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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한국이 임진왜란의 피해를 매우 적게 받아 국가적 역량이 잘 보존되었고, 그 이후 근대화가 되어 열강의 반열에 오르나 파시즘의 등장, 그로 인한 시베리아 출병등으로 폭주하는 내용의 대체역사다. 다만 이 세계의 한국은 제목답게 가끔 이탈리아급의 졸전능력을 보여주는것이 특징이다. 전반적인 추축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분위기는, 독일제국과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탈리아를 합친듯한 모습을 지양한다.

  • 대한제국: 문정왕후의 천연두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인종의 치세가 20년간 계속된 뒤, 명종 대신 인성왕후 소생의 세자가 제위를 잇게 되어 역사의 분기점이 발생하였으며, 곧이어 원균이 1555년에 변소에 빠져 죽으면서 최종적으로 역사가 뒤바뀌게 되었다. 세자의 치세 아래에서 세자가 관심을 보인 10만 양병설로 인해 10만을 양병하지는 않되 군사력을 강화시키자는 안건이 조정에서 통과되었고,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도움 없이 조기에 왜란을 격파한 조선은 이후 역량이 유지된 상태로 1630년대에 명과 연합하여 후금을 처리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명나라가 붕괴되어 가장 강한 순나라와 명의 후속국가들이 다투는 중국의 분열기가 시작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내전으로 치솟는 중국과의 교역이 불가능해지자,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한 내분때문에 일어난 적자와 대중국 무역 증발의 손해를 매꾸기 위해 1641년 경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 말고도 조선에 접근을 하게 된다. 중국과의 교역이 곤란해지고, 명의 원수로 지목된 순과의 교역은 꺼려했던 조선은 급한대로 재물포에 '화란관'을 개방해주고 교역을 허락하였다. 시간이 흘러,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입된 서양 학문들은 기존 유교와 결합되어 알게 모르게 조선에 퍼져나갔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명국의 후계자이며 중국의 국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주장에 기반한 사상 또한 등장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안동 김씨의 집권 또한 원래대로 발생하였으나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만주 등지에서 세력권을 확장시켜나가고, 순나라와 적대하는 중국 국가들에게 무기를 파는 식으로 나름 호황기를 누렸다. 그러다 1866년,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어도 여전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존재하던 조선 조성의 기해박해로 인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인물들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조선에 파병을 명령하였다. 청나라가 없던지라 베트남을 손쉽게 장악했던 프랑스 해군들은 패권이 청나라보다 미약하여 조선에게 일방적 통지를 해줄 여력은 되지 못했던 순나라를 통하는 대신, 직접 팔미도 앞바다에 나타나 조선 수군을 완파시킨 뒤 외방전교회 인원들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것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고, 원 역사보다 일본의 소식을 좀더 접하고 있던 조선은 세력이 흔들리던 안동김씨의 논의끝에, 흑선으로 인한 피를 보는건 우선 방지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로즈 제독과의 협상끝에 '병인년 화친조약'이 체결된다. 안동김씨는 프랑스를 끌어들여 흔들리던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해보고자 하였으나, 1870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는 조선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결국 지지기반이 극도로 약해진 안동 김씨는 한반도에서 프랑스 패권을 제거하려던 영미의 지원을 받은 근왕파에게 밀려나 정묘사화로 영의정 직을 비롯한 고관직책들을 내려놓으며 권력다툼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이후 1871년 경 새롭게 들어선 근왕파 정부는 서양 제국들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빙사를 파견하였으며, 1874년경 이들의 귀국과 알아낸 정보로 개혁에 필요성을 느낀 국왕과 근왕파 대신들은 전격적인 서구화 정책이 시행하였다(신미개혁). 이어서 1873년 서구식 학제의 지정을 이어, 1875년에 천조질서에서 명의 뒤를 이어 천명을 이어받은 '대한'을 신축한 환구단에서 선포하였다. 동시에 그해 9월 20일, 공식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수교가 이루어졌으며 조선이라는 국명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887년 전봉준을 위시한 동학교도들과 상인연합체인 한성협회가 민권운동을 벌이는 일이 벌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추후 의회 개설을 약속하였고, 곧이어 1888년 새로 개설된 의회에서 김홍집이 초대 총리대신으로 발탁되었다. 