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송

呂宋王國
Kaharian ng Luzon
여송 왕국
루존 왕국
Flag of Luzon.png Coat of arms of Luzon.png
국기 국장
표어 盡人事待天命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국가 여송국민가
呂宋國民歌
Luzon location map2.png
수도 루난呂南
최대 도시 루베이呂北
정치
공용어 표준 중국어, 타갈로그어
국왕國王 유헌랑劉憲朗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전뤼위안眞慮鴛
역사
정부 수립  
 • 남토천대 1683년 9월 5일
 • 유씨왕통 1711년 4월 21일
지리
면적 87,688㎢ (116 위)
내수면 비율 0.6%
시간대 LST (UTC+8)
인구
2018년 어림 7,677,456 명 (93위)
인구 밀도 87.5 명/㎢ (83위)
경제
GDP(PPP) 2018년 어림값
 • 전체 $3,205억 2359만 (54위)
 • 일인당 $41,748 (27위)
HDI 0.867 (27위, 2017년 조사)
통화 루소니아 달러 (L$)
기타
ISO 3166-1 159, KNL, KLZ
도메인 .lz
국제 전화 ++889

여송 혹은 여송왕국(중국어: 呂宋王國, 영어: Kingdom of Luzon)은 서태평양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도서국가이다. 동쪽으로는 루소니아 해협을 건너 필리핀, 서쪽으로는 남중국해를 건너 베트남이 위치해 있다. 수백 여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루중(呂中), 루난(呂南)[1], 루둥난(呂東南)의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수도는 루난, 최대 도시는 루베이(呂南)이다.

정씨왕국(鄭氏王國)을 세운 정성공(鄭成功)이 필리핀 침략의 전진 기지로서 1660년대의 개척하였으며,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청나라에게 정씨왕국이 대패함에 따라 타이완(臺灣)에서 지속적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이끌어 갈 수 없음을 판단한 정극장(鄭克藏)과 휘하의 신하들이 지금의 루중으로 도망하여 영구 정착하게 된 것이 시작이다.

풍부하게 매장된 해저유전/천연가스 개발을 통해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으며, 특히 대만과 함께 중국 본토에 대한 포위망으로서의 군사적 요충지 및 남중국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중화학공업과 고부가가치 산업이 발달되었기에 아시아에서 손에 꼽는 경제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다.

국호

정식 명칭은 여송 왕국(呂宋王國)으로서 기록에 따르면 현재 필리핀 마닐라의 일부인 톤도에 수도를 둔 "여송국(呂宋國)"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주 1] 남토천대(南土遷臺) 초기에는 '연평왕국'(延平王國)이라는 명칭도 혼용되었으나, 정홍윤(正紅胤)의 폭정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무평후 유국헌(武平候 劉國軒)의 아들, 유국상(劉國相)의 역성혁명 이후에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복명(復明) 기치를 영구 포기하고 정씨왕조를 연상시킬 수 있는 '연평'(延平)에서 '여송'(呂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 현재까지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에서 유력한 설로 인정받고 있다.

천계령 폐지를 전후하여 일본 상인들도 여송과 교역을 했고, 일본 에도 시대의 상인 루손 수케자에몬(呂宋助左衛門, Ruson Sukezaemon)이 여기에서 무역상을 경영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에는 1500년대 초반, 말라카를 정복했던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 서쪽, 남중국해 사이에 있던 이 원시 무역 국가를 "루소니아"(Luçonia) 또는 "루손"(Luçon)이라 불렀으며, 이 명칭은 한인의 정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양에 알려졌다.[주 2]

역사

여송의 역사
呂宋史
Kasaysayan ng Luzon
Coat of arms of Luzon.png

여송의 역사타이완, 미국과 같은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로 인해 이주민들의 정착 과정에서 현지인들과의 첨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여송 내부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원주민 자치제를 도입하고 이들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정계 참여를 위하여 일부 지방 행정에서는 지방의회 의석 쿼터제를 도입하는 등 갈등 해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이주민의 역사가 중심을 이루긴 하나, 근세를 중점으로 중앙집권제가 약화된 여송 사회에서 영지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지방 세력가로서 성장한 일부 현지민 부족장들의 중앙 정계에 대한 입김이 강해지면서 한인 중심의 사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선사시대

