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의 성전' 세계관은 세상이 악마를 믿는 종교, 마교와 신을 믿는 종교, 신교와의 전쟁과 갈등, 그리고 같은 종교 내에서 일어나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이 주가 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관은 중세시대로, 마교칼루스 교칼비스 교로 나뉘어 서로를 경계하고, 어떨때에는 서로 전쟁을 하고, 신교디아스 교디누스 교는 서로 협력을 하곤 하지만, 이들이 마교를 퇴치하는 순간 이들또한 마교처럼 종교전쟁을 하며 싸울것이다.

마교를 믿는 국가는 셰룸, 베페루티누, 레젠티오, 이그나, 메리디스, 시누스, 레우티오, 노바투스, 아우투스,노비타스칼루스 4대국, 칼비스 6국이다. 그에 비해 신교를 믿는 국가는 오직 레그눔뿐이다. 레그눔제5차 대성전 이후 대륙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서쪽의 이스니아에서 온 자들에 의해 신기술을 전수받고 다시 한번 성전을 일으키기로 한다.

역사

인류

인류는 약 12만 년 전에 레젠티오알테르 지방에서 처음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점차 해안선을 따라 영역을 펼쳐나가며, 결국엔 서로 부족을 이루며 공동체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각 부족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때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것이라 믿을수 있는 존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신, 토속신앙이였다. 이들의 신앙에서의 신은 동물, 물건, 자연물 등 여러가지 존제가 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다른 부족을 공격해 점령하고 나서 자신들의 신을 믿게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힘이 강한 부족이 믿는 신을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고, 부족민들은 전투때 신이 자신들을 보호해줄것이라 믿고 용맹하게 싸웠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는 남부에 신교, 북부에는 마교가 남게되었다. 이 둘의 신들은 서로의 성격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두 종교의 싸움은 예언된 것이였다.

신교는 약 MR.300년대에 알테르 지방에서 나타났다. 신교를 처음 믿은 부족은 알테르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알테르족은 현재까지도 알테르 지방에 남아있다. 마교는 약 MR.250년대에 리멘리멘족에 의해 생겨났다. 이 두 종교는 단일신을 믿으며, 다른 부족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포교했다. 여담으로 최초로 단일신을 믿은 종교는 무려 MR.600년 전에 존재한 싱굴라리타스 교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1차 대성전

신교마교알테르 강을 기준으로 영역 대부분을 나누었다. 그러다 PR.1년, 신교를 믿는 부족들 중에서 메리디아누스 부족이 최초의 왕조인 메리디아누스 왕조를 건국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돌에 문자를 기록하니, 이것이 최초의 기록인 멤브라나 기록의 원형이다. 이들 메리디아누스 왕조는 점차 영역을 뻗어나갔고, 현재의 파나이 반도엘리스까지 진출한다.

PR.50년, 마교의 군대가 알테르 강을 넘어 침범해왔다. 이에 알테르 지방의 여러 부족들은 마교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대부분이 패배한다. 이에 그들은 메리디아누스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메리디아누스 왕조울토르 렉스상투스 1세는 PR.55년에 마교의 군대를 알테르 강 이북으로 쫒아내는데 성공한다. 제1차 대성전으로 인해 알테르 지방에서의 메리디아누스 왕조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제1차 대성전 이후

마교도들을 몰아낸 신교도들은 알테르 강 이남에서 서로 세력권을 두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메리디아누스 왕조는 다른 부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 했고, 다른 부족들은 그런 메리디아누스 왕조의 눈을 피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PR.86년, 알테르 지방에서 알테르 왕조가 건국된다. 당시 메리디아누스 왕조상투스 2세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그는 그저 의 꼭두각시일 뿐이였다. 메리디아누스 왕조의 왕권은 바닥을 기었고, 당연히 지방의 영주와 의 권력은 커졌다. 이에 다른 부족들에 대한 압박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반 메리디아누스

PR.110년에는 켄트룸 왕조가 건국된다. 이에 메리디아누스 왕조엑스페티오 렉스켄트룸 왕조로 군대를 몰고 갔으나, 켄트룸 왕조엑스페티오 렉스의 군대를 격파함과 동시에 엑스페티오 렉스까지 포로로 잡는데 이른다. 엑스페티오 렉스가 포로로 잡혔으나 메리디아누스 왕조의 귀족들은 돈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엑스페티오 렉스는 화형당했고, 메리디아누스에서는 렉스의 자리를 놓고 왕위다툼이 벌어진다. 결국 메리디아누스 왕조의 북부에는 켄트룸 왕조알테르 왕조라는 신흥 강국이 둘씩이나 자리잡게 되었고, 메리디아누스 왕조는 내부에서부터 썩어나갔다.

PR.111년, 켄트룸 왕조엘리스를 공격한다. 이에 티푸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켄트룸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티푸스 1세켄트룸까지 진군하지만, 강한 저항에 부딫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이후 약 10년뒤인 PR.128년, 티푸스 1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켄트룸으로 향했으나, 군대 내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한다. 이후 메리디아누스는 다시 혼란에 휩싸였고, PR.132년, 켄트룸 왕조는 다시 엘리스를 공격한다. 메리디아누스 왕조켄트룸 왕조와 맞섰으나, 전멸한다. 결국 엘리스켄트룸 왕조가 점령하게 된다. 이로 인해 메리디아누스 왕조는 더이상 북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안데르-메리디스 평원알테르 왕조켄트룸 왕조가 분할한다.

재기

제1차 대성전에서 패배한 마교는 부족들끼리 연맹관계(마교 연맹)를 구축하고, 원정군을 조직한다. 또한 동부의 부족들은 동부로 개척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들은 거대한 방목지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수의 궁기병을 양성하게 된다. 이후 PR.142년, 마교 연맹알테르 강에 3만여명의 마교 연맹군을 배치한다.

제2차 대성전

PR.150년 1월, 마교 연맹은 100년 전의 설욕을 갚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알테르 강을 건너 알테르 왕조를 공격하였다.

알테르 전투

마교 연맹군의 궁기병들은 일찍히 알테르 강을 건너 알테르 강에서 멀리 떨어지 곳에서 대기하였다. 이후 알테르 왕조의 보병들은 알테르 강을 건너서 알테르툴리움에서 진을 치고 있던 마교 연맹군의 보병들을 공격하였다.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되었고, 결국 밤이 되자 알테르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퇴각한다. 그러자 멀리서 대기중이던 마교 연맹의 궁기병들이 진을 치고 휴식중이던 알테르군을 공격하였다. 갑작스런 궁기병들의 공격에 알테르군은 우왕자왕하였고, 겨우 전열을 가다듬은 알테르군은 궁기병들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궁기병들은 빠른속도로 달아나면서도 이들에게 활을 쏘았고, 알테르의 보병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알테르군이 궁기병에게 유인되어 진에서 멀리 떨어지자, 알테르에서 대기중이던 마교 연맹군의 보병들이 알테르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를 뒤늦게 깨닳은 알테르군은 궁기병 추격을 중지하고 진으로 돌격을 감했하였으나, 이들은 앞뒤로 공격을 받았고, 결국 대패하게 된다. 이를 본 알테르 성의 방어병력들은 항복을 선언하였고, 결국 알테르는 함략되었다.

시온 전투

알테르가 함략당한뒤 마교 연맹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콘피네, 나빌레, 마르키아, 트란슬리미를 함략한다. 이 소식은 신교 세계에 널리 퍼졌으며, 알테르 왕조의 위상은 저 바닥으로 추락하였다. 이후 알테르 왕조를 지원하기 위해 신교도군이 결성되어 시온으로 향했다. 이를 안 마교 연맹군도 시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시온 산의 정상에는 신교군이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수의 신교군들은 숲에서 매복을 해 있었다. 이에 마교 연맹군은 시온 산 아래에 진을 치고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군세로 인토르, 사울, 미타누스, 엑스티아, 웅투라를 점령하여 시온 산을 포위했다. 그러자 시온 산 정상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교군에게 보급이 차단되었고, 이를 뒤늦게 안 신교군은 시온을 버리고 인토르캉케온으로 이동한다. 그때 마교 연맹군의 궁기병들이 일제히 산을 타고서 남쪽으로 진격중이던 신교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또한 시온 산 남쪽의 마교 연맹군 또한 인토르캉케온을 공격하였고, 신교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했다. 계속된 전투 끝에 신교군은 시온, 캉케온, 인토르, 클림 등 모든 마을들을 잃고 숲에 진을 쳤다. 그러자 마교 연맹군은 시온 산에 불을 질렀고, 시온 산은 며칠동안 불길에 휩사였다. 이후 불길이 꺼진뒤 마교 연맹군이 산을 수색하니 산에서는 불에 타서 그을린 뼈가 만여개가 나왔다.

메안데르 공성전

시온을 함략시킨 마교 연맹군은 사울을 쑥대밭으로 만든뒤 메안데르에 다다랐다. 그들은 메안데르를 포위함과 동시에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던 도시인 안데르까지 점령한다. 이에 메안데르알테르군은 메안데르를 벗어나기 위해 연맹군의 눈을 피해 안데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마교 연맹군이 발견하게 되었고, 그들은 강을 건너고 있던 알테르군의 후방을 공격한다. 그러나 알테르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쳤고, 이에 마교 연맹은 선발대를 보내 이들을 추격한다. 디스케토 국왕이 지휘하던 알테르군은 겨우 강 건너편에 있는 켄타르의 성문에 도착했으나, 켄타르 성의 영주는 디스케토 국왕를 배신하고 그의 군대를 공격한다. 이에 자포자기한 디스케토 국왕은 자신을 쫒아오는 마교 연맹의 추격대에게 투항한다.

알파 협정

마교 연맹군에게 투항한 디스케토 국왕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알파에서 마교 연맹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디스케토 국왕알테르 지방을 모두 마교 연맹에게 넘겨주었고, 자신도 포로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교 연맹에게 자신을 배신했던 켄타르 성의 영주를 죽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마교 연맹켄타르의 영주를 잡아 디스케토 국왕의 앞으로 끌고 왔고, 디스케토 국왕은 그를 직접 고통스럽게 죽인다.

이후 알테르 왕조는 멸망하였고, 알테르 왕조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아이기스 쿠리스움보에서 움보 왕국을 세워 알테르 왕조의 후계자를 자처함으로써 알테르 왕조는 멸망을 고했다.

제2차 대성전 이후

후폭풍의 알테르

충돌

알파 협정으로 알테르 지방마교 연맹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후 알테르 지방에서의 완벽한 통치를 위해 마교 연맹알테르 지방에서의 마교를 포교하기 시작한다. 또한 제2차 대성전에서 큰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알테르 지방에 영지가 수여되면서 알테르 지방에서의 마교의 확산은 엄청나졌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알테르 지방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신교도들은 계속해서 신교를 믿으며 마교를 거부해왔다. 또한 신교에서 마교로 개종한 이들과의 충돌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들간의 갈등은 폭력 사태를 일으켰으며, 신교도들은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폭동 초기, 폭도들은 개종한 전 신교도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데 이르렀으나, 점차 일반 마교도부터 영주 마교도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마교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몇몇 마교도들은 이들에 맞서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그저 이들을 피해다니기만 하였다. 한편, 알테르 지방에서 신교 봉기가 일어나자 안데르 강 이남의 여러 영주부터 국왕, 심지어 까지 이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신의 사자들'이라는 칭호를 붙이기까지 하였다.

단독 진압

알테르 지방에서의 신교도 폭도들이 알테르 강 이북의 부족들에게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불어나자 이들은 폭동을 진압할 필요를 느낀다. 이에 마교 연맹은 다음에 이뤄질 연맹 회의에서 이를 논의하기로 하였으나, 알테르 강과 접하던 스페쿨라 족은 연맹 회의의 권한을 무시하고 군대를 끌고 알테르 강을 넘어간다. 이에 알테르 지방의 영주들은 이에 항의하지만, 스페쿨라 족은 항의하는 영주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는 그들의 영지를 몰수한다. 이후 그들은 신교도로 보이는 모든 자들을 여자, 아이 할것없이 모조리 죽이며 남하한다. 한편, 연맹 회의에서는 폭동 진압과 함께 스페쿨라 족을 진압하는 결론을 내린다. 이후 마교 연맹군은 스페쿨라 족 제거와 폭동 진압을 위해 스페쿨라로 남하한다. 이후 스페쿨라에 도착한 마교 연맹군은 스페쿨라에 있던 모든 스페쿨라 족들을 몰살하였고, 이후 알테르 강을 넘어 알테르 지방스페쿨라 족을 공격한다. 이에 스페쿨라 족의 군대는 알테르 지방에 있던 모든 성 안으로 들어가 마교 연맹군에게 농성했으나, 식량이 다 떨어지자 곧바로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스페쿨라 족의 부족장인 스페쿨라 레닉수스메안데르에서 모든 스페쿨라 족을 긁어모아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는 낙마사고로 인해 죽게되었고, 마지막 남은 스페쿨라 족은 그의 아들 스페쿨라 임파비디타스가 지휘하게 된다. 이후 그들은 마교 연맹군에게 저항하였으며, 꽤나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면에서 부족하였고, 결국 깔끔하게 진압되고 만다. 스페쿨라 족을 진압한 마교 연맹군은 모든 스페쿨라 족을 죽임으로써 스페쿨라 족은 멸망하고 만다.

진압

스페쿨라 족의 진압을 위해 알테르 지방으로 들어온 마교 연맹스페쿨라 족 진압이 끝나자 본격적인 신교 봉기를 진압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신교도를 학살하고 신교의 여러 상징들을 파괴하였으며, 수많은 비블로스들을 불태웠다. 또한 학살을 진행한 신교도의 마을을 약탈하고 그 마을의 주민들까지 모두 학살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알테르 지방의 인구는 순식간에 절반이 줄었으며, 여러 부족장들이 몰래 끌고간 노예의 수도 수백에 이르렀다. 학살은 몇년간 계속되었고, 그러면서 알테르 지방은 황폐해졌다.

인구 부족

대학살이 12년간 지속되다 보니, 정착부족이 처음 나타난 알테르 지방은 마교도의 대학살로 풍요로운 농토에 의해 많았던 인구는 12년 사이 40%나 줄어버렸다. 때문에 이 알테르 지방에서 나오는 세금은 70%가 증발되었고[1] 이는 알테르 지방에서 이득이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어느 부족도 이 알테르 지방을 차지할려 하지 않았고, 알테르 지방은 주민들까지 버려 빈곤층이 주가 되는 지방이 되었다.

신교의 계속되는 갈등

제 2차 신교-마교 전쟁의 패배로도 신교도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런 중요한 때일수록 더욱 단결해야 한다며 다른 국가들을 공격하여 합병하였으며, 국가내에서도 영주들의 밥그릇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니 중장기병의 도입은 전쟁비용으로 자꾸만 미뤄졌다. 그런데도 신교도 국가들은 이단들은 신(디오스)이 막아준다면서 마교도들과의 국경에는 무척이나 소규모의 민병대가 배치되었다. 그러던 PR.192년, 메리디아누스 왕조메리디알리스 가문의 핏줄이 끊어졌고, 이는 지방 영주들의 대규모의 밥그릇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메리다아누스 내전
시작

PR.192년, 왕조의 마지막 핏줄인 스펙탄스 국왕이 사망한다. 그가 사망하자 메리디아누스 근처의 영주들이 군대를 이끌고 메리디아누스 성으로 쳐들어간다. 제일 처음으로 점령한 자는 카시웰라우누스 가문카시웰라우누스 나투스였다. 허나 그는 레프레시오 가문레프레시오 프라고르의 군대에 의해 성문 밖으로 몸과 목이 따로 떨어지게 된다. 그의 다음으로 스트라제스 헤레디타스가 군대를 이끌로 쳐들어 왔으나, 레프레시오 프라고르의 대군에 의해 전멸하고 스트라제스 헤레디타스는 자신의 영지로 도망쳐 스트라제스 왕조를 선포한다.

