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나가마사
(일본어: 山田長政)
야마다 나가마사의 초상화
인물 정보
본명 야마다 나가마사
(山田長政)
별칭 남방의 영웅
(南方の英雄)
생몰연도 미상 ~ 1630년 7월 11일
재위 기간 아유타야 왕조의
(1626 ~ 1628)
타이난 개척청의 초대 칸쵸
(1628 ~ 1630)

야마다 나가마사(일본어: 山田長政)은 타이난의 인물이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의 스루가 국(駿河国)에서 태어나 오쿠보 다다스케(大久保忠助)의 가마꾼으로서 활동했으나 주인선(朱印船)을 타고 지금의 태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태국에서 "방 이푼"이라 불리는 니혼마치(日本村)에서 기이 규에몬을 통해 재능을 인정받아 두각을 드러내어 일본과 아유타야 왕조간의 무역을 주선했으며, 이후 태국을 에스파냐로 지켰다는 공로로 국왕이었던 송탐(ทรงธรรม)에게 일본인 거주지의 영주로서 활동하였으나, 왕위 계승 과정에서 야마다 나가마사의 세력을 두려워 한 이들이 그들을 해외로 추방시키기 위해 핍박을 가하였고, 그는 니혼마치의 일본인들을 이끌고 보르네오 섬의 정착하여 타이난 개척청(対南 開拓廳)의 칸쵸(館長)가 되어 정착지를 건설하던 중 1630년에 현지인들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다.

이력

야마다 나가마사는 현재 시즈오카 현 중앙부 지역의 구 명칭인 스루가 국(駿河國)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누마즈 번(沼津国)의 번주였던 오쿠보 다다스케(大久保忠助)의 가마꾼이었으나, 1611년 경에 슈인센(朱印船)을 타고 현재의 태국으로 넘어갔다. 슈인센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쇼군으로부터 해외 통상 허가증인 슈인조(朱印狀)를 발급받아 외국과 교역하던 배를 말한다.

당시 태국의 도시인 아유차의 동남부에 일본인 거류지인 "방이푼"(日本町)이 있었고, 이곳에 다수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기이 규에몬(紀伊右衛門)이라는 사람을 리더로 하여 샴 정부의 우대를 받고 있었다. 나가마사도 그곳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점점 두각을 드러냈고 규에몬에 이어 니혼마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태국 사절이 일본을 방문할 때 부하를 파견하여 막부 요직자들에게 책이나 선물을 바치는 등 양국의 국교 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자신도 상선을 직접 일본에 파견하여 무역을 했다.

나가마사는 1626년 태국의 고위직에 올라 외교 및 무역 활동을 했으며, 에스파냐를 격퇴하고 태국의 왕위 계승과 관련해 일본인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 왕자를 즉위시키기도 했다. 그 후 왕족 중 한 명이 나가마사를 제거할 목적으로 그를 리고루 태수로 임명했고, 시종을 시켜 그를 독살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나가마사는 휘하의 측근들과 니혼마치의 일본계 거주민들을 이끌고 보르네오 섬으로 이주하였다. 이른바 동도전출(東島轉出)이었다. 이후 남아있던 니혼마치의 거주민들도 아유타야 왕조의 핍박으로 차례차례 넘어오게 되었다.

보르네오 섬 중서부에 정착한 그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촌락과 정착치를 건설하기 위하여 타이난 개척청(対南 開拓廳)을 수립하고 스스로 칸쵸(館長)로서 일본인 정착민들을 통솔하였다. 그러다가 정착지를 확장하던 과정에서 브루나이 술탄국과의 충돌이 일어나자 이들과의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전투에서 그는 결국 보르네오 병사들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사후

타이난 개척청의 초대 칸쵸로서 지금의 타이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며, 그의 사후 야마다 가문이 칸쵸를 세습하다가 타이난 왕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타이난의 건립자로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무용담은 여러 형태로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도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남진 정책 과정에서 그를 "남방 진출의 영웅(南方 進出の 英雄)"으로 미화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