2,3대 총리대신인 이완용의 재임기간동안 '대한제국 헌법'이 반포되어 근대국가의 기본적인 기반이 전부 갖춰지게 된 대한제국은 이어서 독일을 본따 제국의회를 개설하였다. 그러던 1893년 순나라와 금나라의 동맹이 일본과 전쟁을 벌일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대한제국은 천명이 없는 순나라를 친다는 계획을 명분삼아 일본과 비밀협정을 채결. 이어서 금나라 군 일부가 한국 영토에 진입하자마자 선전포고로 간주하여 북진을 시작하였다.이후 한국과 일본은 은 1894년 각각 남만주와 대만 인근에서 순나라와 전쟁을 벌인 뒤 일본 몫으로 푸젠 일부와 대만을, 한국의 몫으로 순의 동맹국이었던 금나라의 영토인 간도를 비롯한 추가적인 남만주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협상의 결과는 원 역사의 청국보다 더 떨어지던 순나라의 국력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가 남만주를 제외한 나머지 만주 지역(친러노선을 따른 금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연해주를 합병하자,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일본 또한 만주에서 설 곳이 없어진 육군이 공적을 위한 대안으로 사할린 및 연해주에 더욱 집착하게 되면서 러시아와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후일 발발한 러한일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금나라를 러시아로부터 도로 빼았고, 일본은 사할린과 알류샨 열도를 가져간 뒤 '연해주 공동자치령'이 한국과 일본의 협의 아래 수립되게 된다(이 영향으로 오늘날 러시아 차르국에서는 일본, 한국문화의 영향력이 꽤 남아있는 편이다.). 이후 1905년 융희 시대에 한국은 '을사년 한만협약'으로 금나라를 완전히 합병하였으며, 이후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함께 전쟁특수를 통한 만주 식민지 통치 및 여유돈 확보에 성공했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협상국 측 일부와 함께 시베리아로 파병을 실행하는 동시에, 극비리 사항이었던'금관 작전'으로 니콜라 2세에게 융희제의 칙서로 망명을 통한 자식들의 안전을 보증하여 로마노프 황손 5명의 확보에 성공하였다. 이후 연해주 자치령과 시베리아 영토 일부에 '백러시아 시베리아정부'를 세웠으며, 황손을 우대하는 형식의 공화국으로 처음엔 운영하였다. 하지만 대공황과 만주 일대에서 여진족들의 3.1 운동, 공산당의 활동등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지다가, 공산주의 타파를 주 슬로건으로 내세운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부상하였고 이들은 1930년 11월 27일에서 11월 31일의 기간동안 한성에서 진군하여 당시 황제인 성덕제 이인황에게서 '구국자들'로서 인정받은 뒤, 다음 해 총선에서 '대한호국회'로 이름을 바꾸고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직후 총리제를 폐지, 당수 김창암을 새로운 황제의 대변인 '대막리지' 로 추대한 이들은 왕화의 덕으로서 시베리아, 몽골과 중국 북부의 국가들이 각자의 왕을 모시며 한국과 공영하는 유교주의적 연합(이렇게 개조된 유교는 오늘날 국가유교, 혹은 제국유교로 학계에서 불린다.반공노선을 이유로 주변국들의 군주정에 집착하는것이 특징이다.)인'해동성맹'을 기획하였고, 이 사업의 첫 시작으로 1932년 7월 22일에 한국의 국가전복사태를 꾀하는 공산세력의 배후를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만주 일대에서 출병하여, 1933년 소련과 졸전을 거듭하였으나 지리적 이점으로 간신히 몽골 영토 일부에 '예케 몽골 울루스'를 건국하고, 데므치그돈로브를 칸으로 하는 군주제 괴뢰국으로 삼았다(데므치그돈로브를 비롯한 몽골쪽의 한국 부역자들은 공화정을 요청하였으나,한국 측이 군주제 국가들의 결합체인 해동성맹의 명분적인 이유로 군주제가 아니면 차후 점령한 몽골 일대를 아예 합병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압력을 넣었고, 결국 기존 복드 칸국과 비슷한 사회주의적 입헌군주제를 모델로 예케 몽골 울루스가 건국되었다.다만 김창암 본인은 몽골의 공화정을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3년 뒤인 1936년 12월 25일 한국은 소련을 상대로 한 '반공 성전'을 주장하며 일본의 뒤를 이어 방공협정에 가입, 이듬해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북부 전선에서 동맹인 일본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대항용으로 독일제 장비를 지원받았던 중화민국을 상대로 당시 중국파병군 사령관 김재균()의 지나친 과신으로 인해 졸전하던 중 겨자가스를 비롯한 독가스등의 생화학 병기를 이용하여 '청더시 전투'에서 승리하고 간신히 베이징에 도달한 뒤 일본 육군과 베이징을 양분하였으나, 얼마 후 청더시에서의 학살과 동맹국 일본의 난징대학살을 방관한 문제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당장 몽골과 북경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석유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시작하겠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미국이 이미 일본에게 석유 제제를 시작하였으니 또다른 아시아 석유 시장인 한국에게까지 석유 금수조치를 내리지는 못하리라 판단한 김창암은 석유값이 오르는 걸 감수하더라도 정권 유지의 명목을 위해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석유 가격을 원래대로 낮출 