달려드는 지방영주들

PR.193년, 지방영주들에게 스펙탄스 국왕의 서거사실과 메리디아누스 가문의 핏줄이 끊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몇몇 지방영주들은 레프레시오 프라고르카시웰라우누스 나투스스트라제스 헤레디타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메리디아누스 성의 권력을 장악하였다는 소식 또한 들었다. 그러던 PR.194년, 모든 지방영주들이 독립을 선언한다. 이는 메리디아누스 왕국의 해체였고, 결국 레프레시오 프라고르레프레시오 왕조메리디아누스 성에서 선포하고, 영토를 메리디아누스 성과 그의 영지인 체사르로 선언하였다.

본격적인 내전

내전은 PR.192년 스펙탄스 국왕이 사망한 순간부터 볼수 있으나, 본격적인 시작은 PR.194년으로 볼수 있다. PR.194년에 스트라제스 왕조는 그의 주변 국가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에 메리디아누스레프레시오 왕조스트라제스 왕조가 선전포고한 나라들을 도와 참전하였다. 이에 그들은 호라에서 전투를 벌인다. 그들의 전력은 비등비등하였다. 허나 스트라제스 왕조의 군대는 경기병경보병보다 많았고, 반 스트라제스 군은 경보병쇠뇌 사수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전투는 스트라제스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다. 초반에 경기병들은 볼트에 맞아 쓰러졌으나, 곧 경보병에게 돌진하여 랜스돌격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쇠뇌 사수들 또한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승패는 확고하게 갈라졌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연합군은 해산되어 스트라제스 왕조의 폭주를 예견하였다.

스트라제스의 폭주

호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준 스트라제스 왕조는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호라를 점령하고서 레프레시오 왕조체사르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결국 PR.195년에는 메리디스 지방에서 메리디아누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트라제스 왕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PR.196년에 스트라제스 왕조는 지난 PR.192년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메리디아누스로 향했고, 전투가 벌어진다. 레프레시오 왕조의 군대가 스트라제스 왕조의 숫자보다 적었으나, 공성전의 특징으로 인해 그들은 10여멘시스간 방어에 성공한다. 허나 10멘시스가 지나자 겨울이 찾아왔고, 창고에 있던 곡물또한 모두 소진되었다. 결국 메리디아누스 성 내에서는 아사자들이 속출하였고, 결국 11개월째에 그들은 항복한다. 허나 항복식에도 레프레시오 프라고르메리디스 지방을 벗어나 도망친다.

내전의 종식

스트라제스 왕조의 폭주로 레프레시오 왕조가 무너지자 메리디스 지방레프레시오 왕조의 차지가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지방영주들은 스트라제스 왕조의 공포에 휩사였다. 이에 메리디스 강 남부의 전 메리디아누스 왕조의 영토에 휘치해있던 모든 영주들은 스트라제스 왕조에 항복한다. 그리고 메리디아누스 강 북부의 영주들도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켄트룸 왕조에 의해 점령되면서 메리디아누스 내전은 분열으로 마무리 된다.

움보-켄트룸 전쟁
움보 왕국

PR.153년, 알테르 왕조의 실질적 권력자였던 아이기스 쿠리스는 무너진 알테르 왕조의 권력자들을 이끌고 움보로 내려가 움보 왕국을 세운다. 움보 왕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전 알테르 왕조의 영토를 되찾아갔고, 알테르 왕조의 계승자라 칭하던 지방 영주들의 소국들은 모두 움보 왕국에게 합병된다. PR.162년, 움보 왕국은 9년만에 안데르 강 아래의 알테르 왕조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결국 다시 신교는 3대국 시대로 되돌아갔다.

움보의 욕심

PR.186년부터 움보 왕국엘리스 쪽에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국경방위라고 보기에는 부적절하였다. 그들에게 기병은 무척 적었고, 대부분이 경보병쇠뇌 사수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들은 공성병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본 엘리스 성의 영주는 크루스타 국왕에게 움보 왕국에게 경고를 요구하였으나, 크루스타 국왕은 이를 무시하고 움보 왕국에게 고개를 숙인다. 엘리스 성녹사 아트귀는 분노하였으나, 마음 밖으로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PR.191년, 움보 왕국의 암살자들이 녹사 아트귀를 암살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인 녹사 울티오엘리스 성의 영주가 되어 크루스타 국왕에게 움보 왕국에게 배상을 요구하라고 부탁하였으나, 크루스타 국왕은 또 다시 무시하였다. 이에 분노한 녹사 울티오는 군대를 이끌고 움보 왕국의 군대를 향해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국경 전투가 발생하였고, 녹사 울티오의 군대가 그들을 상대로 승리한다. 이 사실을 안 크루스타 국왕녹사 울티오의 영지를 뺏었다. 또한 크루스타 국왕움보 왕국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겁쟁이 크루스타

PR.198년, 움보 왕국의 군대가 엘리스 성을 공격한다. 이에 놀란 크루스타 국왕움보 왕국쿠리스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 이 사실이 실수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크루스타 국왕이 보낸 사자는 쿠리스 국왕에 의해 살해당하고, 쿠리스 국왕은 사신의 목을 잘라서 답변 서신과 함께 말 꼬리에 묶어 보냈다. 이에 크루스타 국왕은 지래 겁을 먹고서는 모든 군대를 켄트룸 성에 소집을 명령한다. 엘리스 성을 방어하던 방어군까지 말이다. 국왕의 명을 거절할수 없었던 엘리스 성의 영주는 모든 군대를 문을 열고 켄트룸 성으로 이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방어군은 모두 성문이 열리자마자 성안으로 들이닥친 움보 왕국의 군대에 의해 전멸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켄트룸 성에는 켄트룸 왕국의 모든 군대가 소집된다. 아니 소집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몇몇 영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녹사 울티오에 의해 몇몇 부대는 투타멘에 소집되었다.

엘리스 성을 함략시킨 움보 왕국의 군대가 켄트룸 성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켄트룸 성을 포위하기만 했을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멘시스가 지났다. 2멘시스가 지나자 켄트룸 성의 식량이 모두 떨어진다. 그러자 몇 만명의 군대가 모여있던 켄트룸 성에는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엄청난 악취가 풍겨져나갔다. 그럼에도 왕실 창고에는 식량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크루스타 국왕은 그 식량을 모두 자신의 식사로 대체하였고, 매끼마다 몇백명이 먹을 만큼의 음식이 그의 상에 올려졌다. 이 사실을 안 몇몇 영주들은 분노하여 왕실로 쳐들어갔다. 크루스타 국왕은 분노하며 물러가기를 명했으나, 그들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잡아 몸통을 산채로 십수개로 잘라내었다. 크루스타 국왕이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하자, 그들은 크루스타 국왕의 가족들을 찾아 모조리 죽였다. 모든 것이 끝난 이후 그들은 켄트룸 성 성벽에 백기를 들고 성문을 열었다. 성문을 지나 움보 왕국의 군대가 켄트룸 성에 들어왔으나,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에는 아사자들의 시체가 반쯤 썩어 시체에는 쥐가 서식하고 있었다.

녹사 울티오

켄트룸 성이 함략되자 다른 지역은 순식간에 함략되었다. 도시나 마을이나 모두 저항할 생각을 품지 않았고, 켄트룸 왕국은 멸망하였다. 허나 투타멘 근처의 지역은 함략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PR.200년, 움보 왕국의 군대가 투타멘에서 물러가자 녹사 울티오투타멘 왕국을 선언한다. 그리고는 근처의 마을들을 합병시키며 영토를 넓혀갔다. 결국 신교도들의 세계는 다시 3개국 체제로 되돌아갔다.

마교도 제국

분리주의자들
3맹주 체제

마교도 부족들은 연맹체 형태를 유지하며, 여러개의 맹주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허나 맹주가 아닌 부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 부족도 아닌 부족에게 이득을 취해주는 입장이여서 현재의 형태가 무척이나 불편하였다. 그러는 반면 맹주 부족들은 자신들의 부족도 아닌 부족이 자신들에게 이득을 취해주니 무척이나 좋은 마당이였다. 허나 자신들 또한 이전의 맹주국의 자리를 뺏었던 만큼 다른 부족들을 경계해야만 하는 입장이였다. PR.200년대 당시에는 3개의 맹주 부족으로 리멘 족, 델타 족, 오라 족이 3맹주로 자리잡고 있었다. 허나 중앙언덕평원에 자리잡아 육로 교역로의 시발점이 되던 오카수스 족과 그와 비슷한 지형에 있는 스파티움 족아이쿠름 족이 맹주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체제의 붕괴자

그러던 도중 PR.204년, 스파티움 족비부스를 세우고, 아이쿠름 족루페스 족을 자신들 휘하에 놓는다. 이에 리멘 강 동남평원에 있던 델타 족리멘 강에 위치해 있는 리멘 족의 세력에 위협을 받게 되어 오라 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오라 족은 두 맹주의 요청을 받고 중장기병 수천기를 파견하여 리멘델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라 족중장기병이 다른 부족의 영역에 주둔하게 되자, 오카수스 족은 자신들의 주력 부대를 오라로 향하였다. 리멘델타에 주둔하던 오라 족 중장기병들은 갑자기 리멘델타를 공격하기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마교도 제국이 휘청휘청 되기 시작하였다.

과유불급

오라 족중장기병이 두 맹주를 공격하던 도중, 스파티움 족아이쿠름 족도 군대를 파견에 두 맹주에게 도전장을 내세운다. 때문에 두 맹주는 양면으로 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오라 족이 한참 두 맹주를 공격하고 있을때, 오라오카수스 족에 의해 공격받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오라 족중장기병들은 오라로 퇴각하려 하였으나, 리멘 강에서 진을 쳐두고 있던 리멘 족의 군대에 의해 리멘 강 동부에 갇히게 되었다. 오라 족의 주 군대가 리멘 강 서부로 넘어오지 못하니 오카수스 족은 여유롭게 오라를 공격하여 결국 함략시킨다. 그리고 오라가 함략되던 직후, 오라 족리멘 족리멘 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3맹주 체제의 붕괴

리멘 강 전투에서 오라 족이 후방에서 오던 델타 족들에 의해 갇혀 전멸당한다. 때문에 3맹주 중 델타 족리멘 족만이 살아 맹주자리를 유지하는 듯 하였다. 허나 PR.206년, 리멘스파티움 족에 의해 함략됨과 동시에 델타 족-리멘 족 연합군이 게타이에서 아이쿠름 족과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오라 족과의 전면전 결과 그들의 군대는 무척이나 지쳐있었고, 결국 델타 족-리멘 족 연합군은 대패하고 만다. 그리고 게타이 전투 이후 수 개월뒤, 델타아이쿠름 족에게 함략된다.

마교도 3개국 체제

오라 족, 델타 족, 리멘 족. 이 세 맹주부족은 새로운 강자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마교도 제국은 분열되고 말았다. 마교도 부족연맹체는 분리를 원하고 있던 오카수스 족, 스파티움 족, 아이쿠름 족에 의해 해체된다. 그리고 3맹주 체제를 무너트린 3부족들은 독립적인 국가가 되었다. 오카수스 왕국리멘 강 서부의 대부분 지역을, 스파티움 왕국리멘 강 동북부 지역을, 아이쿠름 족리멘 강 남동부 지역을 차지한다. 결과적으로는 오카수스 왕국이 거대해졌으나, 3개국 안에는 여전히 소국들이, 아니 영주들이 있어서 중앙집권화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연방주의자들

PR.207년, 마교도 제국은 3개국으로 분리되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 중앙집권이 된 것처럼 보였으나, 이들의 시작이 분리주의였던 만큼 이들안에서도 분리를 원하는 부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3개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3개국 체제의 수정을 원치 않았고, 반감을 가진 부족들을 모두 무력으로 진압한다. 그럼에도 분리주의는 여전하였고, 이들은 분리주의자들의 눈을 다른곳으로 돌려야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분리주의 사상에서 새로운 사상을 파생시키기로 하였다. 그결과 분리를 원하면서 소속감을 원하는, 즉 자치권을 원하지만 독립을 거부하는 연방체제를 선택하기로 하였다. 마교도 3대국들은 PR.213년, 자신들의 제국에 수많은 소국으로 구성된, 렉스 체제를 도입하여 소국의 자치권을 보장하면서도 소국들에게 계급을 부여하여 소국 아래에 소국이 있게하였다. 이 체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전쟁의 징조

70년의 세월

PR.228년, 제 2차 신교-마교 전쟁이 끝난 뒤 어연 70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 70년 동안 신교도와 마교도는 여러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교는 3대국 중 하나였던 메리디아누스 왕조가 멸망하고 2대국1국 시대로 변하였다. 마교는 마교도 부족 연맹체가 무너짐에 따라 3맹주 체제는 3대국 체제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건 신교도와 마교도의 군대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마교제 2차 신교-마교 전쟁의 주역이였던 중장기병랜스 돌격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든 주역이기 때문에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해진 중장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의 방어는 더더욱 견고해져서, 무거운 갑옷을 버티기 위한 언더아머도 새롭게 바뀌는 등 랜스 돌격에 더 흡수되어갔다. 70년전에는 사슬이던 갑옷이 이제는 중무장갑옷이랄까? 그에 비해 신교의 군대는 어젼히 경보병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랜스 돌격을 막기위해 파이프폴 암을 도입하여 어느정도 방어력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방어에만 특화되어 있어 전장에서는 무척 비효율적이였다.

국경 분쟁

PR.229년에 평화롭던 세계에 커다란 돌맹이를 떨어트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경인 안데르 강에서 아이쿠름 왕국움보 왕국간의 전투가 발생한다. 이는 충분히 평화를 깨트릴수 있는 일이였다. 이 안데르 국경분쟁은 PR.229년부터 PR.236년까지 무려 7년이나 지속된다. 이 국경분쟁의 시작은 그저 어이없는것인데, 움보 왕국의 한 무리의 병사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활과 비슷한 어업도구를 들고 물에 들어갔다 아이쿠름 왕국의 장궁병에게 사살된 일이였다. 십수명이나 되는 병사들은 한명 빼고 다 죽임을 당하였고, 살아남은 한명은 진으로 되돌아가 이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결국 이 어이없는 상황은 7년간 수 천명의 병사를 죽음의 구덩텅이로 빠트리는 일이였다.

시작된 갈등

PR.236년에 비로서 움보 왕국테노르 국왕에 의해 종료된다. 허나 이 두 국가의 사이는 더욱 나빠진다. 분쟁이 종료된지 몇개월뒤, 테노르 국왕 앞으로 한 서신이 온다. 이 서신은 팔라키아 서신이라 불리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마교도들은 그대들의 군대를 물리쳤네. 이것은 신(카일루스)께서 우리를 선택한것이 아니겠나? 악마들의 종교를 믿지 말고 신(카일루스)을 믿어라. 그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은 우리들과의 전투에서 필패하게 될 것이네. 우리의 신(카일루스)께서는 악마들인 그대들이 일으킨 도발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 신(카일루스)께서는 자네들을 모두 죽이라 하였으나, 우리는 관대하기 때문에 그대들을 지배하기만 하겠네. 만약 그대들이 신(카일루스)를 믿게 된다면 그대들도 지배자가 될수 있네. 카일루스를 믿을 것인가 악마를 믿을 것인가?

