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의 역사


앙골라는 아프리카에 위치한 콩고 문명에 근간을 둔 국가이다.
400년 가까이 지속된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는 앙골라 문명을 쇠퇴시키고 원주민들을 우민화하였다.
앙골라의 역사는 곧 현대사이다. 1966년 독립 이후, 앙골라는 석유산업과 제조업을 바탕으로 눈부신 고성장을 보여주었다.
현재 앙골라는 세계 최상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미국 / 소련과 더불어 세계를 삼분하는 초강대국 이며 자국을 제외한 전 아프리카 경제력의 90% 가량을 통제 중이다.

개요

앙골라는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포르투갈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통하여 1965년에 독립한 국가이다. 전쟁 직후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통하여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1대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나 이에 불응한 MPLA(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소속 조나스 사빔비가 군을 이끌고 반기를 들어 1966년 내전을 개전, 1971년 사빔비가 이끌던 UNITA(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이 승리하여 건국된 국가이다. 이후 몇 번의 헌법 개정을 통하여 현대의 앙골라 공화국의 모습이 형성된다.

건국 이전

선사시대


루안다, 콩고, 나미브 지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으로 보아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최초로 이 지역에 정착한 이들은 산족(San People)들이었으나 이후 기원후 6세기경, 제철기술, 토기제작기술, 농업기술을 가지고 있던 반투족들이 산족을 밀어내고 주류가 된다. 콩고 왕국은 현재의 앙골라 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최강의 콩고국 중 하나였던 음반자 콩고의 음반자는 현재도 존재하는 도시이며 자이르 주의 주도이다. 이후 디오고 캉(Diego Cão) 등등 포르투갈인 탐험가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인은 종교를 전파, 콩고 왕국은 상아, 노예 등을 제공/거래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배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역사는 탐험가 파울로 지아스 지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가 100명의 포르투갈인, 400명의 군인들과 함께 현 루안다 지역에 캠프를 설치하며 시작되었다. 잠깐의 네덜란드 지배기를 제외하면 이후 포르투갈 왕국이 계속 통치하였다. 근 몇백년간 변방에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하지 않은 식민지였으나 열강들과의 힘겨루기에서 패배, 브라질의 독립 등등 악재가 계속 겹치자 왕국은 내륙 진출을 결정하였고 베를린 조약으로 국경을 확정짓게 되었다. 엄청나게 풍부한 귀금속을 바탕으로 포르투갈은 현지인들을 착취하며 자원개발을 진행하였으며 이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이스타두 노부 (Estado Novo) 독재기간에도 지속되었다. 3F 정책을 비롯한 우민화 정책을 진행시키며 본토 문맹률이 40%던 당시 포르투갈의 특성상 앙골라 역시 교육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럼에도 2차대전기부터 50년대까지 포르투갈의 인프라 개발 하에, 루안다는 큰 인구/경제적 성장을 이룬다.

앙골라 독립전쟁

레오폴드빌 콩고에서의 내전 준비
▶ 50년대 레오폴드빌 콩고 요주의 인물들

(시계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 조세프 카사부부, 모부투 세세 세코, 모이스 촘베, 파트리스 루뭄바)


FNLA, MPLA 등등 다양한 이념을 지닌 독립파 세력들은 앙골라에서의 내전을 몇년 전 부터 준비중이었다. 당시 독립세력들은 전부 친서방 세력이 통치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現 콩고민주공화국) 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3파 이상으로 갈려졌던 콩고 내부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당시 콩고의 대통령이었던 조제프 카사부부는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키부 주에서는 공산주의 반군인 '심바 반군', 남쪽에서는 모이스 촘베가 이끄는 분리독립 세력인 카탕카국과의 전쟁을 진행중이었는데 좌익 계열 MPLA 등의 앙골라 독립 반군도 사실상 독립을 위해 이념에 상관없이 카사부부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독립파 세력들은 비교적 안전했던 킨샤사 근처 후방에서 외부세력의 사보타주 없이 내전을 준비 할 수 있었다. 내전 3개월 전, 레오폴드빌 콩고의 카사부부 대통령을 암살하고 집권한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는 킨샤사 주변 치안 안정화를 도왔던 MPLA 등의 좌익 계열을 포함한 모든 앙골라 반군들에게 자이르 영토에서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당시 아프리카 내에서의 코메콘 세력 확장을 도모하던 소련 역시 이들을 지원한다.

독립세력 내 주요 파벌

FNLA

▶ FNLA의 당기

부족단위 독립을 지지하던 저항운동이었던 UPNA가 이 파벌의 시작점이다. 이후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운동의 지도자가 되며 파벌의 이름은 UPA로 개명되었다. 이후 61년 초반, 조직은 FNLA (앙골라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이름을 개명하였으며 이 시기에 킨샤사 중심부에 당 본부 건물을 설립한다.[1] 50년대 자신들이 활동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권력의 정점, 조제프 카사부부와 협력하며 심바 반군들과 맞서 싸우며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무장조직이었으며 킨샤사에서의 폭동 진압과 치안유지 등등의 활동을 해왔던 조직이다. 카사부부 암살과 그 배후에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 역시 친서방 우익 계열이던 FNLA를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세 지원과 카빈다 지역 접경지역에 주둔기지를 마련해준다. 한편, 개전 1개월 전이었던 61년 3월에는 FNLA가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음반자콩고에 잠시 남하하여 포르투갈인들을 학살하고 바콩고인들을 제외한 많은 카톨릭 부족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과 내통하던 호베르투의 오른팔이자 UPA의 내무장관이었던 조나스 사빔비는 외교적인 감각이 없던 호베르투를 배신하여 자신의 세력인 UNITA를 창설하려는 준비를 시작한다.

MPLA

▶ MPLA의 당기

앞서 언급했던 좌익 계열의 반군. 살라자르의 50년대 초반 이스타두 노부 통치기간부터 활동한 PCA (앙골라 지하 공산당)과 PLUAA등등 기타 좌익 계열 정당들과 통합하여 창설되었던 조직이다. 사실상 앙골라, 특히 루안다 출신의 흑인 지식인층 대부분은 이 정당에 속하였고 그 권력이자 지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아고스티뉴 네투 였다. 이들은 기니비사우 / 카보베르데의 독립 조직들과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포르투갈에 대항하였다. 놀랍게도 좌익 계열이었던 이들의 세력은 친서방 카사부부 대통령, 그리고 이후 집권한 모부투 대통령과의 관계는 원만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MPLA 역시 FNLA처럼 킨샤사 주변의 치안유지 활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키크위트 시에서의 공산주의 반군을 토벌한 전적까지 있는 그야말로 독립을 최우선 목표로 우선시하던 조직이었다. 좌익 계열인 만큼 당연히 소비에트 연방과의 내통도 활발하였으며 소련은 전투력이 떨어졌던 콩고의 심바 반군에 대한 지원은 줄이고 점점 앙골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MPLA에 대한 물자지원을 집중적으로 진행하였다.

