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네네 위기
Umbenéné Crisis
Crise d'Umbenéné
Vita vya Uhuru wa Umbenene

벨포르령 움베네네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벨포르 육군 소속 전차대
날짜1958년 3월 1일 - 1960년 8월 25일
장소서아프리카 지역, 벨포르령 움베네네
결과

벨포르 공화국의 군사적 승리
움베네네 저항 전선의 정치적 승리

교전국
벨포르 공화국 벨포르 공화국
움베네네 저항 전선
지휘관

벨포르 공화국 장샤를 루블란
벨포르 공화국 필리프 드 브로이
벨포르 공화국 필리프 보방
벨포르 공화국 프랑수아 메스메르

벨포르 공화국 쥘 라파랭
벨포르 공화국 귀스타브 도리오
오마르 투레
장샤를 아리스티드
아르만도 데지레
병력
벨포르령 움베네네 주둔군
350,000명
움베네네 저항 전선
200,000명
피해 규모
26,000명 전사
51,000명 부상
18,500명의 시민 사망
140,000명~150,000명 전사

움베네네 위기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벨포르 제5공화국과 움베네네 무장 독립 세력이 벌인 전쟁으로, 결국 움베네네는 벨포르 공화국으로부터 조건부 독립을 얻어내게 된다. 이 전쟁은 탈식민지화에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게릴라전, 민간인에 대한 테러, 양측의 고문 자행, 벨포르 주둔군의 대테러 작전 등 복잡한 성격을 보인 전쟁이었다.

원인

서아프리카 지역의 움베네네 지역은 예로부터 유명했던 금 산지이자 석유 산지로, 그 때문에 벨포르는 옛날 제정 시대부터 움베네네 지역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주변 열강들의 견제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벨포르는 1880년에 세르당에서 움베네네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세르당 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벨포르는 움베네네를 포기하지 않았고, 1902년 5월, 자국의 선교사가 움베네네 지역의 소(小)부족에게 납치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특정 국가의 국적을 지닌 거류민이 위협을 받으면 그 국가가 움베네네에 개입할 수 있다는 조약 내 단서를 근거로 벨포르는 본격적인 군사행동과 내정간섭에 들어갔다.

이에 움베네네 지역의 왕중왕(Mfalme)이었던 마부자 음레예(Mabhuza M'reyer)는 벨포르의 내정 개입에 불만을 품었고, 마침 벨포르의 세력 확장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황제가 1905년 3월 31일에 방문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자, 이에 고무된 왕중왕 마부자 음레예는 벨포르 공화국 고등판무관에게 내정간섭을 중단하라는 서한을 보내기에 이른다. 내정간섭을 중단하지 않을 시,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암시도 같이 넣어서 말이다.

이에 따라 벨포르와 오스트마르크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황제와 당시 제국 수상인 구스타브 폰 뤼트비츠는 빈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유로파 열강들 사이의 회담을 조성하여 최대한 오스트마르크의 이권을 챙겨보려는 심산이었지만 벨포르는 세르당 조약의 단서를 근거로 들어 완강히 거부했고, 오스트마르크도 선언문을 내세워 물러서지 않았던 데다가 움베네네에 자국의 순양함인 베르트하임을 파견함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가능성까지 감지되게 된다.

결국 로마냐 왕국의 중재로 로마냐의 마르타에서 유로파 열강들 사이에 회담이 성사된다. 하지만 이미 오스트마르크의 도전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던 연합왕국은 세르당 조약을 근거로 벨포르의 편을 들어주었고, 에쉬르 공화국 역시 상호방위조약을 연장하길 거부한 오스트마르크의 편을 들어주질 않았다.

이로 인해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결국 움베네네에 대한 지원을 끊었고, 벨포르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움베네네의 왕중왕을 폐위, 그대로 움베네네는 벨포르 공화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 뒤, 움베네네 지역에서는 벨포르 식민당국에 대한 수많은 항쟁과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벨포르 정부는 회유와 무력을 통해 움베네네 식민지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벨포르 공화국 정부는 움베네네 지역의 수많은 자원과 청해와 맟닿아 있는 절묘한 위치를 눈여겨보고 움베네네 지역에 대한 개발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벨포르 본토에서 수많은 이주민이 움베네네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자연스레 그 수는 늘어나 1950년대 후반에는 약 250만 정도의 막대한 이주민 후손이 벨포르령 움베네네에 거주했다.

이 때문에 본토 정부에서는 움베네네 지역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움베네네 지역의 독립과 자치권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대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벨포르 공화국은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재화와 인력을 소모했으며, 이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도 마찬가지라서 새로 탄생한 벨포르 제4공화국 정부는 식민지를 차례차례 독립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베네네 지역을 포함한 몇몇 지역은 예외였다.

이에 현지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1956년 1월부터 시민권 확대와 권리 확대를 주장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이에 벨포르 식민당국은 어느 정도 식민지 현지민들의 민심을 다독일 필요성을 인지했고, 1956년 10월에 총독부는 현지민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벨포르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책을 공포했다. 하지만 이는 움베네네 지역에서 특권층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이주민들을 자극했고, 결국 이주민들과 현지민들 간의 물리적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1957년 9월, 움베네네의 수도였던 탕헤르에서 벌어진 충돌이었는데, 5천 명에 달하는 현지민 시위대가 총독부가 소재한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자, 식민지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고, 그 과정에서 상호 총격전이 발생하여 여럿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벨포르 식민당국은 현지민들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무력진압을 선택하였는데, 탕헤르를 비롯한 8개 주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식민지 경찰 병력 뿐만 아니라, 식민지 치안군, 심지어 벨포르 본토 주민으로 구성된 정규군까지 계엄구역에 투입되어 강경 진압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약 19,300명 정도[1]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식민당국의 피비린내 나는 강경 진압에 분노한 일부 현지민들은 FRU[2]이라는 무장투쟁 조직을 결성했고, 곧 벨포르 주둔군에 대한 게릴라 공격에 들어갔다. 1958년 2월 28일, FRU 게릴라가 움베네네 동북부의 다르낭 시를 습격, 농장, 정부 청사, 그리고 시장에 불을 지르고 파괴했으며 백인 1천명 ・흑인 6천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지르자, 벨포르 식민당국은 즉시 보복을 결의했다.

그에 따라 3개 정규 육군사단이 움베네네 지역에 급파되었으며, 움베네네 전역으로 계엄령이 확대되었다. 이것이 2년 간 벌어질 움베네네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결과

전후

각주

  1. 벨포르 식민당국 추산, Georges Wani (1960).《Kwa upande mwingine wa Vita ya Uhuru》
  2. Front de Résistance d'Umbenéné, 움베네네 저항 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