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우타

블라우타 전투
Battle of Blauta
알니야트 전쟁의 일부
▲ 블라우타를 폭격하는 한타우 육군항공대
장소
알니야트 동부 블라우타 시 일대
기간
1908년 3월 11일 ~ 1908년 6월 28일[1] (~ 7월 12일)[2]
(총 3개월 17일)
교전 세력
알니야트 연합 안타레스 제국
지휘관
빅토르 카미르
르부수스 아틸루아
레오 아르니이엔
레오니트 르브 히니겐
키르부스 에우제니오
로베르 하르뒤르
아나르 에우제니오
결과
알니야트 연합의 전술적 승리
안타레스 제국의 전략적 승리
영향
알니야트의 진격 돈좌, 참호전의 서막
병력규모
알니야트 연합군 안타레스 제국군
알니야트 제1군
알니야트 제2군 일부[3]
65,000명 (전투 개시 시점)
126,000명 (전투 종료 시점)
안타레스 동부 알니야트 주둔군
78,000명 (전투 개시 시점)
183,000명 (전투 종료 시점)
총 병력
143,000명 (전투 개시 시점)
309,000명 (전투 종료 시점)
피해규모
알니야트 군 피해 안타레스 군 피해
사상 19,319 ~ 25,000명
손실 화포 43문
사상 23,123 ~ 35,000명
손실 화포 64문
포로 4,021명
민간인 피해
약 30,000명 ~ 70,000명 사상
총 피해
72,442명 ~ 130,000명 사상

개요

1908년 3월 11일부터 6월 18일까지 알니야트 연합안타레스 제국블라우타 시에서 벌인 시가전이다. 알니야트 군은 예상외의 저항에 부딪히며 초기 공세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고, 결국 1914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참호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전투라 할수 있다.

배경

1908년, 알니야트가 22년전에 빼앗긴 알니야트 동부를 되찾기 위해 안타레스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알니야트 전쟁 발발했다.

알니야트는 당연히 안타레스에게 경제와 인구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니야트는 자원의 대부분이 고갈되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아무리 경제 발전을 이루어 내었어도, 이는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크게 후퇴시키며 이룬 것이고, 서서히 알니야트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을 통해 불만의 목소리를 봉쇄하고, 알니야트 동부를 탈환하여 장기 집권의 토대를 다지기를 꾀하고 있었다.

당시 알니야트 군부는 푸른 깃발 작전을 통해 짧으면 6개월, 길어도 1년 이내에 전쟁을 끝내고 알니야트 동부를 할양 받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미 하카르 산맥의 철광이 고갈될 정도로, 알니야트는 심각한 자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알니야트 최대한 빨리 안타레스 군에 유의미한 타격을 가하여, 종전 협상을 이루고 동부 알니야트를 할양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푸른 깃발 작전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 국경을 기습하여 국경의 안타레스군을 섬멸하고, 안타레스군의 주력군이 도착 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영토를 장악한다.
  • 하길레 강을 따라 방어태세를 굳혀 장악한 영토를 요새화 한다. 이를 통해 안타레스 정계가 평화 협상을 원하도록 유도한다.
  • 알니야트 동부중 점령한 지역들의 할양 받는 평화협상을 채결한다.

2월 3일 오전 4시, 암호명 "하카르 강을 건너라"가 집단군 사령관 빅토르 카미르에게 전달되며, 알니야트는 3개 군단 540,000명의 병력으로 안타레스 국경을 넘어 전진을 시작했다. 기습적인 공격에 방비를 갖추지 못한 안타레스 군은 카다르 전투에서 알니야트 1군에게 격파당했고, 동부에서도 제3군이 국경의 군대를 격파하고 안타레스 본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계속 밀리던 안타레스군도 동부 알니야트 주둔군 사령관 키르부스 에우제니오가 군을 재편했다. 또한, 피에르도 에밀리오가 이끄는 2군이 하길레 강 중류에서 반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키르부스는 제31사단과 제32사단이 블라우타에서 반격할 것을 명령하였고, 따라서 14만여명의 양측 병력이 시가지에서 격돌하였다.

