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요동 전쟁의 일부
날짜1388년 음력 5월 22일 ~ 음력 6월 3일
장소위화도개경
결과 쿠데타 세력의 결정적 승리, 신진세력들의 고려 정계 장악
교전국
고려 만주 지원군
지휘관
우왕
최영
안소
정승가
조민수 (좌군도통사, 서열 1위)
이성계 (우군도통사, 서열 2위)
심덕부 (서경도원수, 서열 3위)
정지 (안주도도원수, 서열 4위)
왕안덕 (양광도도원수)
박위 (경상도상원수)
지용기 (안주도상원수)
최공철 (조전원수)
변안열
김백흥
배극렴 (조전원수)
이지란 (조전원수)
남은
조인옥
병력
불명 6만 명 추정
피해 규모
불명 불명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은 고려 말기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만주 조정을 돕기 위한 지원군 목적으로 파병된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 이성계개경(開京)으로 다시 회군(回軍)한 사건이다.

개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ver.고려

명나라와 만주를 두고 분쟁을 벌이던 만주 조정의 상황 속에서 요동 전쟁이 발발하자, 만주 조정은 고려에게 도움의 요청을 보냈고, 이에 고려에서는 만주 지원군을 이끌던 이성계(李成桂)와 조민수 등의 무인들이 국경지대 압록강의 섬인 위화도까지 북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심을 품고 회군, 개경 인근에서 전투를 벌여 고려 중앙군과 최영을 패배시키고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음력 5월 22일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무진년에 벌어졌기에 "무진회군(戊辰回軍)"라고도 일컫어진다.[1]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이성계는 정도전조준, 남은 등 신진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한국 역사상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주변 정세에 크게 영향을 끼친 군사정변.

배경

고려의 혼란과 명나라의 대두

무신정권(武臣政權)의 대두와 몽골 제국과의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혼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러 폐단이 쌓이고 쌓이던 불안정한 상황에서 공민왕은 개혁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벌였으나, 본인이 시해당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와 함께 만주 조정의 묵인 아래 고려 국경을 침범하던 여진/몽골족들의 난립으로 대위기를 맞이 한다. 이런 혼란한 대외 정세는 급진 개혁파들을 출현케 하였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과정에서 황산대첩(荒山大捷) 등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입지를 키운 이성계, 조민수 등의 신흥 무인세력들을 탄생토록 하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세계를 재패하던 몽골 제국의 위세가 바닥으로 떨어져 결국 원(元) 재국은 몰락하여 북부로 후퇴한 뒤 북원(北元)을 세워 명나라에게 대항한다. 자신의 능력을 잘 살렸던 주원장(朱元璋)은 파양호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명나라를 건국하고 서달, 상우춘 등의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북벌을 감행 및 몽골 세력들을 몰아내는데 애를 쓰게 된다. 이런 급격한 원명 교체기의 대혼란은 당대 고려의 정계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수 밖이 없었다.

고려-명나라의 외교 접촉과 만주의 정세

1368년, 명나라 홍무제와 고려의 접촉은 공민왕 시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홍무제는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라는 인물을 보내 고려에게 자신의 친서를 보냈다.

공민왕은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직접 나아가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하였으며, 명나라 황제 즉위에 대해 축하함에 따라 조공 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당초 고려의 입장은 명나라의 대해 크게 우호적이었다.

건국 초기 북원과 만주 조정을 상대해야 했던 명나라의 홍무제에게 고려의 외교적 가치성은 매우 우수했다. 고려와 명은 국교를 수립한지 3~4년 뒤인 1372년에도 북원의 코케 테무르(扩廓帖木尔)가 서달의 수만 대군을 격파했을 만큼 당시 북원은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으며, 전면적인 군사 충돌은 없었으나, 당시 북원의 전신인 원 제국과 화친을 맺었던 만주 조정에 입장에서는 명나라를 좋게 보기에는 어려웠다.