독립전쟁의 개전

전쟁 초반
▶ 담배피는 해방군 소속 소년병들


1961년 4월 25일, 세계의 탈식민지화 광풍에 힘입어 앙골라 내 저항세력들 역시 포르투갈의 유사 노예통치에 반기를 들며 앙골라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개전 직후, 카빈다 국경에 주둔중이던 FNLA는 카빈다를 48시간만에 자이르 영토에서 출발하여 점령, MPLA는 자이르 마타디 시에서 음반자콩고시로 진격하여 포르투갈군과 교전, 6일만에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살라자르는 미국으로부터 마셜 플랜을 지원받을 정도로 미국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서방국가였으며 NATO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소련은 개전 2주차 엄청난 석유자원/귀금속이 대량 매장되어있는 앙골라의 공산화를 추구하며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하여 MPLA 에게 무기지원/공군지원 그리고 의용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개전 1개월 후, 모든 자이르 (前 레오폴드빌 콩고)국경에서 다양한 해방군들이 앙골라로 진입하면서 내전은 격화되었으며 의용군으로 왔던 소련군의 공군과 포르투갈군의 간의 공중전까지 발생한다.

FNLA의 분열과 UNITA의 창설
▶ 호베르투와 사빔비


한편 FNLA의 지도부였던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의 우유부단함과 이전에 음반자콩고에서의 제노사이드에 불만을 느낀 조나스 사빔비는 학살의 트라우마에 빠져있던 FNLA 병력의 대부분을(80% 정도로 추정) 이끌고 UNITA를 창설하였으며 이에 우익이었던 호베르투는 처신하고자 좌익 반군인 MPLA에 FNLA의 전력을 양도한다. 이 과정에서 남은 FNLA 병력(10%)의 절반이 우익 사상을 지녔고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빔비의 UNITA에 참가한다. 사빔비는 카빈다, 즉 공격의 위험이 없던 본거지를 확보하였다는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였고, 카빈다에 매장돼있던 기름을 본격적으로 수출하면서 무기를 확보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최악의 인종정책을 실행했지만 친서방이라는 성향을 발판이자 협력관계로 이용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으로부터 보급차량 400대를 구입한다던지, UNITA가 직접 탄약과 무장을 수급할 공장을 짓고 도로/상하수도를 정비하면서 카빈다의 주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카빈다에 계류중이다가 탈출하지 못한 포르투갈인 역시 루안다로 보내주면서 미국은 사빔비에게 지원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한 포르투갈-소련 공중전에 경악한 미국은 당시 저항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자 우익이었던 UNITA와 접선하여 앙골라의 공산화/소련의 전진기지화를 막고자 하였으며 친미성향이 강하던 사빔비는 포르투갈의 배후였지만 자신을 지지했던 미국과의 거래에 동의하였고 이는 앞으로 이어질 앙골라-미국 동맹의 시작었다. 이후 미국, 남아프리카의 지원을 받아 사빔비는 나미브 사막을 통하여 남부에서도 전투를 시작하였다.

전쟁의 진행과 종전
▶ 종전 후 환호하는 루안다의 시민들


MPLA는 자이르의 마타디 시를 보급거점으로 이용, 루안다 주변에서 게릴라전과 정글에서는 포르투갈군과의 전면전을 진행하였으며 개전 1년차에는 지속적으로 남하한에끝에 동북부 주요 도심 중 하나였던 사우리무와 서북부 대도시였던 말란제를 점령한다. UNITA는 나미브 시와 루방구 시를 개전 2년차인 1963년에 점령하며 포르투갈의 숨통을 조인다. 전쟁이 3년차가 되자 MPLA와 기타 협력관계에 있던 반군들은 소련의 지원으로 음반자콩고에서 시작하여 북부 본토 앙골라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으며 목시코를 비롯한 내륙지역은 특정 이념이 없던 군소군벌들의 손에 떨어진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UNITA는 포르투갈령 앙골라 최대의 병기창과 보급선이 존재하던 벵겔라와 우암부를 점령하는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1964년 12월 즈음엔 포르투갈은 사실상 루안다와 그 주변 지역을 마지막 거점삼아 포위된 상태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지정학적인 자치가 없다고 판단 1965년 1월 1일, 포르투에서 반전 시위가 발생하고 루안다에서도 폭동이 일어나자 UNITA • MPLA 대표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은 발을 빼게 된다. 앙골라는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한다.

앙골라 인민공화국

앙골라 인민공화국 건국과 혼돈의 총선거

포르투갈 철수 직후 앙골라 내부 세력들은 정치적인 방황을 겪는. 다양한 군벌들은 몇백년만에 얻은 독립국가를 지도할 능력이 있는 지도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앙골라 영토는 군벌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이때 아우구스티뉴 네튜, 당시 MPLA의 지도자는 군벌 지도자들과 UNITA의 사빔비와 함께 '국가' 건설을 제안, 1965년 2월 13일,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설립한다. 네튜는 지도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4월 15일에 열릴 총선거 직전까지만 국가를 임시통치하고 물러나기로 하였으며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영웅인 네튜 대신 후보로 지명된 이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네튜의 오른손으로 MPLA의 지도층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UNITA의 사빔비 역시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하며 선거 전 2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다양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 소련-미국 양국은 지정학적/자원 가치가 풍부하던 앙골라에 대규모로 선거자금과 산업기반을 지원한다. 친서방파 조나스 사빔비는 자신이 일구어낸 카빈다 발전의 사례를 어필하며 앙골라 경제발전 계획과 미국의 지원금을 강조, 산투스는 이념에 무게를 실으며 평등, 그리고 소련의 사례로 든 공업발전을 외친다. 하지만 앙골라 토착민들은 어차피 전부 '평등하게' 빈곤하였고 산투스의 주장보다는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춘 사빔비의 주장이 힘을 얻으며 UNITA의 전국 지지율이 70% 이상으로 상승한다. 또한 사빔비는 개인 친위대를 동원 지역별로 군벌들을 토벌/흡수하며 약점이었던 작은 통제구역을 넓히며 세력을 키운다. 결국 4•15 선거의 출구조사[2]에서 사빔비는 80%의 추정 득표율을 획득한다. 이에 권력욕에 눈이 먼 산투스는 4월 16일 선거 다음날, 앙골라에 파병되어있던 소련군 전차사단 2개의 2만 4천명[3] 병력을 이끌고 선거용지가 모두 모인 루안다 임시선거관리위원회 청사를를 UNITA의 반격이 있기 전까지인 6시간 가량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투표용지 분서, 위조 투표용지 생산을 하며 조작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99.7%라는 말도 안되는 지지율로 당선된다. 이는 당시 흐루쇼프 내각에서도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당선된 정통성 없는 정부라며[4] 엄청난 비난을 보내며 2개 사단장을 송환시켜 전부 KGB가 취조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4월 20일, 산투스는 60만 MPLA 대군의 비호 아래 당선을 선언하며 취임한다. 결국, 사단장들은 이후 내전의 짐조를 느낀 흐루쇼프와 소련 지도부에 의하여 다시 앙골라로 보내진다.