우라늄 동위원소측정법으로 6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칼라오 원인의 중족골은 오늘 날까지 이 제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유물이다. 이전까지는 탄소동위 원소 측정법으로 약 24,0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팔라완에서 발견된 타본 원인이 가장 오래된 인류였다. 네그리토인들은 또한 이 제도에 정착한 가장 초기의 사람들이었지만, 필리핀 제도에서 그들의 초기 정착과 지금의 여송 지역까지 정착지를 옮긴 시기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고대 여송인들의 기원에 대해 상반되는 여러 개의 학설이 있다. 가장 널리 수용되는 언어학적, 고고학적 증거는 “타이완 유래설 모델”이며, 이것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량주 문화와 같은 양쯔 강의 신석기 문명으로부터 온 후손이라는 타이완에서 왔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의 여송 제도에 고대 여송인들이 기원전 4,000년 전에 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에, 이 제도에 살던 사람들이 여러 개의 사회 집단으로 발전했으며, 사냥-채집을 하는 종족, 전사 사회, 그리고 해양 항구 집단등의 다양한 분화 사회로 나타났다.[주 3]

서기 300년부터 700년경에는 동남아시아의 섬들을 중심으로 해양 민족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이 해양민족은 인도 문화권에서 유래된 불교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루소니아는 중계 교역을 통하여 이들 문화의 원천이 되었고, 이렇게 유래된 문화는 필리핀에도 소개되었다. 때문에 오늘날 필리핀과 여송의 모국어이자 국민어인 타갈로그어에는 산스크리트어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원시 왕국 시대

원주민이었던 탕가시카족들을 중심으로 부족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점차 다른 부족들의 이주가 증가하고 기존 부족들이 분화함에 따라 왕의 권위와 권력은 떨어지고 족장들이 왕의 간섭통치를 받는 부족 연맹체가 되었다. 이후에는 '루손' 혹은 '루소니아'라고 불렸다.[주 4] 그러나 중국에 여러 사서에 따르면 10세기에 이르러 부족연맹체에서 고대 왕국으로 중앙집권적 형태를 띈 국가로 발전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청나라 때의 사서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982년 여송으로 추측되는‘마일국’(摩逸國)이라는 국가의 상인들이 교역품을 실어 광저우를 방문했다고 한다. 또한 1225년에 지어진 《제번지》(諸蕃志)에서는 이 시대의 ‘마일’사람은 무명천으로 몸 전체 또는 아래쪽을 가리고 있으며, 청동 신상을 초원에 두고 있어 중국과 아랍 국가와 물물교환 무역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여송의 현지 언어에는 중국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제 및 서민 용어가 많았다.[2] 14세기 《도이지략》(島夷誌略)에서도 마닐라를 의미하는 ‘마리’(麻里)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그외에 여송을 의미하는 '루손'(呂宋)도 사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

15세기에는 명나라가 명목상의 관할 지역이자 신하국으로서 현지 명나라 사신과 현사가 자리하는 관청을 설치하나 직접적인 통치는 사실상 불가했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이 설치한 스페인령 동인도에 간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인들의 이주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의 미약한 행정력으로 암암리에 불법 이민이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정착한 한인들은 루손의 주요 평야지대를 개척한 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수출하면서 이익을 만들어냄에 따라 본격적인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 정성공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정씨왕국의 통제를 받고 요새를 건설하고 촌락을 짓는 등 기반 시설이 다져지게 되었다.

정씨왕국 시대

명나라는 1644년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였지만, 명나라 황제의 유신(遺臣)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를 내걸고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정성공은 그러한 반청복명 지도자들 중 한명 이었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타이완 해협에서 무역업과 해적 행위로 큰 돈을 번 해상 모험가였는데,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일본의 다가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의 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정성공이었다.

정성공은 청나라 군대와 9개월 간의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타이완으로 쫓기게 되었다. 1661년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여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을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의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씨왕국)

정성공은 타이완과 루송을 개척하고 시설을 정비하여 반청 운동의 기지로서 활용코자 했으나, 말라리아로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성공의 장남, 정경(鄭經)은 강희제가 주도한 중앙집권제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반청을 기치로 한 반란이었던 삼번의 난에 가담하여 푸젠 지역을 공격했으나 지휘권의 난립, 대의명분 상실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결국 난이 진압됨에따라 정씨왕국은 크게 패하게 되었고 정경은 술과 여자를 탐닉하다가 숨을 거둔다. 이후에 극심한 정계 혼란으로 정극장이 힘겹게 왕위에 올랐으나, 과거 정씨왕국의 협력했던 청나라의 수사제독 시랑(施琅)과 정씨왕국의 유국헌펑후 제도에서 해전을 벌이면서 결국 유국헌이 대패하게 되자, 승산을 잃은 정극장은 과거 정성공이 필리핀 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여송 지역으로 정착을 시도하게 된다.