대안을 갈구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전쟁중인 한국에 있어서 대경유전만으로 감당이 안될 수준인 미국의 석유 전면 수출 금지령이 나타나자, 석유 파동으로 흔들리는 민심 때문에 다급해진 김창암을 위시한 대한호국회는 석유 확보를 위해 대량의 석유가 매장된 소련의 시베리아 방면을 공격하는 것을 고려하였고, 조만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리라 가정한 '필승연구소'는 독일로 소련이 불안정해 질 때를 노려서 시베리아를 접수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41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같은해 3월'할힌골 사변'을 시작으로 독일의 유럽전선에 이어 아시아 방면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전쟁 초기 서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으로 인해 전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켜야 했던 소련의 극동 지역 방비 약화,육군대신 홍범도 장군이 고안한 '빙과 작전'으로 바이칼 호 바로 앞까지 어찌어찌 진격한 한국군이었으나, 추위로 인한 문제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세가 약화되면서 극동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소련에게 연달아서 졸전하며 서서히 서시베리아 전선이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43년 2월 서시베리아 전선 대부분이 소련군에게 점거되었다. 시베리아 전선 붕괴와 몽골에서의 실책으로 김창암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나 김창암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기세 좋게 그해 3월 음력 설날을 축하하는 광화문 앞의 민간정치인들 앞에서 '청년한국단'이라는, 대한호국회의 정치깡패들을 소집한 뒤 그들을 매국노로 지목하여 부상, 심하게는 죽을때까지 폭행하도록 명령하고, 이어서 의회를 습격하여 의원들을 폭행 및 구타하는 만행을 벌였다. 허나 이 과정에서 의회에 순방 차 왔던 영친왕이 폭동을 만류하려다가 성난 폭도 중 하나에게 총에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고, 이로 인해 대한호국회는 국민들에게 황실 일원을 살해했다는 충격을 앉기게 된다. 때마침 대한호국회를 못마땅해하던 의친왕 이강과 민주정 지지자인 우남 이승만이 영친왕을 죽인 대한호국회와 김창암은 대한의 미래를 위해서 멸해야 하는 역적이라고 지목하였고, 결국 수도권을 중심으로 약 6주간 영친왕, 이승만의 자유주의 세력과 대한호국회가 총격전을 벌이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황족 시해로 명분을 잃은 호국회에 대다수의 군인들과 민중이 반기를 들기 시작하면서 1944년 12월 5일 김창암을 위시한 호국회 핵심인원들이 일본제국의 지원을 받아 대마도로 망명하였고, 일주일 뒤 공식적으로 총리제도가 다시 부활하면서 대한제국의 파시즘 체제는 막을 내렸다. 새롭게 들어선 이승만 내각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우호적이었고, 황족의 주요인물로 떠오른 이강 또한 미국유학을 한 경험이 있던지라 이들은 진주만 공습 이후 끊었던 미국과의 외교를 다시 회복하는것과 연합국에 참가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것, 12월 31일 크리스마스 회담으로 해동성맹을 해체하는것을 시작으로 국가정상화를 시작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대마도에 망명해 있던 호국회 잔당들도 극동 군사재판으로 투옥되거나 사형되고 난 직후, 한국은 조선 시대부터 개척한 대련 등의 남만주 지방 일부를 제외하고 그 외 모든 영토와, 냉전의 선봉이 될 백러시아정부를 제외한 괴뢰국들을 뱉어낸 뒤, 연합국 점령하 일본의 통치를 포괄하는 '아시아 태평양 GHQ'에게 일부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연합국에 참가했음에도 끝내 내정간섭을 받았다는 국민들의 실망감은 이후 이승만 내각의 몰락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1950년 군정이 폐지되자 김구의 집권을 허용한 선덕제에 대한 반감이 급증하였고, 당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던 성덕제는 전국가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의친왕 이강에게 제위를 양도, 자신은 상황으로 집권할 것을 선언하였다.
  • 대일본제국: 임진왜란의 조기 종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은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결국 휘하 다이묘들이 그의 자택을 야밤에 습격하면서 변을 당해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구심점이 없던 다이묘 반란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주군으로 내세운 이에야스의 세력에 밀려 결국 몰락하였고, 최종적으로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로 히데요리를 팽하면서 원래의 권력 구도가 자리잡았다. 이후 네덜란드 상인을 통한 난학 숙지로 조선과의 연관점이 어느 정도는 생겨서 조선 통신사 말고도 일본에 유학이 전파되는 길이 마련되었으며, 한편 조선은 부산 일대에서 활력이 더 강해진 왜관을 운영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대정봉환 이후 일본은 만주 일대를 이익선으로 보는 조선의 존재로 인해 사쓰마 파벌의 발언권이 더 커졌고, 순나라와의 전쟁 당시 공식적으로 만주를 대한제국의 이권선으로 인정하면서 일본의 확장 전략은 남방, 그리고 북중국을 제외한 남중국 일대로 바뀌게 된다. 