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인구

2000년 기준 95,274,129명으로 세계 12위의 인구를 지닌 체급이 큰 국가이다. 출산률은 고도성장 시기의 7명보단 줄어들긴 하였으나 선진국임에도 출산률이 2명에 가까운 수준으로 거대한 개인경제력과 맞물려 국가경쟁력은 계속 상승중이다.

이민자

80년대 성장기에는 바콩고인들을 포함한 아프리카 전역의 흑인 이민자/해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며 다문화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범민족적은 호칭으로 불리우며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앙골라의 다양성 높은 사회를 구축하는 일원이 된다. 특히 2천만명이 넘는 인구가 '아프리카계'로 앙골라의 경제 성장기, 제조업에 인력을 풍부하게 공급해준 큰 족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회 기조에 따라 앙골라의 선거위와 헌법은 절대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그 어떠한 정당 설립을 허가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 역시 제정되어 인종차별, 제노포비아 범죄행위는 강도높게 처벌받으며 학교 내에서 역시 반인종차별 교육이 실시된다. 또한 흑백혼혈인 메스티소, 백인들의 인구 역시 증가하며 이들 역시 고급인력으로 취급받으며 앙골라 내에서도 취급이 좋다.

고령화

고령화와 관련하여 노령인구이민지원법이라는 법안이 존재하는데, 이는 퇴역한 노인들의 해외 휴양지 이민을 권장 및 도와주는 법안으로 이미 큰 자본을 보유한 퇴역노인들에게도 해외에서 연명이 가능한 식료품 구매 기초수급과 의료지원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자국 내 고령인구를 해외로 이민시키고 고령화 현상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실제로 선진국임에도 평균연령이 35세로 극도로 낮아졌다. 물론 통계조작/노인쫒아내기라는 비판여론이 존재하지만 사회의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분위기를 유지시키며 지도층의 고령화를 방지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단점을 압도하는 제도라고 평가된다. 물론 이는 앙골라 자체가 시민들이 해외로 이민갈 여력이 있는 부국이기에 가능하다.

인종

인종의 절반 가까이인 48%가 토착인종인 오빔분두인들과 밤분두인이다. 하지만 인종 정체성 지우기를 국가차원에서 가속화시키고 일부 풍습을 유/무형 문화재로 등록시키는 선에서 남겨두었기에 사실상 50%든 30%든 사회 분위기 자체가 이를 개의치 않아한다. 실제로 2천 2백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아프리카계 흑인', 즉 사하라 이남 전 아프리카에서 지역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흑인 이민자들 1세대/2세대들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모두가 섞여사는 상태다. 많은 이들이 80년대 성장기에 이주법의 완화로 이주하였고 다같이 경제력이 올라갔기에 특정 인종들이 빈곤하다던지, 그로 인한 차별 등의 문제는 전무하다. 또한 75년 영어 공용어 설정과 90년대 선진국 분류로 인한 이미지 상승 덕분에 무려 미국에서 역 이주하는 흑인인구들이 생기면서 미국계 흑인들 역시 사회에 정착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적다고 여겨졌던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앙골라에서는 어느 정도 살만한 중산층이었기에 남부와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많은 이들이 앙골라로 도착한다.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백인 인구 역시 백만명에 가깝다. 현재 앙골라는 80년대와 달리 이민법이 강화되어 아프리카 흑인들의 이민이 매우 까다로워졌으며 건강한 신체와 좋은 지능수치를 가진 사람들과 가족들을 선별해서 데려온다.

