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난의 역대 대통령
신센 시대
신센 막부 역대 쇼군
1대 2대 3대 4대
나가야 쿄타 오토리 아시스케 타가와 미에나리 오누치 시다요리
난세이 시대 역대 대통령
오누치 시다요리
(일본어: 五塁地下頼)
파일:五塁地下頼.jpg
오누치 시다요리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오누치 시다요리
(五塁地下頼)
주요 직책 타이난 공화국 대통령
타이난 공화국 총사령관
생몰연도 1845년 2월 17일 ~ 1909년 4월 17일
임기 기간 타이난 공화국4대 대통령
(1887 ~ 1892)

오누치 시다요리(일본어: 五塁地下頼)는 타이난 공화국의 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최초로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었으나, 전전(戰前) 일본의 폭주하는 군부와는 달리 타이난 군부를 오로지 조국과 국방의 방위를 위해서만 동원토록 할 것을 결의하면서 문민 통제를 강화하였다.

초기 생애

모라토쿠켄 출생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를 따라 조정파 엘리트 군인 출신으로서, 막부군 기병대장으로 시작해 막부군 부지휘관까지 무난하게 출세해오다가 공화 혁명이 발생하자 혁명을 진압하려다가 당시 막부와 조정의 항복으로 진압은 물건너 가게 되었고, 이후 공화 정권이 수립되자 몰락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나가야 쿄타의 요청에 따라 융장군을 이끌기도 했으며, 타이난 공화국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자 초대 총사령관으로서 국군을 지휘하였다. 오토리 아시스케 정권 당시에 추진된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 확장 당시의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1882년에 하의원(下議院)의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의외의 대통령 당선

1887년, 타가와 미에나리 대통령이 퇴임하자 정치권은 후임 대통령 선출을 놓고 고민에 빠졌는데, 공화파 엘리트 출신의 미츠타리 카즈마와 비 공화파 출신의 자수성가했던 다케우에 미노루를 두고 정치권은 분열되었다. 기존의 공화 혁명 참여자 및 출신들은 미츠타리 카즈마의 당선을 기도했고, 반대로 엽관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했던 이들과 일부 공화파들은 다케우에 미노루를 지지했다.

한편 일부 군인 출신 정치인들과 비 공화파 인원들은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한 이미지를 고수하며 조용히 지내던 시다요리를 대통령으로 세울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계에서 양파간의 싸움이 강화되는 와중에 오히려 그 싸움에서 한발 물러나는 듯한 이미지를 고수하던 사다요리는 차근차근 부족했던 지지층을 모으고, 공화파 중심 독주 정치에 문제에 무관심을 표하던 계층이나, 양파의 싸움에 지루함을 느끼던 약한 지지층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시다요리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 효과가 있었다. 본격적인 포퓰리즘 정치의 시작을 알리던 시점이라 시다요리의 '평범한, 중간의 사람'이 다른 어떤 강한 단어보다 민중의 폐부를 찌르는 단어로 작용하여 시다요리쪽에 유리한 영향을 주었고 결국 당선까지 되며, 이는 역대 대선의 목표 중 당시 민중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글귀로 꼽힐 정도였다.

조용한 5년(静かな午年)

시다요리의 글귀대로, 그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했던 5년은 매우 무난하고 조용히 진행되었다. 시다요리는 정권의 불만을 품은 이들을 다독이면서 혼란스러운 정계 상황을 일단락 시키기 위하여 공화파 출신의 정치인들과 엽관제 출신의 정치인들로 정권 인사들을 구성했다. 그의 뜻대로, 공화파와 엽관파는 일시적인 정계 휴전을 통해 정권 운영에 치중하였다.

그러는 한편, 포퓰리즘의 시작인 전임 대통령의 재임기와 난세이 시대의 시작인 후임 대통령의 재임기의 사이에 존재했던 시다요리 정권은 별다른 행적이나 일 없이 워낙 '평범하게' 지나갔기 때문에 공화정 시기를 공부하던 이들도 오누치 시다요리 정권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어떻게 이끌어졌는지는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사다요리 정권 시기에는 내각 중심의 공화제가 안정화 되던 시기이면서도 19세기를 마무리하는 1890년대의 진입로에 있던 격동의 시기이다. 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팽창 정책의 극대화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이 맞물리기 시작했던 기로에 놓여있던 시다요리 재임기는 당시 시대와는 역설스럽게도 오히려 군축을 장려하면서 군부의 지나친 정계 진출 시도와 폭주를 방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그가 군인 출신이자 일본의 군부 상황에 빠삭한 인물이었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문민 통제를 통해 현직 군인들이 의회 의원직이나 정권의 임용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으며, 군사 정책을 수립하고 통제하는 군무성 장관은 오직 퇴직 군인 출신의 문인에 의해서만 한했다.[1]

대외적인 면에서는 온건 팽창 정책을 지향함에 따라 이오 섬(硫黄島)의 항공 기지를 설치하여 오가사와라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방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지금의 아그리한 섬페이간 섬을 임대했던 아돌프 카펠(Adolph Capelle)에게서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두 섬을 매입하면서 타이난령 대양군도의 발판을 다지기도 했다.

조용한 5년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타이난 최초의 환경재해로 불리는 미라이키 유독 사건이 시다요리 재임기에 발생했다. 다나카 메이란(田中明蘭)이라는 현직 의원이 사임을 표하고 미라이키 사건을 해결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시다요리에게 호소하려고 하다가 공무방해죄로 수감되었다는 것을 들은 시다요리는 처음으로 '대통령 특별 사면'을 통해 그를 지원하였고, "미라이키 사건은 신속히, 빠르게 처리하길 바라네.(未來期 事件は迅速に、速やかに処理することを望む。)"이라고 표명하면서 정부가 직접 사고 처리에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다카우에 미노루의 재임기 때 완수되었다.

사후와 평가

1909년, 고향에서 사냥을 하던 중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치면서 중태에 빠졌고,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대통령 중 최초로 '사고'에 의하여 숨을 거둔 인물이었기에 당대의 주요 정치인들과 민중들은 안타까운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내각체제의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인물이었지만 다른 신센 시대 대통령들 보다 인지도나 평가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잇따른 학계 논문 발표로 수면에 떠오르면서 재평가 되고 있다.

각주

  1. "퇴직 군인" 출신의 문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문민 통제를 통해 군부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군부의 실정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들을 억누를 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시다요리는 퇴직 군인에 한해서 군무성 장관 직책에 임용했는데, 실제로 시다요리 이후에 군무성 장관들은 군부의 폭주를 제압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