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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민주공화국
亐陵民主共和國

1979.10.291983.9.5
국기
정치
공용어 한국어, 문화어
정부 형태 신정국가, 사회주의 공화국, 괴뢰 정부
위대하신 령도자 리명택
역사
 • 북한의 울릉도 침공 1979년 10월 28일
 • 공화국 설립 1979년 10월 29일
 • 일본-울릉도 전투 1981년 1월 7일
 • 대한민국에 의한 멸망 1983년 9월 5일
인구
1981년 어림 약 19,439 명
기타
국교 주체사상
통화 주체 (ULJ)


울릉민주공화국은 울릉도에 4년간 존재하였던 사회주의 국가이다. 동해 중앙에 위치해있으며,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고있었다.

역사

북한의 울릉도 침공 (1979.10.26-1979.10.2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정국이 어수성해지자 북한 정부는 세력을 확대할 목적으로 울릉도 및 독도 침공을 계획했다. 김일성 주석은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울릉도 괴뢰화를 위해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소련군 4500여명이 울릉도 침략을 위해 파병되었다. 그리하여 1979년 10월 28일 북한 특전사 100여명, 전차병 130여명, 포병 30여명, 보병 3000여명과 소련군 전차병 20여명, 포병 3명, 보병 4000여명이 울릉도를 침공하였다.

1979년 10월 28일 새벽 4시 급작스러운 북한-소련 연합군대의 침공으로 울릉도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특히 소련쪽 진공 방향과 가까웠던 북면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대한민국 울릉도 수비부대는 북한-소련 연합군대를 공격하였으나 소련군을 막을수 없었다. 소련군 4500명은 북면에 상륙하였고 북한군 3600여명은 서면에 상륙했다. 울릉 수비부대는 대부분 항복하거나 전사한 상태였다. 울릉도 주민들은 울릉군청에서 시민군을 조직하고 북한군과 맞서 싸웠으나 10월 29일 1시 소련군의 군청 헬기 사격으로 시민군 230명이 사망했다.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측 군인 12명과 민간인 278명이 사망하였으며 북한-소련군측 군인 15명이 사망하였다.

공화국 수립 (1979.10.29-1979.11.3)

1979년 10월 29일 오전 9시 모든 울릉도의 지역이 함락되었다. 1979년 10월 29일 오후 3시 신헌법 발표와 신 정부가 창립되었다. 국명은 울릉민주공화국(亐陵民主共和國)이며 1대 령도자로 리명택이 선출되었다. 1979년 11월 1일 울릉민주공화국을 찬성하냐는 1979년 울릉도 국민투표가 치뤄졌다.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한 선거 결과로 78%의 찬성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서 1979년 11월 3일 공화국이 완전히 수립되고 리명택이 령도자로 집권했다.

일본-울릉도전투 (1981.1.7)

1980년 12월 7일 울릉인민군이 군사훈련도중 순찰하던 일본 헬기를 피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항의하였으나 울릉도 정부는 이를 단순한 실수로만 여기며 형식적 추모만 하고 넘어가려하였다. 나카소네 일본 총리는 이런 극악무도한 공산주의자의 폭력적 행위를 용납할수 없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에 받아쳐 12월 20일 리명택 령도자는 인민담화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1910년에는 우리를 병합했으면서 겨우 헬기를 폭파했다고 쌩 난리를 피운다며 비난했다. 일본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울릉도에 대한 인식중 매우 부정적이 93.43%, 부정적이 5.03%로 총 98% 이상이 울릉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이런 괴뢰 울릉도의 행태를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며 대울 선전포고를 했다. 1981년 1월 7일, 일본의 전함 2대가 울릉도 영해에 나타났고 울릉인민군은 비상경보를 내리고 총력전을 준비했다. 울릉인민군은 소련에게 지원받은 대포와 전차로 일본의 전함을 공격하였으며, 대공미사일로 일본 전투기를 파괴하는 등 수비를 하였다. 3시간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헬기 1대와 초계기 1대의 손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리명택 령도자는 1월 9일 인민담화에서 인민들의 굳은 의지로 일본군을 이겨냈다고 발표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이 사건으로 사퇴하였고 일본 자유민주당의 지지율도 급속도로 하락하여, 1950년대부터 30년동안 이어진 자민당의 일당 체제가 종말되는 계기가되었다.

멸망 (1983.9.5)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무참히 진압한 전두환 정부의 국민적 지지도는 매우 낮았다. 더군다나 1983년 2월 김대중이 출소 이후 김영삼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자 전두환 정권은 위기감에 지지율을 높일 수단을 찾아야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1983년 9월 북한에 의해 점령된 울릉도를 다시 되찾겠다고 선언하였다.

1981년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과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는것에 동의하고있던 미국의 레이건 정부도 이에 동참하여 한미일 동맹군이 결성되었다. 한미일 동맹군은 1983년 9월 5일 새벽 3시 울릉도를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은 35분만에 종료되었고 기습적 폭격을 받은 리명택 정부의 구성원들이 전원 북한으로 도주하는것으로 사실상 울릉도 정부는 무너졌다. 동시에 울릉군민이 혁명을 일으켜 울릉도 전역에서 인민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정치

울릉민주공화국은 명목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재 신정주의 국가에 가까웠다. 울릉민주공화국 주체헌법 3조 1항에서 모든 권력은 인민과 인민을 대표하는 령도자에게 있다고 쓰여져있다. 지도자인 령도자가 사실상 사법, 의회, 정부의 역할을 모두 맡아서 하였다. 선출 방식은 1년에 1번씩 선거인단으로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마지막 선거는 1983년 울릉도 령도자 선거였다. 선거인단은 100여명으로 이루어졌고 자격은 울릉 사회로동당 당원이라면 가능했다.

울릉민주공화국은 다당제를 표방하여 여러 정당이 있었으나 사실상 유일 합법 정당인 울릉 사회로동당의 우당에 불과했다. 주요 정당은 이러했다.

경제

울릉민주공화국의 평균 국민소득은 1900불이었다. 주요 산업은 어업이었으며 주로 북한에 수출하여 돈을 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