앙골라 내전

발단

사빔비와 미국 지도부는 격노하였으며 심지어 산투스를 후보로 지명한 네튜 역시 UNITA에 가세하며 MPLA에 거센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산투스가 개의치 않고 정식으로 인민공화국 공화정부를 출범시기는 5•1 선언을 발표하자 당시 남부와 카빈다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UNITA의 사빔비는 내전이라는 수단을 선택, MPLA 내부의 반대파들을 포섭하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는다. 결국 1965년 6월 2일, 비에 주의 쿠이토(Kuito)라는 UNITA-MPLA 접경지역에서 UNITA가 전투를 개시하고 2시간만에 마을을 점령하며 앙골라 내전이 개전한다.

전개

개전 직후 상황 파랑색은 UNITA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지역, 붉은색은 MPLA가 통제하는 지역, 체크 지역은 교전구역.

사빔비의 적극적인 군벌 포섭으로 인하여 개전 직후 대부분의 군벌들은 두 편중 하나에 이미 가담해있던 상황이었다.

개전 직후 전력비교
UNITA MPLA
지도부 대통령 조나스 사빔비
부통령 안토니오 세바스티앙 뎀보
국방부장관 제레미아스 치툰다
내무부장관 안토니우 아구스티뉴 다 실바 네투[5]
서기장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부서기장 알바루 올뎅 호베르투
국방부장관 비리아투 다 크루즈

병력 26만 5천명 45만 8천명[6]
파병병력 미군 5천여명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3천여명
소련군 2만 4천여명(+3만 5천여명)
전차 M60A1 1522대, M48A5 2521대 T55M 3142대, T62 1400대,T64A 832대
자주포 M53 573대, M55 762대, M109 600대 ISU-152 1550대, 2S1 200대, ISU-122 521대
장갑차 M113A1 2200대, M113A5AR 1200대, M113FV 300대 BTR-50 1200대, BTR-60 600대, BMP-1 200대
공군 F-4C 220대, A-7 250대 MiG-21 360대, MiG-17 220대

UNITA는 독립전쟁부터 선거기간과 내전 준비기간동안 자신들의 통제구역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통제구역을 2.5배 이상 늘리는데 성공하였으며 자원 수출과 미국의 대외원조를 바탕으로 전시/평시인프라 구축과 근로시간을 보장한 면직물 생산공장/포탄 및 군수품 생산공장을 건설한다. MPLA 역시 유화책과 소련의 경제지원으로 시민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경제적/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사빔비에 비해서는 미숙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산투스는 소련에게 도움을 청했고 위의 선거조작을 감행한 2만 4천여명의 전차사단 2개와 대량의 공군부대를 선거 이후 직후 루안다 근처에 주둔시킨다. 미군 역시 이에 대응하여 F-4C라는 당대 최강의 전투기를 벵겔라 공군기지에 전진배치 시켰으며 UNITA 부대에 전차를 대량지원하고 훈련을 시작한다. 특히 중공업 기반을 UNITA에 판매하여 M60을 자체생산 하도록 만들었다. 내전 전 기간동안 미-소 해군은 기니만과 남대서양 일대에서 지속적인 신경전을 벌였으며 루안다 항에 소련의 킬로급 잠수함과 IRBM이 배치되었다. 다행인 점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쓴 맛을 본 양국, 미국과 소련은 내전 확정 후 발발 직전 합의를 통하여 앙골라 내전을 아프리카 대륙 내로 확전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앙골라에서의 손실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즉, 무제한적인 폭격과 물량전이 일어날 것을 합의한 셈이었다.

1차 UNITA 대공세

6월 2일 개전 직후 UNITA는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인 숙련도와 규모르 MPLA를 압살하며 북진하였으며 위에 나열된 다양한 기갑전력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포위섬멸을 통하여 900대에 달하는 T55/T62를 개전 2주만에 노획하는데 성공한다. 미국의 F-4C와 A-7은 전 지역을 폭격하고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소련은 자이르-수단 루트를 통하여 MPLA에 대량의 최신형 무기들과 무장된 추가 병력들을 급파하며 UNITA를 개전 4개월만에 공세종말점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UNITA는 전술대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기갑전력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각 부대들을 재보급하면서 포병전력과 미 공군을 이용하여 MPLA 전선에 확충되는 신병들에게 신선한 불바다를 선보이며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MPLA의 반격

소련의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소련군이 대략 6만명 가까이 집결하자 MPLA는 자이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내륙지역, 목시코 주에서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다. UNITA는 의도적으로 지뢰를 가득 매설한 밀림지역 뒤에서 기다렸고 BTR-50등을 동원한 소련군/앙골라 인민군 기계화부대는 포병/지뢰/공군의 공격에 당하며 큰 피해를 입으며 3천명의 사상자를 기록한다. 그럼에도 목시코의 거점인 루에나의 주변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하며 보급을 원활하게 만드는 성과가 있었다.

UNITA의 심리/외교전

사빔비는 자원을 채굴한 돈으로 M60 생산공장 확충과 미국과 우방국에 역판매를 시작하며 자금을 확보하였고 그 자금은 포탄공장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전쟁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UNITA의 포탄 생산량은 전 세계 5위 수준이었고 이를 수출까지 시작했다. 사빔비는 수출하고도 남아도는 포탄을 모조리 M109를 비롯한 전선에 배치된 자주포들에게 공급하면서 전투중이 아님에도 지속적인 포격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인민군들에겐 지옥도였으며 특히 탁 트여있던 해안가 사막지대 부대의 전투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또한 주요국가에 대한 자원수출로 UNITA가 정통정부임을 세계에 홍보하면서 외교전을 시작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32개의 서방국가는 앙골라를 정식적인 합법정부로 승인한다.

MPLA의 2차 전면공세

소련군과 앙골라 인민군은 포격만 받으며 전투력이 깎일 바엔 돌격을 실시하여 자주포 전력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기로 결정한다. 개전 1년이 되는 1966년 6월 2일, 인민군은 콴자부터 목시코까지 모든 전선에서 T-64와 62를 앞세워 공세를 시작하였으며 ISU-152와 실험적인 2S1 자주포들도 합세하여 포격을 시작하였다. 또한 MiG-21을 동원하여 고속폭격도 하는 등 모든 전선에서 MPLA가 진격하였다. 사빔비는 당시 MiG-21의 공습을 예상, 미제 호크 미사일과 다양한 지대공 미사일을 배치하였고 공세 직후 소련군은 30대가 넘는 MiG-21을 폭탄 한번 못 떨구고 잃었으며 도합 65대의 MiG-21을 손실한다. 지상은 상태가 나았는데 비에 지역의 3개의 UNITA 전차여단을 단독으로 한개 사단 혼자서 와해시키고 진군하는 상황도 생겼다. 사빔비는 F-4C와 A-7을 동원하여 전차들의 진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소련 역시 S-125 페쵸라와 S-75 데스나를 배치, 팬텀기 10대, A-7을 30대 격추하며 미국/앙골라 공군에 큰 피해를 입힌다. 또한 이 시점에 최초의 공중전이 성사되는데, 4대의 앙골라 공군 소속 F-4C 팬텀기와 5대의 MiG-17, 7대의 MiG-21이 조우한 것이었다. F-4C는 AiM-9를 이용한 미사일 교전으로 3대의 MiG-21을 격추하고 도그파이팅을 통하여 2대의 MiG-21을 추가로 격추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MiG-17의 우월한 기동력으로 인하여 2대의 팬텀기를 손실하고 후퇴하였다. 전술적인 미제 기체의 승리였다. 한편 이 시기에 MPLA의 부서기장이던 올벵 호베르투가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전사, 산투스의 신임을 얻은 내륙군 지도자 루시우 라라(Lúcio Lara)가 부서기장으로 임명된다.

