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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신지로
小沢次郎
기본 정보
직책 첨관 첨관국무총리
1994년 6월 10일 ~ 1997년 12월 31일
2008년 3월 6일 ~ 2010년 9월 16일
출생 1941년 10월 1일
타치바나 현 누마루 시
사망 2038년 2월 15일 (96세)
국적 첨관 첨관
학력 육군부사관학교 (6기 / 졸업)
타치바나대학 (정치외교학 / 석사·박사)
신체 171 cm, O형
병역 첨관 육군 원사 만기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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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의원 선수 10
의원 대수 5, 6, 7, 8, 9, 10, 11, 12, 13, 14
소속 정당
무소속
[ 소속 정당 변천사 ]
첨관국민단결기구 (1971 ~ 1984) →
신첨관민주당 (1984 ~ 1992) →
선진자유당 (1992~1998) →
국민연합-자유당 (1998~2010) →
무소속 (2010~2038)
지역구 타치바나 6구 (1971~1984)
센칸토 8구 (1984~1992)
센칸토 1구 (1992~2004)
타치바나현 3구 (2006~2008)
센칸토 20구 (2008~2012)
경력 첨관국민단결기구 대표
신첨관민주당 대표
선진자유당 원내대표
국민연합 대표
남국일보 논설가

개요

오자와 신지로 (小沢次郎)첨관의 전 정치인이자 수필가, 논평가, 저술가이다. 첨관의 군부정권시대-민주화시대-2000년대를 관통한 정계의 거물이였으며, 관제야당으로 시작한 정치 경험 이후 정계에서 2인자로 남는 일이 많아 "영원한 2인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생애

군인 시절

1941년 일제강점기 당시 첨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출세를 위해 군인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1960년 육군부사관학교에 입학했고, 타치바나 동향 출신 동기들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후 1963년 재학 중 동향 출신이던 마에바라 신이치2.14 발렌타인 쿠데타가 일어나자, 동기들과 함께 부사관학교 생도들의 지지성명을 마에바라 신이치에게 올리고 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마에바라 신이치의 주목을 끈 오자와 신지로는 1964년 졸업 후 부사관이 되었으며, 병사들을 우선으로 생각해 솔선수범하거나 복지 분야에 신경을 쓰는 등의 행보를 보여 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마에바라 신이치에게도 들어갔으며, 평소 눈여겨보던 고향 후배가 좋은 평을 받자 신이치는 신지로를 등용하고 키우기로 한다.

정계 입문과 첨관국민단결기구 대표 시절

마에바라 신이치는 국회에서 관제야당을 몇개 풀어두고 있었는데, 이 중 첨관국민단결기구를 이끌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다. 신이치는 오자와 신지로를 그 인물로 발탁하고 몸소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신지로는 감격하며 그 제안에 응했고, 1971년 전역한 후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관제야당인 첨관국민단결기구의 당수가 된 신지로는 당연히 마에바라 신이치에 협조했지만, 때때로 뼈 있는 충고를 하며 반대표도 날리고 충직한 제언을 하며 마에바라 신이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관제야당을 이끌며 신지로는 '외부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신첨관민주당 대표 시절

이후 1984년 마에바라 신이치가 급서하고 료우에 리치요가 정권을 이어받았고, 오자와 신지로는 료우에 리치요에 의해 관제야당인 신첨관민주당 당수로 등용된다. 군부 출신이고 관제야당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오자와 신지로는 료우에 리치요를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며, 너무 빡빡한 그의 사상과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신첨관민주당 당수가 된 후 오히려 기존 민주화운동가 출신을 영입한 뒤 관제야당이 아닌 '정말 제대로 된 야당'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당황한 료우에 리치요는 오자와 신지로에게 압박을 가했으나 오자와 신지로는 "나도 신이치 각하의 장자다"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던 형편이여서 오히려 맞설 수 있었다. 또한 군부 내 인맥도 풍부했기에 독자적인 세력도 나름 있었다.

그 결과 1984, 1988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선거제도 속에서도 50석 내외를 확보하는 선전을 했다. 다만 료우에 리치요와 거래를 통해 일종의 선을 넘지 않는 대신 묵인을 받았다는 의혹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후 1992년 신정혁명이 발생하자 시위대측 지도자였던 사토 에이치와 대담을 하였고, 그 후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며 신첨관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료우에 리치요의 퇴진을 주장하였다.