언어

내전 직후인 75년까지는 포르투갈어였으나 문맹 퇴치와 세계화에 초점을 둔 사빔비의 결정 하에 법적 공용어를 영어로 설정하게 된다. 문맹률이 극도로 높았던 상황이었기에 영어를 재교육하기 적합한 상황이었다. 자원 수출과 교육복지 확충으로 1980년까지 되자 영어 구사자 인구는 전체 인구의 80%, 포르투갈어 사용자 인구는 70%가 되며 문맹 퇴치에서 큰 성과를 보였으며 특히 저 두 수치가 겹치지 않고 일부는 포르투갈어만, 일부는 영어만 사용하는 상태였기에 실질적은 문맹률은 5%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 고도성장 시기에는 아프리카계 흑인 인구가 급증하며 문해율이 오히려 감소하였으나 80년대 중반이 되자 이민자들 역시 대부분이 영어 사용이 가능해졌으며 90년대에는 인구의 98%가 영어, 82%가 포르투갈어 화자가 되며 문맹률은 0%에 근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어와 표준 미국 서부영어를 섞어쓰는 '앙골라 영어'가 생긴다. 앙골라 인구 대부분이 고급인력화가 되었고 영어-포르투갈어-앙골라 영어 3중언어가 가능해진 상황으로 브라질에 진출하여 강사/통역사/사업가가 되어 떼돈을 버는 상황까지 생겼다.

종교

공식적인 국교는 존재하지 않으나 기독교 인구가 80% 수준으로 사실상 기독교가 단독으로 국교에 근접한 역할을 수행중이다. 남부 흑인문화들처럼 앙골라 역시 기독교와 혼합하여 독특한 앙골라만의 문화를 형성하며 종교는 문화에서 큰 축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슬람은 5% 정도로 비주류이며 딱히 차별법은 없고 국민들 자체가 차별에 회의적인 이들이고 다양성을 존중하기에 앙골라 내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대도시별로 대형 모스크가 1개씩은 꼭 있으며 루방구 대모스크는 앙골라 내에서도 매우 유명한 건축물이다.

교통

미국식 교통과 유럽식 교통을 혼합한 교통체계라 볼 수 있다.

철도

앙골라 국토교통부 (MTIT)의 산하 부처인 '앙골라 국영철도기관(AFEA)'에서 전국의 철도를 담당중이다. 80년대 고성장을 이끈 주요 기업으로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흑자를 기록중이며 높은 자본력으로 자국산 고속철도 개발/도입을 1980년대에 하였다. 이 원천기술은 전 세계에 앙골라가 철도수주를 받아 철도건설을 하는데에 큰 기여를 하였고 AFEA는 대량의 자금을 확보하였다. 백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는 방대한 국토에 한반도 길이 1.5배에 달하는 기다란 해안선을 커버하기 위한 고속철도가 크게 발달되어있으며 900km밖에 되지 않는 캘리포니아 레딩-로스엔젤레스 암트랙이 15시간이 걸리는 미국과 달리 최대속도 300kph에 가까운 AMFAV(Angola Máquina Ferroviária de Alta Velocidade), 앙골라 기계고속철도는 본토 최북단 - 최남단 해안철도 주파가 단 5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특히 AMFAV는 승객 운송 뿐만 아니라 전용 철로로 화물운송까지 하며 매우 빠른 속도로 내륙에서 무역항까지 제품을 수송 가능하다. 또한 소도시-대도시 철도기반 역시 미국과 다르게 촘촘하게 설치되어 유럽과 비슷하게 높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앙골라 해안철도는 해외 관광객들이 사용하기 최적의 교통으로, 평지 지형에 해안 뷰까지 보면서 매우 깔끔하고 넓은 객차에서 3시간만에 루안다에서 모사메데스까지 이동이 가능하기에 평가가 매우 좋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이 철도 바로 옆에는 앙골라의 경부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1번도로가 위치한다.

