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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니노 제국
아펜니노 제국
Impero d'Appenninica in Italia

 

 

 

(BC 27 ~ AD 1947)
1822
1947

 

 

국기 국장
표어 I.P.Q.A. Imperatoris Popoloque Appenninus
정부:
Se non cambia, cadrà
황실:
Aumentare onore anche se condividere potere
국가 Màrcia Cesare

AD 1913년의 아펜니노 강역
수도 Città-di-Roma 북위 41° 54′ 동경 12° 30′
정치
공용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정부 형태 민주제, 연방제, 입헌군주제
로마 황제
제국 수상
Carolus Gaius III (1913)
Flavius Maximus (1913)
입법 Senato Appennino
지리
면적 12,700,000 km²
인구
1913년 어림 92,399,000 명
기타
국교 로마 가톨릭교회
통화 lira (ITL)

이탈리아의 아펜니노 제국(이탈리아어: Impero d'Appenninica in Italia 임페로 디 아펜니니카 인 이탈리아[*]), 줄여서 아펜니노 제국(이탈리아어: Impero d'Appenninica 임페로 디 아펜니니카[*] 영어: Empire of Apennine 엠파이어 오브 아펜닌[*] 중국어:亚平宁 帝国 야핑닝 디궈)은 남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 스위스 연맹와 , 에일슈타트 공국 동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남쪽으로 그리스영국령 몰타, 서쪽으로 프랑스 식민제국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펜니노 제국의 영토는 약 12,700,000 km²이며, 기후는 주로 지중해성 기후건조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1913년 기준 92,399,000명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 중 하나이며, 공용어는 이탈리아어라틴어이고, 아프리카 소수 민족어나 히브리어, 아랍어 등도 지역에서 쓰인다.

고대에 여러 여러 유럽 민족이 살던 이탈리아-아펜니노 반도는 이후 라틴족인 로마에 의해 통일되고 로마 제국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27년 이전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6세기부터 로마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지만 더욱이 단결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북부의 이탈리아 왕국과 남부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리되었고 19세기에 이탈리아 왕국 세력의 주도로 통일을 이룩하였다. 또한 19세기부터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막대한 영토와 노동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펜니노 제국은 연방제,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군주국으로 10개의 속주와 5개의 본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로마에서도 중심지인 치타-디-로마이다.

상징

국명아펜니노이탈리아 반도의 중심을 따라 종단하는 산맥의 이름으로 이 이름을 따서 이탈리아 반도를 아펜니노 반도라고도 부른다. 아펜니노란 이름은 로마 이전부터 생겼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재통일을 거치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Dall'alto verso il basso, dal basso verso l'alto)'라는 표어와 함께 아펜니노라는 국명이 채택되었다. 아펜니노 왕국 시기에는 '아펜니니아'라는 약명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으로 변경된 이후 폐지되었다.

아펜니노의 국기통합기(이탈리아어: Bandiera unificata 반디에라 우니피카타[*])는 종교색인 금색, 백색과 함께 로마 시대부터 사용해온 적색이 세로 세 줄, 같은 비율로 배치된 삼색기이다. 이 기는 1822년 이탈리아 반도 재통일 당시 처음 국기로 지정되었다. 별칭은 삼색기(Il Tricolore 일 트리콜로레[*])라 한다.

아펜니노의 국가카이사르 행진곡(이탈리아어: Màrcia Cesare 말치아 카이사르[*])로 아펜니노 왕국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역사

연표

이탈리아 아펜니누스의 역사
Italia Appenninus
고대
Storia antica
중세
Storia medievale
근대
Storia moderna
현대
Storia contemporanea
에트루리아
Etruria
에트루리아
Etruria
로마 공화국
Repubblica romana
로마 제국
Impero romano
카이사르
Caesar
동고트 왕국
Regno ostrogoto
프랑크 왕국
Regno franco
중프랑크 왕국
Francia Media
신성로마제국
Sacro Romano Impero
사보이 공국
Ducato di Savoia
사보이 공국
Ducato di Savoia
아펜니노 왕국
Regno Appennina
아펜니노 제국
Impero Appenninina
아펜니노 공화국
Repubblica Appenninina
이탈리아 공화국
Repubblica Italiana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로마 왕국
Età regia di Roma
교황령
Stati Pontificii
라티움 제국
Impero di Latium
나폴리 왕국
Regno di Napoli
이탈리아 제국
Impero Italiana
마그나 그라이키아
Magna Graecia
이탈리아 제국
Impero Italiana
이탈리아 제국
Impero Italiana
시칠리아 제국
Impero di Sicilia
>>>
스페인
Spagna
페니키아
Phœnicia
카르타고
Carthago
론디니움 제국
Impero di Londinium
이슬람 제국
Califfato
루마니아
Romania
프랑스 제1제국
Primo Impero francese