소강상태

양측은 큰 손실을 입었고 1966년 9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한다. MPLA는 소련군의 훈련과 군사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키웠으며 산업 육성사업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UNITA는 저렴한 노동력과 공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미국의 부속 병기창으로 지정되어 전시라는 특성에 의하여 엄청난 규모의 군수품을 생산하고 NATO에 공급하였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공업기술을 대량으로 이전해주고 F-4C의 판매를 승인한다. 사빔비는 통제하고 있던 지역중 교전지역으로부터 70km 바깥에 위치한 모든 지역에 학교/병원/수도시설/아파트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내륙지역의 1차산업 육성과 섬유/기계산업체를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인명 손실을 제외한다면 대외원조로 큰 적자를 입지 않았으며 그 주요 요인은 바로 UNITA의 경제성이었다. 군사하청생산과 노동력 제공은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미국은 방위산업 공장들을 앙골라에 지으며 원가를 절감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이 덕분에 군사적으로는 UNITA는 F-4C를 100대 추가도입, M60AN 앙골라 파생형 M60을 1000대 가량 도입하며 전력의 향상을 이루었고 M109는 200대 추가주문하여 MPLA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날리며 MPLA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UNITA의 2차 대공세

말란제 외곽에서 이동중인 앙골라 제4 기갑사단 제1포병지원중대 소속 M109AG

68년 12월, 전력을 2배 가까이 증강하고 대지상공격교리까지 준비한 공군을 동원, UNITA는 해안 지역에 대공세를 벌인다. F-4C 80대를 순수하게 폭격용으로 이용하는 전술로 UNITA는 루안다 남쪽 인근 지역인 남콴자에 주둔중이던 MPLA를 사실상 전멸시켰으며 (70% 이상의 병력이 무력화) 공세 1개월만에 루안다 20km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후 와해된 전력이 재조직하여 UNITA에 대한 역공세를 진행하였고 유격대까지 동원하며 반도지형인 루안다의 포위를 막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사실상 국지적인 저항 수준에서 무의미하게 마무리되었으며 UNITA는 루안다를 포위, 결국 포위 1주일만에 5만명에 달하는 루안다에 포위된 MPLA 병력들이 항복한다. 1969년 1월 14일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MPLA는 이미 전력의 50% 가량을 상실하며 사실상 패배가 확정되어버렸고 모든 전선에서 1명의 MPLA 병사가 2명의 UNITA 병사를 상대해야 했었다. 이러한 실패는 예견되었던 것으로 UNITA 지역의 1인당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살짝 아래였던 $1000 후반이었으나 MPLA 지역의 GDP/C는 $180으로 이집트/한국보다 조금 높았던 수치였다. 총생산 역시 당시 인구가 1.5배 가량 많던 MPLA보다도 UNITA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MPLA 점령구역에는 원래 적었던 석유기반시설과 중/경공업 기반이 대규모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다.

UNITA의 자이르 상륙

한편 2차 대공세 당시 카빈다에서는 UNITA가 3만명의 기계화해병부대 훈련을 마무리 지었으며 자이르 주에 대한 상륙작전을 이미 구상한 뒤였다. 1969년 2월 3일, UNITA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10척 가량의 LHA와 민간수송선을 동원, 3만명의 돌파용 기계화해병부대, 3만명의 전차사단 그리고 무려 1만명에 달하는 보급지원부대를 소유(Soyo)라는 마을에 투입, 해안경비대 2백병의 저항을 제외하고 아무 저항도 없이 손쉽게 점령한다. 이후 차량화부대를 동원하여 하루만에 2000km²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후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루안다에 배치된 북진하는 UNITA 선봉대와 만나기로 결정한다. 제2군 이라 명명된 민병대 10만명을 동원하여 진격을 막고자 MPLA는 저항하였으나 대인살상용 20mm 기관포를 장착한 A113-IFV에게 잔혹하게 학살 수준으로 패배당하며 저항은 분쇄되었다. 결국, 1969년 3월 2일, 벵구 주의 암브리즈라는 소도시에서 북부 상륙전력과 루안다에서 북상하던 두 전력은 접촉에 성공하였고 이를 통하여 MPLA는 해안 지대를 전부 상실하게 된다.

UNITA의 제압작전

소련은 루안다가 쉽게 무너지자 이미 생산은 없고 경제적 손해만 비대하던 앙골라에서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8일 뒤 호전파였던 브레즈네프가 암살당하자 최고회의와 후임 안드로포프는 철수를 결정, 6만명에 달하는 소련군 지상병력을 앙골라에서 한번에 빼내버리게 된다. 공군을 제외한 전력은 남지 않았으며 소련 해군 역시 쿠바와 무르만스크로 철수한다. UNITA는 표범 작전이라 불리우는 MPLA 소탕 작전을 가동, 내륙에 고립된 MPLA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소련의 지원이 없는 MPLA는 유류품이 없어 많은 수량의 전차를 유기하면서 후퇴하며 압도적인 화력의 UNITA 앞에서 큰 저항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1970년 1월 1일에는 말란제와 루에나 두 도시 모두 잃고 룬다 주에 처박히게 되는 신세가 된다. 또한 UNITA는 포격도발과 자이르의 유일한 해안지역인 키톰베를 무단점령하며 자이르에게 MPLA 지원을 멈추라는 무력협박을 보냈으며 이에 모부투 세세 세코는 MPLA의 탈출/보급로를 끊어버리고 키톰베를 반환받는다.

MPLA의 항복

산투스의 지휘 아래 의미 없는 저항을 계속하던 MPLA는 UNITA를 정글로 끌어들이며 공세종말점으로 도달시켰으나 MPLA 자신들이 먼저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에 루시우 라라, 앙골라 인민공화국 부서기장은 1970년 12월 5일, 산투스가 취침 중인 시점에 그를 납치 후 권력을 탈취, 최대한 저항을 이어가다 최초의 MPLA 아사자가 발생하자 이성적인 판단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전 7시, UNITA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으며, UNITA는 이를 받아들여 1971년 1월 1일 자정, 공식적인 종전을 새해에 선언하고 임시 공화인민정부를 수립한다.

앙골라 국가재건 임시공화정

1971년 1월 1일, 사빔비는 공화인민정부 내각을 꾸리며 UNITA의 정식 국가로서의 새출발을 준비하였다.

