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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女傭)은 집안일을 시키기 위해 고용된 여자 하인을 일컫는 말로서 다른 말로는 하녀(下女)라고 부르기도 했다. 광무시대(光武時代)때(1871-1919) 이러한 여용들의 채용률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때 전해진 빅토리아 양식의 메이드 관습이 조선 사회로 이전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 당시 여용들의 생활 방식과 역할, 의상은 당대 영국의 모습을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

내용

광무시대조선은 어느정도 걸쳐진 산업혁명과 그동안 천시되던 상업 경제의 자유화에 따른 사회구조적 변화와 혁명으로 번영해 당대 조선의 정책기조였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모습이 가장 충실했던 절정기였다. 그 반면 오래된 생활습관과 함께 완전히 타파되지 못한 계급사회의 모습에 따라 상대적으로 졸부 혹은 중산층 내에서 "계급 상승 의지"가 아주 높았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당시의 조선인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계급층이나 상류층에 들어가고 싶어했으며 그 탓에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을 실제보다 상류층인 것처럼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를 스노비즘(Snobbism)이라고 부른다.

이런 스노비즘적 항유 사회에서 유행했던 것이 "영국 신사"(英國 紳士)를 닮고자 하는 것이었고[1], 이는 곧 자신들을 "신사인 " 꾸미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신사로 꾸미기 위한 노력 중 하나가 여용을 고용하는 것이었고, 남성 고용인, 이른바 집사(執事)라고 부르는 이들과는 반해 가격면에서 남성 고용인에 비교할 때 절반 이상의 가격으로 책정되는 여성 고용인의 수요는 높아졌으며, 이것이 광무시대때 하나의 트렌드로 잡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들은 당대 조선 사회의 배경을 비추는 모습과 함께 당대 발흥했던 시대 문학(時代 文學)에도 상당수 그 소재로 사용될 정도로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면으로는 안 좋은 일도 많아서, 당시 조선 경각부(京各部) 직속 민중조사국(民衆調査局)의 조사에 따르면 고용된 여용들 중 다수가 고용자에 의해 강간 혹은 이에 준한 성폭행,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당대 민권획득운동(民權獲得運動)과 함께 고조된 민중 참여적 성격이 입김을 불고 있던 시대에서도 조선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의 지위나 그 인식이 현저히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들 여용은 조선 사회가 서구화 되었다는 점을 증명하면서도, 조선 사회가 여전히 구시대적 성격이 공존하고 있다고 반증할 수 있는 표본이 되었다.

각주

  1. 이는 조선이 183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영국과 교류하고 이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 작용된 결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