이에 분노한 테노르 국왕과 교황은 분노하였고, 교황 네메아 2세는 모든 신교도 국가에게 성전을 선포한다. 이에 신교도들끼리의 전쟁은 멈추게 되고, 모두 군사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제 3차 신-마 전쟁

팔라키아 전쟁

펠 서신

PR.238년, 2년간 팔라키아 서신의 복수를 위해 힘을 길러오던 움보 왕국은 국경분쟁을 또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해 아이쿠름 왕국은 이들을 규탄하는 아쿠사토리우스 서신이라 불리는 서신을 테노르 국왕에게 보냈다. 허나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던 테노르 국왕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고, 오히려 테노르 국왕코루스 1세에게 펠 서신이라 불리는 모욕적인 서신을 보낸다. 모욕을 받을것이라 생각못한 코루스 1세는 매우 흡족해하며 이 서신을 펼쳤는데, 왠걸? 엄청난 모욕이 들어가있었다. 이에 분노한 코루스 1세는 전 국토의 군대를 모두 소집를 명령하였고, 전국에서 강제적으로 노숙자나 평민들이 징집되어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북 안데스 대전투

PR.240년, 이십만에 달하는 오합지졸 군대가 징병되자 코루스 1세는 사령관으로 전장으로 출전하였다. 이윽고 안데스 강 북쪽에서 강을 넘어온 움보 왕국의 3만 군대와 맡붙는다. 코루스 1세의 5천 기병은 전투가 시작되자 움보 왕국에게 돌진한다. 5천 중장기병들은 랜스를 들고 화살비를 헤쳐나갔다. 이윽고 움보 왕국의 진에 다다른다. 허나 전면에 위치해 있던 보병들은 중장기병에게 파이프를 찔러 넣는다. 전면에서 파이프에 찔린 중장기병들은 순간적으로 놀라 멈칫하는 사이 폴 암을 들고 있던 보병들에 의해 말의 목과 함께 그들의 목이 날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코루스 1세는 18만 보병들을 모두 돌격시킨다. 18만 보병들이 진 중앙에 위치했을 즈음, 옆에 있던 숲에서 움보 왕국의 1만 경비병대가 나타난다. 그들은 바로 코루스 1세장궁병들을 향해 돌격하였으며, 18만 보병들을 양쪽으로 적을 맡게 되었다. 경기병들의 랜스 돌격이 시작되자, 장궁병은 물론 중장보병의 피도 하늘에 흩뿌려졌다. 경기병들의 무장이 뛰어나지 않아서 경기병 또한 많은 피해가 났으나, 장궁병크루스 1세의 호위병력에는 큰 타격을 입혔다. 전투 시작 2시간이 경과되자, 코루스 1세는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그걸 포착한 경기병들은 장궁병 사냥을 뒤로 접어놓고, 도망치고 있는 코루스 1세 향해 돌격한다. 이 모습을 본 코루스 1세는 안간힘을 쓰며 달렸지만, 랜스에 의해 심장이 꿰뚫린다. 총지휘관이 사살되자, 오합지졸의 20만, 아니 6만의 패잔병들을 항복을 선언한다. 전투 시작 3시간만의 일이였다.

알테르 진격

북 안데르 전투에서 코루스 1세가 전사되었다. 코루스 1세의 전사소식은 아이쿠름 왕국뿐만 아니라 마교도 세계를 떠들석하게 하였다. 신교도의 위력을 본 마교도 국가들은 저마다 참전을 곰곰히 생각하였고, 아이쿠름 왕국은 공포에 떨었다. 아이쿠름 왕국은 16만에 달하는 강제징병으로 아이쿠름 왕국 내에 남아있는 징병가능 대상은 고작 10만명 남짓이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상인이나 농부를 빼면 3만명도 남지 않게 된다. 때문에 몇몇 광신도들은 자진해서 지원하여 군으로 들어가고, 상인들은 제바르게 외국으로 도망갔다. 그에 비해 움보 왕국은 사기가 올라 알테르 지방 회복을 위해 공세를 퍼부었다. PR.240년 5월, 움보 왕국의 3만 군대는 시온에서 2천 마교 광신도 게릴라군과 만난다. 알테르 지방은 지난 강제징병으로 알테르 지방을 이루던 빈민층이 모두 징병되어 무주지가 되었다. 이는 시온도 마찬가지였고, 도시는 조용했다.

불타는 시온 산

시온 산에서 광신도 게릴라들이 움보 왕국의 정찰부대와 만났다. 광신도 게릴라들은 숲으로 움보 왕국 정찰군이 진입하자, 화살을 쏟아부었다. 경무장으로 이뤄졌던 정찰부대는 화살에 맡는 족족 쓰러졌다. 그러나 곧 쇠뇌 사수궁수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진형을 이루었고, 쇠뇌 사수볼트를, 궁병불화살을 쏘았다. 곧 시온 산은 불이 붙기 시작하였고, 시온에 있던 게릴라 지휘부는 시온 산과 같이 불에 타 소멸되었다.

알테르 강 방어선

시온 산이 불타 사라진 이후 PR.240년 퀸티멘티스, 움보 왕국알테르 왕조의 중심이자, 제 2차 신교-마교 전쟁 이후 빈곤층이 주가 되었던 알테르 지방 모두를 수복하였다. 그와함께 알테르에 인질로 잡혀있던 알테르 왕가 가족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PR.240년 퀸티멘시스 19일, 알테르 왕가 혈통의 대부분이 마르키아에서 처형된다. 잘린 그들의 머리는 동해에 수장되고, 그들의 몸은 마르키아의 마교도 사원과 함께 불타 사라진다.

알테르 강까지의 국경을 회복한 움보 왕국은 PR.240년 노베멘시스부터 방어선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방치되어있던 요새들은 모두 재건되었으며, 알테르 지방 남부는 움보 인들이 정착하여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대전은 신교의 승리로 무르익어가는듯하였다.

성전

신교군
돌격

PR.241년, 알테르 강 방어선이 아이쿠름 왕조를 막아내며 점점 강화되고 있을때, 교황 네메아 2세신교군이 방어선에 도착한다. 움보 왕국입장에서는 방어선을 이용하여 아이쿠름 왕국를 협상대로 모셔갈려 하였으나, 신교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더더욱 확대되는게 아닌가 하였다. 그러던 PR.244년, 방어선이 3년간 아이쿠름 왕국를 막아내던 쯔음 테노르 국왕이 자연사한다. 이에 테노르 국왕과의 갈등으로 공격에 나설수 없었던 신교군은 1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테르 강을 넘는다.

패배

강을 넘으면서 만난 아이쿠름 왕국의 2천 방어대와 만나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아이쿠름 평원에서 아이쿠름 왕국의 2천 중장기병을 만난다. 그들은 아이쿠름 왕국에 의해 고용된 다른 마교도 국가 출신의 기사단이였다. 신교군들은 숫자를 보고서는 바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아무리 돈을 들여서 장비한 중보병이라도 보다 강한 장갑으로 랜드를 들고 돌격하는 중장기병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아이쿠름 평원 전투에서 1만에 달하던 중보병 신교군은 대부분이 전사하여 해체된다. 그에비해 마교도 기사단은 200명 가량의 피해밖에 나지 않았다.

전쟁의 확대

신교군의 패배는 1만 신교군의 전사와 또다른 피해가 일어났다. 신교군이 출정할때부터 신교를 칠 준비를 하고 있던 마교도 국가들의 참전이였다. 그들은 신교군의 1만 대군이 고작 2천 기사단에게 패하자 자신들의 힘을 믿고 움보 왕국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테노르 2세는 쓰러져 며칠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했다. 그러나 네메아 2세는 마교도를 이 세상에서 몰아낼수 있다고 생각하여 날뛰었다. 네메아 2세는 다른 신교도 국가들에게 참전을 요구하였고, 결국 스트라제스 왕조투타멘 왕국은 성전에 돌입한다. 양쪽의 군대는 점점 한곳에 모여 수십만에 달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마교도 32만명, 신교도 56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숫자로 보면 신교도가 우세한듯 보였으나, 마교도의 주력인 중장기병이 5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나머지 27만명도 대부분이 중무장된 중보병이었다는것을 보면 마교도가 우세하였다.

알테르 방어선 전투

PR.246년 마르멘시스, 마교도 32만 대군과 신교도 56만 대군이 알테르 강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플멘시스 12일, 대규모의 전투가 시작된다.

첫째날, 알테르 근방에서 마교도의 27만 중보병 중 2만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에 신교도의 8만 궁수들은 2만 중보병에게 화살세례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중무장한 그들은 화살비를 맡으며 전진하였고, 이에 신교도의 5만 경보병이 그들을 향해 격돌하였다. 전투시작한지 3시간이 경과하였을때, 2만 중보병들은 대부분이 전사하고 5만 경보병 중 4만이 전사하였다.

둘째날, 마르키아 근방으로 신교군 6만명이 강을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이 강을 건넜을 쯔음 1만 중장보병과 3만 중보병들이 그들을 향해 격돌하였다. 1만 중장기병들은 3부대로 나뉘어 6만 신교군의 앞과 옆을 쳤고, 3만 중보병들은 전방을 향해 돌격하였다. 쐐기 진형이였던 신교군의 진형은 앞부분이 점점 퍼지면서 양날도끼모양이 되었다. 3시간이 경과했을때에는 이들의 진형은 뒷부분이 뭉툭한 원형이 되었고, 그들의 진형이 원에 가까워지자, 진지에 있던 마교도 3만 중보병들이 추가로 전투에 참여해 점점 그들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전투경과 5시간째, 자신들이 포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닳은 신교군 사령관들은 후퇴를 명령하였으나, 살아남은 2만 중보병들이 그들을 섬멸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7시간째에 그들은 포위섬멸된다.

셋째날, 사로잡힌 신교군 지휘관을 구출하기 위해 소규모 유격대가 마교도의 진으로 향했지만 절반이 전사하고 실패한다.

넷째날, 신교군이 모두 마르키아로 모인다.

다섯째날, 모인 14만명의 신교군이 마교도를 향해 돌격한다. 마교도의 진 안에서는 소규모의 유격대가 교란작전을 펼쳐 진에 불을 지르는데 성공하였고, 신교군은 앞뒤로 적을 만난 중보병장궁병들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힌후 몇몇 지휘관들을 데리고 후퇴한다.

여섯째날, 알테르 방면 서해에서 해전이 벌어진다. 마교도의 선박은 160대, 신교군과 신교도의 선박은 250대였다. 마교도의 선박이 일자로 늘어서 신교도의 선박으로 돌진하였으나, 신교도의 수용화약을 내뿜는 선박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마교도의 선박은 90대만 살아남아 후퇴한다.

일곱째날, 아이쿠름 왕국코루스 2세 암살 시도가 벌어진다.

여덝째날, 마교도의 진이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홉재날, 마교도의 다음 타겟이 마르키아라고 확신한 신교도들은 신교군과 주력부대를 마르키아 방면으로 배치한다.

열번째날, 마르키아 방면으로 마교도의 장궁병들이 화살을 쏘아대었다.

열한번째날, 동부 미개척지로 향한 탐험가일행 중 단 1명만이 살아 돌아온다.

열두번째날, 동부 미개척지에 이어 동남 미개척지로 향한 모험가 일행또한 실종된다.

열세번째날, 안데르 강 동부, 알파에서 마교도의 중장기병이 포착되고, 전투가 벌어진다. 양측의 전력은 마교도 3만명, 신교도 8천명으로 시가전이 벌어진다. 마을을 둘러싼 방어선을 신교도들이 구축하였으나, 중장기병에 의해 무너지고, 중장기병은 신교도 경보병과 신교도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결국 전투 2시간이 경과하자 신교도 경보병은 물론 신교도 민간인들까지 몰살당한다.

열네번째날, 알파중장기병들은 메안데르로 향하고, 길목마다있는 마을들을 약탈한다. 알테르 방면으로 10만여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마교도 군대가 강을 넘어와서 알테르 성을 포위한다.

열다섯번재날, 포위당한 알테르 성으로 마르키아에 있던 5만의 신교도 군대가 출정하였다. 그러나 사이에 있던 숲에서 매복을 받아 1만여명의 사상자가 난다. 그리고 시온에 위치해있던 지휘부는 알파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여섯번째날, 메안데르의 3천명의 수비대는 3만명의 중장기병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메안데르에서는 신교도 학살이 벌어진다. 알테르 성의 수비대 2만여명은 4만명의 지원군과 함께 돌격하였으나 전멸하고 알테르 성은 함략당한다. 그리고 신교도 지휘관은 메안데르를 향해 7만의 대군을 파병한다.

열일곱번째날, 메안데르로 향하던 7만 대군은 마교도의 5만 중장기병에 의해 박살난다. 이후 살아남은 3만의 마교도 군대는 시온을 향해 돌격한다.

열여덟번째날, 마르키아가 포위당해 20만명에 달하는 신교군과 신교도 군대가 포위된다.

열아홉번째날, 마르키아에 포위당한 20만 대군은 마교도 군대를 향해 돌격하여 탈출하였으나, 13만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스무번째날, 시온에 신교도의 모든 군대가 모인다. 그들은 시온 산을 둘러싸는 방어진을 세운후 롱보우 전술을 이용하기 위해 통나무를 깍아 언덕마다 세운다.

스물한번째날, 시온이 완벽하게 포위된다. 그러나 시온 산을 둘러싼 마교도 군대는 이들을 향해 돌격하지 못하고 롱보우전술로 인해 중장기병의 피해가 가랑비에 옷 젖듯 추가된다.

스물두번째날, 시온 산을 포위한 9만 마교도 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5만 마교도 군은 안데르 강아래로 남하를 시작한다.

스물세번재날, 시온 산의 식량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교도 5만 군대는 안데르 강을 넘는다.

스물네번째날, 안데르 강을 넘은 5만 마교도군은 움보 향해 돌격한다.

스물다섯번째날, 시온 산의 식량이 바닥난다. 5만 마교도군은 움보 성을 포위한다.

스물여섯번째날, 움보 성에 있던 4천의 수비대는 5만의 마교도 군대와 맞서싸웠으나, 패배하고, 성은 함략당한다. 성에 있던 테노르 2세는 성이 함략되기 직전 켄트룸을 향해 탈출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마교도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힌다.

스물일곱번째날, 시온 산이 함략된다. 시온 산에 있던 3만여명의 신교도 군대는 전멸한다.

스물여덟번째날, 켄트룸으로 마교도 군대가 도착한다.

스물아홉번재날, 켄트룸 근처 마을에 숨어있던 테노르 2세가 붙잡힌다.

테노르 2세가 포로가 됨으로써 알테르 방어선 전투는 양측 모두 67만명에 달하는 피해를 내고 종료되었다.

제 2차 알파 협정

PR.246년 마이멘시스 11일, 29일에 걸친 대전투는 종료된다. 그리고 6년간에 걸친 제 3차 신교-마교 전쟁은 다시 마교의 승리로 종료된다. 그리고 알파에서 다시한번 협정맺게 된다. 움보 왕국알테르 왕조]와 같이 알파에서 치욕을 맞보게 되었다. 이 협상의 내용은 신교도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불리한 내용이였다.

  • 신교도들은 더이상 알테르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요구할수 없다.
  • 신교도들은 20만에 달하는 마교도 전사자들을 위해 배상금을 국가적차원에서 제공해야한다.
  • 마교도 3국들은 신교도 전사자에 대한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
  • 움보 왕국은 이시간부로 해체된다.
  • 움보 왕국의 모든 영토는 마교도 3국이 차지한다.
  • 신교도들은 마교도 포로들을 무상 송환한다.
  • 마교도는 신교도 포로들을 송환할 필요가 없다.
  • 신교도들은 50척 이상의 선박을 가질수 없다.
  • 신교도 국가들은 마교도인 상인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수 없다.
  • 신교도 국가들은 마교도인 상인의 상권을 보장하며 마교도 상인이 우선순위가 된다.

이는 전쟁의 피해를 오직 신교도국가들만 배상하고, 마교도 상인에 대한 이익을 요구하는 협정이였다. 그러나 테노르 2세는 협정을 체결하는 방법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으며 도장을 찍었다. 또한 시온 산에 있던 스트라제스 왕조에레디타스 1세 또한 포로로 잡혀 동일한 내용의 협정을 체결해야했다.