명나라는 강력한 북벌 정책으로 북원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힘을 썼지만 요서 등지에서는 여전히 나하추(納哈出) 같은 이들이 활개를 치고 북방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고려는 명과 북원/만주 조정의 대립 관계를 인지하고양쪽의 이런 관계를 외교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고려는 대외적으로 명나라와 조공관계를 이루고 친명 정책을 내세웠으나 그럼에도 만주 조정/북원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화친을 유지하는 등의 실리를 추구했다. 그렇기에 홍무제의 입장에서는 북원/만주와 고려의 관계를 끊는 것이 중요했다.

요양(라오양 시)으로 활동하던 일부 북원세력들(대표적으로 유익)은 만주 조정과 협력하여 명나라의 국경에서 무력 시위와 함께 국경지대의 행정권/군권을 행사하여 명나라의 만주 공격을 적극 대비하기 시작했다. 요서의 나하추 세력은 명나라의 토벌 작전에도 십여 만에 이르는 대군을 일구었으며, 만주 지역과 북원을 넘나들어 명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나하추는 한때 만주 조정의 충성하던 원나라 출신 별무대관 조소생(趙小生)의 묵인 아래 만주를 거쳐 고려의 삼살, 홀면 지역을 공격했으나 이성계와의 전투에서 연거푸 지게 되었다. 만주 조정은 이 상황을 무마하려 고려에게 철령 이북을 비롯한 실질적 관할 아래 있는 영토들을 고려의 영토로서 인정하는 내용의 조서를 체결하면서 관계 회복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나하추는 고려에 대한 침략 의식을 버리고 화친을 택하면서 관계를 회복하려 했으며, 요서의 명군 전초기지였던 우가장(牛家庄)을 공격하여 10만 석에 이르는 식량을 탈취하고 5, 000명에 이르는 명군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우가장은 요서의 최대 명군 주둔지로서 요서 최고의 군량미를 저장 및 보급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나하추의 이러한 승리는 요서 지역의 명군을 약화시키는 한편, 요동 지역을 비롯한 만주 강역을 지키면서 후에 요동 전투에서 명군을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북원은 나하추의 승리를 계기로 적극적 공세에 나서 요서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명나라는 지속적인 군사 압박을 물리치려 시도하면서 나하추의 기세를 꺾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하추는 고려와의 연대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고려와의 관계 맺기에 나서게 되었다.[2]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 변화

이 무렵 명-조선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나, 공민왕 말기 이후 이러한 틈이 커지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양상은 우왕 시기에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이었던 채신(蔡斌)이 살해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공민왕의 시해 사건이 벌어짐에 따라 홍무제는 고려에 대해 강력한 의구심을 품게 된다. 당대 고려의 실력자였던 이인임(李仁任)은 명나라의 사신을 처형할 것을 지시했고, 실제 이를 행동에 옮긴 김의(金義) 등은 고려를 떠나 만주 등지로 도망가게 되었다. 비교적 친명 정책을 유지하던 고려의 이같은 혼란한 상황을 보여주던 일련의 사건들은 홍무제에게 경각심으로 작용되었고 이에 따라 강경 정책에 나서게 되었다.

명나라는 고려에게 만주 조정과의 전쟁을 위한 군비 자금을 이유로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했으며, 고려는 이 때문에 점점 국고의 무리가 오게 된다. 홍무제의 우려대로 고려는 점차 북원, 만주 조정과 협력을 시도했고 나하추는 고려와의 연대 작전을 통해 요서 지역에서 명군을 몰아내고 전세를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1375년을 전후로 북원-만주-고려의 연락망은 튼실하게 유지되었고 나하추와 북원은 고려에게 당면한 문제인 우왕의 정통성과 책봉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말하고 대신 군사적 협조를 요청했다.