선진자유당 시절

민주화 이후 사토 에이치가 세운 선진자유당에 신첨관민주당계를 이끌고 입당해 자신의 계파인 신지로계를 이뤘다. 당시 군부 출신이 입당한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나 료우에 리치요 시대 야당 운영 능력과 친 민주화운동 성향을 보였다는 점이 인정되어 입당 자체는 승인되었다. 또한 본인의 성격 자체도 강경보수가 아닌 유들유들한 보수 성향이였기에 입당 이후 당내 충돌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사토 에이치와 함께 선진자유당의 양대 축을 이루며 국무총리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토 에이치와 결별하게 되는데, 사토 에이치는 자력으로 해결하자는 주장이였으나 오자와 신지로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자는 주장을 하며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둘은 결별을 선택했고, 1998년 오자와 신지로는 자신의 계파와 타치바나 지역 의원들을 이끌고 선진자유당을 탈당했으며 국민연합을 창당하였다.

국민연합-자유당 시절

그 뒤 2000년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오토다시 히케모토에게 밀려 2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선진자유당을 누르고 보수 정당 의석 수 1위를 차지하며 보수 정당의 적장자가 되는데는 성공했다. 대통령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신지로는 2003년 민주당 내분 사태가 일어나자, 반히케모토 성향이던 평화당과 접촉해 오토다시 히케모토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도박을 던지게 되며 국민연합-평화당을 중심으로 히케모토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성 위반 발언과 선거 조작 의혹, 정적 비방 등을 하였다며 그 증거를 제출해 압박했다.

하지만 후에 이것이 과장과 날조로 이루어진 자료임이 폭로되고, 국민적 여론이 다시 히케모토 대통령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자 비난의 화살은 국민연합-평화당으로 날라가 결국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 무효 선언을 하며 히케모토 대통령은 복귀하였고 오자와 이치로는 정치적 도박을 대실패로 끝내게 된다. 또한 2004년 13대 총선 센칸토 1구에서도 정치경험이 자신보다 한참 적던 미케츠카미 소시에게 낙선하며 정계 은퇴의 위기에 몰리게 되며 큰 실패를 맛보았다.

낙선 이후 조용히 칩거하며 재기를 노리다가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타치바나현 3구에 출마하여 다시 국회에 복귀하였으며 정적이였던 오토다시 히케모토를 다시 비난하며 지지율을 하락시켰다. 이후 2007년 다시 국민연합 대표가 되었으며 2008년 14대 총선을 국민연합의 압승으로 이끌며 다시 일어서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통령이 되는데는 실패하였는데, 경선에서 리노우에 케이이치와 맞붙었다가 큰 차이로 지지율 차이가 나자 대결을 피하고 케이이치 지지 선언을 하는 대신 국무총리 자리를 약속받으며 꿈을 다음 기회로 접었기 때문이다. 그 뒤 약속대로 2008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2010년 최측근이던 니우에 마치로가 뇌물수수 혐의로 잡힌 뒤 당에게서 꼬리자르기를 당해 당선무효가 된데다가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계파가 공천학살을 당하자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리노우에 케이이치에게서 배신을 당하여 국무총리 자리에서 짤리고 만다.

그 뒤 2011년 탈당하고 자신의 계파 출신들을 15대 총선에 대거 출마시킨 뒤 자유당과의 전면대결을 계획했으며, 본인도 센칸토 6구에 출마하며 복수를 결심했으나 모두 줄줄이 낙선하고 자신도 3위로 낙선하면서 대실패로 끝난다. 결국 낙선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끝까지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2인자로서 정계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센칸토같은 격전지에서는 고춧가루를 뿌려 자유당의 의석 수를 감소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이후 회고록과 수필, 논평, 각종 저서를 쓰며 수필가, 논평가, 저술가로 지내고 있다. 또한 리노우에 케이이치와 자유당에 대한 분노가 아직도 남아있는지 2018년 이후 논란이 되고 있는 리노우에 케이이치의 유령회사 의혹에 대해서도 앞장서며 폭로하고 있으며 "즉시 수사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미케츠카미 소시 대통령을 공개지지 선언하며 2016년 16대 총선 이후 "난 민주당 뽑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9년 현재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리노우에 케이이치의 유령회사 의혹에 대해서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그래도 정계의 거물이였던지라 미케츠카미 소시 대통령이 초청하여 정견을 듣는 등 아직은 정계에서 고문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2018년 3월 사토 에이치 전 대통령이 건강 위독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병문안을 갔고, 약 20여년만에 이야기를 나누며 화해를 했다. 병간호도 해주며 나름 앙금을 풀었다고 한다.

선거 이력

소속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