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알버트 (카이저라이히)


이 문서는 현재 카이저라이히 공식 위키에서 WIP 상태입니다. 내용을 추가하기 전에 먼저 공식 위키를 확인하십시오.

웨일스 공 에드워드 알버트
Edward Albert, Prince of Wales
원어명 Edward Albert Christian George Andrew Patrick David
작위 웨일스 공, 영국령 인도와 영국 자치령의 왕자
(1910- )
출생 1894년 6월 23일
대영제국 서리 리치먼드 (만 41세)
상태 생존
소속 캐나다 자치령 (카이저라이히) 캐나다 자치령
정당 무소속 (윈저 가문)

웨일스 공, 에드워드 알버트(Edward Albert, Prince of Wales, 1894년 6월 23일~)조지 5세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서열 1위로 현재 캐나다 자치령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생애

유년 시절

에드워드는 1894년 6월 23일 영국 리치먼드의 화이트로지에서 태어났다. 요크 공작(조지 5세)과 요크 공작부인(옛 테크 공녀 빅토리아 메리)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웨일스 공(에드워드 7세)과 웨일스 공비(옛 덴마크 공주 알렉산드라)의 둘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테크 공작과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메리 애들레이드의 장녀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로서 에드워드는 태어났을 때부터 요크 공작 하이네스 프린스 에드워드라고 불렸다.

1894년 7월 16일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에게 세례받았다.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왕가에서 "에디", "에드워드"로 알려진 죽은 삼촌과 그의 증조할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앨버트라는 이름은 빅토리아 여왕의 요청으로 포함되었다. 마지막 이름인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빗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수호성인으로부터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에게 데이비드이라는 성으로 더 많이 불렸다.

요크 공작 부부는 당시 다른 상류층 영국 부모들 처럼 자녀 양육에 큰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에드워드와 동생 앨버트는 왕실 보모 중 한 명에게 학대를 당했다. 유모는 에드워드를 꼬집기까지 했으며, 에드워드가 울음을 터트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모는 해고되었다. 아버지는 엄격한 규율주의자였지만 분명히 다정했고, 어머니는 엄격한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아이들을 대할 때 상냥하고 유쾌했다.

교육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부터 헬렌 브리카에 의해 집에서 교육받았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붕어한 후, 공작부부는 거의 9개월 동안 대영제국 전체를 순방했다. 어린 에드워드와 형제들은 조부모인 알렉산드라 여왕과 에드워드 7세와 함께 영국에 머물렀고, 그들은 손자들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부모님이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프레드릭 핀치와 헨리 헨셀이라는 두 사람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헨셀은 에드워드가 학교에 더 일찍 입학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오스본 해군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고 1907년 입학에 성공했지만, 학교 생활을 즐기지는 못했다. 오스본 대학에서 2년을 보낸 후, 에드워드는 다트머스 왕립 해군대학으로 편입했다. 이후 영국 해군에 입대하는 2년간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붕어하자, 에드워드는 웨일스 공으로 즉위하였고, 이후 왕실 후계자로서의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정식 졸업 전에 해군 대학을 자퇴했다. 그는 전함 힌두스탄에서 3개월동안 소위로 근무한 후 즉시 옥스포드의 맥달렌 칼리지에 입학했다. 이후 별다른 학력 없이 8학기를 바치고 옥스포드를 떠났다.

웨일스 공

1910년 5월 6일 아버지 조지 5세가 왕위에 오르자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콘월 공작위와 로테세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1910년 6월 23일 조지 5세는 그를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으로 추대했고, 1911년 7월 13일 카나폰 성에서 열린 즉위식을 통해 그를 공식적으로 임명했다. 1616년 이후 처음으로 웨일스의 정치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요청으로 웨일스 미인 대회를 개최해 에드워드 공이 참석해 웨일스 어로 몇 문장을 말하도록 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군사 경력

대전쟁이 발발했을 때 에드워드는 현역 복무에 적합한 나이였고, 실제로 참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1914년 6월 근위대의 수류탄 투척병으로 입대하여 전선에서 복무하겠다고 의사를 전달했으나, 전쟁장관 키치너가 왕위 계승자가 붙잡힐 경우 발생할 상황을 근거로 입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참호전을 직접 목격했고, 가능한 한 자주 전선을 방문하려 노력했으며, 1916년 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에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지만, 참전 용사들 사이에서 에드워드의 평판은 굉장히 좋았다. 1911년 그는 영국 해군의 소위였고, 1913년에는 중위가 되었었다. 에드워드는 1918년 첫 번째 군용기를 몰았고, 이후에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망명

웨일스 공으로서 에드워드는 아버지 조지 5세를 대신해 국내외에서 영국을 대표해 1921년부터 1925년까지 6차례에 걸쳐 제국 각지를 순방했다.

영국 혁명이 일어났을 때 왕실은 캐나다 자치령으로 망명해야 했다. 망명 당시 에드워드의 왕위계승서열, 순방, 잘생긴 외모, 그리고 미혼인 왕자라는 지위 때문에 캐나다 언론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캐나다, 특히 퀘백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자신의 매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군주국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속으로 식민지 출신을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간파한 자유당 총리 매켄지 킹과는 긴장된 관계를 유지했다. 매켄지 총리나 동생 앨버트와는 달리 전제군주제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가치관은 식민지인에 대한 그의 편견이 알려짐과 동시에 영국령 인도, 남아프리카, 오스트랄라시아에서 그의 인기를 주춤하게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조지 5세와 후계자인 에드워드의 관계는 에드워드가 수 많은 불륜 행각을 보이며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조지 5세는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보였고, 차남 앨버트 왕자를 왕위에 올리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여전히 왕위계승서열 1순위이며, 왕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면서 그의 왕위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