선사 시대

선사 시대의 이탈리아 반도는 오늘날과는 지형이 달랐다. 마지막 빙기 동안 엘바 섬시칠리아는 대륙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아드리아해는 지금보다 훨씬 작아서 오늘날 포자 지방가르가노 반도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베니스 지역은 당시엔 대륙 한 가운데의 습도 높은 평원이었다.

최초의 사람족이 이달리아 반도에 살았던 흔적은 85만년전 무렵에 형성된 몬테포기올로 유적이 있다.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후기 홍적세 유적은 기원전 5만년 전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구석기 유적도 발견되었다.

2011년 11월 옥스포드 방사성 탄소 가속기는 1964년 그로타델카발로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아기의 치아를 분석하여 그 연대를 4만 3천년에서 4만 5천년 전쯤으로 측정하였는데, 이는 유럽에 현생 인류가 전무하던 시기이다. 리구리아 주와 롬바드리아 주의 발카모니카의 동굴, 사르디니아 주의 누라게와 같은 곳에서 선사 시대 후기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미이라로 유명한 외치는 티롤 남부의 지밀라운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3천년 무렵인 동기 시대의 사람이다.

동기 시대 무렵부터 인도유럽어족의 사람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오기 시작했다. 인구의 대규모 이동은 대략 4차례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주요 유입 경로는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인도유럽어족 유입은 대략 기원전 3천년 쯤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구리를 재련할 수 있었다. 포 계곡을 중심으로 레메델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두 번째 이주는 청동기 시대에 있었으며 기원전 3000년대 후반에서 기원전 2000년대 초반 쯤에 일어났다. 이들은 청동기를 제작하였으며 오늘날의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 연안, 그리고 파단 평원에서 종형잔 문화를 이루었다. 기원전 2000년대 중반쯤에 세번째 이주가 있었다. 포 계곡을 중심으로 호수 위에 집을 짓던 테라마레 문화를 일구었던 이들은 여전히 수렵생활을 하는 문화를 지니고 유입되었으나 점차 농부로서 정착하였다. 네번째 이주민은 청동기 문화를 지녔고 기원전 2000년대 말에서 기원전 1000년대 초에 유입되었다. 이들의 문화는 원시 빌라노바인 문화로 불리며 중부 유럽의 언필드 문화와 관련이 있었다. 원시 빌라노바인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최초로 철기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두개의 토기를 겹쳐 만든 옹관묘를 이용하여 시신을 매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원시 빌라노바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에서 중부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보고 있으나 캄파니아 주의 카푸아에서 발견되는 무덤도 이들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누라기 문명

사르디니아 주코르시카 섬 남부에는 기원전 1800년대에서 시작되어 기원후 2세기까지 존속하였던 청동기 문화인 누라기 문명이 있었다. 누라기 문명은 후반기엔 이미 로마화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그곳에 이미 있었던 거석 문화에서 비롯된 누라기 탑에서 비롯되었다. 누라기 문화보다 더 오래된 사르디니아의 거석 문화는 많은 고인돌선돌을 세웠다. 누라기 탑은 누가 언제 세웠는 지 알 수 없지만 유럽의 대표적인 거석 문화 가운데 하나이다.

누라기 문명은 해양 문명으로 지중해 각지와 교역하였다. 누라기 유적에선 발트해가 원산인 호박과 아프리카 유인원을 포함한 각종 동물을 묘사한 작은 청동 유물들과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만들어진 무기와 미케네산 도기 따위가 발굴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록된 해양인이 이들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

철기 시대

기원전 8세기 무렵 페니키아 문자로 쓰인 글들에서 이탈리아가 언급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는 원래 오늘날 칼라브리아 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이는 아마도 오스카어 비텔리우(Víteliú, 어린 소의 땅)가 어원일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이탈리아라는 지명은 반도 전체를 의미하진 않았다. 이탈리아가 반도 전체를 가리키게 된 것은 고대 로마 시기인 기원전 1세기에 들어서였다.