이후 포츠머스 조약으로 사할린과 알류샨 열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대공황의 여파로 이미 진출이 준비중이던 남중국 일대를 식민화시키자는 여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31년 8월 14일 푸젠 조차지 인근에서의 병사 실종을 빌미로 대만군이 그 일대를 점령한 뒤, 괴뢰국인 '대명국'을 걸립하고 주원장의 후손인 주인훈을 황제로 즉위시킨 뒤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다. 대명국 수립 이후 한국과 일본은 이듬해인 1932 5월 11일에 '대마도 밀약'으로 중국 분할 계획을 모의하였고, 이 결의는 훗날 중한일전쟁의 시작이 되는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 대순→중화제국: 이자겸의 반란으로 인해 건국된 순나라는 초기에 명나라를 쓰러트리고 가장 강력한 중원국가로 군림하였으나, 경쟁자들의 존재로 인하여 청나라급의 위상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이를 메꾸기 위하여 대만 섬, 북만수 일대즈음으로 진출했던 순나라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어가며, 중화대륙을 전부 다 통일하지 못한데다가 명나라를 붕괴시키기까지 했다는 정통성 문제 때문에 조선을 무시하는 선에서 나름의 번영기를 누렸었다. 그러나 중화사상으로 영국 사절단에게 오베삼고두지례를 강요했다가 2번의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국력이 심각하게 흔들리게 된 상태에서,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도 성과가 그닥 좋지 못하자 결국 열강의 간섭을 피해 대만과 만주 일대로 세력을 확대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후 변법유신으로 나름 개혁의 성과를 내는 듯 하였으나 함대의 수준은 북양함대의 그것보다 질적으로 훨씬 부족하였고, 결국 한국, 일본과의 전쟁으로 이마저도 유명무실해지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종국에는 1911년에 시작된 신해혁명으로 민심이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이윽고 1912년 2월 12일에 황제가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면서 멸망하였고, 이후 대순의 영토는 원새개가 다스리는 중화제국으로 바뀌었으나, 수많은 반발을 산 원새개가 퇴위하면서 제국 체제가 해제되고 이후 각 성들의 독립, 혹은 중화민국으로의 합류로 공중분해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
  • 대명: 1932년에 푸젠사변으로 건국된 일본제국의 괴뢰국으로, 명나라 황실의 직계 후손인 주인훈을 황제로 모시는 통치형태였다. 당시 일본이 주장한 '참중화'사상의 실험장으로서 5개년 경제개발 계획등이 실행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을 비롯한 다른 중국 정부들의 정통성을 부인하였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항복 직후 중화민국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한 뒤 황제가 국가해체를 알리는 칙서를 공표하면서 멸망했다.
  • 백러시아 시베리아정부→러시아 차르국:연해주 일대에 일본과 한국의 승인 아래 건국된 국가로, 1933년 이전까지는 공화국의 형태로 운영되다가 왕화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해동성맹'에 가입하면서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군주국으로 거듭났다. 건국 직후부터 서방세계의 보증을 받아오며 러시아 정통 정부로서의 기반을 다졌으나, 시시각각 소련의 위협에 시달린 결과 소련에 적대적인 독일과의 관계가 긴밀해졌고,이후 한국의 뒤를 이어 방공협정에 가입하였다. 이후 1941년 8월 12일 할힌골 사변 직후 소련에게 선전포고하였으며 동시베리아 일대에서 한국, 일본의 지원을 받아 진격을 시작하였다. 점령지에 간 이들은 남아있던 백군 잔당들과 그 거주민들에게 한국군과 더불어'해방자'로서 칭송받았으나, 43년 3월부터 바이칼 호 전선에서 한국군이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열악해지자 시베리아 원주민들에 대한 본격적인 착취가 시작되었다. 이후 1944년 12월경에 대한호국회의 세력이 한국 내에서 김창암의 대마도 도주로 사실상 증발하였고, 이어서 성덕황제 이인황이 이듬해 3월 흥안 회담에서 총리대신 이승만을 통해 공식적으로 해동성맹의 해체를 공표하며 본토인 연해주 일대를 제외한 동시베리아에서 철군했다. 한편 소련은 카이로 회담에서 백러시아 시베리아정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세계대전 이전까지 소련을 경계할 목적으로 연해주 일대에 넣어둔 투자금이 상당했던 영국이 '연해주 일대는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이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구 러시아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니 구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백러시아정부는 연해주를 영토로 삼는 정당한 국가다'라는 주장을 하여 '러시아 차르국'이라는 새로운 국명으로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다.
  • 후금→대청제국→대한제국령 만주총독부→대금공화국