버스 및 대중교통

앙골라 국토교통부 (MTIT) 산하 국영 버스회사인 '앙골라 대중교통회사(CTPA)'에서 모든 대중교통을 운영한다. 이 회사 역시 설립 이후 단 한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으며 흑자로 유지비와 차량도입비 대부분을 충당하는 생산기업이다. 1990년대부터 실험적으로 무려 전기버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상용화가 결정되어 도입수량이 많이 늘어났다. 지하철도-버스는 전자교통증으로 환승이 가능하고 이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수준의 대중교통 서비스이다. 이 덕분에 최대도시인 루방구 중심부 출근시간에도 도로의 정체는 보기 힘든 수준이며 심지어 교통사고로 도로가 통제되어도 양호한 수준의 통행속도를 보여준다. 시외버스 역시 시외버스전용차선 제도로 일반 자가용보다 속도, 경제성에서 앞서나가며 사용률이 높으며 역시나 CTPA에서는 시외버스 사업으로 흑자를 내고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앙골라 해안철도 바로 옆에 앙골라1번 고속도로가 위치하고 있다. 고속철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역시 자가용으로 루안다에서 모사메데스까지 6.5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며 고속버스로는 5시간보다 일찍 도착이 가능하다. 앞서 말한 지하철도 역시 시내교통을 책임지는 기둥이다. AFEA에서 운영중이며 인구 70만 이상의 모든 대도시/중소도시들에 설치된지하철도는 매우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의 전차들에 비하여 속도 역시 빠르다. 지하철도와 융합되어 일부 사무/상업지구는 매립식으로 지하에 위치한 경우도 많으며 이는 교통정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이었다. 대도시들은 고속철도-고속버스-지하철도-공항이 모두 한번에 연결되어있다. 루안다를 비롯한 대도시 지하철도 일부 노선은 직선구간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최대속도 80km라는 충격적인 속도로 운행하며 경제성이 없다는 비판이 무색하게 도시의 반대편에서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직장인들에겐 이를 이용시 일반대중교통 출근소요시간의 1/3 수준이다.

항공

앙골라 국토교통부 (MTIT) 산하 국영 항공회사인 TAAG 앙골라 항공이 지역항공/아프리카항공/국제항공노선을 전부 담당한다. 지역항공으로서의 역할은 크지 않다. 철도로도 충분하기 때문. TAAG 항공의 진정한 저력은 바로 아프리카항공에서 나온다. 사실상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아프리카 유일의 강대국이자 선진국이기에 TAAG는 아프리카 내의 높은 앙골라의 영향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각 아프리카 국가 수도에 위치한 국제공항 활주로의 최소 하나를 독점하고 있으며 최신형 항공기를 바탕으로 항공수송/여객의 아프리카 내 점유율을 90% 이상 가지고 있다[1]. 이러한 상황에 TAAG는 '아프리카 항공 (African Airlines)라는 항공사를 따로 설립하여 운영중이다. 독과점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AAR의 창설로 아프리카 무역활성도가 1.4배 증가하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국제항공. 루안다에 위치한 조나스 사빔비 국제공항루방구에 위치한 안토니우 아구스티뉴 다 실바 네튜 국제공항은 앙골라의 초대형 허브공항으로 기능하며 해외국가-아프리카 노선의 75% 가량이 이 두개의 공항으로 집중된다. TAAG는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앙골라인을 실어나르고 외국인들을 끌어오며 규모를 키웠으며 2000년에는 승객 수송량 기준 세계 3위의 규모를 가진 초대형항공사가 된다. B747만 무려 50대를 보유중이며 B777은 200대가 넘어가는 수량을 보유중이다. 총 항공기 보유 대수는 550대로 세계 2위의 수량이다.