에트루리아 문명

에트루리아인은 기원전 800년 무렵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서 문명을 꽃피웠다. 이들이 어디서 이주해 왔는 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전 시기의 빌라노반 문화와 연관있는 토착인이라는 설이 주류이나 이탈리아 북부나 근동에서 침입해 왔을 것이란 설도 있다. 오늘날 토스카나 주 인구의 데이터를 토대로 근동 인구와 유전적 유사성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두 집단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현대인과 과거 에트루리아인을 곧바로 연결지을 수는 없지만, 토스카나 주 인구에 대한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를 본다면 에트루리아인은 신석기 시대 이래 중유럽에 정착한 토착 문화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의 언어가 인도유럽어족이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남아있는 금석문에 보이는 낱말들 몇은 애게해림노스 섬에서 발견되는 고대 언어와 유사하다. 에트루리아인은 일부일처제 사회였고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족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 연맹체였다. 에트루리아의 종교는 모든 것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다신교였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이 신들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고 인간은 신들을 달래거나 설득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에트루리아 문화의 강역은 아펜니노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탈리아 북중부 지역으로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작은 마을들이 이 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 연안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들인 마그나 그라이키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이들 그리스의 도시들과 달리 귀족정 정치 체제가 두드러진 사회였다. 에트루리아의 주된 산업은 광업으로 구리, 철과 같은 금속을 생산하고 교역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금속 무역을 통해 지중해 서부 각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지중해 서부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과 함께 오늘날 프랑스 남부 연안과 카탈로니아 그리고 코르시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페니키아가 해상 교역권을 두고 에트루리아인들과 경쟁하였다.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의 도시들과 겨루기 위해 고대 카르타고의 일원이었던 퓨니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540년 무렵 일어난 아랄리아 전투는 딱히 누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상태로 끝맺었지만, 이후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에트루리아인들은 코르시카 섬을 장악하고 티레니아 해 북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기원전 480년 에트루리아와 카르타고의 연합군은 시라쿠사를 중심으로한 그리스의 마그나 그라이키아 도시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기원전 474년 시라쿠사는 참주 히에로가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쿠마에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에트루리아는 크게 약화되어 로마를 비롯한 라티움의 도시들과 남부의 삼니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기원전 4세기가 되자 갈리아가 북부에서 침입하여 포 강 유역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영향력을 넓히는 동안 라티움 지역은 고대 로마가 강성해져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에트루리아는 고대 로마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마그나 그라이키아

기원전 8-7 세기 무렵 인구의 증가, 기근의 발생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흑해 연안과 이탈리아 남부,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동부와 같은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지를 "거대한 그리스"를 뜻하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로 불렀다. 스트라본과 같은 고대 지리학자는 오늘날의 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마크나 그라이키아로 묶었다. 이들 그리스 식민지는 본국의 언어인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고, 정치 체제 역시 폴리스를 기반으로 한 독립적인 도시 국가 형태를 유지하였다. 헬리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언어와 풍습, 문자들은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각지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리스 문자는 이탈리아 여러 부족에서 변형되어 사용되었고 훗날 로마는 이를 다시 정리하여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였다.

헬레니즘 시기에 새롭게 세워진 도시들은 부유하고 강력하게 발전하였다. 나폴리는 그리스어 Νεάπολις(네아폴리스)가 어원으로 "새로운 도시"를 뜻한다. 이 외에도 시라쿠사, 시바리스, 아그리젠토 등이 헬레니즘 시기에 세워졌다. 한편 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속하였던 도시로는 오늘날의 타란토, 로크리, 레조디칼라브리아, 크로토네, 투리이, 벨리아, 놀라, 안코나, 세사칠렌토, 바리 등이 있다.

기원전 282년 피로스가 패한 후 마그나 그라이키아는 고대 로마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 시대

로마 왕국

로마 왕국은 당대에 쓰인 기록이 거의 소실되었고 훗날 로마 공화정로마 제국 시기에 쓰인 것들은 전설에 기반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역사적 사료는 매우 적다. 전설에 따르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는 티베르 강 강가인 팔라티네 언덕에서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기원전 509년 로마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로마 공화정을 시작하였다.