재건

당시 MPLA 가 점거하고 있던 전 지역은 UNITA의 절멸수준의 포격으로 황폐화되어있던 상황이었고 남부 지역과 카빈다만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사빔비는 일단 당시 보유중이던 대량의 군사력을 절반 수준으로 감축하는 군축을 시작하며 국방비 지출과 인력을 군대에서 빼냈으며 또한 내각 수립 2주 후, 안드로포프와의 정상화담을 개최하고 소련과의 관계 역시 정상화된다. 당시 정상적으로 루안다가 수도로서 기능할 상태가 아닌 점을 감안, 사빔비는 루방구를 수도로 지정한다. 한편 미국과 서방권의 시선을 의식, 사빔비는 1인독재 체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다당제는 아니지만 견제세력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여 양당제를 허용한다. 또한 UNITA 내부의 의원들의 충돌 역시 의도적으로 봉합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기로 결정한다. 이는 튀르키예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의 통치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었다. 어쨌든 종전 1년차에는 대도시들 대부분의 재건작업이 끝났으며 손상된 건물들은 전부 사빔비가 건축을 주도한 신식 아파트들로 대체하며 앙골라의 모습은 천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전 전까지 존재하는 부족사회는 전쟁으로 뿌리채 뽑혀나갔는데,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 포격과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완벽히 사라졌고, 사빔비의 제안에 도시로 이동하여 지옥같은 고향보다는 도심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대량의 유전 발견

1972년, 지질조사 중 앙골라 국토부 (MTI)[7]은 이미 석유가 나던 카빈다 지역을 넘어서 자이르에서 루안다까지를 비롯한 앙골라 북부에서 대량의 석유를 발견하였다. 백억 배럴이 넘어가는 수준이었고 이는 앙골라 경제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졌다. MTI는 남부에서의 텅스텐과 다이아몬드 광업을 위하여 남부와 내륙까지 포함한 2차 지질조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남부에서 도합 1500억 배럴이 넘어가는 석유가 국토에 매장된 것을 확인하면서 앙골라의 경제는 역대급 청신호가 켜진다.

경제 성장의 시작

이후 석유를 세계에 공급하기 시작하며 앙골라는 국내 인프라 확충에 열을 올렸으며 이미 대량 보유중이던 중공업 기반을 북부 해안까지 건설하기 시작한다. 전차공장은 미국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온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사빔비는 자국을 불로소득 복지산유국으로 만드는 정책을 고려하던 힐베르토 라 크루즈 재무부장관을 경질하고 앙골라 경제자문협회 (ANAE)를 설립하고 국내 모든 경제학자들과 미국 경제학자들의 자문을 구하여 결론적으로 석유 증산은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자국의 공업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산유국 국민들이 나태해지는 현상을 걱정했던 것. 한편 국토부 MTIT는 공업으로부터의 공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는데 사빔비 자신의 고향인 무낭구라는 마을 역시 무분별한 자연개발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론적으로 후에 큰 도움이 될 선택이었다. 또한 소련의 사례를 확인한 사빔비는 섬유제조와 원단제조라는 무척이나 기초적인 산업부터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사빔비가 직접 루안다에 초대하여 석유협정으로 한국에 석유를 소폭 낮은 가격에 제한없이 판매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1번 고속도로의 건설 자문을 돕고 당시 사빔비가 진행중이던 황폐화된 내륙을 녹지화하는 사업을 돕기로 결정한다. 이 덕분에 앙골라에는 식목일이 생겼으며 한국과 똑같이 4월 5일이 식목일이다. 이러한 외교적인 접촉으로 인해 한국-앙골라 관계는 한-미 관계에 필적할 정도로 크게 가까워지며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에서 한창 북한이 우위를 점할 때에 가봉과 함께 한국의 든든한 우방국이 되어주었다.

제 1차 오일쇼크와 앙골라의 부상

1973년 루안다 시가지의 모습

1973년, 이집트가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을 침공화며 4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앙골라는 정통성 미확보와 정식 공화정부 미수립으로 아직까지 OPEC에 가입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석유 역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추가로 발견된 1500억 배럴의 석유매장량은 미국 고위층과 앙골라 정부, 그리고 후에 설명하겠지만 소련 고위층만 아는 극비 사실중 하나였기에 OPEC 국가들은 앙골라의 체급을 무시하였으며 선제적인 외교관계 수립도 고려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사우디를 비롯한 다양한 OPEC 회원국들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던 서방에게 철퇴를 후리기로 결정, 석유를 감산하게 된다. 이는 서방국가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빔비는 숨겨둔 유전을 공개하기보다는 이미 생산하던 카빈다 유전의 증산이라고 외부에 알린 뒤, 새로 발견된 유전에서 뽑혀올린 많은 양의 석유를 당시 중동의 제제에 당한 캐나다/네덜란드 등의 국가에게 공급하였다. 이는 아랍 국가들이 앙골라를 적대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파동은 세계를 강타하긴 하였으나 감산과 가격 증가라는 카드를 쓴 국가들과 달리 앙골라는 충실한 서방의 유전으로 기능하였고, 서방국가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었으며 서방 기업들과 협력도 이때 시작된다. 또한 이 시점에 앙골라는 쏟아져 들어온 돈으로 포드 F-150과 세단들의 하청생산공장을 모사메데스에 유치하는데에 성공하였고 도요타로부터 내연기관 기술력 일부를 구입하면서 국가차원으로 차량/내연기관을 비롯한 중공업 개발을 시작한다.

70년대 초반 안정적인 성장 및 2공의 설립

1974년 앙골라는 안정궤도에 접어들며 매년 7-8%에 달하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전국에는 사빔비가 주도한 계획경제 체제에 의거, 아파트, 학교, 병원등이 들어선다. 루안다는 다시 수도로써의 위상을 회복하였고 200m가 넘는 유리 마천루들은 대도시들 곳곳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나스 사빔비는 이에 국가재건 공화임시정부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2공화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75년, 신헌법 제정과 부패개혁으로 '앙골라 공화국' 이 탄생하며 임시정부는 소멸하고 정식적으로 정부가 출범한다. 북한과 팔레스타인같은 일부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수출량도 크게 늘었으며 이 시기에 인민공화국 시절에 사용하던 국장과 UNITA의 당기이던 국기 역시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한다.