당시 알니야트군은 적들을 후퇴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적들의 전력에 큰 타격을 준 전투는 아직 치루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예상외로 국경에 전개된 안타레스군의 병력이 알니야트군이 집중시켜서 공세에 투입한 병력에 비하여 많았으며, 안타레스의 동원령은 그저 열차가 부족해서 늦춰지고 있던 것 뿐이었다. 즉, 알니야트는 병력 규모로 안타레스에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알니야트군의 진격은 안타레스군의 반격으로 서서히 돈좌되고 있었다.

알니야트 고위급 지휘관들, 특히 대통령이자 군 총사령권이기도 한 아랄프 히르카디우가 제일 조급해 하고 있었다. 알니야트의 국력은 당연히 안타레스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푸른 깃발 작전이 아니라면 곧 증원될 안타레스군이 알니야트를 멸망시킬 기세로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과 맏물려, 알니야트 산업화 당시 신흥 도시로써 젊은 이들과 사업가들이 대거 배출된, 즉 동부 알니야트의 상징과도 같은 블라우타에서 안타레스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는 것은 상당히 상징적으로 작용할 것이었고, 전술·전략적으로도 철도 중심지를 점령하는 훌륭한 성과라 할수 있는 상황이었다.

1908년 3월 1일, 르부수스 아틸루아가 블라우타 공격을 제안, 빅토르 카미르를 거쳐 아랄프 히르카디우가 작전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며 한타우 육군항공대와 1군 소속의 포병대, 병력들을 대거 증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잔인한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전개

블라우타 포격

1908년 3월 10일 오전, 알니야트의 비행선 전대가 블라우타 상공에 나타났다. 민간인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알니야트의 항공대가 나타나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타우 육군항공대는 3대의 비행선을 동원하여 "가능한 적들의 인심을 동요시키고 사기를 낮추라"는 명령에 따라, 도시에 진입한 적들이 참상에 동요함을 유도하기 위해 민간인들에 대한 어떠한 경고 조치도 없이, 11시 경부터 폭격을 시작했다.

폭격은 3시간 가량 이어졌다. 한타우 항공단은 블라우타의 시청과 철도를 돌아가며 폭격하며 광장과 민가에 폭탄을 떨어뜨렸으며, 블라우타 시립 박물관& 도서관에도 폭격을 가하였다.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은 그대로 폭격에 노출당하며,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타우 항공대의 폭격은 밤에도 이어졌다. 폭격이 그친지 2시간째가 되던 10일 23시 경, 항공대는 다시 도시 상공에 나타나 도시 외각에 철도를 폭격하고 다시 민가와 진입로에 대한 폭격을 가하였다.

이후 탄약 부족으로 항공대가 재배치되는 5월 11일까지, 비행선들은 블라우타와 진입로를 보름 간격으로 폭격했다. 또한 도시 근처에 접근해 있던 11사단의 포대가 포격을 가하며, 도시를 위협했다. 수천여명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도시의 진입로가 파괴되어 안타레스군은 진입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이 폭격은 오히려 향후에 벌어질 시가전에선 악수로만 작용했으니, 건물들의 잔해들과 시가지의 특성을 이용한 '껴앉기 작전'으로 알니야트군은 엄청난 손실을 겪게 되었다.

도시 외각의 전투

포격당하는 블라우타

기습 작전 따라, 알니야트의 11사단은 성공적으로 국경에 배치된, 211연대, 212연대, 310연대등을 격파하고 도시 외각으로 진출했고, 마침내 불바다가 된 도시를 제303연대를 선두로 진입을 시작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부대들은 군 복무 부적격자들로 이루어진 제103지원연대였다. 당연히 이들은 육상의 적 목표에 대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순식간에 와해되어 포대를 점령당했다.