로마가 세워진 곳은 티베르 강을 걸어서 건널수 있는 여울이 있는 곳으로 팔라티네 언덕을 비롯한 언덕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티투스 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디오니시우스 등과 같은 고대 역사가들은 로마가 건국 이후 수 백년 동안 일곱 왕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연대기 작가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왕정이 243년간 유지되었고 왕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35년 정도였다고 기록하였다. 바로의 기록은 근대의 로마사 연구자 바르톨드 게오르그 니부흐르에 이르기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기원전 390년(바로니안의 기록,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387 - 6년이라고 기록하였다.) 갈리아인의 침입으로 일어난 알리아 전투에서 옛 기록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도난당하였다.

로마 공화정

티투스 리비우스를 비롯한 전통적 역사 서술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509년 설립되었다. 일곱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리부스루시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폐위되었고 정치 체제는 로마의 민회에서 선출된 정무관들에 의해 행정과 사법권이 작동되는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로마 공화정의 정체는 계층간의 균형과 권력 분립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정무관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는 집정관은 두 명을 두어 서로를 견제하도록 하였고, 군대에 대한 권한은 사령관인 임페리움에게 있었다. 집정관은 로마 원로원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였다. 원로원은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인 파트리키 가운데에서 선출되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로마 공화정은 갈리아의 침공을 받았다. 로마는 마르쿠스 퓨리우스 카밀루스의 지휘아래 갈리아를 격퇴하였다. 그 후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고, 에트루리아인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안의 주변 세력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은 기원전 281년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거점인 타란토를 점령함으로써 완료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들어 카르타고는 로마의 새로운 적수가 되었다.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로마는 히스파니아와 북 아프리카, 그리고 시칠리아를 속주로 삼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셀레우코스 제국을 무너뜨렸고 이로서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국가들을 정복한 뒤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가 융합되어 그레코-로만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로마는 유럽과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으며 더 이상 주요한 적수가 없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로마는 사회적 불안과 정치 위기를 맞았다. 그 중심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였다. 크라수스는 로마 제일의 부자였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겸 군사령관이 되어 갈리아 지역에 대한 원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키웠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죽자 삼두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권력 다툼을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뒤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를 축출하였다. 일인 지배체제가 되자 카이사르는 많은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종신독재관이 되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반대파는 이두스 마르티애인 3월 15일 암살을 모의했으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군대가 암살 직전에 급습하여 반란 무리를 모조리 처단하여 포룸에 내걸렸으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유배되었다. 카이사르는 이 일로 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으며, 그 후 2여 년 동안 원로원에 정치를 맡기고 휴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반란이 일어났으며 수 년간 내전이 있었다.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정점으로 하는 1인 지배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아우구스투스(라틴어: Augustus, 존엄한 자)의 칭호를 받았다. 역사학자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 것을 로마 제국의 출발점으로 본다. 당시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이미 모든 권력은 아우구스투스 개인에게 잠식당한 상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케사르가 달력을 개혁하고 율리우스력을 만든 뒤 7월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것을 뒤따라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뒤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부르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하여 지중해와 유럽 각지의 방대한 속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공화정 당시 로마의 속주는 최종적으로 집정관과 법무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로마에서 집정관이나 법무관으로서 1년간 임기를 마치면 3년의 임기를 가지고 속주의 장관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1인 지배 체계를 확보한 뒤로는 주요 속주들을 황제가 직접 지배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특별한 부관을 군단 병력과 함께 속주에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로마 제국은 계속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다. 기원후 47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 오늘날 잉글랜드웨일스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가 속주가 되었고, 70년 무렵에는 유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이 독립을 상실하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이후 트라야누스 시기에 이르러 파르티아 제국를 정복하며 최대 판도를 보였다. 로마 제국은 파르티아 제국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한 나라와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한나라의 기록에선 로마를 대진(大秦)으로 불렀다.

아우수그투스 시기의 로마에서는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그리고 루푸스와 같은 시인들이 문학을 발전시켜 고전 라틴어의 황금기를 열었다.

중세 시대

프랑크족의 침입

동고트의 침입

라티움 제국과 론디니움 제국

랑고바르드의 침입

이탈리아의 재통일

프랑크 왕국의 침공

이슬람 제국의 침공

이탈리아 제국의 확장

교황령

사보이아 공국

근세 아펜니노

나폴레옹 전쟁

외세의 압박과 분열

아펜니노 왕국

루마니아

아펜니노 제국

제국주의

제1차 세계 대전

정치

황실

제국의회

원로회

평의회

행정구역

국방

육군

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