정극장은 휘하의 가신들과 함께 여송 개척에 여념이 없었으며, 진영숙(陳永淑)[3], 풍석범(馮錫範)과 함께 본격적인 섬 개발을 위하여 생번(生蕃)으로 불리며 한인들의 이주를 막던 중부 고원 지대와 남부 지대에 위치했던 원주민 소왕국들을 몰아내고 영구 정착과 촌락 지역 설치 위한 근거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또한, 원주민들을 몰아낸 곳에서 농업 기반을 세우고 남양 무역을 주도함에 따라 서양과 중국 본토를 잇는 무역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시도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1705년, 청나라강희제(康熙帝)는 '반청복명 기치를 내놓고 청나라 황제의 신하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국권을 보장한다.'를 서신으로 보내고, 정극장의 아들이었던 정석호(鄭石昊)가 이를 수락함에 따라,[4] 여송은 청나라의 천계령(遷界令)의 압력에서 벗어났으며, 국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통제 및 제한되던 남양 중계 무역이 재활성화되면서 여송은 번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원주민 소왕국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지금의 루난, 루둥난 지방까지 행정력을 확대하였으며,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한인들간의 혼혈 결혼이 이루어지면서 한인 사회에 동화되었다. 그 뒤 정석호는 여송 일대에 대해 확대된 행정력을 기반으로 명나라의 관료제를 본딴 체제를 정비하고 도입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였다. 한편으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도독령(Capitanía General de las Filipinas)과는 상호 보완 및 동맹 관계이자 남양 무역을 주도하는 입장으로서 그 협력을 강화하는,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역성혁명과 유씨왕통

강희제에게서 명목상의 신하국 지위를 인정한 대신 국권을 존속받는데 노력했던 정석호가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자, 그의 동생이었던 정홍윤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폭정과 향락으로 그를 따르던 신하들과 공신들의 지지와 민심을 동시에 잃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척들을 동원하여 과거 정극장을 도와 여송 개척에 협력했던 공신들을 탄압하며 그들의 공적을 파쇄하고 의도적인 정치적 배반을 저질렀다. 이에 감국(監國)[5]에 지위에 있던 유국상을 중심으로 하여 1711년, 정홍윤을 제압하고,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얻게 된다. (신묘개란)

왕위에 추대된 유국상은 공신들을 우대하고 화합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에 다수의 공신들과 신하들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안정적인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그는 지방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루난루둥난에서 허용되었던 무기 소지제를 폐지하고, 이에 반하던 곽원류의 난(霍元瀏之亂)[6]을 진압하는 것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7]

유국상의 뒤를 이은 강종(康宗) 유지월(劉志月)은 외왕내제를 통해 군주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했으며, 그는 국왕이자 교학자, 신흥종교인 따중지아오(大忠敎)의 수장으로서 따중지아오를 정비하여 민족종교이자 국가종교로 확립하여 부분적인 제정일치 사회를 이룩했다. 그는 또한 충교사(忠覚寺)를 건립하여 불교따중지아오의 보급의 중심지이자 여송 사찰의 번영을 기대하였다. 그외에도 무역항의 기능을 맡을 핑하이 항(平海港)을 건설하고 청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시도하여 이윤을 얻으려 했고, 핑하이는 19세기에 이르러 공행무역의 중심지, 광저우(广州)와 서양 세력을 잇는 자유 무역 항구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중앙집권제의 붕괴와 번진시대

강종 이후에 왕위를 이은 이들이 연달아 무능력하거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급사하는 등 중앙 정치가 혼란에 빠짐에 따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되었으며, 이렇게 빈 지방 권력의 공백을 지역 세력가들이 틈을 노려 차지하면서 독자적인 영지를 구축하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과 통제에서 벗어난 번진(藩鎭)의 영주가 되어 국가체계를 갖추어 독립을 꾀하려는 일부 지역 세력들이 있는가 하면, 유씨왕통(劉氏王統)의 불분명한 정통성에서 정씨왕조(鄭氏王朝)를 되살리고 정통성을 확보하겠다는 세력들도 있는 등 각지에서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번진들이 성장하였다. 그러던 중, 영종 유덕검이 정계의 혼란에서 즉위하였으나, 그의 삼촌이었던 유숙창(劉淑昌)이 왕위를 노리면서 폐위될 위기에 처하자, 영종은 각 번진들에게 안찰사 혹은 관찰사와 같은 직위를 내려 그들의 지방 통제권을 인정하는 대신 중앙 정부의 정계 혼란을 해결해 줄것을 요청했고, 이에 풍의(馮義)[8], 무진(武津)[9] 등의 영종을 지지하는 번진 세력과 유숙창을 위시한 반 영종 번진 세력들간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여송내전)