알니야트 병사들이 블라우타로 진입하는 철물 공장 앞 대로에 다다르자, 다시금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공군과 포대가 파괴한 것으로 보이던 시가지구에서 갑작스레 안타레스군은 기습적인 반격을 가하였고, 제303연대는 오히려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저항을 확인한 본부는 군을 돌려 우측에서 진입을 시도했지만, 이도 보급 문제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지리에 익숙해진 알니야트 병사들이 좌익의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면서 이를 틈타 제3사단이 틈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211고지를 확보하고 블라우타 외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을 블라우타 점령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같이 보였으나...

전투의 막은 이제 올랐을 뿐이었다.

시가전

시가지의 안타레스 병사들

키르부스 에우제니오의 명령에 따라 방어선의 중핵인 동부 알니야트 주둔군이 제4예비군단을 증원함과 함깨 남동집단군으로 편제되어 외각 방어군과 합륙하여 시내에서 결사의 방어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안타레스의 군대는 무너진 공장과 집을 이용하여 방어거점을 구축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안타레스 집단군 사령부는 이미 블라우타를 전방도시로 지정하고 '안타레스 신민들은 성상 폐하께서 배푸신 자애에 보답하기 위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야만인 침략군을 막아내야 할 것' 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따라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난하지 못하고 남자들은 강제로 징집당하거나 여자들은 진지공사에 동원되었다. 당연히 알니야트의 장병은 도시에 진입한 뒤 장군들의 명령에 따라 이 '적들에 부역한 조국의 배신자들'을 사살할 수밖에 없었고, 다량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알니야트 병사들도 이 전투가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가전에선 알니야트 보병들은 긴 볼트액션 소총을 들곤 몸을 가누는 것조차 어려운 시가지의 폐허에서 소규모 근접 보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알니야트군이 블라우타에 퍼부은 폭격은 오히려 독이 되어, 시가전에서 건물의 잔해들로 인해 차량의 진입을 막는 장애물과, 방어하는 안타레스군에게 많은 엄폐물을 제공하였다.

안타레스 육군은 이에 알니야트군의 손실을 극대화 하기 위해 아나르 에우제니오 소장를 주도로 "껴안기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는 알니야트와 안타레스군이 가능한 알니야트군과 바짝 붙어 전투를 치루는 것으로, 건물마다 하나하나 병력을 배치해 강제로 백병전을 일으키는 시가전 전술을 펼쳐, 알니야트군의 상대적으로 안타레스군에 비해 우세한 화력 투사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알니야트군은 우세한 화력이란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건물 하나 하나에 분대, 혹은 소대단위의 병력들을 파견하여 큰 희생을 치룬 끝에 완전히 건물을 점령한 뒤에나 전진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간신히 알니야트군이 안타레스군을 밀어내기 시작한건 211고지와 일대의 고지들에 화포 130여문이 배치되어 보급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한 5월 9일부터였다. 안타레스의 보급로와 진입로는 포병들의 견제로 접근이 매우 어려워졌고, 시가지 내 안타레스의 병력들은 보급도 받지 못하고 사실상 고립되었다. 결국 로베르 하르뒤르 소장을 주도로 211고지의 포대를 무력화하고 보급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 제32사단과 47사단을 편성하여 고지능선에 대한 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고지전