앙골라 제2공화국

1970년대 안정성장의 지속

80년이 되기 전까지 앙골라는 쏟아져 들어오던 돈으로 화학공업과 기본적인 소비재 공장 역시 확충하였으며 이 시기에 2백만명 가량의 이민자들을 아프리카 전역에서 데려온다. 이들은 서방이 세운 하청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내전에 얼룩진 조국을 두고 앙골라로 이주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영어-포르투갈어를 동시에 학습시키는 문맹퇴치교육과 과학교육의 비중이 커진 것은 이때부터였으며 특별법안을 제정, 아동노동을 군경까지 동원하며 철저하게 단속하였고 강제로 하루에 10시간 가량의 학습량을 학생들에게 요구하며 이때부터 급격하게 시민들의 지적능력도 향상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싱가포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사빔비는 70년대 중반에 싱가포르 국빈방문을 5번이나 할 정도로 리콴유와의 접촉이 많았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해외유학까지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산업이던 교육이던 악착같이 국민들을 쥐어짠다는 느낌이 강했던 시기였다.[8] 78년에는 연구개발의 성과로 T22 내연기관이라는 서방권의 그것보다 높은 수준의 내연기관을 자체생산하였고 MTIT는 국영 차량회사인 FVE를 설립하여 자국의 차량을 판매 시도하였으나 타국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 방산업계는 앙골라에 공장을 더 확충하였고 사빔비는 미국으로부터 F-14, M1 전차, LVT-7등 무기들의 생산공장의 유치를 따냈으며 심지어 F-14 120대 수입과 180대 라이선스 생산까지 허가받았고 1980년 초까지 200대 이상을 전력화한다. M1은 2000대 가량을 운용하며 세계 2위의 M1 운용국이 되었으며 모든 M113을 자국에서 생산한 LVT-7 장갑증강형으로 대체하면서 군사력도 10년만에 세계 7위로 크게 상승한다. 여튼 79년 말이 되자, 독립 당시 90%가 넘던 문맹률은 5% 아래로 내려갔으며 2개국어 사용자들도 많아졌다. 또한 1979년, 팔라비 왕조의 붕괴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으로 제2 오일쇼크가 터지자 79년 경제성장률은 IMF가 예측한 7-8%를 훌쩍 넘은 13%를 기록하였으며 1980년이 되자 앙골라의 1인당 소득은 유럽 평균의 절반을 넘어섰고 GDP (PPP)/C의 수치는 유럽의 45%를 넘는다. 이미 이 시점에서 아프리카 최강의 국가 타이틀을 이집트로부터 따냈다는 평가가 주류였으나 아직까지는 서방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 한다.

아프리카 내 군사개입

남아공 국경전

나미브 사막에서 진군하는 앙골라 육군 제3 전차사단 소속 M1AG 전차

70년대는 냉전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고 앙골라는 미국의 부하로써 미국의 요청으로 세계 각국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남아공 국경전이었다. 내전에서 UNITA를 지원한것과는 반대로 사빔비는 남아공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군사력을 키워 남아공과의 전면전을 계획하였다. 미국 역시 앙골라 정부와 지속적으로 침공계획을 조율한다. 결국, 1978년 3월, 당시 반두스탄 설립과 극심해지는 흑인 탄압으로 앙골라 내부로 넘어오는 나미비아계 주민들이 많아지자 사빔비는 전체 30만 중 10만의 병력을 동원, 나미비아의 카프리비 회랑의 서쪽을 점령하여 약 2000명의 남아공군을 포위하였고 이에 남아공이 항의하자 오히려 군사력을 동원, 2000명 전부를 포위하여 포로로 잡으며 국경전이 시작된다. 남아공은 올리판트 전차 500대와 라텔 1000대로 이루어진 30000명의 병력,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보급부대를을 동원하여 모사메데스로 진격, 기갑전을 유도 하였으나 F-14D와 F-4E의 압도적인 폭격으로 전력의 30%가 육상전 없이 파괴, 앙골라는 이후 당시 신무기였던 M1 전차 단 100대를 동원하여 남은 전차 300대 중 절반인 154대를 한 대의 M1 손실도 없이 격파시키고 내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해상에서는 직접 건조한 키드급 5척, 올리버 해저드 패리급 10척을 동원, 월비스 베이와 뤼데리츠 항을 봉쇄하여 해상보급을 막았으며 C13, B1 고속도로를 비롯한 4개의 나미비아행 보급로를 주기적으로 폭격하며 남아공군을 굶기기 시작한다. 공세가 내륙으로 집중되자 남아공군은 내륙으로 결집하여 방어를 시도하였으나 후방이었던 나미비아 최대도시인 빈트훅이 공수작전을 통하여 투하된 A113[9]을 동원한 1000명 가량의 공수연대에게 점령당하며 퇴로까지 막히면서 자국이 가진 30%의 전력이 포로로 잡히며 남아공은 블룸폰테인 협상의 타결로 나미비아에서 철수하였고 개전 2개월만에 전면전으로 확대된 국경전은 앙골라의 압도적인 승리로 돌아간다. 이후 앙골라는 나미비아 임시통치기구를 1년 유지 후 1979년 5월, 승전기념일에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ANFN (Angolan Forces Namibia), 주나미비아 앙골라군을 창설, 빈트후크와 월비스 베이에 군 기지를 소유하고 비행장을 이용, 지속적으로 남아공을 견제한다. 전후,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하여 백인들밖에 국방에 투입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던 남아공군은 30%의 백인 군대가 사라지자 치안유지병력도 부족해질정도였고 이를 파악한 ANC 등의 저항운동층은 앙골라나 당시 신생국가였던 짐바브웨의 적극적인 무장지원으로 북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케이프타운이나 프리토리아 등 대도시에서 총기난사, 폭탄테러, 납치극의 빈도가 1980-81년동안 250% 증가한다.

오가덴 전쟁

하르게이사에서 디레다와로 이동하는 제3전차사단 2대대 소속 M1AG 전차

당시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공산독재 체제 아래 굴러갔으며 소련의 비호 아래 있었다. 한편, 소말리아역시 공산국가로 소련의 비호를 받는 상황이었다. 소말리아의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인 시아드 바레는 '범소말리아주의'를 내세우며 당시 소말리인이 대거 거주하던 에티오피아의 면적 1/4 을 차지하던 오가덴을 탈환하고자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사빔비는 사태가 터지자 마자 바로 움직인다. 당시 소말리아가 대부분의 오가덴 지역을 점령했음에도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자 앙골라는 당시 주도권을 잃은 소말리아의 지도자 바레에게 파병을 제한, 이후 바레가 사빔비를 극진히 모시며 허가하였으며 77년 11월, 앙골라 공군 소속 F-14 50대와 이후 남아공에서 승전할 100대의 M1으로 구성된 전차연대를 소말리아에 파병한다. 또한 공산국가를 지원한다는 문제를 자국 기업의 진출로 메꾸기 시작하였으며 바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도-친미 성향을 보이게 되며 앙골라에게 주둔지를 제공한다. 어쨌든 앙골라군은 하르게이사를 보급거점으로 지속적인 디레다와에 대한 공세를 진행하였으며 결국 1978년이 되기 직전인 77년 12월 15일, 디레다와와 하라르는 함락되었고 당시 소말리아 역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에 결국 돌로-발룸발 선을 신국경선으로 설정하여 소말리아의 사실상의 승리로 끝난다. 집권기반을 강화한 바레는 당시 작살난 소말리의 경제를 앙골라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안정권으로 만들고 모가디슈는 무역항으로 발전하며 80년대 초반에 고성장세를 보인다.