제 3차 신-마 전쟁 이후

움보의 처리

전후처리

PR.247년부터 움보 왕국 영토에 대한 영유권 투쟁이 발생하였다. 아이쿠름 왕국은 가장 많은 이익을 요구하였으며, 스파티움 왕국은 동부로 긴 지역을, 오카수스 왕국움보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음에도 영토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간의 긴 마라톤 회담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PR.258년이 되서야 회담의 결과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PR.258년에 체결된 움보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국 11년 간의 마라톤 회담은 PR.250년에 제시된 안을 따르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중요했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마라톤 회담을 진행하던 11년 동안 움보 왕국의 땅은 방치되어 범죄율이 폭등하고, 신교도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또한 각국의 기사들은 마을을 약탈하여 이곳의 경제력은 거의 0에 수렴하게 되었다.

불만

PR.258년에 움보 왕국의 영토에 대한 영토분배는 끝이 났다. 그러나 이때동안 백성들의 원한은 하늘을 찔렀고, PR.259년에 본격적으로 영지에 영주가 들어오면서 이들의 불만은 결국 폭발한다. 이들은 영주가 성으로 들어오자 각종 농기구를 들고 영주들을 살해하였고, 이는 지역적으로 벌어졌다. 때문에 1년간 백여명에 달하는 영주들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영주가 군대를 이끌고 성에 들어와서 그들은 농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였다. 그러나 결국 영지에서 일할 농노들이 없어지자 이들도 점점 굶기시작하였다.

알테르 지방

PR.261년, 알테르 지방알테르로 한 영주가 영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알터 수브렉티오였다. 알터 수브렉티오는 스스로 알테르의 영주가 되기를 원하였고, 아무것도 없던 알테르 지방을 통치할 영주가 나타나니 아이쿠름 왕국코루스 2세는 바로 그를 알테르 지방 전체를 다스리게 한다. PR.262년부터 황무지였던 알테르 지방은 점점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거리에 나돌던 빈민들은 농지로 복귀하여 체계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알테르만이라도 농사가 시작되어 다른 마을에 있던 빈민들이 알테르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PR.264년에는 이전까지 1천명 가량이던 인구가 다른 지역에서온 빈민들에 의해 2천명으로 늘어났다. 때문에 알테르의 농지는 모두 풍요로워졌고, 알테르 성은 북적북적해지기 시작하였다. PR.269년, 8년이 지나자 인구는 5천명에 다다르게 되었으며, 알테르메안데르의 농지는 곡식들이 자라고 있었다. PR.272년에는 인구가 1만명에 달하였고, 지난 대전으로 불에탄 시온 산은 숲이 우거져 알테르 지방의 나무공급처가 되었다. PR.275년, 인구는 3만명에 달하였고, 알테르 지방 전체는 풍요롭게 되어 과거 인류가 탄생할때의 영광을 다시누리게 되었다.

신교도

개척자들

제 3차 신교-마교 전쟁이 종전이 된지 30년이 지났다. 여러국가들은 전쟁에서의 피해를 대부분 복구하였고, 때문에 국채의 규모도 낮아졌다.그러나 신교도들의 활동영역은 지난 제 2차 신교-마교 전쟁 이후부터 마교도들의 활동영역보다 작아지기 시작했으며, 안데르 강을 넘어 메리디스 강까지 당도하게된 마교도들은 신교도들에게 무척이나 걸리적거리는 일이였다. 때문에 이들이 살아남을려면 동부로의 확장이 필요했으며, PR.278년부터 신교도 국가들은 개척자들을 지원해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개척한 땅을 개인의 소유로 만들수 있게 하였으며, 거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영주가 될수 있다는 말이였다. 때문에 빈민들이나 여러 농노들이 동쪽으로의 개척에 나섰고, 이는 신교도들의 활동영역을 다시금 늘여주는 것이였다. PR.278년부터 시작된 동부 개척은 PR.291년이 되서 대부분이 종료되었으며, 신교도들의 활동영역은 배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으로 혼란이 일어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소국 투타멘
난국

투타멘 왕국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제 3차 신교-마교 전쟁이 또다시 신교의 패배로 돌아가자 투타멘 왕국을 감싸고 있던 움보 왕국 전체가 마교도의 손에 올려지게 되어 그들은 남쪽을 제외하고는 확장을 전혀 할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메리디스 강 남쪽에 자리잡은 스트라제스 왕조는 동부 개척으로 인해 무척이나 거대해져 버려서 그들의 힘으로는 전혀 처리할수 없었다. 그러다 PR.299년, 투타멘 왕국 녹사 왕조트리카이 국왕이 붕어한다. 이에 트리카이 국왕의 딸인 임페라트릭스 1세가 왕위를 잇는다.

여왕

임페라트릭스 1세의 집권 초기에는 그녀의 권력이 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위협적인 신하들의 목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결국 PR.302년에는 그녀에게 위협적인 세력은 존제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대규모 숙청을 하면서 신하들의 직위와 재산, 가문을 모두 몰수하여 국고를 돈과 노예로 채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빼앗은 돈으로는 다국적 용병을 고용하고, 노예로는 노예군, 즉 세르부스 군을 키운다. 결국 PR.312년, 집권 13년차가 되니, 투타멘 왕국은 엄청난 수의 용병을 가지게 되었고, 그만한 노예군단을 가지게 되었다.

여제

PR.317년, 임페라트릭스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스트라제스 왕조프라이리피아로 향하였다. 그녀의 대군은 메리디스 강에서 멈춰 진을 세웠다. 이에 프라이리피아의 영주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에레디타스 2세는 무시한다. 이에 임페라트릭스 1세는 직접 에레디타스 2세에게 통첩을 보낸다. 이 통첩을 본 에레디타스 2세는 [[[프라이피아]]의 영주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결국 PR.318년 마르멘시스 9일, 투타멘의 군대는 화살비를 맞는다. 그러나 흉갑으로 무장한 중보병들은 이들의 화살세레를 손쉽게 해결한다. 다음날, 투타멘의 공격이 시작된다. 여왕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다. 이후 강에서 마중나온 프라이피아의 수비병력을 해치운후 프라이피아 성을 포위해버린다. 이 사실을 안 에레디타스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프라이피아로 향한다. 메르멘시스 13일, 프라이피아 성이 함략된다. 이후 투타멘의 군대는 프라이피아 성을 보수하여 에레디타스 2세의 군대를 맞을 준비를 한다. 마르멘시스 15일, 에레디타스 2세의 군대가 프라이피아 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마르멘시스 16일 새벽, 투타멘의 소수병력은 에레디타스 2세의 진을 기습공격하여 피해를 낸후 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방식을 수십번 써서 에레디타스 2세의 군대에 큰 피해를 준다. 결국 아플멘시스 7일, 임페라트릭스 1세는 돌격을 명령한다. 이에 모든 성문에서 대군이 돌격하였고, 에레디타스 2세의 군대는 후퇴한다.

아플멘시스 13일, 투타멘의 병력은 우릅스를 포위한다. 이에 스트라제스 왕조의 허리가 끊어졌고, 동부는 포위되었다. 이에 동부로 피신하였던 에레디타스 2세의 군대는 회군을 명령하였으나, 레고 성에서 발생한 안테쿠르소르 가문의 반란으로 군대는 항복하고 에레디타스 2세는 처형된다. 이 반란으로 동부는 각 영주들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오직 서부만이 투타멘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PR.319년 노베멘시스, 스트라제스 왕조는 항복하여 투타멘 왕국우릅스 서쪽의 스트라제스 왕조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PR.320년, 임페라트릭스 1세는 귀족들에게서 '여제' 칭호를 수여받았고, 투타멘 왕국투타멘 제국이 된다.

개척지 전쟁

3개국들

PR.318년 아플멘시스, 레고 성에서 반란으로 에레디타스 2세가 처형됨으로써 동부 개척지는 내전이 벌어졌다. 각 영주들은 국가를 선포하였고, 몇천명 단위의 전투가 거의 매일 벌어졌다. PR.321년이 되자 많던 소국들은 3개국으로 줄어들었다. 레고 성카부스 북쪽을 영토로 하는 안테쿠르소르 왕조벨리나를 제외한 시누스 호주변의 인슐라 왕조, 벨리나 동부의 벨리나 왕조로 정해졌다. 그러다 PR.325년, 인슐라 왕조시누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왕조가 전복당하고 대신 시누스 왕국푸로르 왕조가 지배하게 되었다.

휴전파기

동부는 17년간 조용하였다. 그러나 PR.338년, 인슐라 왕조가 30여대의 선박과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벨리나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균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안테쿠르소르 왕조도 참전한다.(제 2차 개척지 전쟁) 양측의 전력은 인슐라 왕조 4만, 연합군 6만이였다. 퀸티멘시스 8일, 벨리나 성 밖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진다. 3만 대 5만, 인슐라 왕조는 포위로 연합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으나, 전멸하였고, 곧 5대의 선박이 불탄뒤 25대만이 살아 돌아간다. 이후 9월 1일, 테라에서 인슐라 왕조의 1만 군대와 연합군의 2만 군대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인슐라 왕조는 2배의 병력차이임에도 불과하고, 연합군의 군대를 격퇴한다. 그러나 시누스 호의 다른 도시들은 함략당해 인슐라 왕조시누스 섬테라에 갖혀있었어야 했다.

2개국

PR.342년, 인슐라 왕조에게서 빼앗은 도시의 통제권 획득을 위해서 점령지에서 연합군의 전투가 벌어진다. 두 도시에서 모두 안테쿠르소르 왕조의 군대가 승리하였고, 이에 대해 벨리나 왕조안테쿠르소르 왕조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5월 22일, 벨리나 왕조무니멘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한다. 이후 6월 3일, 두 국가는 시누스 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초반에는 벨리나 왕조가 승리하였으나, 벨리나 왕조의 군대는 시누스 강을 넘어서 점점 깊숙히 들어왔다. 때문에 테라 주변에 숨어있던 안테쿠르소르 왕조의 군대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그에 맞춰 전방에서 후퇴하던 군대가 벨리나 왕조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 결국 유니멘시스 11일, 시누스 강을 넘어온 벨리나 왕조의 군대는 전멸한다. 이후 유니멘시스 27일, 벨리나 성의 성문이 열렸고, 퀸티멘시스 2일까지 성내에서 전투를 벌이다 모르스 국왕이 포로로 잡혀 항복한다. 이후 퀸티멘시스 5일, 모르스 국왕벨리나 성 성문에 목이 걸린다. 결국 개척지 전쟁은 안테쿠르소르 왕조시누스 왕국이 남으며 종료되었다. 이후에도 안테쿠르소르 왕조테라를 공격하였으나, 매번 패배하였고, PR.361년에 테라 조약을 맺으면서 국경분쟁을 종료했다.

파나이 반도

영토분쟁

PR.372년, 엘리스아이쿠름 왕국의 군대가 집결하다. 또한 스파티움 왕국켄트룸켄트룸 스파티움 점령지에 군대를 배치시켜 켄트룸 오카수스 점령지와의 경계선을 봉쇄한다. 이에 대해 오카수스 왕국은 이들에게 사신을 보내 항의를 표했다. 그러나 아이쿠름 왕국은 이 사신을 매질하여 돌려보냈으며, 그의 옷가지와 말을 포함한 모든 물건을 압수하고 걸어서 돌려보냈다. 또한 스파티움 왕국은 사신을 고문시키고 그의 목까지 땅에 떨어트렸다. 이에 분노한 오카수스 왕국은 군대를 대대적으로 징병하여 그들과의 국경에 배치시킨다. 그러나 켄트룸만큼은 아이쿠름 왕국스파티움 왕국의 영토 안에 위치해있는 '육지 위의 섬' 그 자체라서,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켄트룸을 방어지역에서 제외시킨다. 그럼에도 그들은 켄트룸 성안에서 자경단을 창설하는 것을 명령하였으나, 그 문서를 들고가선 파발은 오카수스 왕국의 군대에 의해 잡혀 명령은 전달되지 못한다.

그들의 요구

PR.374년, 켄트룸 성으로 가던 파발이 아이쿠름 왕국에 잡혀 내용이 들통났고, 아이쿠름 왕국오카수스 왕국에게 문서를 증거로 그들에게 배상금과 사과를 요구한다. 이는 오카수스 왕국에게는 무척이나 화날 노릇이였고, 결국 폭발한 오카수스 왕국아이쿠름 왕국스파티움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오카수스 전쟁

PR.375년, 오카수스 왕국아이쿠름 왕국-스파티움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에 대해 아이쿠름-스파티움 연합오카수스 왕국에 대해 비난을 표하고 정당성을 임명한다. PR.375년 6월 29일, 스파티움 왕국의 군대는 켄트룸 오카수스 점령지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또한 그와함께 아이쿠름 왕국의 군대는 체네움으로 향했다.

체네움 전투

퀸티멘시스 2일, 아이쿠름 왕국의 군대는 체네움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도착하자 마자 밤에 캠프파이어를 하는 등 방심하였다. 때문에 도착후 삼일뒤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전투는 퀸티멘시스 5일에서 퀸티멘시스 6일로 넘어가기 직전 밤에 오카수스 왕국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아이쿠름 왕국은 캠프파이어가 진행중에 있을때 그들을 습격하여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오직 먹다만 음식들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이 모습을 본 오카수스 왕국의 장교는 말머리를 돌렸으나,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오직 아이쿠름 왕국의 군대였다. 모닥불에 오카수스 왕국의 습격대는 갇히게 되었고, 곧 전멸하여 장교와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 뿐만 살아돌아갔다. 비록 습격대는 수백여명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들 중 반이 기사였다. 이는 오카수스 왕국의 기사들의 피해가 심했다는 뜻도 되지만, 이런 기사들과 맞서 싸운 아이쿠름 왕국의 징집병의 피해가 속출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질적으로 보면 오카수스 왕국의 피해와 체네움 성의 방어력이 일부 상실됬다는 말이 된다. 이 습격을 지휘한 장교는 성으로 돌아가 지휘관의 작위를 박탈당한다.

퀸티멘시스 11일, 본격적으로 아이쿠름 왕국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지난 습격으로 인해 징집병 수백여명이 사망하였으나 그들의 수는 만명을 넘어갔으며, 이 숫자로 그들은 체네움 성을 충분히 포위할수 있는 병력이였다. 첫 공선전에서 오카수스 왕국은 사방면에서 올라오는 적을 막지 못하고 외각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쿠름 왕국은 성 안뜰까지 넘어가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체네움 성 안뜰 건물에는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고, 얼마 버티지 못하게 될 상황이였다. 결국 옥토멘시스 3일, 버티고 버티던 오카수스 왕국의 군대가 항복한다. 이로써 오카수스 왕국 본토와 연결되던 두개의 항구도시중 한개가 함략되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항구 도시인 파나이마저도 항구가 아이쿠름 왕국의 함대에 의해 봉쇄되었다. 때문에 파나이 반도오카수스 왕국의 5천 군대가 갇히게 되었다.

파나이 전투

옥토멘시스 4일, 파나이파나이 반도에 갇혀진 5천 군대가 모두 집결하게 되었다. 그들은 파나이 외 다른 지역에는 단 한명의 수비대도 배치하지 않고 오직 파나이를 사수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에게는 2주도 버티지 못할만큼의 식량이 있었고, 아껴먹는다 해도 단 3주치의 식량뿐이였다. 때문에 그들은 파나이 성에 그들의 뼈들 묻을 생각이였다. 옥토멘시스 9일, 파나이아이쿠름 왕국의 군대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도착하여 몇주간 그들이 묵을 막사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성문이 열리면서 파나이 성에 있던 모든 군대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놀란 그들은 막사를 세우는 것을 멈추고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막사를 치지 않고 있던 기사들은 이미 무장이 되어있어 바로 오카수스 왕국의 군대를 막기 시작하였으나, 막사를 치고 있던 징집병이나 용병들은 최소한의 무장을 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때문에 사슬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징집병과 용병들은 순식간에 쓰러졌고, 기사들과 살아남은 징집병들이 막사를 지켰다. 전투가 3시간이 경과하자 오카수스 왕국의 군대는 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들과 맞서 싸우다 그들이 후퇴하는 것을 본 기사들과 징집병들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상태로는 그날안에 막사를 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옥토멘시스 13일, 스파티움 왕국의 지원병들이 도착하였다. 그들이 도착할 동안 아이쿠름 왕국의 군대는 오카수스 왕국의 공격을 간간히 막아냈으며, 공성전 준비까지 거의 마쳤다. 4일간 오카수스 왕국의 습격은 10번을 넘겼으며, 그동안 아이쿠름 왕국의 군대는 8천여명의 피해를 입었고, 오카수스 왕국은 2천의 피해를 입었다.