5월 24일, 안타레스군의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고지전의 막이 올랐다. 안타레스군은 전투병력을 대대단위로 교대하며 파상공세를 펼쳐 203고지, 301고지를 성공적으로 확보하며 능선에 진출에 성공했지만, 안타레스군은 곧 감제고지 211고지에서 쏟아지는 포화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알니야트군의 큰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알니야트군은 안타레스군의 부대 재배치 간격과 사전 포격을 통해 안타레스군의 공세 시점을 정확히 읽어내는데 성공했다. 짧고 집중적인 포격이 있은 후, 안타레스군은 211고지, 311고지와 같은 주요 격전지에 집중적인 공세를 가했지만, 하루종일 이어진 맹공에도 불구하고 안타레스군은 주요 목표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안타레스군은 단 하루밤 세에 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알니야트군이 시가전에서 한달간 입은 피해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안타레스군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32사단은 공세 7일만에 18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공세에 실패했다. 이에 로베르 하르뒤르 소장은 6월 4일, 21사단을 증원하여 다시 211고지에 공세를 가했고 6월 5일에는 일시적으로 정상을 확보하는데에 성공했지만, 곧 알니야트군의 반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키르부스 에우제니오 중장은 피에르도 에밀리오 중장이 증원하기로 결정되어있던 4사단중 4여단를 차출하기까지 하여 이 전력이 합류하기 전까지 적 포대에 포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6월 9일까지의 대규모 포격이후, 안타레스군은 공세를 가하여, 6월 19일까지 양측은 4차례나 고지를 뺏고 뺏는 일을 계속했지만, 결국 승자는 알니야트군이었다.

결국의 대부분의 전력이 소실된 고지 공세군은 남은 능선에서조차 저항하지 못하고 3일만에 점령했던 모든 능선을 빼앗겼다. 양측의 사상자는 14,000여명에 달하는데, 이는 블라우타 전투의 군인 사상자의 4분의 1에 달하는 수였다. 안타레스군은 설치한 대부분의 진지들과 보급품들을 그대로 알니야트군에 내주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블라우타의 향하는 안타레스군의 보급로는 사실상 차단되었다. 알니야트군은 6월 23일, 시내에서 저항하는 안타레스군의 대한 투항시키기 위해 공세를 가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3년 같던 3달의 전투가 마침내 끝을 향하고 있었다.

블라우타의 함락

전투가 끝난 이후의 블라우타
"자애로우신 황제폐하, 자비를 배푸소서. 아군의 장병은 최선을 다하였나이다. 우리를 심판하시되 다만 약간의 자비를 배푸소서."

- 키르부스 에우제니오로타리오 3세에게 패전을 알리기 위해 보낸 전문의 첫 구절.

고지 공세가 실패하고, 결국 시내의 안타레스군은 보급로가 차단된 상태에서도 시가지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결국을 한계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타레스군 수뇌부는 6월 21일 철수를 결정하였다. 안타레스군은 마지막으로 절대 야만인들에게 투항하지 말라는 훈시를 일선에 하달하였으나, 돌격하는 알니야트군과, 오지 않는 보급은 결국 안타레스의 장병들에게 투항 혹은 죽음이라는 생각만을 머리 속에 맴돌게 하였다. 시가전이 종결되는 6월 24일까지, 안타레스 장병 2,104명이 알니야트군에게 투항하였고, 5,103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안타레스군의 철수를 지휘하던, 방어전의 실질적 지휘관이었던 아나르 에우제니오 소장이 안타레스군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직접 보루들에 방문해 상황을 살피던 와중에 실시된 알니야트군의 포격에 의해 전사하였다. 이는 전방군 내에서 가장 신임 받는 지휘관의 사망을 의미하였으며, 안타레스군의 방어 의지를 크게 꺾는 계기가 되었다. 아나르 소장의 지위를 대체한 것은 로베르 하르뒤르 소장이었다. 그는 카다르에서 블라우타까지 퇴각하는 과정에서 무능력함을 보였기에 병사들의 신임을 잃었던 인물이었고, 이후 안타레스군은 알니야트군의 시가지 및 전방 보루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밀려나게 되었다.