외교

사빔비는 데탕트로 인하여 개선되는 미-소 관계를 등한시하지 않았고 앞서 설명했듯이 내전 종전 단 2주만에 소련과의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오히려 다른 공산/중립국들보다 소련과 훨씬 일찍 수교한다. 양측은 모두 OPEC에 가입되어있지 않았으며 OPEC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두 국가는 자국의 석유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점을 들어 OPEC의 석유 무기화를 견제하고 중동 국가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밀 기구인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를 설립, 미국과 접선하여 미국을 가입시키면서 중동과 다른 산유국들의 패권국가화를 견제한다. 미국-소련이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최초의 사건이기도 한데 이를 앙골라가 중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구이다. 앙골라는 아프리카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남아고 내전을 유도한다. 또한 소말리아를 친서방국가화했으며 잠비아,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각종 국가들에 민주화 시위를 지원하고 내전에 개입하며 주변국의 막장화를 방지한다. 이러한 정책은 아프리카의 수호자 (Guardião da áfrica)로 불렸다.[10] NATO 국가들과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며 무기수출을 시작한다.

1980년대

1980년대 앙골라의 상황

앙골라는 이미 1980년, 아프리카 내에서는 최대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지역강국이었으나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 수준이었으며 인당소득 역시 유럽의 60%, 군사력은 세계 7위 수준이었고 강대국의 필수조건인 비대칭전력 역시 전무했다. 그럼에도 개도국 이라는 특성과 석유채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커지는 공업력과 함께 7-8%라는 고성장세를 유지하며 많은 이들의 삶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건국 직후에 비해서 몆십배 가량 경제규모가 커져있던 상태였고 응골라의 기적이라는 표현도 이미 쓰여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양당제라고 하였으나 사실상 일당 권위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던 정치판 역시 UNITA의 정치계 자유화와 노조법의 제정으로 사회민주주의 파벌 역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71년, 앙골라의 국영공장(앙골라 재무부펀드 지분 95%)으로 시작된 기업인 FVE (Fábrica de veículos estatais)는 오일쇼크 당시 정부의 대규모 투자로 F-150의 라이선스 생산과 토요타의 내연기관 기술을 구입하여 고연비차량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78년에 미제 내연기관보다 출력은 낮지만 연비가 2배 이상 향상된 T22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2차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에 T22-M이라는 향상된 내연기관을 장착한 FVESE (세단)을 유럽에 판매하기 시작하며 자동차산업에도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미국의 M1 하청공장, 자국산 M1AG 라이선스 생산공장에서 M1을 생산하였고 M1AG는 K1 실전배치 전에 한국에서 500대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F-14나 C-130을 생산한 기술을 기반으로 민간항공기업인 (국토부 MTIT 지분 40%) 아비앙골라(이름답게 아비브라스의 협력기업이었다)를 설립하여 소형 여객기인 AO-330부터 생산하기 시작한다.

1980년 초고도성장

이란-이라크 전쟁의 발발

1980년 3월, 사빔비는 1980년의 국제박람회를 루방구에서 개최하며 자국의 성장과 산업화를 세계에 홍보한다. 특히 이 시기에 고연비차량을 생산하던 FVE 차량수입계약을 70개국으로부터 따내며 자동차산업에 청신호가 켜지는 등 앙골라 역사에 큰 의미가 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참가했던 루홀라 호메이니의 경호원단과 후세인의 호위용 용병들이 박람회 진행중이었던 밤에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터졌고 정오가 지나자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경호원들까지 각자의 편에 가담하여 패싸움에 가담하는 국제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이란 혁명 이후 이라크와 이란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확인하였으며 신설된 국가정보국인 (ANI)를 동원, 사담 후세인이 8-9월 즈음에 이란을 침공한다는 첩보를 확인한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들간의 전쟁이 3차 오일쇼크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경제부는 공공사업을 임시중단하면서까지 단기간에 자국의 산업역량을 최대치로 원, 4개월동안 보유중이던 유전/유류저장고를 3배 이상 늘리고 석유를 5배 이상 증산하여 8월이 되기 전 유류저장고를 최대치로 채워놓는다. 결국, ANI의 예측대로 9월 22에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다. 유가는 급상승하였으며 특히 7일 뒤인 9월 29일에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명령으로[11] 시리아가 쿠르드족과 함께 모술을 비롯한 이라크 북부에 진공하며 전쟁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전쟁 전부터 미국에 국빈방문이 계획되어 있던 사빔비는 9월 초반에 이미 전쟁 시작일을 22일로 정하고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를 만나러 자국시 21일 출발하였고 개전 4시간 전인 10시까지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이때 이미 사빔비는 카터와 함께 다음 날 벌어질 전쟁에 대한 논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역시나 다음 날 위의 설명대로 이라크의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하였고 사빔비와 카터는 같은 정장을 입고 너란히 서서 개전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는 성장한 앙골라의 외교적 지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TIME 지에서 1980년의 사진으로 선정될만큼 의미깊은 일이다. 성명 이후 카터는 급상승하는 기름값에 앙골라와의 관계도 고려하여 앙골라의 시장진출을 허가하고 앙골라산 석유를 대량수입하여 자국 정유고를 채우기 시작한다. FVE는 바로 5일만에 이미 물밑작업을 끝낸 상태로 FVE-US 법인을 설립하였다. 앙골라 내의 FVE 납품지연도 용인하며 FVE는 무려 5만대의 차량주문을 단 1개월만에 소화하면서 입지를 크게 늘린다. 앙골라의 차량공업이 미국을 덮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5차 대중동전쟁과 제 3차 오일쇼크

시리아/쿠르드/이란-이라크 구도로 흘러가던 그나마 단순했던 이란-이라크전은 이후 시리아를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골란을 넘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자 단독전을 이어갈 위험이 있던 이란은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레바논이 참전하도록 회유, 이후 10월 1일에는 이란군 3만명, 레바논군 2만명이 하이파로 진격하면서 가나안에 전쟁의 불길이 번지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과의 공존과 평화를 주장하던 팔레스타인 파타당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호전파들이 강제로 그를 탄핵시키며 권력을 잃었고 하마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팔레스타인은 10월 5일, 예루살렘에서 전투를 시작하였고 가자에서는 베르셰바로 미사일을 발사한다. 당시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주장하던 안와르 사다트는 이 전쟁으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우려, 4차 중동전 때의 강경노선을 다시 채택하여 10월 9일, 네게브로 30만명의 병력과 500대의 지상공격기/전투기를 진격시키며 이스라엘에 총공세를 가한다. 이러한 개판에서 사우디는 아직 중립을 유지중이었으나 이란의 승리와 시아파의 준동을 우려한 수니파 지도부는 참전을 결정,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엎고 10월 15일, 이란을 공격한다. UAE, 카타르는 이란의 미사일 오폭 사건으로 사우디와 함께 참전한다. 단 3주만에 벌어진 일로 전 중동은 1차대전을 연상케 하는 포화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전쟁에서 안전했던 국가는 요르단과 오만, 그리고 북/남예멘밖에 없었다. 이 사태로 요르단과 오만은 대규모 피란민을 수용하고 반사이익을 누렸다. 결국 일련의 일로 세계 최대의 유전이 사실상 통째로 증발하자 전 세계는 대공황의 2배에 달하는 일시적 경제적인 충격을 받았고 한번의 웨이브로 각국의 최대기업들이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타타그룹이 파산하였으며 아람코는 리야드가 공습당하며 본사가 폭격당하며 사실상 기업이 없어졌고 휘청거리던 동독의 트라반트는 소련의 KamaZ가 인수하였으며[12] 폭스바겐/벤츠/바이엘 등등 다양한 공업기업들도 도산한다. 이러한 경제혼란에 앙골라는 1500억 배럴의 유전 발견을 11월에 선언, 대규모 증산과 석유 무제한 수출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오일쇼크를 발표 하루만에 크게 완화한다. 이후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앙골라/미국/소련/베네수엘라/브라질) 5개국은[13] 공식 증산 발표로 OPEC의 입지를 전부 빼앗아온다. 하지만 5개국은 '자유화' 라는 명칭과 달리 자국의 적당한 윤 추구와 패권 확보를 위하여 감산을 무제한적으로 하지 않고 유럽 기업들이 충분히 도산할 만한 수준으로 유가를 유지한다. 이 때문에 르노를 기점으로 다양한 유럽계 중공업 기업들이 무너졌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도 크게 타격받는다. 한국은 앙골라와의 협정으로 정상유가대로 기름을 공급받으며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였고 그 대가로 앙골라에 금성/삼성 의 공장을 유치한다. 이 덕분에 한국은 80년대 대규모 웨이브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앙골라 자본 잠식과 종전