명나라는 고려에 대한 강경책에서 유화책으로 노선을 변경하고 조공의 양을 재조절하고 억류되어 있던 고려인들을 석방하는 등의 화해의 재스처를 표하였다. 1380년, 최종적으로 고려의 공물 문제가 해결됨에따라 명과 고려는 어느정도 합의점을 찾아 외교 관계를 정상궤도로 돌리려고 했으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몽골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명나라가 만주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하추의 투항과 몽골 세력의 약화

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부우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 보병과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리오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명사(明史)》 풍승전

1387년, 나하추가 요서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패전하여 포로로 사로잡히면서 명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1375년 이후 악화된 전황으로 북원의 주요 장수들은 속속 명나라에 투항하기 시작하였고, 고려와의 연계도 명나라의 외교적 노력 때문에 여의치 않자 나하추 군대의 큰 축을 이루고 있던 여진인들은 경제적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여진인들이 고려와 만주 조정에 투항을 계속함에 따라 나하추의 군사적 세력도 점점 약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무리하게라도 전황을 회복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나하추는 금산(金山)에서 포위하는 명군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풍승(馮勝)의 회유책과 압박책으로 무산되면서 결국 항복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나하추의 투항은 요서 지역 뿐만 아니라 북원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脫古思帖木兒) 정권은 재기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이는 나하추가 투항함으로써 요서지역 접근이 차단되었고, 그렇게 된 이상 북원 정권은 일개 초원의 유목민 정권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북원의 투항자는 굴비를 엮듯 줄줄 딸려오기 시작하여 나하추가 투항한 이후에는 10만 호, 토구스 테무르의 패배 이후에는 최대 40만 호에 달하였다.

골칫거리였던 나하추 세력이 붕괴되면서 명나라는 큰 자신감을 얻었고, 이제 더 이상 북원과 고려의 연대를 고려하며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데, 나하추의 항복으로부터 1년여 뒤, 위화도 회군의 불과 얼마 전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는 초원으로 진군하여 북원 정권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1388년 3월, 명나라의 15만 대군은 북원의 수도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남옥은 포로만 무려 3만명 가까이에 이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시점에서 북원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달아난 북원의 군주 토구스 테무르는 휘하의 5만 명에 달하는 잔존 병력들을 이끌고 만주 조정에 귀순하였다. 또한, 이수데르(也速迭児)라고 불리는 인물은 소위 타타르(Tatar)라고 불리우는 정권을 세워 나중에는 오이라트와 더불어 명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지만, 당장은 남옥에게 당한 대패 때문에 본인들 수습에도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여하간 나하추를 항복시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북원 정권을 몰락 시키려 했을 정도니, 당시 명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행보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판이었다. 또한 명나라는 더 이상 고려가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기에 다시 강경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나하추의 투항 이후 명나라의 공격이 간접적으로나마 가능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만주 조정과 지속적인 연대 작전을 펼치게 된다.

요동 전쟁의 발발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는 1387년 12월 만주 조정과의 외교 관계를 끊을 것을 통고하는 한편, 고려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말도록 함으로써 고려 조정에 막대한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사실 이미 1387년 무렵부터 고려의 지도층은 명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요서와 만주를 거쳐 넘어온 어떤 사람이 고려로 도망쳐 와, 명나라의 황제가 장차 처녀와 수재(秀才) 및 환관 각 1천 명과 소와 말 각 1천 마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도당(都堂)에 제보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도당에서 우려하자, 최영은 "정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명나라를 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즉 반명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요동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최영 등은 명나라가 만주 조정를 공격하고 고려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피력하며 극도의 반명 기조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음 해인 1388년, 최영은 이성계의 협력을 바탕으로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제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우왕과 긴밀히 연결된 최영의 권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따라서 공공연히 명나라 공격을 말했던 최영의 의도는 고려의 국가 정책에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반명 기조가 한층 올라왔던 상황에서, 같은 해 2월에 앞서 명나라에 건너갔던 외교관 설장수(偰長壽)가 돌아와 명나라 황제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는 고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천 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으며 만주 조정(滿洲 措定)과의 파계(破係)하라 지시하였음에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태세와 전함 건조 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만주 조정과 함께 우리를 몰아내려고 계략을 쓰는 걸 보아하니 이러한 것들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라고 생각하여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일체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애당초 만주에 속했으나 이제 명(明)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심양(瀋陽)·신주(信州) 등지의 군민(軍民)들은 만주 도적들을 몰아내고서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고려사》 우왕 14年