옥토멘시스 16일 새벽, 또다시 오카수스 왕국이 습격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맞이한건 텅 빈 막사였고, 그들은 아이쿠름-스파티움 연합에게 포위당했었다. 그들은 말꼬리를 돌려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격을 진행하였으나, 성문으로 연합의 기사들이 들어갔고 연합군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습격 7시간 후, 오카수스 왕국은 3천 군대가 1600명으로 줄어드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파나이 성으로 들어간 연합군 기사들은 성안에 큰 피해를 입히고 130명중 3명만이 전사한 체 온전하게 돌아온다. 이제 파나이 성의 수비대는 단 1700명 안박, 그러나 아이쿠름-스파티움 연합의 군대는 2만여명에 달하였다. 8월 18일, 공성전 준비를 마친 연합군은 파나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파나이 성 앞 바다에는 아이쿠름 왕국의 함대가 파나이 성]과 파나이 항구를 공격하였고, 연합군은 바닷가를 제외한 세곳에서 공세를 퍼부었다. 공성전은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13시간뒤, 파나이 성의 남문이 열림으로써 종료된다. 공성전 결과 연합군은 4천명이 사망하였고, 오카수스 왕국은 1000여명이 사망하였다. 살아남은 600명의 오카수스 왕국의 군대는 파나이 성 안뜰에서 방어를 이어갔다. 다음날에 이어진 공성전으로 파나이 성 안뜰에 남아있던 오카수스 왕국군은 모조리 전사하였다. 결국 오카수스 왕국파나이 반도의 통제권을 잃게 되었다.

오카수스 조약

노비멘시스 2일, 오카수스에서 세 국가의 대표가 만난다. 오카수스 왕국의 대표로 나온 에클립시스 국왕은 최대한 영토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였고, 연합군의 대표로 나온 두 대표들은 최대한 이득을 보기를 원했다. 패전국인 오카수스 왕국은 노력하였으나 조약은 오카수스 왕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노비멘시스 4일, 에클립시스 국왕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써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오카수스 왕국이 다시는 소생할 수 없게만드는 것이였다. 이 조약이 선포되자 마자, 오카수스 왕국에서는 온갖 반란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고, 오카수스 성만이 연합군의 군대가 주둔하여 반란이 진압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반란은 일어났고, 셰룸 지방의 무역 중심지였던 오라에서는 새 왕조가 선포된다. 결국 PR.376년에는 오카수스 산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독립이 선포되며 각 국가들은 전쟁을 시작한다.

개혁주의자

신성 논제

PR.393년, 메리디알리스에서 한 교수가 바치카누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성 논제라는 것을 게시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의 직속 근위대는 메리디알리스의 모든 대학을 폐쇄한다. 그리고 신성 논제를 게시한 포시티오 레포르마티오 교수를 체포하여 화형을 구형한다. 이를 본 포시티오 레포르마티오 교수의 동료들은 더욱더 신성 논제를 밀어부쳤다. 이 사실을 안 는 교수들을 수배하기 시작하였고, 교수들은 점점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 영주를 시작으로해서 다른 영주들까지 이 신성 논제를 받들며 의 권력악화를 주장하였다.

가담자들

PR.397년, 신성 논제를 바탕으로 한 종파가 선포된다. 이 종파는 구교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표교활동을 펼쳐나갔다. 결국 투타멘 왕국의 몇몇 영주와 동부 개척지 국가들은 신성 논제를 받아드렸고, 서부의 투타멘 왕국바치카누스와의 관계가 나빠진다. PR.401년, 투타멘 왕국의 기사단들이 아교, 즉 신성 논제를 받아드린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였다. 노숙자부터 시작하여 영주까지, 때문에 투타멘 왕국 내에서 아교도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과거 알테르 종교 내전처럼 몇몇 영주와 기사들은 다른 영주나 기사를 모함하였고, 기사단들은 이 제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잡아들었다. 결국 투타멘 왕국은 과거 알테르 지방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교 전쟁
레고 공성전

PR.413년, 투타멘 왕국아교를 받아들인 안테쿠르소르 왕조시누스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마이멘시스 10일, 투타멘 왕국의 15만 대군이 레고 성에 도착한다. 레고 성에는 9천여명의 안테쿠르소르 왕조의 방어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15만 대군을 막기에 부족하였고, 9000의 방어군중 5000명이 탈영한다. 결국 레고 성에는 4천명밖에 되지 않는 방어군이 남게 되었다. 마이멘시스 21일, 본격적인 공성전이 벌어졌다. 수적인 차이는 엄청났고, 순식간에 4천명의 방어군은 성 안뜰로 도망쳤다. 하루의 전투로 4천명이던 방어군은 단 1500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5만의 투타멘 왕국군은 천 명의 사상자만 나왔다. 다음 날,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레고 성은 함략당하고 1500명의 방어군도 모조리 전멸하게 된다. 공성전 후 항복한 방어군들은 투타멘 왕국의 캠프파이어 때 십자가에 묶여 화형당했다.

시누스 호

레고 성을 점령한 투타멘 왕국은 이후 무니멘, 닐루스, 벨리나를 점령하여 시누스 호를 둘러쌌다. 그리고 유니멘시스 1일, 투타멘 왕국은 10만의 군대로 테라를 공격한다. 성밖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순식간에 시누스 왕국의 군대가 패퇴하여 성으로 들어갔고, 투타멘 왕국테라 성을 포위한다. 이들이 성을 포위하고 다음날, 시누스 호의 함선과 테라 성에서 투석기가 돌을 날렸고, 이 공격은 며칠동안 여러번 이뤄진다.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낸 투타멘 왕국군은 공성전을 시작하지만, 패배한다. 테라에서 벌어진 공격으로 투타멘 왕국군은 오직 5천명만 살아돌아간다.

반격

15만의 대군이 5천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안테쿠르소르 왕조는 모든 군대를 이끌고 레고 성을 포위하였다. 또한 시누스 왕국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고, 시누스 왕국은 수락한다. 유니멘시스 26일, 두 왕국의 22만의 군대가 레고 성에 모인다. 레고 성을 방어하는 수비대는 2만명, 꽤나 많은 규모였으나 공격군과 11배의 차이가 났다. 공성전은 28일에 시작되었고, 하루만에 함략당한다. 이후 21만중 부상병과 1만명의 수비대가 [[[레고 성]]에 남고 나머지 19만명의 군대가 우릅스로 진격한다.

유니멘시스 30일, 우릅스 성 밖에서 세 왕국의 군대가 만난다. 양측의 병력은 12만 대 19만, 각 국가의 중장기병이 돌격을 개시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9시간이나 벌어졌으며, 아교도 연합군은 6만, 투타멘 왕국군은 9만명의 피해가 생겼다. 전투가 끝나자 투타멘 왕국군우릅스 성에서 방어를 개시하였다. 그러다 퀸티멘시스 9일, 포위전은 계속되고 있을 무렵 투타멘 왕국의 본토에서는 아교를 믿는 영주와 기사들의 잔당이 농민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투타멘 왕국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투타멘 왕국은 동쪽으로의 지원을 철회하고, 동부 지원병 6만명을 반란에 투입한다. 하지만 토벌군은 폰스로 가던중 광대한 메리디스-노비타스 평원에서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절반의 사상자가 난다. 퀸티멘시스 11일, 토벌군은 폰스에 도착해 토벌을 시작하였고, 5천명의 사상자를 낸체 폰스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이후 그들은 푸니쿨루스로 향했다. 그러다 퀸티멘시스 15일, 우릅스 성의 9만 수비군중 8만이 전사하며 성이 함략된다. 또한 메리디아누스바치카누스가 반란군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다. 도시 전역에서는 불이 나고 바치카누스의 성당들은 반란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를 보고 분노한 투타멘 왕국의 구신교도들은 스스로 민병대가 돼 반란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퀸티멘시스 14일, 메리디아누스는 반란군과 토벌군, 농민군에 의해 대규모 학살의 현장으로 변했다. 반란군들은 시민을 약탈하였고, 토벌군과 농민군은 그런 반란군을 학살하였다. 그러다 세드 1세가 농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를 본 여러 성직자들은 무기를 들고 반란군을 토벌하기 시작한다.

심장의 함략

퀸티멘시스 18일, 프라이리피아 성이 포위당한다. 투타멘 또한 아교도 연합군에게 포위당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메리디아누스의 토벌군과 농민군, 성직자들은 이를 알지못하고 오직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집중하였다. 때문에 적은 수비군으로 버티던 프라이리피아 성은 이틀만에 함략당하고, 곧 투타멘 성이 포위된다. 투타멘 성녹사 왕가를 호위하는 근위대와 수비군을 합쳐도 1만명이 간신히 넘었고, 이는 12만의 아교도 연합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대한 저항하였고, 퀸티멘시스 24일에 성이 함략된 이후에도 성내와 성 안뜰에서 저항이 지속되었다. 때문에 수비군 1만여명은 12만 연합군 중 4만명의 사상자는 내는데 성공하고 전멸한다. 퀸티멘시스 28일에 완벽하게 함략된 이후 아교도 연합군들은 오직 3명의 부상당한 왕족을 생포하였고, 나머지 왕족들은 모조리 전사한 뒤였다.

혼란

퀸티멘시스 28일에 투타멘이 함략되었음에도 메리디아누스의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반란군들은 바치카누스 성당을 중심으로 저항하고 있었고, 토벌군들은 이 성당이 파괴되는 것을 꺼려하여 소규모의 공격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다 옥토멘시스 2일, 그들은 투타멘 함략 5일만에 소식을 접하였고, 패닉에 빠졌다. 몇몇 농민군은 집으로 돌아갔으며, 토벌군은 탈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옥토멘시스 4일, 폰스가 점령되고, 옥토멘시스 7일에는 푸니쿨루스가 점령당한다. 그리고 옥토멘시스 9일에 이들은 메리디스 강을 건너 메리디알리스 성을 포위했으며, 이틀후 함략시킨다. 옥토멘시스 12일, 7만명의 아교도 연합군메리디아누스를 포위하였다. 이에 많은 부대가 항복하였으며, 이런 항복하는 부대를 토벌군이 공격하여 큰 혼란이 일어난다. 심지어 반란군까지 성당에서 나와 토벌군에게 공격을 진행하니 포위 4일째인 옥토멘시스 16일, 메리디아누스의 토벌군 전원이 항복한다.

여제의 유산

옥토멘시스 20일, 아교도 연합군과 아교도 반란군, 구신교 성직자들은 메리디아누스 한가운대에 모인다. 곧 이들은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은 '여제의 유산'이라 불리는 신교 조약이였다. '여제의 유산'이란 이름과 다르게 이 조약은 여제의 유산을 파괴하는데 열중하였다. 신교 조약은 이후의 구신교아교의 위치를 정하며, 신교와 관련된 모든 권리들을 새롭게 정하는 내용이였다. 또한 시누스 왕국안테쿠르소르 왕조의 땅따먹기의 결정체였다.

'여제의 유산' 말고도 다른 조약들로 인해 투타멘 왕국의 지휘는 오직 상징적인 존제로 변하였고, 안테쿠르소르 왕조시누스 왕국의 세력권안에 놓인다. 또한 PR.414년에 체결되는 투타멘 조약으로 인해 투타멘 왕국아데시오 왕조가 즉위하게 되었다. 또한 PR.416년에 체결된 신 왕국 조약으로 프라이리피아 동쪽에는 시누스 왕국의 속국인 수보르디노 왕조가 자리잡게 되었다. 과거 여제의 위대한 제국인 여제의 유산은 그 다음 세대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제 4차 신-마 전쟁

인데펜덴스 왕조

PR.462년, 아이쿠름 왕국은 둘로 나눠지게 된다. 알테르 강 북부은 아이쿠름 왕국, 알테르 강 남부는 인데펜덴스 왕조가 다스리는 레젠티오 왕국이였다. 인데펜덴스 왕조의 초대왕인 인데펜덴스 암비티오아이쿠름 왕국공작령 레젠티오의 전 영주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인 그가 공작령을 받고 독립하게 되었다. 공작령 레젠티오에 속해있던 백작령 아우라는 PR.458년에 공작령 레젠티오와 마찬가지로 백작령 아우라의 전 백작이 자식없이 사망함으로써 스파티움 왕국의 가신이였던 새 영주가 영지를 물려받게 됨으로써 공작령 이그나에 복속 된다. 때문에 레젠티오 왕국백작령 아우라의 영역이였던 안데르-메리디스 평원 중앙을 소실한 남북으로 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진정한 마교도?

PR.508년, 레젠티오 왕국의 제 1대 렉스인 암비티오 1세가 사망한다. 이후 그의 아들인 인데펜덴스 오위즈가 제 2대 렉스로 즉위한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기사단을 창설하였고, 기사를 모집하였다. 또한 영지에서는 신병모집이 이루어졌고, 이 신병들은 훈련을 받기전 마교의 상징인 코르누가에 맹세를 하여 마치 성전을 준비하는것만 같았다. 또한 해안가에는 조선소가 지어지고 함선까지 제작되었다. 안데르-메리디스 평원의 평야를 가면 어디에나 말이 있었다. 하지만 PR.531년, 암바티오 2세는 사냥을 하다 생긴 상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대를 이은 준비

암바티오 2세가 사망하였음에도 그의 아들인 암바티오 3세는 계속해서 군사를 증강시켰고, 이들의 군대는 수십만에 달하였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갑옷을 제작하였으며, 이 갑옷은 매우 얇음에도 방어력이 상당하였다. 레젠티오 왕국의 군대는 어느세 강력한 중장기병을 가진 수십만의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PR.542년, 암바티오 3세는 다른 마교도 국가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긍정적인 대답이였다. 그리고 사우멘시스, 메리디스 강에는 그들이 수십년간 모은 수십만의 군대가 배치된다.

개전

투타멘

사우멘시스, 메리디스 강레젠티오 왕국의 수십만의 군대가 모임과 동시에, 스파티움 왕국의 군대도 메리디스 강에 배치된다. 신교도의 영토중 메리디스 강을 넘은 마지막 성인 투타멘 성은 포위되다시피 되었다. 이에 투타멘 왕국 아데시오 왕가의 구성원들은 투타멘을 빠져나와 프라이리피아로 피신한다. 투타멘 성에는 총 8천명의 수비대가 있었고, 그들을 둘러싼 자들은 수만명에 달하였다. 이를 본 투타멘 성의 수비병들은 매일 밤마다 수십명식 탈영하기 시작하였고, 곧 수비병력의 수는 백수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결국 사우멘시스 28일, 투타멘의 수비군은 투항한다.

메리디스 방어선

두오멘시스, 어느 한 겨울에 메리디스 강 남쪽은 무척이나 분주하였다. 새로운 세드 2세가 모든 신교도 국가에 성전을 선포하여 동원을 명령하지만, 과거 '여제의 유산'으로 인한 의 권력 축소와 신교 내에서의 종파싸움으로 인해 디아스 교의 성격인 바치카누스의 명령을 아교도 국가들이 듣지 않았다. 결국 바치카누스의 근위대와 디아스 교도 귀족, 기사, 농민들로 구성된 디아스 십자군 만이 성전을 개시하였다. 디아스 십자군메리디스 지방에만 긴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다른 국가들의 메리디스 강 남쪽은 내버려두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이며 돈 낭비였을 것이다.