1985년 루안다 다운타운의 모습

이미 원래 생산량으로 현상유지를 하던 미국/소련/베네수엘라/브라질과는 달리 앙골라는 기존의 고성장세에 유류수출 수요로 자본유입량이 극대화되었으며 1980-1981년 GDP 성장률이 32%대라는 극빈국에서나 나올 수치를 보여주며 폭주를 시작한다. 앙골라는 계획경제체제를 유지중이었기 때문에 투기나 과소비 문제를 억제시킬 권력이 행정부에 있었고 많은 돈이 구식 인프라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고속철도사업, 경제지구 건설, 반도체와 중공업 팽창 그리고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일때의 지원금으로 투입되었다.이러한 일 덕분에 80년대 초중반, 5차 중동전 기간동안 앙골라의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또한 중동전에 인도와 파키스탄까지 엮일 조짐이 보이자 M109 등 대량의 무기들을 생산하여 서아시아로 팔아넘기기 시작하였고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와도 현물거래를 통하여 사실상 사라졌던 아람코의 지분 80%를 획득하며 사우디의 기름을 챙기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딜이 있었던 배경으로는 이미 사우디의 담맘, 심지어 사막 넘어 헤자즈의 메디나까지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점거당한 상태였고 리야드와 메카 코앞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알사우드 왕가는 차라리 망한 아람코로 반전의 기회를 노리기로 생각했던 것. 앙골라는 그 대로 무려 1000대가량의 M109, 1500대의 M1전차와 이를 운용할 아프리카에서 모집한 아랍어 사용이 가능한 용병 전차병, 그리고 100대의 F-14와 파일럿들을 지원하며 사우디가 어떻게든 버티도록 하였으며 결론적으로 이라크가 모술을 사수하고 타브리즈/아바스를 점령하며 이란이 패배하게 되면서 앙골라의 투자는 결실을 맺게 된다. 전쟁 기간동안 앙골라는 대표적인 실적으로 폭스바겐을 인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자국의의 공업기반을 제외한 아프리카 전역의 공업시설 95%, 자원 70%를 MTIT가 확보 및 확장, 사우디 국가채권의 40%를 확보, 총 5억 달러의 무기를 수출 그리고 80%의 아람코 지분을 구입하였으며 중동전이 정리된 1987년, 경제력은 1980년의 2.5배에 달해있었고 세계은행 추정 1995년, 일본의 경제력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앙골라의 패권국가화

OPEC의 우두머리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앙골라에게 기름줄을 뺏기게 되면서 OPEC의 존재는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전쟁 전 아랍 경제력의 70%가 사라지며 중동은 초토화되었다. 아프리카 내 공업기반과 자원 채굴권의 대부분이 MTIT의 자본에 넘어가게 되면서 앙골라는 아프리카 전역을 자국의 앞마당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대규모 이민자들 역시 앙골라 내로 유입된다. GDP로 모든 유럽국가들을 압도하였고 일본을 추월할 기세로 성장하며 세계 3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이에 비례하게 군사력을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성장시켰다.

한편 압도적인 경제력을 지니고 세계에 자국의 자본이 도배되자 앙골라는 종전 직후 7일만에 이미 개발이 진행되었던 자국산 열핵탄두 실험을 나미브 사막에서 진행하였고 결국 핵보유국이 된다. 미국은 형식적인 제재를 단 2주간 지속하며 이를 용인하였고 소련 역시 앙골라의 핵개발에 대외적인 입장표명을 거부한다.

한편 유럽의 경제가 엄청난 타격으로 무너지자 프랑스와 영국, 두 UNSC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패권을 유지할 힘이 없다고 판단, 상임이사국 지위를 포기하였으며 당장 핵보유국에 세계 경제력 3위라는 타이틀을 얻은 앙골라는 상임이사국 가입을 도전, 중화인민공화국의 투표 기권과 소련/미국 그리고 비상임이사국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게 되면서 1988년, 앙골라는 UNSC 상임이사국이 된다.[14]

냉전 종식

1991

현재

  1. 현재 이 건물은 앙골라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 포르투갈과 미국 언론사에서 낸 결과
  3. 소련 제13육군군단 소속 제60 전차사단, 제4 근위전차사단, 두 사단 모두 비교적 안전한 후방이었던 모스크바에서 파병되었다.
  4. 소련도 명목상으론 법치국가였으며 특히 흐루쇼프는 권위주의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5. 원래 MPLA의 지도자였으나 자신이 지목한 총통 후보자 산투스의 부정선거로 인해 UNITA 측으로 망명, 이후 사빔비에 의하여 내무부/재무부장관에 임명된다. 이는 MPLA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입혔으며 50만 수준이던 MPLA 병사들의 많은 비중이 비무장을 진행하고 UNITA로 망명, 또는 UNITA에 관할구를 넘기고 편입되는 등 네투의 영향력은 사빔비에 필적하였다. 이후 사빔비가 앙골라를 부국으로 만들면서 네투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6. 원래 60만이 넘어가던 병력이 안토니우 네투의 UNITA 망명으로 많은 MPLA 병력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해제후 UNITA에 참가하거나 직접 병력을 이끌고 UNITA에게 관할구를 넘겨버리면서 병력의 1/4이 증발한다.
  7. 국토교통부 (MTIT)의 전신
  8. 이러한 사회 풍조 때문인지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었다.
  9. M113을 IFV로 개조한 차량
  10. 당연하게도 내정개입이라는 비판을 밥먹듯이 듣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의 먼로 독트린의 결과물과는 달리 앙골라가 지원한 국가들의 막장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11. 당시 시리아 바트당과 이라크 바트당의 불화는 최악 수준이었다.
  12. 1980년 데탕트로 트라반트와 카마즈는 다치아와 함께 세계시장에 진출한 3개의 코메콘 소속 차량기업이었다.
  13. 모두 석유 정제기술이 당대 세계 상위권이었다.
  14. 미국/소련/중화인민공화국/앙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