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山田.png
타이난의 역대 토모키미
공화정 시대
타이난 왕조 역대 테이쿤
1대 2대 3대
야마다 미야헤이하루 야마다 미야츠키 야마다 미야토루
현대 타이난의 역대 테이쿤
야마다 미야헤이하루
(일본어: 山田宮平春)
파일:山田宮平春.jpg
야마다 미야헤이하루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야마다 미야헤이하루
(山田宮平春)
주요 직책 타이난 공화국 토모키미共君
생몰연도 1866년 6월 17일 ~ 1935년 1월 28일
임기 기간 타이난 공화국초대 토모키미
(1927 ~ 1935)

야마다 미야헤이하루(일본어: 山田宮平春)는 야마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아버지는 타이난 왕조의 마지막 테이쿤(帝君)이었던 야마다 사다이츠(山田定逸)였다. 신센 시대의 지속적인 공화 정부의 탄압으로 일본영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야마다 귀국령(山田 歸國令)으로 1927년에 조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공화 정부에 특별 사면과 함께 다른 군주국들의 국왕과 다름없는 토모키미(共君)로 강제 추대되었다.

초기 생애

1866년, 야마다 사다이츠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왕세자로 책봉된 뒤 미야헤이하루(宮平春)라는 궁호[1]를 받았다. 유년 시절 그는 체구도 왜소하였고 유약했으나, 부모님의 정성과 보모의 육아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7살이 되던 해에 공화 혁명이 발발함에 따라 그의 부모님을 따라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타이난의 왕족이 망명한 것이 대대적으로 알려짐에 따라 타이난 내에서는 "구왕족이 나라를 망친 것을 모자라 국위까지 낮추고 있다!"며, 정부와 함께 일본에게 공식적인 항의를 요청하여 퇴출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굴복한 사다이츠는 1875년,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이후 그가 20세가 되던 해인 1886년에 야마다 사다이츠가 영국에서 숨을 거두자, 야마다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윽고, 당주로 추대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아츠케 히츠메가 결혼하였다.[2]

강제 귀국행, 강제 추대

1926년, 3.12 사건4.15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쿄와 로망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회에 만연해지면서 공화 정부는 이를 수습할 필요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특히 공화 정권에 반대하던 군주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테이쿤(帝君)을 귀국시키고, 태평양 공영권을 달성하자!"라는 모토를 내걸고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선동된 민중들은 공화 정권에 반발하는 과격 시위를 열면서 사회적 혼란은 더욱 커지게 되었는데, 3.12 사건으로 살해되었던 미네츠야 토키모 대통령의 뒤를 이은 미누카이 츠카사는 공화 정권의 붕괴 조짐을 일시적으로 메꾸기 위하여 야마다 귀국령(山田 歸國令)을 발포하였으며, 이에따라 영국에서 망명중이던 미야헤이하루와 직계 가족들을 급히 타이난으로 귀국시켰다.

그러고서는 허울뿐인 직책이자 사실상 "군주"로서 추대시키는 것과 다름 없는 "토모키미"(共君)라는 영구 종신 세습 직책으로 임명하면서 군주의 복귀를 알리고 민중들의 불만을 수습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억지로 떠밀리듯이 타이난으로 돌아온 미야헤이하루는 휘하의 가족들과 함께 지방 순행을 통해서 민심 수습에 나섰고, 이를 노린 군주주의자들과 반 공화주의자들은 "테이쿤(帝君) 폐하의 복귀를 환영한다."를 환영한다는 의미의 퍼포먼스를 기획하였다.

물론, 이러한 민심 수습에는 전간기 호황을 통해 당시 수출 무역의 성황에 따른 경공업 및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도시 및 농촌의 전반적인 생활의 질 향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민중들은 정계 혼란이 자칫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의 붕괴로 연결될 것을 우려하여 군주주의자들과 반 공화주의자들의 행동에 지지한 것이다. 특히, 정권이 지속적으로 변동하던 혼란스러운 공화제 보다는 영구 종신으로서 군림하던 왕정 체제 하에 혜택을 누리는 보수적 태도가 대두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군주와 다름없는 직위에 놓인 미야헤이나루는 야마다 고궁(山戰 古宮)을 거처로 하여 공화 정권의 각료들을 가볍게 만나기도 했다. 말년에는 딱히 정치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단순한 사회원로 정도로 말년을 누리고 있었으나 야마다 고궁을 제외하고서는 왕실 재산이 국유화되고 뒤를 이은 공화 정권이 이들의 정계 진출을 철저히 배척하고 민심 수습을 위한 도구로 여김에 따라 사회적으로 큰 소외감을 느끼고서는 병들게 되었다.

사망과 인물됨

직계 왕족들의 돌봄에도 큰 소외감을 느끼면서 끼니를 거르다가 얻은 영양실조로 결국 1935년 1월 28일로 타계하였다. 군호는 "센소"(宣想). 작위나 다름없는 '토모키미'는 장녀였던 야마다 미야츠키에게 세습되었다. 공화 정권을 위해 노력하던 것과 무색하게도, 가벼운 국가장을 치루고서는 곧바로 타이난 왕립공원에 매장되었다.

의외로 자동차를 좋아했던 인물인데,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하던 것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강제 귀국령으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여전했다고 하는데, 이런 행위로 왕실에 대한 반감과 함께 정계의 위협을 줄 것이라 여긴 정부 각료들에 의하여 제지되었다고 한다.

각주

  1. 미야헤이하루 이후로 직계 왕실은 이름의 '궁'(宮)자를 넣게 되었는데, 이는 공화 혁명으로 왕실이 전복된 이후 공화 정권에서 직접 나서서 궁호를 폐지하게 됨에 따라 일반 서민과 왕족의 성씨를 구분할만한 요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2. 서민 출신의 여성과 왕족이 결혼한 첫번째 사례이며, 가문 내에서는 반발이 심했으나 미야헤이하루가 강행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