마교도 군대는 오직 메리디스 지방에만 방어선이 구축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메리디스 지방의 건너편에는 소수의 군대만 배치하였고, 대부분의 군대를 메리디스 강 중류에 배치하였다. 또한 마교도들은 성전에 적극적이지 않은 아교도 국가에게 협정을 제안하였고, 마교도들은 투타멘에 대한 지배권 약속과 더불어 군사 통행권까지 얻어내었다. 야누멘시스, 모든 준비를 마친 마교도들은 반쯤 얼어있는 메리디스 강을 넘어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을 건넌지 며칠후, 그들은 메리디스 지방의 남쪽 건너편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메리디스 강 방어선에 배치해놓은 군대는 강을 넘어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군대가 그들을 막는데 투입되었다.

메리디스 지방 남쪽의 군대는 강을 넘었고, 곧 방어가 허술하던 메리디알리스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메리디아누스로 진격한다. 이를 안 세드 2세는 신교도 국가들의 배신에 치를 떨다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바치카누스 내에서는 큰 권력과 통솔력이 있는 그가 사망하자, 많은 자들이 도주를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바치카누스 내에서는 후계자 문제로 결투까지 벌어졌다. 그러다 메리디아누스에 마교도군이 도착하자 그들은 메리디아누스를 떠나기 시작하였고, 수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메리디알리스가 함략된지 5일만에 메리디아누스가 함략되고 메리디스 지방은 마교도들에게 점령당한다.

그들의 요구

메리디스 지방바치카누스가 파괴되자, 안테쿠르소르 왕조는 퇴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레젠티오 왕국은 이를 거부함과 동시에 안테쿠르소르 왕조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곧 메리디아 강을 건너 빠른 속도로 안데르-메리디스 평원을 지나 레고 성으로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안 안테쿠르소르 왕조레고 성의 방어를 준비하는 동안 만여명의 병력으로 이들에게 기습을 가하며 시간을 벌기로 하였다. 작전은 어느정도 성공하였고, 안테쿠르소르 왕조는 1만의 군대를 잃고 공격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제 1차 레고 공방전

PR.542년 페볼멘시스, 레젠티오 왕국의 군대는 레고 성을 포위하였다. 레고 성의 방어병력은 총 2만여명, 레젠티오 왕국군의 전력은 12만명으로 방어는 무척이나 불리하였다. 그러나 공격군은 3주만에 방어군을 성안으로 간신히 몰아내었고, 그사이 공격군은 수만의 피해를 입었고, 그에 비해 방어군은 4천의 피해를 입는다. 3주만에 성문 앞의 방어진을 돌파한 레젠티오 왕국군은 며칠간 휴식을 가지기로하여 경계가 약해졌고, 그 기회를 틈타 방어군은 밤에 기습을 감행하여 공격군에 더 큰 피해를 입힌다. PR.543년 마르멘시스, 기습이 이루어지던 밤, 공격군의 진형에서 큰 불길이 일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공격군의 진지를 집어삼켰고, 기습군은 불을 피해 도망가는 공격군들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총사령관도 포함되어있었다. 하루만에 군량과 총지휘관을 잃은 공격군은 무력해졌다. 그리고 결국 마르멘시스 9일, 4주도 체 안되서 포위는 해제되었다.

우릅스 방어선

레고 성의 견고한 방어를 뚫지 못한 마교도 연합군은 우릅스로 퇴각하였다. 그리고는 우릅스 성에서 방어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안테쿠르소르 왕조의 군대는 레고 성에서 나와 우릅스 성 앞에서 진을 쳤다. 그리곤 시간이 흘렀다. 우릅스 성의 방어로 인해 서쪽의 지역들을 점령하기 쉬워졌으며, 아플멘시스에는 우릅스 서쪽의 모든 지역이 점령당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안테쿠르소르 왕조의 남은 영토에서는 굶어죽는자들이 속출하였으며, 군대가 각 마을에 가서 농사를 짓는 지경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군 내에서는 전염병까지 돌아 5만여명의 군대는 2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때문에 방어선에는 단 7천명의 군대만이 남아있었고, 그에 비해 마교도 연합군은 수만의 군대가 대기중이였다.

시누스 전선

그러던 유니멘시스 11일, 수보르디노 왕조닐루스가 공격당한다. 이에 닐루스에 있던 200여명의 방어군이 마교도 연합군과 맞써 싸웠으나, 수만의 병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마을의 모든 사람은 전사하였으나 마교도 연합군은 고작 10명의 사상자가 전부였다. 그리곤 다음날인 12일에는 무니멘이 함략된다. 유니멘시스 19일, 레고 성 남부 근방에서 마교도 연합군의 군대가 나타난다. 그들의 수는 9만여명, 게다가 근처인 우릅스에는 8만명의 군대가 있었다. 그에 비해 방어군은 두군데 합쳐서 1만 3천명이였다.

제 2차 레고 공방전

유니멘시스 20일, 1만 1천명의 수비군이 모두 레고 성에 모였다. 공격군은 17만명, 성벽에서 내려다본 그들의 진은 방어군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안테쿠르소르 왕조수프레미타스 국왕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유니멘시스 22일, 공격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공격군의 피해가 더 심했으나, 전투 중반이 되니 비슷해졌다. 그리고 결국 공격 이틀후... 레고 성은 함략당한다. 방어군 1만 1천명과 도시주민 2천명은 전원 사망하였으며, 안테쿠르소르 왕조의 임시국왕과 두 왕자는 전사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그에 비해 공격군의 피해는 4천명의 전사였다.

시누스 해전

레고 성을 점령한뒤 마교도 연합군은 휴식을 취하였다. 가끔씩 시누스 호에서는 시누스 왕국의 공격이 있었다. 옥토멘시스 1일, 마교도 연합군이 한달간 만든 두대의 군함으로 시누스 호를 건너기로 한다. 두대의 군함에는 수백명의 군사가 승선하였다. 그들은 항해 몇시간 후 시누스 호의 중앙에서 엄청난 수의 함대를 만나게 된다. 시누스 왕국의 함대는 20여대의 군함과 80여대의 무장상선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곧이어 해전이 시작되었으나, 마교도 연합군의 군함은 백여대의 함선에 의해 엄청난 공격을 받고 결국 전투 2시간만에 두대 모두 침몰당한다. 이후 마교도 연합군은 시누스 왕국과 해군으로는 이길수 없음을 깨닳고 그들과 협상을 결정한다.

제 1차 레고 조약

PR.543년 노비멘시스 5일, 레고에서 협정이 이루어진다.

이 조약으로 신교도 국가는 오직 한국가, 시누스 왕국만이 남게 되었으며, 서부의 평야지역 모두를 마교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레젠티오 왕국메리디알리스를 넘겨주기 전 군대로 메리디알리스의 모든 성벽과 모든 성당, 모든 조각상을 파괴한뒤 반환하였다. 바치카누스의 중심이던 바치카누스 성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성당이 있던 자리는 모직 성당의 잔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또한 성당 지하의 역대 교황의 묘지역시 불에 타버려 대부분의 묘가 소실되었다. 결국 시누스 왕국메리디알리스를 자신들의 괴뢰국인 수보르디노 왕조에 넘겨 관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수보르디노 왕조메리디알리스를 재건하는데 엄청난 재정을 소모하였고, PR.558년에는 바치카누스 성당과 성벽을 제외하고는 모든 도시를 복구하였다.

제 4차 신교-마교 전쟁 이후

레그눔의 발견

PR.555년, 수부르디노 왕조의 탐험가들이 오카수스 마레 망망대해에 있는 작은 섬 하나를 발견한다. 이 섬을 발견한 탐험가는 상타리움 레그눔이였고, 그의 이름을 따 섬의 이름을 레그눔 섬으로 정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수부르디노 왕조는 어느누구에게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시누스 왕국도 이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PR.556년, 수부르디노 왕조바치카누스 성당을 재건하는 것을 중지하고 레그눔 섬상타리움바치카누스 성당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레그눔 섬으로의 이주가 계속되었고, 수부르디노 왕조의 왕자인 수부르디노 팔마 왕자는 상타리움에 정착하여 레그눔 섬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PR.558년에는 왕실의 다른 구성원들 또한 레그눔 섬으로 이주하였고, 수부르디노 왕조의 궁에는 오직 국왕만이 있었다. 메리디알리스에서는 거대 항구를 건설하여 시민 대부분을 태울수 있는 배를 향시 대기시켰다.

왕조의 교체

반란

PR.564년 두오멘시스, 시누스 왕국에서 해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수도인 시누스는 함대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으며, 궁궐과 시누스 성당 역시 피해를 입었다. 공격은 다음날까지 이루어졌다. 이후 해군은 시누스로 상륙을 하였고, 시누스의 외각부터 점령하기 시작한다. 두오멘시스 22일, 수병 대부분이 전투로 전사한다. 그러나 곧 인슐라에서 온 지원군에 의해 살아서 함대로 퇴각하였다. 지원군으로 온 루크룸 마누스 후작은 다음날, 시누스 성당을 점령하고 궁궐 앞까지 다다른다. 이에 푸로르 왕조의 국왕은 모든 왕실 구성원에게 무기를 들게하여 돌격시킴과 동시에 자신도 무장을 하여 반란군에게 돌격한다. 그러나 순식간에 왕실 구성원들은 목이 땅에 떨어졌고, 반란군이 권력을 장악한다.

밥그릇

두오멘시스 24일, 반란을 성공시킨 그들은 궁에서 새로운 왕가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가장 유력한 계승자는 루크룸 마누스 후작이였다. 그러나 두오멘시스 27일, 반란 사실을 안 수부르디노 왕조는 독립을 선포한다. 이에 루크룸 마누스 후작은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섬을 떠난다. 그러자 우수르포 카르니피카르틱스 백작이 수뇌부를 살해하고 우수르포 왕조를 건국한뒤 왕에 오른다. 루크룸 마누스 후작은 이 사실을 야누멘시스 2일에 알게되었고, 수부르디노 왕조와 휴전을 맺고 회군한다. 그러다 이들은 우수르포 왕조의 함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다 루크룸 마누스 후작은 전사한다. 해전에서 패배하자 루크룸 마누스 후작의 아들인 루크룸 엑스풀시오는 군대를 이끌고 테라를 공격한다.

두 왕조

야누멘시스 11일, 루크룸 엑스풀시오테라 성을 함략시켰고, 그와 함께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의 가족들을 전원 처형시킨다. 이를 안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은 모든 백성을 징집하여 바다를 건넌다. 야누멘시스 15일, 우수르포 왕조의 함대는 테라 앞바다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가차없이 공격을 진행하였다. 5시간 뒤, 우수르포 왕조의 군대는 상륙을 시도하였고, 곧이어 루크룸 엑스풀시오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강제징집된 우수르포 왕조의 군대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몇몇은 무기를 사용하지도 못하였다. 그럼에도 지휘관은 돌격을 명령하였고, 분노한 징집군은 하극상을 저지르고 투항한다. 그와 동시에 루크룸 엑스풀시오의 군대는 함선 몇대를 나포한다. 이후 야누멘시스 18일, 루크룸 엑스풀시오테라에서 루크룸 왕조를 선포하였고, 자신은 마누스 1세로 즉위한다.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의 가족들 두개골과 함께.

몰락

페볼멘시스 24일, 루크룸 왕조의 함대가 우수르포 왕조의 함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페볼멘시스 29일, 루크룸 왕조인슐라에 상륙을 성공시킨다. 하지만 인슐라에는 그 성인 남성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집에 있는 것이라곤 여성과 아이 뿐이였다. 마르멘시스 2일, 루크룸 왕조의 군대는 시누스에 당도하였고, 곧이어 남아있던 우수르포 왕조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 허나 우수르포 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패배하였고, 마누스 1세는 궁 안으로 진입하여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과 만난다. 허나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마누스 1세의 가족들을 그의 눈앞에서 살해하다 붙잡힌다. 이후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은 마르멘시스 8일, 능지처참당한다.

루크룸 왕조

PR.565년 마르멘시스 8일, 루크룸 왕조가 정식 건국된다. 카르니피카르틱스 국왕의 처형으로 건국식이 진행되었고, 마누스 1세시누스 왕국의 국왕이 된다. 이후 마누스 1세수부르디노 왕조와 공식적인 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레젠티오 왕국

레젠티오 대 스파티움

PR.581년 마이멘시스, 레젠티오 왕국스파티움 왕국비쿨루스 주변에서 분쟁이 이뤄진다. 이에 스파티움 왕국움보 근처에서 분쟁을 일으켰고, 두 국가는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른다. 그러던중 노비멘시스, 켄트룸에서 엘리스로 이동하던 상인무리가 도적에 의해 약탈을 받는다. 이로인해 상인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 이후 스파티움 왕국의 보초들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자 양국의 사이는 급속도로 나빠졌고, 이에 아이쿠름 왕국은 중재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아이쿠름 왕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적이 스파티움 왕국의 명령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레젠티오 왕국은 전쟁을 선포한다.

레젠티오-스파티움 전쟁
켄트룸 공성전

데카멘시스 21일, 켄트룸레젠티오 왕국의 군대가 당도한다. 공격군은 11만명, 방어군은 4만명이였다. 방어군은 성 밖 시가지에서부터 저항을 지속하였고, 데카멘시스 30일에서야 방어군을 성안으로 몰아넣는다. 허나 방어군은 매일 밤마다 기습을 진행하였고, 공격군의 피해가 날마다 늘어갔다. 게다가 사우멘시스 5일에는 공성무기까지 불에 타버려 전황이 불리해져갔다.

그러다 사우멘시스 19일, 방어군 내에서 의견충돌이 벌어진다. 다들 이 충돌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지휘관 중 하나가 군사를 이끌고 회의장을 급습하여 총지휘관과 자신을 반대하는 지휘관들을 모두 살해한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한 지휘관은 살아남아 성에서 도망친다. 이후 그는 공격군에 투항하여 켄트룸 성의 약점을 알려준다. 이후 사우멘시스 22일, 공격군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방어군은 공격군의 공격을 방어해내고 있을때 그들의 후방에서 화살이 날라와 그들에게 박히기 시작하였다. 결국 방어군은 양쪽에서 몰아닥치는 공격을 막지못하였고, 결국 켄트룸 성은 함략된다. 그리고 같은 날, 아우라 또한 함략된다.

비쿨루스 공성전

사우멘시스 26일, 비쿨루스에서도 공성전이 진행된다. 그러나 비쿨루스는 협곡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천하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공격군의 공격은 매번 공격군에게만 피해를 입혔다. 여러번의 공격 끝에 공격군은 비쿨루스 성을 함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공격을 중단한다. 그러나 군대를 물리지는 않았다. 때문에 방어군들은 항상 공격군을 보고 있었다.

두오멘시스 17일, 협곡 한쪽에서 레젠티오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들은 협곡 위에서 성을 향해 화살을 쏘았고, 방어군은 피해를 입는다. 겨우 공격이 줄어들었을때쯤, 평원에서도 레젠티오 왕국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이후 두오멘시스 19일, 세 방면의 공격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방어군은 세 방면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멸하게 된다.

아이쿠름의 참전

PR.582년 마르멘시스, 아이쿠름 왕국스파티움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아이쿠름 왕국은 빈 상태나 다름 없던 스파티움 성을 함략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레젠티오 왕국알테르 강까지 진군하였고, 알테르 강의 두 성을 공격하였다. 마르멘시스 28일, 바부스아이쿠름 왕국에게 함략당하고 만다. 이에 스파티움 왕국은 항복을 선언하였고, 스파티움 왕국은 멸망한다.

켄트룸 조약

PR.582년 아플멘시스 2일, 켄트룸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으로 알테르 강을 중심으로 아이쿠름 왕국레젠티오 왕국으로 나뉘어졌으며, 레젠티오 왕국레젠티오 제국을 선포하여 암바티오 4세는 황제의 작위에 오른다.