이 당시 명나라의 요구 조건을 가볍게 살펴보자면,

  • ① 고려에서 보낸 말은 모두 약소하여 쓸모가 없다는 점
  • ② 고려에서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명나라를 정탐하고 회유하였으며 만주 조정과 계략을 모의하는데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 ③ 철령 이북은 본래 만주에 속한 땅이었으니, 이것을 모두 명(明)에 귀속시켜 명나라의 땅으로 해야 한다는 점

바로 이 세 가지가 요구 조건이었는데, 게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사항의 경우에는 늘쌍 있는 험악한 분위기의 대립과 트집이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으나, 세 번째인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요구가 문제였다.

철령위 지역은 함경도 원산만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명나라가 주장한 것은 고려에게 있어선 일전에 회복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회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쌍성총관부 지역이 고려의 영역으로 되었던 것은 벌써 23년이 지난 후였으며, 이는 명나라의 건국보다도 2년 더 앞선 시점이었다. 또한, 만주 조정은 쌍성총관부 회복을 정식적으로 인정하였기에 영토 문제 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될 건더지가 없었고 명나라가 뒤늦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고려로서는 황당하고 민감했을 뿐이었다.

대체 왜 홍무제는 이 시점에서 철령위 설치, 즉 국가 간의 가장 민감한 영토에 대한 분쟁을 초래하였을까? 앞서 말한대로 홍무제는 북원고려와 함께 만주 조정간의 연결 가능성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고, 나하추를 굴복시킨 후에는 고려가 다시는 몽골의 잔여세력과 만주 조정에게 손을 잡지 못하도록 조치 하고, 고려가 여진 세력을 포섭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홍무제의 핵심은 사실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북원 세력을 약화시키고 만주 조정을 굴복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위화도 회군 이후 명나라는 더이상 철령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철령위 문제를 통해 고려 내 친명파와 친원파를 구분해내고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덤으로 친원파까지 쳐내버렸다는 것.

물론 단순히 홍무제가 고려의 땅이 탐나서 그런 요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홍무제는 여러 차례 고려에 대한 군사 원정의 무익함에 대해서 말한 바가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영토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가장 당면한 문제인 북원 세력의 절멸보다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반도 땅에서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고심하고 있을 때, 몽골에서는 남옥이 이끄는 15만의 군대가 북원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원을 약화시킨 뒤에도 고려만주 조정간의 연계는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 만주 조정이 북원의 잔존 세력과 휘하 여진 및 만주인들을 통해 명나라의 침공을 대비하면서 만주 산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만주를 견제하는 동안 북원의 세력이 회복될 여지가 있었기에 명나라로서는 부득이하게 만주 조정을 공격하여 북원과 고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만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택한 선택이었던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요동 전쟁의 불씨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고려의 반응

최영의 만주 지원에 대한 의지

외교관 설장수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의 지시를 전달하자, 고려는 그 즉시 바쁘게 움직였다. 5도(道)의 성곽을 수리하게 하는 한편 원수(元帥)들을 서북 국경지대로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면서 동시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 등을 명나라로 파견하여 철령 이북이 고려의 영토임을 역사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도록 했다. 또한, 만주 조정과는 비밀리에 모의하여 명나라를 견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최영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만주 조정을 위하여 지원군을 조직할 것인지, 아니면 화친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이 당시 모든 재상들은 화친 쪽에 찬성했고, 이에 밀직사사(密直司使) 조림(趙琳)이 명나라 조정으로 출발했지만 요서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최영은 다시 한번 재상들을 불러 모아 철령 이북을 할양하고 만주와의 관계를 끊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 했고, 재상들은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밀었다.