알니야트군에게 진작에 포위당하여 철수조차 할수 없던 동지구에서 저항하던 안타레스군 2개 여단의 2,900여명은 블라우타 지하 갱도와 광산에 숨어들어 저항을 계속했지만, 알니야트군이 가죽 벨트를 태워 유독가스를 발생시켜 광산을 공격하자, 결국 살아남은 1,900여명의 안타레스 장병들이 항복하면서, 블라우타 시내에서 안타레스군이 완전히 축출, 시내의 전투가 종결되었다.

이후에도 7월 12일까지 블라우타 인근 지역에서 저항하던 산병들과 일부 보병 병력들이 완전히 축출되면서, 4개월 1일의 전투가 종결되었다.

결과와 영향

알니야트군은 결과적으로 안타레스군을 섬멸하고 블라우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피해는 막심했으며, 알니야트군의 진격은 돈좌되어 푸른 깃발 작전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초 알니야트군의 계획은 1달 안에 블라우타 전역을 접수하고 철도를 확보하여 하길레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가전에서만 장장 3개월을 끌었으니, 계획은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안타레스군은 당장은 전투에 패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오히려 큰 우위를 점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장장 3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알니야트군의 발을 묶어놓는 동안 안타레스군의 동원은 신속하게 이루어져 안타레스군의 병력은 개전 직전 324,312명에서 블라우타 전투 종료 직후에 1,796,440명까지 늘어났다. 안타레스군은 이제 모든 전선에서 알니야트군에 비하여 병력에서 우위였고, 곧 반격이 시작되며 기나긴 참호전의 서막을 알렸다.

스콜피 전쟁

스콜피 전쟁
Skorpii War
세계대전의 일부
장소
베가를 제외한 전 스콜피 대륙
기간
1908년 2월 3일 4시 ~ 1949년 11월 19일 14시 30분
교전 세력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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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영향
병력규모
총 병력
피해규모
민간인 피해
총 피해

카파리

카파리 전투
Battle of Kaparrii
알니야트 전쟁의 일부
▲ 전선의 안타레스 장병들
장소
알니야트 북동부 카파리, 하길레 강
기간
1910년 9월 18일 ~ 1912년 12월 21일
(총 2년 3개월 3일)
교전 세력
알니야트 연합 안타레스 제국
지휘관
로테리히 에리히
르부수스 아틸루아
레오 아르니이엔
막스 르브 가르비우츠
조제프 자크 세제르
키르부스 에우제니오
로베르 하르뒤르
페르디르 데'히르부르드
아우귀스테 헤에르
결과
안타레스 제국의 승리
영향
알니야트 공세종말점 도달
안타레스 내 반전여론 대두
병력규모
알니야트 연합군 안타레스 제국군
알니야트 제1군
알니야트 제2군
330,000명 (전투 개시 시점)
1,126,000명 (전투 종료 시점)
안타레스 남동집단군
420,000명 (전투 개시 시점)
1,283,000명 (전투 종료 시점)
총 병력
750,000명 (전투 개시 시점)
2,409,000명 (전투 종료 시점)
피해규모
알니야트 군 피해 안타레스 군 피해
사상 331,000 ~ 517,000명
포로 400명
사상 448,000 ~ 584,000명
포로 1,900명
민간인 피해
약 50,000명 ~ 100,000명 사상
총 피해
829,000명 ~ 1,201,000명 사상

"인류가 미쳤다. 지옥조차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순 없을 것이라.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이 무참한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에 절여진 피의 주검들을 보라! 더 이상은 우리의 말로는 표현할 수조차 없다. 인류는 완전히 미쳤다!"

- 안타레스 육군 중위 알프레드 키프르 소위의 일기장 中
"그들은 단 한 발 자국도 지나갈 수 없다."

- 안타레스 남동집단군 사령관 조제프 자크 세제르의 훈시

개요

알니야트 연합안타레스 제국이 사이에 1910년 9월 18일부터 1912년 12월 21일까지 벌어져, 결과적으론 안타레스가 승리한 전투.

