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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의 천하관(영록어:英鹿 エ 天下觀)은 중국의 화이관(華夷觀)을 중심으로 한 책봉·조공 관계의 반발에서 시작된 질서 변동의 과정이었다. 일반적으로 영록(英鹿)은 중원을 차지한 국가들과의 실속 관계를 중시하였고, 고대 사회에서 선진 문물을 갖추고 있던 중국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위해 스스로 조공하는 경우도 많았다. 허나 중원 국가들의 잇따른 몰락과 재구축의 과정 자체를 '무분별한 혼란'으로 판단한 지식인 계층 사회에서는 다원적인 국제 관계의 과정 외에 자국 내에 변방 이민족 혹은 사회를 통해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고자 했고, 그것이 천하관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견수사와 견당사

6세기 말, 중원 사회가 수나라(水國)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시점일 당시, 에이슈 지방(英州地方)에서는 하나아루 하누센(壹乙天孫, 567년~630년)의 치세가 중기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당시 하나아루 하누센백제(百濟)를 통해 유입된 불교를 중앙집권제를 통한 왕권 강화에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왕실 일가의 불교 귀의 및 포교 과정에서 귀족층과의 갈등으로 류타바나국의 난(ルュタパナ國 エ 亂, 586년)같은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나아루 하누센은 여러차례 혼란상을 극복하고 칸토지루(カント寺), 만노지루(マンノ寺) 등의 불교 사원들을 건립하여 만에루 시대(滿開時代)의 융성을 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중흥 과정에서 하나아루 하누센수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직접 조공을 바침으로서 중원 국가들과의 국제 관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이를 이용하는데 혈안이었다. 그는 견수사 일행을 통해 유입된 율령 제도를 통해 '2성 6관제'와 선거제(先擧制, 과거제의 전신)를 비롯한 중국 문물들을 대거 수용하게 되었고, 한반도를 통한 간접 교류에서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꾀함으로서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후 수나라의 뒤를 이어 당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자, 하나아루 하누센의 장남이자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로 인정받고 있던 히치노코에 하누마리(筆ノ声天下)가 대권을 장악하고 629년의 당나라에 입조하고자 견당사를 파견했다. 이때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의 방문한 기나사비(道士)[1] 안노에(アンノエ)[2]가 여러 불교 서적과 도교 서적을 구법해 오게되어 민간 신앙과의 융화가 진행되었다.

허나 8세기 무렵부터는 안사의 난(安史之亂)으로 혼란에 빠진 중원 사회를 바라보면서, 왕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기존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등용되었던 관료 지식인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키우고, 자국만의 독특한 문물을 확립해 나갈 것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쿄 하누센(元公天孫)은 강대한 왕권을 바탕으로 기존 선왕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모쿄 중흥비(元公中興碑)를 건립할 것을 추진했다. 허나 단순히 이 비문은 군주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만이 거론된 것이 아닌, 본격적인 영록만의 천하관이 제시되기 시작한 것을 알려주는 이정표의 역할까지 도맡게 되었다.

천하관의 형성

영록서기(英鹿書紀, 714년)」와 모쿄 중흥비를 통해 영록의 천하관이 중원의 천하관과 대비되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원에서 의미하는 '천자'(天子)의 개념은 하늘(天)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봉선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신분을 말하였다. 허나 영록의 사료들을 통해 영록의 임금을 천하지손(天下之孫) 혹은 해제지손(海帝之孫)이라고 부른 것으로서, 영록의 군주가 하늘의 직접적인 혈연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중국의 천자가 하늘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성격이 강한 제사장이라면, 영록은 하늘의 후손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앞세웠다.

...告河曰 我是天帝子 天下之孫...
...(무코우가) 물을 보며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천하의 손자이다."...

 
영록서기 권 제2(卷第二) 무코우 하누센

모쿄 하누센은 이러한 권위를 앞세워 '다사쿄'(ダサキョ, 月祭)라고 하는 하늘의 제사를 지냄으로서 독자적인 천하관의 주인임을 과시했다.[3] 또한 에이슈 지방(英州地方)을 중심으로 '자닌'(ジャニン ,殘人)이라고 불리는 이민족 집단[4]들을 천하관 내에서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속민(束民)의 영역으로 여기면서 지속적으로 군사 행위를 통해 영토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각주

  1. キナサビ, 당시에는 도교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종교계에서 힘을 쓰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의미 확대가 일어났다.
  2. 지카호(ジカホ, 영록어의 고대 문자 표기)로는 안난병(案鸞柄)
  3. 일반적으로 하늘의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황제국(皇帝國)만 가능한 일이었다.
  4. 당대까지만 하더라도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던 마에토 지방(マエト地方)과 토라 지방(度羅地方)의 원주민들을 일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