭) 과 병합되었으며, 1950년대에 정권이 선호 구단을 레알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 하나의 클럽으로 존재하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우리가 보유했던 최고의 외교관들이다", 라고 한때 장관이 언급한 적 있었다. 이 관념은 도시의 축구 정체에 있어서 공동 인식을 두드려 큰 영향을 주었다. 그로 인해, 아틀레티코 팬들이 "마드리드 만세, 마드리드 만세, 정부의 팀, 국가의 수치" (Hala Madrid, hala Madrid, el equipo del gobierno, la vergüenza del país) 라는 곡의 작곡자이자 가장 자주 부르는 자들로 추측되고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이 더비의 큰 이슈들로 최근 고전하고 있는데, 14년간 2012-13 시즌까지 무승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5월 17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도시 라이벌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2-1로 이기고 코파 델 레이를 가져가며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 흐름은 2013년 9월 29일, 아틀레티코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또다시 1-0으로 승리하며 유지되었다.

최근에 있었던 마드리드 더비에서는 부진을 겪던 토레스가 선발로 출전해 2골을 넣으며 화제가 되었다.

현재 선수 명단

2021년 1월 22일[58]

임대 선수 명단

선수 기록

아델라르도는 클럽의 최다 공식경기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아틀레티코 유니폼을 입고 1959년에서 1976년까지 551경기에서 활약하였다. 선수와 감독으로써 모두 전설이 된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173골로 클럽의 최다 득점 기록을 지니고 있으며, 아드리안 에스쿠데로는 150골로 라 리가 최다 득점 기록을 지니고 있다. 라울 가르시아는 현역 최다 출장 선수로 182경기에 출전하였다. 라다멜 팔카오는 €40M으로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세웠으며, €60M으로 역대 최고 방출 이적료 기록도 가져갔다.

스태프

감독

다음 감독들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최소한 한 개의 트로피를 획득하였다:

이름 임기 트로피
[[그림:{{{국기그림-1945}}}|22x20px|border |스페인 (동음이의)|링크=스페인 (동음이의)]] 리카르도 사모라 1939–1946 라 리가 2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그림:{{{국기그림-1945}}}|22x20px|border |스페인 (동음이의)|링크=스페인 (동음이의)]] 에밀리오 비달 1946–1948 코파 프레시덴테 FEF
아르헨티나 (동음이의) [[그림:{{{국기그림-1945}}}|22x20px|border |스페인 (동음이의)|링크=스페인 (동음이의)]] 엘레니오 에레라 1949–1953 라 리가 2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그림:{{{국기그림-1945}}}|22x20px|border |스페인 (동음이의)|링크=스페인 (동음이의)]] 호세 비얄롱가 1960–1962 코파 델 레이 2회, UEFA 컵 위너스컵
브라질 오투 붐베우 1964–1965 코파 델 레이 1회
[[그림:{{{국기그림-1945}}}|22x20px|border |스페인 (동음이의)|링크=스페인 (동음이의)]] 도메네크 발마냐 1965–1966 라 리가
프랑스 마르셀 도밍고 1969–1972
1979–1980
라 리가
틀:나라자료 AUT 막스 메어켈 1971–1973 라 리가, 코파 델 레이
스페인 (동음이의) 루이스 아라고네스 1974–1980
1982–1987
1991–1993
2001–2003
인터콘티넨털컵
라 리가
코파 델 레이 3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코파 이베리카
세군다 디비시온
틀:나라자료 CRO 토미슬라브 이비치 1990–1991 코파 델 레이
아르헨티나 (동음이의) 산토스 오베헤로 1992–1993, 1994–1995 코파 델 레이
틀:나라자료 SRB 라도미르 안티치 1995–1998 라 리가
코파 델 레이
멕시코 (동음이의) 하비에르 아기레 2006–2009 UEFA 인터토토컵
스페인 (동음이의) 키케 플로레스 2009–2011 UEFA 유로파리그
UEFA 슈퍼컵
아르헨티나 (동음이의) 디에고 시메오네 2011– UEFA 유로파리그
UEFA 슈퍼컵
코파 델 레이
라 리가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회장

최근 시즌

시즌 리그 순위 승점 코파 유럽대항전 비고
1987–88 1부 3 38 19 10 9 60 38 48 8강
1988–89 1부 4 38 19 8 11 69 45 46 준결승 UC 64강
1989–90 1부 4 38 20 10 8 55 35 50 16강 UC 64강
1990–91 1부 2 38 17 13 8 52 28 47 우승 UC 64강
1991–92 1부 3 38 24 5 9 67 35 53 우승 CWC 8강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준우승
1992–93 1부 6 38 16 11 11 52 42 43 16강전 CWC 준결승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준우승
1993–94 1부 12 38 13 9 16 54 54 35 16강 UC 32강
1994–95 1부 14 38 13 9 16 56 54 35 8강
1995–96 1부 1 42 26 9 7 75 32 87 우승 클럽 역사상 첫 더블
1996–97 1부 5 42 20 11 11 76 64 71 8강 UCL 8강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준우승
1997–98 1부 7 38 16 12 10 79 56 60 16강 UC 준결승 비에리가 24골로 피치치 획득.
1998–99 1부 13 38 12 10 16 54 50 46 준우승 UC 준결승
1999–2000 1부 19 38 9 11 18 48 64 38 준우승 UC 16강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강등
2000–01 2부 4 42 21 11 10 59 39 74 준결승
2001–02 2부 1 42 23 10 9 68 44 79 64강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승격
2002–03 1부 11 38 12 11 15 51 56 47 8강
2003–04 1부 7 38 15 10 13 51 53 55 8강
2004–05 1부 11 38 13 11 14 40 34 50 준결승 UEFA 인터토토컵 준우승
2005–06 1부 10 38 13 13 12 45 37 52 16강
2006–07 1부 7 38 17 9 12 46 39 60 16강
2007–08 1부 4 38 19 7 12 66 47 64 8강 UC 32강 UEFA 인터토토컵 우승
2008–09 1부 4 38 20 7 11 80 57 67 16강 UCL 16강 포를란이 32골로 피치치유러피언 골든슈 획득.
2009–10 1부 9 38 13 8 17 57 61 47 준우승 UEL 우승 UCL – 조별 리그 탈락
2010–11 1부 7 38 17 7 14 62 53 58 8강 UEL 조별 리그 UEFA 슈퍼컵 우승
2011–12 1부 5 38 15 11 12 53 46 56 32강 UEL 우승 유럽대항전 12연승 기록
2012–13 1부 3 38 23 7 8 65 31 76 우승 UEL 32강 UEFA 슈퍼컵 우승
2013–14 1부 1 38 28 6 4 77 26 90 4강 UCL 준우승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준우승

우승 기록

국내 대회

리그

국제 대회

유럽 대회

외부 링크

틀: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틀:프리메라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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