하카르 전투와 더불어 알니야트 전쟁의 가장 유명한 대전투 가운데 하나다. 특히 소모전의 시초이자 참호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나타내며 공격자와 방어자 양측 모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살육을 강요했다.

이 전투로 알니야트는 완전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지만, 안타레스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소모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참호전을 이어가게 된다.

배경

알니야트의 푸른 깃발 작전이 국경 전역과 함께 실패로 돌아간 이후, 전 참모총장 르부수스 아틸루아를 대신하여 취임한 로테리히 에리히 장군은 1908년과 1909년의 대대적 안타레스군의 반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서부에선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수세로 일관하며, 동부에선 안타레스군은 포위, 섬멸하며 동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레스군은 우월한 해군전력으로 알니야트의 동부와 서부를 모두 봉쇄하였고, 알니야트군은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안타레스군을 소모시키고 전선을 붕괴시킬 것을 기대했다.

따라서 "도살장 작전"이 입안되었다. 이는 기습으로 안타레스군이 절대로 내어줄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만 점령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면 안타레스군이 그대로 무차별적으로 공세를 가할 것이라 예상했고, 이를 안타레스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며 알니야트군이 이를 격퇴하기만 하면 되었다. 작전의 이름 그대로, 안타레스군을 도살하겠다는 것. 이를 통해 전선을 돌파하고 안타레스군의 수도를 점령하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 기대했다.

알니야트 사령부는 작전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되었을 경우에 적과 아군 피해 비율을 5:2로 상정하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되었으며, 알니야트군 참모본부는 안타레스군에게 최대한의 병력 손실을 강요할 장소로 요새 지대이자, 안타레스군의 자존심, 역사적 상징이기도 한 카파리 계곡을 선택, 공세를 펼치게 된다.

1909년은 안타레스군에 있어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해군과 함께 진격하여 쉬운 승리가 예상된 서부전역은 Q 해안포대 전투에서 알니야트군의 반격으로 해안작전이 실패하면서, 안타레스군의 빠른 라보 점령은 실패했고, 동부전역은 그야말로 재앙적인 패배였던 아슬리아 전투에서 남동집단군의 9분의 1에 해당하는 4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34,800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사가 일어났다.

전개

하카르

하카르 전투
Battle of Jhakkar
알니야트 전쟁의 일부
▲ 전진하는 알니야트 화염방사병
장소
알니야트 중북부 하카르 산맥
기간
1912년 2월 11일 ~ 1913년 5월 5일
(총 1년 2개월 25일)
교전 세력
알니야트 연합 안타레스 제국
지휘관
빅토르 카미르
레오니트 르브 히니겐
레오 아르니이엔
르부수스 아틸루아
라피아 노르게르트
키르부스 에우제니오
로베르 하르뒤르
이온 바멘하임
아풀르 리가르트
게오르주 에콜르
결과
안타레스군의 공세 실패
영향
안타레스군의 인력부족 본격화
알니야트군의 카파리 공세 중지
병력규모
알니야트 연합군 안타레스 제국군
알니야트 제2군
알니야트 제3군
203,000명 (전투 개시 시점)
1,033,000명 (전투 종료 시점)
안타레스 남동집단군
497,300명 (전투 개시 시점)
2,185,700명 (전투 종료 시점)
총 병력
700,300명 (전투 개시 시점)
3,218,700명 (전투 종료 시점)
피해규모
알니야트 군 피해 안타레스 군 피해
사상 418,000 ~ 591,000명
포로 200명
사상 978,300 ~ 1,318,300명
포로 37,900명
민간인 피해
60명 ~ 30,000명 사상
총 피해
1,396,300명 ~ 1,839,300명 사상
"그날이 밝았다! 자신감을 가지고, 제국 만세!"

  1. 시내의 모든 안타레스군의 항복 기준.
  2. 안타레스군 잔존세력이 완전히 블라우타 인근에서 축출 기준.
  3. 18사단의 일부가 독립 여단으로 편제되어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