자가용

80년대 앙골라 경제 붐의 주요 산업이자 앙골라의 구원자. 위의 모든 대중교통과 항공산업은 결론적으로 80년대 이후에나 생겨난 것들이다. 자가용은 앙골라가 내전으로 파괴된 폐허에서 일어서기 위한 기둥이었다. 71년 사빔비의 승전 직후, 5년간의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한 UNITA의 자주포와 로켓포를 동원한 대량화력전은 전국은 폐허로 변한 상황이이었다. 이 상황에서 앙골라는 국가주도 계획경제정책의 일환으로 국영기업 '앙골라 차량제조공장' FVE(Fábrica de veículos estatais)를 설립한다. 운좋게도 재건이 끝난 직후, 73년 중동전으로 오일쇼크가 터지자 석유 수출로 크게 들어온 자본을 사용, 미국의 지원으로 1세대 포드 F-150과 일본에서의 기술구입으로 개발한 AN5 SUV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오일쇼크에서 기름값이 수직상승하는 상황을 본 FVE는 고연비 차량을 어떤 국가라도 팔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연비, 고생산성에 견고한 트럭을 만들기 시작, 78년, 힘은 떨어지지만 연비는 기존 F-150의 2배에 달하는 괴물급 내연기관인 T22 엔진과 이를 장착한 ANGT-125 트럭을 개발, 79년에는 FVESE/SUV 등등 다양한 플랫폼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변방 아프리카 국가의 차량의 1세계 진출은 쉽지 않았다. 이때 공산권에서는 싸고 튼튼한 이 차량을 발견하여 앙골라에게 중공업 기술을 이전해주는 대가로 T22 내연기관을 정가보다 살짝 비싼 값에 외주생산을 제안, 사빔비는 직접 유리 안드로포프 당시 소련 서기장과 계약을 체결하여 발달한 중공업 기술은 더욱 더 강해진다. 하여튼 이러한 이벤트로 T22는 대량생산을 시작하였고 점점 제조단가가 낮아진다. 그리고 대망의 1980년 9월 22일, 중동의 초대형산유국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며 역대급 오일쇼크 사태가 발발한다. 사빔비는 전쟁 직전에 예정되어 있던 정상회담에서 카터와 이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고 결국 회담 도중 제 5차 중동전이 발발하자, 단기간에 유가가 수직상승하던 차에 카터는 FVE 앙골라의 미국시장진출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이후 쿠웨이트,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쟁에 휘말리며 이미 커져가던 전쟁의 규모가 초대형 전쟁으로 확전되었고 이는 앙골라에게 최고의 상황이었다. T22의 파생형인 T23은 효율이 무려 50% 가까이 증가한 최고의 엔진이었고 당시 차량제조기술까지 확보된 FVE는 미국에 지사인 FVE-US를 설립한 뒤 본격적으로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동방의 국가 일본과 함께 FVE는 미국 차량시장 점유율의 30%를 가져갔으며 특히 트럭이라는 특수성으로 일본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이후 UAE에 오폭사건, 카타르가 참전하며 석유파동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사실상 튀르키예를 제외한 모든 아랍국가가 전쟁에 연루되며 당시 초대형 산유국이었던 소련, 베네수엘라[2] 그리고 앙골라는 큰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87년, 몰타 협정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잦아들고 팔레스타인의 네게브 점령과 예루살렘 확보로 5차 중동전이 끝나자 전 세계는 새로운 국가의 부상을 확인한다. 플라자 협의로 일본은 버블이 서서히 꺼지며 경제는 하향곡선을 그렸고 카이로, 텔아비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테헤란, 베이루트, 리야드, 아부다비, 도하 등등 중동국가들의 수도는 모조리 폐허가 되었으며 유럽은 오일쇼크의 충격으로 성장률이 0% 대로 떨어졌다. 반면 중공업과 경공업이 발달하던 한국, 오일쇼크에도 등소평의 신들린 경제정책으로 경제권을 서서히 잡기 시작한 중국, 앙골라와 베네수엘라를 이용하여 자국의 경제력 방어를 성공한 미국, 제조업에 투자가 들어간 소련, 그리고 이젠 일반 공업을 넘어 반도체에도 손대기 시작한 앙골라는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앙골라 자가용은 압도적인 자금투입과 유럽계 기업 인수를 쳐 10년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FVE에서 나온 엔지니어들은 국가의 지원으로 각종 차량/군사업에 뛰어들며 경쟁력이 올라간다. FVE는 이로서 공고한 앙골라의 국영 자금줄이 되었다. 전국의 앙골라 국민들은 FVE를 타고 다녔으며 이는 전세계에도 적용되었다.

  1. 에티오피아 항공이 나머지 10%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2. 다만 베네수엘라는 유가상승의 혜택을 보았음에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실패한 부패정치로 몰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