이미 명나라가 만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만주 조정을 도와 명나라를 몰아낸다를 주장하는 반명세력의 핵심인물이 되어, 인척관계를 맺은 우왕과 더불어 만주 지원을 논의하였다. 우왕은 요서 공격에 대한 자문을 최영에게 구했고, 최영은 이에 대해 찬성했다. 즉 만주 지원이라는 정책의 핵심은 바로 최영이라는 이야기.

이 때문에 요서 공격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직접 최영의 집에 찾아가 만주 지원을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최영은 이자송을 곤장으로 두들겨 패서 유배를 보낸 다음에 곧 죽여버렸다. 요동 공격에 대한 최영의 의지가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볼 수 있는 부분.

이때 때마침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명나라가 물길을 건너 병사 1천여명을 이끌고 와서 철령위를 세우려고 한다." 는 보고를 올렸고, 동강(東江)에서 돌아오고 있던 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 과인을 책망하기가 이를데가 없다. " 라고 울면서 통탄했다. 이후로 우왕은 명백하게 명나라를 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마침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서백호(遼西百戶) 왕득명(王得命)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하였으나, 이미 명나라를 적으로 여기던 우왕은 병을 핑계로 아예 왕득명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우왕 대신 판삼사사(判三司事)였던 이색(李穡)이 왕득명을 만나 잘 달래었으나, 왕득명은 "철령위 요구는 황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것은 아니다." 라고 답하였다.

심지어 최영은 여기서 한술 더떠, 왕득명의 일로 고려에 왔던 명나라의 요서군 21명을 살해하고, 다섯 사람만 남겨 구금함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적대 의지를 불태웠다. 고려 팔도에서는 요서 공격과 만주 조정을 지원하기 위한 병사들이 징집되었고, 우왕은 황해도 부근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병력의 징발과 요서 공격에 대한 준비를 착수하게 된다.

이성계의 사불가론(四不可論)

사냥을 핑계로 이동하며 요동 공격 준비에 착수하던 우왕은 봉주(鳳州)에 도착했을 무렵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서 공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전까지 우왕은 인척이 된 최영하고만 더불어 만주 지원을 논의했지만 이때 처음 이성계에게도 만주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 말 이름난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서를 치는데 힘을 써주라는 우왕을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기서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그러나 사불가론을 내세웠음에도 우왕의 요서 공격 의지를 전혀 꺾을 수 없어 보이자, 이성계는 만주 지원을 기정 사실로 여기는 대신 전략상의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즉 정 공격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기는 좋지 않으니 좀 더 적절한 때를 노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우왕은 전혀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이성계는 소득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물러나면서 "이제 참화가 시작되었다." 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이성계의 발언이 비판을 받게 되었음에도, 여타 불가의 이유들 가운데서 전략, 전술적 입장에서 크게 틀리다고 볼 법한 부분은 크게 없었다. 대국이 소국을 칠 수는 없다는 내용을 단순하게 해석하게 된다면 적은 군사로 대군을 칠 수 없다는 군사적 입장으로 볼 수 있기에 충분히 타당한 지적이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불가론 이후에 이성계는 우왕의 요구에 동의했으며, 대신 공격의 시점을 가을로 물리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성계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내놓은 타협책이었으며, 이 당시 말한 전략상의 이유도 큰 허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성계는 실제로 요동을 공격해서 잠시나마 점령했던 요동 정벌[3] 당시의 주역으로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고려에서 가장 경험 있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기껏 성 하나를 점령한다고 해도, 군량이 떨어지고 더 진격하지 못하면 별 소득도 없다는 언급은 요동 정벌 당시의 전황을 그대로 말한 사례로써,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묵살됨에 따라 이성계는 자신이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좀 더 나아가 당시 이성계가 떠오르는 강국 명나라와 패망 직전인 북원의 정치적 상황 등에 대한 이해 때문에 이를 반대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성계와 그 가문은 당대 고려인들 중에 누구보다 동북아 정치 상황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하추의 항복과 위화도 회군 얼마 전에 이루어진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의 패배를 파악하고, 이 싸움이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간파하였다는 것이다.