내전시기에 여송은 서양 세력의 도움을 받아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번진, 유능한 신하들에 의해 관찰사, 안찰사 지위를 빼앗기는 하극상 등의 혼란이 빈번했다. 또한, 종교 교단 역시 이 시기에 폭압적인 지역 세력가들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결집하고 봉기를 유도하여 독립 정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따중지아오지아오셔우(敎首)[10], 채선(砦腺)[11]은 민중 봉기를 이끌어 가류(街流)의 관찰사를 몰아내고 따중지아오를 위시한 독립 세력을 유지했다.

1745년, 친정성 전투(親貞城戰鬪)에서 반 영종 번진의 핵심 번진이었던 북영(北英)과 천우(天遇)가 영종 번진들에게 굴복함에 따라 유숙창 세력은 사실상 와해시켰으며 풍의의 관찰사, 풍경흥(馮炅興)이 차례로 루둥난루난을 평정함에 따라 번진시대가 마무리되었으며, 풍경흥은 스스로 금위총장령(禁衛總將領)에 지위에 올라 다른 번진들을 통제하고 중앙 정부를 관할하는, 여송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영종 이후에 유씨왕통은 지위만 보존하게 되었으며, 실권을 잃고 얼굴마담으로 전락하였다으며, 이는 일본의 막부 체제와 상당한 유사성을 띄게 된다.

바둑전쟁과 평문시대

경목유신과 제1공화국

각주

  1. 여송의 수도인 루난(呂南)과는 명칭만 같으며 의미하는 개념이 다르다.
  2. 이러한 사실에 한인들의 정착 이주에서 의외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 정성공을 도와 반청복명(反靑復明)운동을 주도했던 진영화(陳永華)의 장남이다.
  4.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정석호에게 항복할 것을 제의한 강희제의 서신을 받은 정석호는 자신의 차남, 정석중에게 사신의 지위로 중국 본토에 파견한 뒤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이라는 답장문을 보내고 명의 충신들과 따르는 백성을 저버릴 수 없음을 피력하여 강희제를 동요시켰다고 한다.
  5. 정씨왕국의 관직 중 가장 높은 무관직으로서 국왕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군사권을 통솔하고 일부 지방을 관할하던 포괄적 직책이었다.
  6. 지방의 유력가였던 곽원류가 사병을 양성하려던 과정에서 무기 소지제로 불가해지자, 스스로 여남왕(呂南王)을 자칭하여 지방 분리 독립을 시도했던 일을 말한다.
  7. 그러나 지방으로 거처를 옮긴 공신들과 재력가, 일부 현지민 부족장을 주축으로 하여 지방 세력권이 성장함에 따라 유국상이 확립한 중앙집권제는 점차 붕괴되었으며, 지방 세력가를 칭하는 '안찰사'(按察司) 혹은 '관찰사'(節度使)들은 영지와 국가에 공인을 받은 국사병(國社兵)을 양성함에 따라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국왕의 권위는 영종(瑩宗) 유덕검(劉悳檢) 이후 완전히 무시되기에 이른다.
  8. 지금의 펑위현(馮譽縣)
  9. 지금의 우창현(武昌縣)
  10. 신분이 높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따중지아오의 수장직을 겸임하는 여송국왕(呂宋國王)의 임명을 통해 이루어졌다.
  11. 놀랍게도, 여성 지도자(!)였다. 따중지아오에서 여성 사제들의 역할과 그 의무는 막중했으며, 특히 교수(敎首)는 대충교에서 묘사되는 신의 영지인, 성토(聖土)를 관할하고 지방의 백성들의 의견을 결집하여 지방 행정관 혹은 세력가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등 민중들의 지지도 두터웠기에 민중들을 이끌고 지역 세력들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

인용 및 관련 출처

  1. 첸용저우, 「정씨 왕국의 몰락과 여송 시대에 대한 연구」, 『강좌여송사』, 2007
  2. 천스위싱, 《고송사일대지》(古宋史日代志), p45-49
  3. 천스위싱, 《고송사일대지》(古宋史日代志), 呂宋源人編 p112-115
  4. 이제박, 『呂宋史- 古代政의 展開, 神史』 21,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