비록 중국을 공격하는것은 조선과 명의 방해로 실패한 후금이었으나, 쌓아둔 군사력을 기반으로 최소한 만주 땅은 자신들의 영향 아래에 계속 존속시킬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우선 안정화를 위해 중국의 제도들을 도입하는 한편, 진출격로가 막힌 중국방면과 조선을 뒤로하고 연해주 일대를 일찍 점거하는 등 소소한 정복전쟁을 계속 이어나가다가 승하하였다. 이후 몇백년의 시간동안 후금은 서서히 자신들만의 유교 질서를 발전시켜나갔으나, 1689년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겠다며 내려온 탓에 상당한 출혈을 들여 겨우 연해주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재의 피해로 인해 후금의 국력에는 큰 공백이 발생했고, 이어서 명, 조선과의 전쟁때부터 영유권이 불투명하던 남만주 지역이 사실상 조선령이 되어버리면서 추가적인 영토손실까지 발생한 결과 외부의 것을 멀리하자는 만주족 근본주의가 대두되면서 쇄국정책을 펼치기에 이른다. 결국 1875년 대한제국군의 일부가 만주에서 한 군사훈련 도중 금나라 병사들에게 해를 입었다는 명목으로 교전이 발생하였고, 교전 끝에 금나라 군대가 패배하면서 강제로 문호를 열게 되었다. 이렇게 서서히 대한제국에게 경제침탈을 당하기 시작한 금나라였으나, 순나라의 재상 이홍장의 제안으로 불평등조약 폐기를 위해 한국과 일본에게 적대하는 선택지를 취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순나라의 대패였고, 거침없이 심양으로 진격한 한국군이 심양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자, 당시 정국의 주요인물안 광서제는 신료들에게 떠밀려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일시적으로 금나라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어서 점령한 만주 지역에 자희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친한 정권을 수립하여 기세가 등등해진 한국은 만주를 완전히 집어삼키려 하였으나 러시아와 그 우방국들의 간섭으로 조약을 통해 확보한 추가적인 남만주 영토만 인정받았고, 얼마 후 파천을 한 두 지도자가 귀국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 싶었다. 아관파천으로 상황의 변화를 절실하게 느낀 광서제는 국호를 옛 제국의 이름이 될 예정이었던 대청제국으로 바꾸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한국의 침공으로 단단히 약이 오른 자희태후를 위시한 보수파의 개혁방해, 한국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면서 친한파가 되어버린 개혁인사들로 인해 사실상 지지부진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결국 러한일 전쟁으로 러시아라는 뒷배도 사라진 대청제국은 이후 청국통감부의 설치로 주권이 소멸한 뒤, 최종적으로 1910년 을사년 한만협약으로 완전히 대한제국에 병합되었다. 구 청국 황족들은 '예흐나라 추장'이라는 별개의 한국 귀족으로 흡수되어, 사실상 심양성에 유폐된 신세가 되었으며, 이제 완전히 만주를 삼킨 한국은 만주 지역에 총독부를 설치한 뒤, 제 1대 만주총독으로 이용익을 파견하였다.