혈육 없는 명성

PR.601년 아플멘시스 7일, 레젠티오 제국암바티오 5세가 서거한다. 암바티오 5세는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하였고, 인테펜덴스 가문의 다른 이가 황제가 되어야 됐었다. 이에 인데펜덴스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를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암바티오 1세의 직계가 되어야 한다느니, 암바티오 4세의 동생의 직계가 되어야 한다느니... 이후 아플멘시스 22일, 후계자는 3명으로 좁혀졌다. 암바티오 1세의 3세손인 인테펜덴스 암바오암바티오 3세의 2세손의 인테펜덴스 프레리움, 암바티오 4세의 서자의 아들인 인테펜덴스 스푸리우스였다. 이후 이 3명의 후계자들을 놓고 각 지지자들이 유혈사태까지 일으키게 되어 결국 마교까지 참견하게 된다. 메지스타네스(교황)은 신앙심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정하기로 압박하였고, 결국 인테펜덴스 스푸리우스가 작위를 받는다. 이후 아플멘시스 28일, 인테펜덴스 스푸리우스스푸리우스 1세로 즉위한다.

명성 없는 혈육

스푸리우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그가 서자라는 것과 메지스타네스가 개입하였다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은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게다가 귀족들마저 스푸리우스 1세를 섬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스푸리우스 1세는 귀족들의 영지를 뺏기를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그의 지지자들을 잃게된다. 이후 스푸리우스 1세는 꼭두각시가 되었고, 많은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잡기위해 힘을 썼다. 이에 민심은 점점 나빠졌고, 백성의 주머니는 공기만 가득하게 되었다.

혈육 없는 권력

PR.612년, 또다시 권력자가 바뀌었다. 610년부터 권력을 잡아왔던 녹사 가문이 물러나고 알터 가문이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알터 가문은 수도를 켄트룸으로 옮기고 알테르 지방공작령 알테르를 만들고선 자신들이 공작령 알테르의 지배자가 된다. 그들은 국고를 빼돌려 공작령 알테르에 투자하였으며, 자신들의 쾌락에도 사용하였다. 또한 꼭두각시인 스푸리우스 1세도 국고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하였다. 이후 국가 중요 관직 대부분에는 알터 가문의 사람들이 임명되었고, 심지어 군대의 지휘관도 알터 가문이 겸하게 되었다.

반란

PR.627년, 스푸리우스 1세가 서거하고 스푸리우스 2세가 즉위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서는 손을 놓고 오직 사치와 향락에만 눈을 돌렸다. 게다가 매일 밤마다 연회를 벌이고 사냥을 하니 국고는 며칠에 한번씩 비게되었고, 며칠에 한번씩 징수가 이루어졌다. 결국 백성들의 생활은 더더욱 피폐해져갔으며, 기근까지 겹쳐 엄청난 수의 백성이 아사하게 된다. 결국 참다못한 농민들은 PR.631년, 반란을 일으키게된다. 하지만 군대는 이를 막지 못하고 번번히 패배하였고, 봉기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귀족의 반란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각 지방의 귀족들은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결국 한해동안 20여명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서로간의 협상과 전쟁을 통하여 그 수를 줄여나갔다. 최후에는 안데르-메리디스 평원, 메리디스, 메리디스-노비타스 평원, 카부스-시누스 평지, 그리고 비쿨루스 협곡 주변에 큰 반란군이 남게되었다. 이들은 서로간 평화조약을 맺고 오직 레젠티오 제국에 반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제국의 해체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자 레젠티오 제국은 부랴부랴 군대에 돈을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알터 가문은 자신들의 군대를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PR.634년, 안데르-메리디스 평원의 반란군은 토벌된다. 그러나 레젠티오 제국은 반란을 토벌하는 것을 중지하고 반란군과 협상에 들어갔다. 여러번의 조약을 통해 레젠티오 제국은 해체되었고, 그 뒤를 레젠티오 왕국이 잇게 된다.

호라 조약

호라 조약메리디스 평원에 있던 반란군과 레젠티오 제국간 체결된 평화조약이다.

우릅스 조약

우릅스 조약메리디스-노비타스 평원에 있던 반란군과 레젠티오 제국간 체결된 평화조약이다.

제 2차 레고 조약

제 2차 레고 조약레젠티오 제국과 반란군간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제 1차 레고 조약과는 관계가 없다.

비쿨루스 조약

비쿨루스 조약비쿨루스 지역에 있던 반란군과 레젠티오 제국간 체결된 조약으로 레젠티오 제국이 완벽하게 해체된 조약이다.

이 조약 이후 레젠티오 제국은 해체되어 레젠티오 왕국이 되게 된다.

고통의 승자

PR.375년의 오카수스 조약 이후 수많은 국가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300여년이 지난 PR.649년, 과거 오카수스 왕국의 영토에는 4개의 국가가 들어서 있었다. 리멘 강 주변의 리멘 왕국과, 오카수스 산오카수스-셰룸 왕국, 그리고 오카수스 마레의 해안선에 위치한 셰룸 왕국이 있었다. 이들은 지난 PR.620년 이후로 휴전협정을 맺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전쟁

사신 피살 사건

PR.649년 메카멘시스 11일, 오카수스-셰륨 왕국의 사신이 리멘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리멘 강을 건너고 있을 무렵, 수십발에 달하는 화살이 그에게 날아온다. 이후 그 사신은 화살을 맞고는 리멘 강으로 떠내려 갔다. 이를 본 리멘 왕국의 수비대는 당황하며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리멘 강을 건너 남부로 내려간 수색대는 실종되었고, 리멘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한 수색대 또한 습격을 받았다.

여파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사신이 피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 국가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각 국가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메카멘시스 29일, 각 국가의 대표들은 리멘으로 집합한다. 회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화살이 날라와 리멘 왕국의 대표를 제외한 대표들이 피살되었고, 세 국가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결국 사우멘시스 3일, 오카수스-셰룸 왕국리멘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그런데 5일에 셰룸 왕국은 오히려 오카수스-셰룸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대 오카수스-셰룸 전쟁
리멘 돌격

사우멘시스 4일,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군대가 리멘 강에 속속히 집결한다. 총 집결한 군대의 수는 총 7만명, 그에비해 리멘 강의 수비병력은 3만명 정도였다. 사우멘시스 5일, 7만의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군대는 리멘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곧 3만의 수비병력은 패주하여 리멘 성으로 후퇴하였고, 강을 넘은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6만 군대는 진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갑자기 셰룸 왕국의 5만 군대가 이들을 공격하였고, 무장해제 상태던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군대는 2천의 기사를 잃었다. 그리고 이중에는 왕족과 지휘관도 포함되어있었다.

뒷통수 치기

사우멘시스 6일, 리멘 강에 있던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6만의 군대는 셰룸 왕국이 전쟁을 선포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들은 재빨리 군대를 나누어 후방으로 군대를 재배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셰룸 왕국이 더 빨랐다. 튀레에 있던 2만의 군대는 이미 몬스까지 다다랐으며, 프로눔에도 3만의 군대가, 그리고 리멘 강에서 오카수스로 향하는 길 마저 3만의 군대가 점령한다. 또한 강을 넘었던 오카수스-셰룸 와국의 6만의 군대는 리멘 왕국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고립되었다.

오카수스 산

오카수스 산에서는 오카수스-셰룸 왕국의 4만 군대와 셰룸 왕국의 8만의 군대가 대치중이였다. 오카수스-셰룸 왕국은 모든 방향에서 오는 군대를 막아야하였으며, 과거 오카수스 왕국이 건설했던 오카수스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건은 쉽지 않았고, 인부가 부족하여 병사들은 시간이 날때마다 몇명씩 건설에 동원되었다. 또한 밤마다 셰룸 왕국은 기습을 개시하여 성벽의 일부를 무너트리는 등 많은 방해가 있었다. 그러나 야누멘시스 18일, 두달여간의 저항으로 결국 오카수스 성벽을 재건하는데 성공하였고, 오카수스-셰룸 왕국은 더 안전하게 공격을 방어할수 있었다. 그러나 두달여동안 4만의 군대중 2만명이 전사하였고, 전투가능 인력은 고작 1만 2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셰룸 왕국 또한 꽤나 큰 피해를 입어 3만명이 전사한다.

농성

오카수스 성벽이 재건된 이후로 오카수스-셰룸 왕국오카수스 산을 안정적이게 방어해낼수 있었다. 그리고 오카수스-셰룸 왕국은 농민들을 징집하여 병력 구멍을 채웠다. 또한 셰룸 왕국은 진을 산 아래로 이동하였다.

배신

PR.650년 마르멘시스 5일, 리멘 강셰룸 왕국의 4만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첸 리멘 왕국은 강가의 수비병력을 모두 성안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그때, 셰룸 왕국의 4만 군대가 리멘 강을 넘어 그들에게로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기습을 받은 수비병력들은 저항한번 못하고 대부분이 죽었고, 열려있던 문으로 셰룸 왕국의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성 밖의 군대또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곧 성문이 다시열리게 된다. 성문으로 셰룸 왕국의 군대가 몰아쳤고, 성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성안은 불바다가 되었고, 궁궐이 공격당해 궁 안의 모든 이가 살해된다. 다음날, 리멘 왕국은 항복하였고, 리멘 조약으로 인해 합병당한다.

내부발열

마르멘시스 13일, 오카수스 산을 둘러싸는 병력이 많아진다. 그러다 마르멘시스 19일, 오카수스 성벽 내부 프로눔 성이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 불은 한밤중에 안채에서 발생하였고, 불은 내성을 불태우고 소화되었다. 이 화재로 인해 안채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사망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는 남부의 군을 총지휘하는 지휘관들도 포함되어잇었고, 내성에 있던 경비병 전원이 사망한다. 이로 인해 남부의 수비군은 혼란에 빠졌고, 오카수스에서는 사령관을 임명하는데에 대해 국왕파와 귀족파, 군부가 끊임없이 다툼을 반복하였다. 결국 마르멘시스 24일, 여전히 혼란속이던 프로눔 주변의 성벽으로 셰룸 왕국의 군대가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패닉에 빠진 수비병들은 탈영을 하거나 항복하였다. 결국 프로눔 성도 점령되었고, 성벽은 있으나마나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불의 산

프로눔 성 부근이 뚫리자 수뇌부들은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들은 제빨리 남부의 수비군을 모두 동부와 서부의 수비군에 배치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은 남부수비군이 몇명인지도 몰랐을 뿐더러 이는 남부의 독자적인 수비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원할한 행동이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오카수스-셰룸 왕국이 시간을 지체하고 있던 동안 셰룸 왕국의 군대 대부분은 남부로 이동하였고, 몇몇의 군대가 3방향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마르멘시스 24일에는 동부의 성벽이 파괴되며, 25일에는 북부의 성벽이 파괴되 몬스가 함략당한다. 26일에는 오카수스 성셰룸 왕국의 군대가 당도한다. 수도까지 적군이 당도한것을 안 농민들은 귀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행위에 징집되었던 농민들까지 가세하여 오카수스는 혼란에 빠진다. 마르멘시스 28일, 셰룸 왕국의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전투는 수십분만에 종결, 오카수스 시내로 들어온 셰룸 왕국의 군대는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고, 궁을 제외한 오카수스 성은 불에 휩싸인다. 적군이 성 안으로 들어온것을 보고받은 왕족과 귀족들은 서둘러 탈출을 준비하였으나, 발각되어 사지가 갈갈히 찢긴다. 결국 오카수스는 불바다가 되어 삼일간 타오른다.

잿더미

아플멘시스 1일, 오카수스를 집어삼켰던 불길은 소화되었다. 오카수스의 건물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궁궐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또한 땅에서는 그을린 해골이 돌아다녔으며, 왕족과 귀족은 성벽 뒤에 사지가 찢긴채로 걸려있었다. 아플멘시스 3일, 셰룸 왕국의 국왕, 세로 국왕은 과거 오카수스 왕국을 통일함을 선언하였다. 또한 셰룸 왕국의 국호를 '셰룸 신성 연방 왕국'으로 선언하였고, 자신이 초대 렉스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는 자신을 워카티오 1세로 선언하였고, 수도를 오카수스로 선언한다.

레그눔 왕국

기밀문서들

PR.681년, 수부르디노 왕조의 국왕인 레푸지오 국왕이 서거한다. 그러나 그의 시신이 담긴 관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며, 다음날에는 궁궐 문서실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이 화재로 인해 온갖 문서들이 재가 되었고, 특히 레그눔 섬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소실되었다. 또한 그 다음날은 레그눔 섬으로 이주하지 않은 상타리움 가문 구성원들이 살해되고 실종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주변에 있던 기사와 귀족들의 가문 구성원들마저 실종된다.

동군연합

수부르디노 왕조의 대가 의문스럽게 끊어지자, 많은 귀족들은 의문점을 찾는 것이 아닌 왕위를 얻기위해 권력다툼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일개 귀족들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을 이길수 없었고, 결국 시누스 왕국의 국왕이자 루크룸 가문마누스 2세가 왕위를 잊는다. 그리고 결국 시누스-캉케르 동군연합이 선포된다.

의문점

시누스 왕국캉케르 왕국의 국왕이 된 마누스 2세는 즉위 이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시켜 미스터리한 사건을 조사하는 것을 명한다. 그러나 조사가 시작된지 일주일도 안된 PR.682년 옥토멘시스 14일, 한 신하가 메리디알리스에서 사망한체로 발견된다. 그의 피부에는 수 많은 문자가 쓰여있었으며, 시체가 부패하면서 피부가 썩어 옥토멘시스 23일에 문자들을 해석한다. 그 내용은 '왕위를 잃기 싫다면 조사를 그만하라!('""'"'"")'였다. 그러나 마누스 2세는 조사를 계속하였고, 결국 PR.682년 노비멘시스 17일, 마누스 2세의 침실에 자객이 들어 그를 암살하였다.

무소식의 메리디알리스

PR.682년 노비멘시스 20일에 마누스 3세가 즉위한다. 그는 조사를 그만두었고, 암살자를 찾는데 힘을 기우렸다. 결국 PR.684년 유니멘시스 6일, 암살자와 주동자가 붙잡힌다. 그러나 그들은 감옥에서 혀를 깨물어 자살하였고, 마누스 3세는 결국 아무정보도 얻지 못하였다. PR.686년, 마누스 3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는다. 동군연합이 결성된 이후 세금의 20%가 줄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누스 3세는 과세 자료를 찾아본다. 그러나 동군엽합 이전의 과세 자료는 PR.681년에 소실되었고, 그 이후의 자료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어쩔수 없이 동군연합 이후의 과세 자료를 찾아본 결과 과세 자료에서는 메리디알리스가 빠져있었다. 그는 이사실을 알고나서 다른 자료를 찾아본 결과 메리디알리스로 향한 모든 이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PR.688년과 691년에 메리디알리스로 상인으로 위장한 신하를 보냈으나, 두번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결국 마누스 3세는 조사를 완전하게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제 5차 신교-마교 전쟁

전조

PR.700년 메카멘시스, 메리디알리스메리디스 왕국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였다. 그러나 메리디알리스에는 단 한명의 주민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도시는 텅 비어있었다. 마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도시만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메리디알리스에 무혈입성한 메리디스 왕국은 도시의 소유국인 시누스-캉케르 동군연합에게 소유권을 주장하는 문서를 보낸다. 그러나 메리디스 왕국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순순히 도시를 내주었다. 결국 메리디스 왕국은 의문점을 가지고 도시를 합병하고 수도로 선언하였다.