  • 후송→중화민국
만주
滿洲 | Manchuria under the rule of Korea
국기 국장
내만동체
(內滿同體)
한만합방 이전 해방 이후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만주 인민위원회
상징
국기
태극기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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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전쟁 승전
1930년 한성 진군
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1944년 한성 내전, 헌정 복귀
지리
최대도시
심양부瀋陽府
위치
북만주
국가
대한제국
면적
약 963,000km2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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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4200만
공용어
한국어(사실상 공용어)
만주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만주 문자
민족
한국인, 러시아인, 만주인, 중국인 등
국교
제국유학
종교 분포
만주 신화, 기독교, 유학, 불교 등등
군대
만주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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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유교 파시즘 · 군사독재
국가 원수
대한제국 대황제
통치 수반
만주총독
통치기관
만주총독부
애신각라왕
재첨왕→부의왕
연호
융희 (1908~1928 )→성덕 (1928~1945)
통화
대한제국 원 (圓)


개요

벛꽃이 질때까지

동명의 소설인 높은 성의 사나이 세계관의 설정들을 각색,확대 및 세세하게 정리해보는 문서이다. 배경은 루즈벨트와 처칠의 이른 암살로 인해 연합국이 추축국에게 패배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이 세계에서 각각 나치와 일본제국이 독일령 아메리카와 태평양 합중국 외 지역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리고 이 두 아메리카 점령지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세력

  • 아인하이츠팍트: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에 가맹국들을 두고 있는 아인하이츠팍트는 대게르만국과 그 동맹, 혹은 괴뢰국들이 가입되어있는 국제기구이다. 다만 점거한 영토가 지나치게 광범위한 관계로 보통 '아메리카 팍트'와'유로피아 팍트'로 지부들을 나누어서 부르기도 한다. 대전 이후 원활한 지배를 위해 아메리카의 유대인을 제외한 백인 인구를 모두 아리아인으로 편입시킨 결과, 현재 아인하이츠팍트는 북미 경쟁과, 나아가서 태양계까지 넘나드는 세계 패권 경쟁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 세력이라 볼 수 있다. 아인하이츠팍트의 우주 기술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정점에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우주기지는 현재 달 그리고 화성에 설치되어있는 상태다. 공용화폐는 라이히스마르크화다.
  • 지중해 연맹:3대 국제기구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기구로, 이탈리아 왕국과 스페인 왕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들이 가입되어 있는 집단이다. 주로 지중해권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 일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빈약한 기본국력탓에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과도 격차가 심각할 수준으로 나는, 사실상 아인하이츠팍트의 하청집단 수준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이들의 민주주의 및 자유도 수치는 현재 지구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며 독일과 일본에서 밥먹듯이 일어나는 전화기 도청도 꽤나 드문 편으로 이루어진다. 공용화폐는 지중해 페소화다.
  • 공영권:두번째로 강대한 세력인 공영권은 일본제국이 지도하는 기구다. 본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으나, 호주와 아메리카 서부를 정복한 뒤 점령지에 있는 백인들의 모순성을 고려하여 일시적으로 '공영권'으로 부르는것을 권장하는 중이다. 다만, 1980년부터는 정식으로 서부 아메리카지역과 오세아니아 지역을 문화적으로 동아시아권으로 편입시키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공영권은 나치에 이어 가장 강대한 세력들 중 하나이나, 지도국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 육해군 대립이 괴뢰국들과 식민지에도 반영되어, '아시아 공영권 동맹'과 '태평양 공영권 동맹'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분열이 생각외로 심각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디 우주기술은 없었으나, 1980년대에 우주선 '이나자미'를 달로 발사하면서 우주 진출을 시작하였다. 공용화폐는 일본 엔이다.