메리디스 왕국메리디알리스를 무혈점령하자 이 사실을 들은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은 전쟁을 준비한다. 700년 두오멘시스, 시누스-캉케르 동군연합의 국경에는 십만명에 달하는 군대가 모이게 된다. 그리고 PR.701년 마르멘시스,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시누스-캉케르 동군연합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마지막 전쟁

마지막 육지

PR.701년 마르멘시스 13일, 카부스 왕국의 6만 군대가 시누스 강을 넘어 테라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시누스 왕국은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전투 1달만에 승리를 거뭐진다. 그러나 마르멘시스 15일에는 우릅스에서 넘어온 레우티오 왕국의 4만 군대에게 닐루스를 빼앗기고 18일에는 무니멘을, 26일에는 디스크리멘을 빼앗긴다.

PR.701년 아플멘시스 8일,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의 13만 군대가 테라를 포위한다. 그에 비해 테라에는 2만의 군대만이 방어를 준비중이였다. 아플멘시스 8일, 공격 준비를 마친 13만명의 군대가 테라로 공세를 가한다. 그러나 시누스 왕국의 군대는 방어준비를 마치지 못하였으며, 항구에 정박중이던 함대는 모두 수리중이였다. 시누스 왕국은 최선을 다해서 13만명의 군대에게 저항하였으나, 아플멘시스 13일에 전멸한다. 이후 테라를 점령한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은 수리중이던 함대를 발견하고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한다.

마지막 해군

아플멘시스 18일, 테라 항구에 정박중이던 11척의 함선이 수리를 완료하였고, 5일간 제작한 8척의 무장함선을 함선과 같이 바다에 띄운다. 이후 아플멘시스 19일,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의 군대가 탄 함선은 8척의 함선과 21대의 무장상선과 마주친다. 해전은 즉각 이루어졌고, 해전이 시작한뒤 얼마되지 않아 시누스 왕국의 함선 한척이 침몰하였고, 곧이어 3척의 함선이 대파, 1척의 함선이 나포된다. 그리고 해전 7시간째에 시누스 왕국은 함선 7척 모두 잃어버렸으며, 무장상선도 18척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시누스 왕국은 후퇴하지 않았고, 엄청난 수적,질적 우세로 인해 살아남은 3척의 무장상선은 30분도 안되서 침몰한다.

마지막 국왕

아플멘시스 20일,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의 6척의 함선과 2척의 무장상선이 시누스 앞바다에 나타난다. 그들은 하루동안 시누스에 공격을 지속했으며, 이로인해 시누스에 있던 2만명의 수비병력은 8천명으로 줄어들고, 궁궐은 큰 피해를 입음과 동시에 왕태자가 사망한다. 다음날, 카부스 왕국레우티오 왕국시누스에 상륙을 하였고, 시누스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누스 왕국마누스 3세는 무장을 하고 전쟁터로 뛰어들었고, 곧이어 포로로 잡힌다. 그럼에도 그는 협정을 거부하였고, 결국 임시 왕태자인 루크룸 킴베리우스가 대신 협정에 도장을 찍는다.

시누스 조약

PR.701년 아플멘시스 22일, 시누스 왕국의 수도 시누스시누스 궁에서 신교의 마지막 협정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륙의 신교도 국가는 모두 사라졌으며, 대륙에서 신교의 흔적을 볼수 없게 되었다. 또한, 루크룸 가문은 사라졌으며, 루크룸 가문의 사람은 마교로 개종을 해야했다. 이 조약은 마교신교의 전쟁에서 신교가 패배함을 알려주었다.

제 5차 신-마 전쟁 이후

마교의 분열

유물

PR.712년, 과거 바치카누스 성당의 지하실 창고에서 한 문서가 발견된다. 그 문서는 과거 신교를 분열로 고통받게한 시발점이였다. 이를 발견한 학자는 그 두루마리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그는 그 사실을 까먹은체 일을 종료하였고, 그가 집으로 갈때 두루마리는 길바닥에 버려지게 된다. 그 후 몇시간뒤, 누군가가 이 두루마리를 보고 놀란체로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리곤 다음날엔 이 두루마리가 복사되어 메리디아누스 여기저기에 걸린다.

논제

메리디아누스 여기저기에 걸린 두루마리는 '논제'라는 이름으로 걸렸으며,[2] 이를 삽시간에 메리디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주일뒤, 이 사실을 교회가 알게 되었고, 즉각 기사단을 이용해 주동자를 체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레우티오까지도 퍼져나간 뒤였다. 그리고 점점 이 논제를 받아들이는 귀족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는 오직 메리디스 강 이남뿐이였고, 메리디스 강 이북으로는 레젠티오의 강한 탄압으로 뻗어나가지 못하였다.

충돌

PR.715년, 논제로 인해 마교에서 칼비스 교가 탄생한다. 이 칼비스 교는 순식간에 세력이 커졌고, 메리디스 강 남부의 국가들은 칼비스 교를 믿는 신도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칼비스 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신도의 수가 칼루스 교의 신도보다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권력이 줄어들것을 우려한 팔리스폰티피치우스칼루스 교 신도들을 꼬드겨 칼비스 교를 공격하게 한다. 또한 메리디스 강 이북의 칼루스 교를 믿는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PR.716년 옥토멘시스 11일, 메리디아누스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발생한다. 이 폭동은 칼루스 교의 신도들이 일으켰으며, 폭동에 폰티피치우스의 근위대가 참여하였다. 칼비스 교는 이 폭동에 분노하여 무기를 들고 폭도를 공격하였으며, 서로간 학살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 학살극은 옥토멘시스 26일에 메리디스의 기사단에 의해 제압되었으며,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끝이난다. 이 학살극으로 칼비스 교 신도는 7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칼루스 교 신도는 4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폭동으로 폰티피치우스칼루스 교에 거부감이 생긴 메리디스도미노스 1세칼비스 교를 공식적으로 국교로 선언한다.

도미노

메리디스칼비스 교를 공식적으로 국교로 선언하자, 주변의 다른 국가들도 칼비스 교를 국교로 선언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폰티피치우스를 대신하는 페트리메리디아누스에 세운다. 이로인해 칼비스 교를 믿는 국가들에서 폰티피치우스페트리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고, 렉스가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카부스 왕국

왕국의 전복

PR.729년, 칼비스 교를 믿는 신도들이 플루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기사단이 플루멘으로 떠난 사이, 레나스켄티아 노비티우스 자작이 군대를 이끌고 카부스 궁을 점령한다. 이후 그는 카부스 왕조의 왕족들을 살해하였다. 이후 플루멘에서 돌아오던 기사단을 격퇴하고 노바투스를 건국한다. 그러나 그는 PR.732년에 암살당하였고, 노비티우스 2세가 왕위에 오른다. 허나 PR.735년에 노비티우스 2세는 자식 하나 없이 병으로 사망하였고, 노비티우스 2세의 형제들은 왕위다툼을 시작한다.

왕위다툼

노비티우스 2세의 형제들은 돈을 이용하여 폰티피치우스의 사제들과 신하들을 매수하여 세력을 늘려갔다. 그러다 넷째인 레나스켄티아 위스백작령 플루멘을 소유하고 있던 플루멘 쿠라 백작과 손을 잡고 군대를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여 노비티우스 3세로 즉위한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그의 추종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한다. 그러던중 셋째인 레나스켄티아 바풀로는 도주에 성공하여 시누스로 도망친다.

후환

PR.736년에 즉위한 노비티우스 3세는 PR.739년에 아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또한 왕위다툼에 휩사였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레나스켄티아 바풀로의 아들인 레나스켄티아 포스테리우스는 지지자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카부스로 쳐들어간다. 그들은 행군중 공작령 레고콩레수스 코나멘 공작을 만나 같이 카부스 진격한다. 그러나 노비티우스 3세의 아들들은 계속해서 싸웠고, 결국 PR.737년 유니멘시스 21일, 레나스켄티아 포스테리우스의 군대는 카부스를 공격한다. 그러나 카부스를 방어하던 방어군들은 항복함과 동시에 성문을 열었고, 레나스켄티아 포스테리우스카부스 궁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노비티우스 3세의 아들들과 그 추종자들을 처형하고, 노비티우스 3세의 무덤을 도굴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레나스켄티아 포스테리우스는 PR.737년 유니멘시스 25일에 즉위한다.(포스테리우스 1세)

신계념

머스킷
서쪽에서 온 이방인

PR.792년, 팔메에 한척의 난파된 범선이 나타난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그들의 허리춤에는 한손검과 나무작대기가 걸려있었다. 이후 이들을 기사단이 발견을 하고 그들을 궁궐로 데려간다.

궁으로 간 그들은 왕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였으나, 왕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그들이 온 나라의 이름이 '이스니아'라는 것과 그들이 들고 있던 나무작대기가 '머스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방인들은 왕과 신하들이 '머스킷'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시범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왕과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머스킷'의 화력을 보여주었다. 이 '머스킷'이라는 무기의 실체를 알게되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그들은 이방인으로부터 '머스킷'의 제작과 사용방법을 전수받기 시작하였다.

이스니아의 기술

PR.796년, 이방인들은 4년간 '머스킷'에 대해 전수하고는 왕에게 받은 범선으로 다시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후 레그눔의 지원을 받은 데쿠스 가문데쿠스 아우구스투스는 '머스킷병'을 포함하는 아우구스투스 기사단을 창설한다. 또한 그는 상타리움 무기고을 건설하고 '머스킷'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머스킷의 발전

PR.812년, 이스니아에서 전수받은 '메치락 머스킷'은 한단계 발전을 거듭하여 부싯돌과 휠을 이용하는 '휠락 머스킷'으로 발전한다. 또한 PR.825년에는 '플린트락 머스킷'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플린트락 머스킷'이 생겼을 무렵, 총열에 강선을 세긴 '라이플'도 등장한다.

경기병
레그눔의 흉갑기병

이방인이 레그눔에서 '머스킷'에 대한 기술을 알려주고 있을 때, 그들은 '흉갑기병'이라는 계념을 알려준다. 하지만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병들이 주가 되던 시대에는 이해할수 없던 계념이였다. 그러나 PR.811년, 라트룸 가문라트룸 용병단을 '흉갑기병'을 중심으로 창설한다. 이 모습을 본 디누스 교는 자신들의 기사단인 테오타스 기사단의 기병들을 '흉갑'만으로 무장시킨다. 이에 레그눔은 1개의 중장기병 기사단과 1개의 흉갑기병 기사단을 소유하게 되었다.

칼비스 교의 경기병

PR.829년, 메리디스에 방어범위를 줄인 '쓰리쿼터 아머'가 등장한다. '쓰리쿼터 아머'는 다리부분을 방어하지 않은 갑옷이다. 그리고 곧 '쓰리쿼터 아머'를 입은 기병이 중심이 되는 루멘 기사단을 창설한다. 이를 본 다른 국가들도 중장기병 대신 '쓰리쿼터 아머'를 입은 경기병 기사단을 창설한다. 그러나 이는 칼비스 교 한정이였고, 칼루스 교는 여전히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중장기병이 중심이 되었다.

700년의 시간

속 썩은 거목

PR.820년대, 아이쿠름 왕국은 부정부패가 막연해지고 있었다. 또한 국왕은 사치와 향략을 쫒으며 부정부패를 부추기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국왕이 정치를 손에서 놓자 영주들은 권력을 잡기위해 매일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혼란의 몫은 결국 백성의 몫이였고, 점차 생활은 피폐해졌고, 기근까지 들어 농노와 평민이 큰 피해를 입는다.

민중의 편

한창 권력다툼이 지속되고 있을 무렵, 아이쿠름 왕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 있었다. 그곳의 영주는 크레푸스 쿨룸 자작이였으며, 크레푸스쿨룸을 영지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 두 도시는 무척이나 평화로웠으며, 이 영지의 농노들도 그나마 괜찮은 삶을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크레푸스 쿨룸 자작은 많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는 다른 귀족들(자작)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인다.

민중의 창

PR.828년, 크레푸스 쿨룸 자작이 다른 귀족에게 암살당한다. 그의 아들인 크레푸스 콤피니움는 암살의 배후가 당시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스파티움 가문임을 알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아이쿠름 왕국은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려하였으나, 그들의 군대는 훈련도 부족했을 뿐더러 장비도 좋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의 군대는 투항하였고, 며칠만에 아이쿠름 성이 함략된다.

베페루티노

아이쿠름 성을 함략시킨 크레푸스 콤피니움 자작은 당시 국왕인 포스트레무스 국왕을 죽이고 크레푸스 왕조을 선포하고 크레푸스 1세로 즉위한다. 또한 PR.831년엔 아이쿠름 왕국의 멸망을 선언하고 3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진 베페루티노 연합을 선포한다.

지리

지형

보통 페르마티오라고 한다면 세계 전체지만, 사실상 라브룸 산맥 서쪽에 있는 대륙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페르마티오오카수스 마레, 즉 서해는 낮고, 라브룸 산맥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진다.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부의 라브룸 산맥과 그 지류들에 대부분이 몰려있다. 라브룸 산맥은 개척된 페르마티오와 미개척된 페르마티오를 나누는 기준이다. 이 라브룸 산맥의 지류로는 카부스-시누스 평원을 감싸는 레고 산맥과 북쪽의 데모니움 산라브룸 산맥을 잇는 보레아스 산맥있다. 서쪽에도 평지 가운데 작은 산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오카수스 산, 스파티움 산, 시온 산, 엘리스 산이 그 예다. 이중 오카수스 산은 이런 종류의 산중 가장 높다.

하천은 대부분이 동쪽의 라브눔 산맥과 그 지류에서 시작하여 오카수스 마레까지 흐르며, 몇몇은 레고 산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갔다 오카수스 마레로 가거나 아예 대륙에 갖혀 호수를 형성한다. 서쪽으로 간 하천은 하류, 특히 바닷가에서 세갈래로 나눠져 삼각주가 되거나 아예 네갈래로 나눠지는 곳도 있다. 몇몇 하천은 하류에서 두갈래로 나뉘어 거대한 섬을 형성하기도한다. 이 섬들의 대부분은 평지이며, 알테르 지방만이 중부에 시온 산이 있을 뿐이다.

레그눔 섬오카수스 마레에 홀로 있으며, 대륙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며, 알고 있는 사람또한 레그눔의 스파이거나, 베페루티누메리디스의 고위층일 뿐이다. 레그눔 섬에는 유일한 신교도 국가인 레그눔이 자리잡고 있으며, 섬 중앙에는 남북으로 긴 레그눔 산이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자원

철광석은 대부분의 산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중 오카수스 산, 데모니움 산이 유독 많기로 유명하다. 때문에 이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마교도 국가들은 훌륭한 철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중장기병 중심으로 들어났다. 이 철기술 때문에 정교한 예술품은 물론이고 날카로운 무기나, 가벼우며 단단한 중갑옷 또한 제작할수 있었다.

레고 산에는 철광석보다는 은광석이나 금광석이 많아 과거 신교도 국가들이 금은을 이용한 금속 공예 기술이 뛰어났다. 이 정교한 공예품들의 대부분은 교회나 왕궁으로 흘러들어갔다. 몇몇 왕조는 금속 세공사들을 궁내에서 작업하도록 하였다. 때문에 금속 세공사라는 직종이 인기있었고, 마교도들이 신교도들을 몰아낸 이후에도 이들의 직위는 존중받았다.

시온 산에는 구리가 많았다. 때문에 알테르 지방의 신교도 국가는 청동을 이용한 경보병들을 주로 양성하였다. 그러나 알테르 지방이 마교도에게 점령당하면서 시온 산의 구리는 방치되었고, 현재까지도 꽤나 많은 구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레그눔 산의 북부에는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고, 중부에는 황이 주로 나온다. 때문에 남부 해안가에서 나오는 염을 이용해서 흑색화약을 만든다. 또한 레그눔 산 남부의 숯의 질이 무척이나 좋아서 좋은 화약을 만들때 사용한다.

라브눔 산맥과 그 지류에서는 많은 석탄이 나와서 석탄광산이 무척이나 많은 편이다.

각주


  1. 알테르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이 신교도 학살로 인해 모조리 죽어버렸다
  2. 신성 논제 중 '신성'글자가 적힌 부분은 소실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