주요 국가들

-대독일국 -북미와 아프리카의 자원, 그리고 구 소련의 요충지들과 유럽 국가들의 역량을 빨아들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거듭났다.

주요 식민지 -노르트아메리카 국가판무관부 -미텔아메리카 국가판무관부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

-일본제국

주요 식민지 -제국 대양주 -제국 북방주 -제국 태평양주

그대에게 영원한 승리의 왕관을

개요

우리는 이제, 독일 민족의 정당한 자격인 영지로서의 양지를 마침내 받아내었다. 이제부터 해나갈 일은 이 영지를 영지답게 만드는 일이다.

 
— 벨트쾨니히 총회의 초대 의장 오토 폰 비스마르크 2세

그대에게 영원한 승리의 왕관을 세계관은 2024 1월 13 8일부터[1] 구상을 시작한 세계관이다. 2020년대 제이위키에서 광기의 창작자로서 유명했던 이들의 세계관을 모델로 구상을 시작하였으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발전된 기술 및 미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면서 바뀌게 된 역사를 주로 다루는 내용이다.

내용

낙일상맹

개요

일본은 영미의 식민지가 아니다!!! 에도 막부 만세!!!!

 
— 하야시 리스케, 신센구미 대원

재팬은 미개하여 스스로를 통치할 자격이 없으니 미국의 도움을 받는것이 마땅하다.

 
—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 대통령

낙일상맹은 미국의 자치령이 되어버리게 된 상황에 처한 일본을 다룬 소세계관이다. 너무나 많은 권한을 잡았던 고메이 덴노의 오판으로 인해 일본의 정세가 오히려 더 막장으로 변하면서 졸지에 막부가 존황파를 앞서는 명분을 가지게 되버렸고, 이런 혼란한 정국 속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영미의 패권다툼이 벌어지는 일본 열도를 주로 그리고 있다.

특징 중 하나라면 존황파의 조기 몰락으로, 고메이 덴노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서 오히려 존황파는 일본 내에서 혐오받는 조직 중 하나로 거듭나버린 상황이다. 한편, 조선은 이미 영국의 식민지인 영국령 조선왕국이 되어버렸다.

또 한번의 남북시대(임시명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만주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구성국
국기 국장
강성국가
強盛國家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목란꽃
국조
까치
국수
소나무
[ 펼치기 · 접기 ]
광복 1945년 8월 15일
소비에트 민정청 수립 1945년 10월 3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수립 1946년 2월 16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 1947년 2월 2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9일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국부천대의 고난 종료 및 만주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수립 1958년 1956년 8월 30일
지리
수도
연길시
최대도시
연길시
면적
233,437 km2²
위치
동북아시아 남만주 일대
주변국
대한제국, 둥베이인민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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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3700만명
공용어
중국어, 몽골어, 러시아어, 문화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한글 (법정 문자), 한자, 키릴 문자
민족
조선인 92%
중국인 6%, 그 외 2%
국교
국교 없음 (국가무신론)
종교 분포
무종교 64.5%, 민족종교 16.0%, 천도교 13.5%, 불교 4%, 개신교 2%
군대
없음(만주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연방군인 만주연방군이 대체)
정치 및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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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 공화제, 연방제, 일당제 → 다당제, 양원제,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 원수
연방 최고회의 주석 → 연방회의 수상
정부 수반
(황제)
공화국 연맹의원장
민주주의 지수
163개국중 45위
(결함있는 민주주의)[2]
여당
만주공산당
경제 체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명목 GDP 전체 GDP
1인당 GDP
GDP(PPP)
전체 GDP
1인당 GDP
통화
만주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원 (圓)

정족지세:무쇠솥 아래에서

정족지세:무쇠솥 아래에서는 아침해의 원유관에 기반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아침해의 원유관이 한국과 아시아 방면의 근대 및 최근의 현대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 배경설정 등에 치중해있다면 해당 세계관은 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서사성을 위주로 세계관의 작성을 하고자 기획하고 있으며, 아침해의 원유관의 설정이 어느정도 구비되었다고 판단됬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다.

주 테마는 상하이 안보 조약기구의 중화인민공화국,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미국과 그 동맹인 유럽연합 및 태평양 의정서 기구,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현대에 펼치는 일종의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이며, 이 거대한 대립과 더불어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속 세계의 전경을 묘사해보고자 한다.


  1. 독일 시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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