만주 지원군의 진군

이유가 무엇이였던간에 어찌어찌 마침내 만주지원군은 출정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고려 전역에서 준비된 이 군대의 병력은 64,830명이었으며, 이 군대를 지원하는 병력이 11,634명으로 도합 7만여 가량이 되어 출정할 무렵 호왈 10여만이라고 일컫었다. 여기에 동원된 말은 총 21,682필이었다.

군대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승진된 최영이었으며,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는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는 이성계였다. 당시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崔瑩)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曹敏修)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심덕부(沈德符)
부원수(副元帥) 이무(李茂)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 왕안덕(王安德)
부원수(副元帥) 이승원(李承源)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鷄林元帥) 경의(慶儀)
안동원수(安東元帥) 최단(崔鄲)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조희고(趙希古)
안경(安慶)
왕빈(王賓)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상원수(上元帥) 지용기(池湧奇)
부원수(副元帥) 황보림(皇甫琳)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助戰元帥) 윤호(尹虎)
배극렴(裴克廉)
박영충(朴永忠)
이화(李和)
이두란(李豆蘭)
김상(金賞)
윤사덕(尹師德)
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이원계(李元桂)
이을진(李乙珍)
김천장(金天莊)

이 부대는 서경(평양)에서 출발하여 진군하게 되었는데, 군대가 준비되기까지 우왕 역시 서경에서 징발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마침내 군대가 출발할 무렵이 되자 최영은 우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라 행군에만 한 달을 끌게 된다면 군사 작전이 성공할 수 없으니 제가 가서 행군을 독려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의지하던 최영이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우왕은 불안에 빠져 최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우왕은 "그대가 떠나면 어떻게 정치를 의논하는가?" 라며 최영을 만류했고, 정 가겠다면 자신 역시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는 사이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는데, 최영은 자신은 서경에 남아서 일선의 군대를 감독할 터이니, 우왕은 개경으로 내려가라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하지만 우왕은 이런 이유를 대며 거절하였다.

"선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그대와 함께 있지 않겠는가?"

공민왕이 시해될 당시 최영은 목호의 난(牧胡─亂)을 진압하기 위하여 떠나 있었는데, 우왕은 그 이야기를 하며 최영을 만류한 것이다. 사실상 고려의 전 군사력을 북쪽에 투입한 상태에서 최영의 보호가 없다면 우왕은 위험했고, 또 원정군을 장악한듯 보이는 최영을 완전히 풀어두기에도 우왕은 불안했을 터이니 최영과 바싹 붙어 있는게 가장 안전해 보였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 이성(泥城)에서 온 어떤 정체불명의 사람은 자신이 근래에 요동을 다녀왔다면서, 요동의 만주군들은 명군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요서 지역에 군대는 북원을 견제하기 위해 떠났다고 하자, 최영은 기뻐했다. 또 최영은 만주 조정을 통해 북원의 잔당들과 연락하여 서로 협공하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 그 무렵 북원 세력은 남옥의 승리 이후 거의 힘을 잃어 사막으로 쫓겨나 근근히 버티고 있던 참이었다.

명나라와 만주 조정의 반응

만주 지원이 진행될 무렵 명나라의 반응에 대해서는, 고려사에서 홍무제가 만주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황제가 전쟁을 위해서 종묘에서 재계를 한다면 꽤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명사 태조본기 등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이는 조선시대 사가들이 위화도 회군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집어넣은 서술로 보인다.

그러나 명나라는 1388년 4월 도착한 고려 사신이 철령위에 대한 주장을 하자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우기는 한편, 8월 경 위화도 회군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자 무슨 만주 조정과 무슨 술수를 세운 것이 아닐까 하며 미심쩍은 눈으로 상황을 살피는데 주력하였다. 고려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하다.

만주 조정의 경우에는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크게 기뻐했으며, 만주 조정의 사신들이 개경으로 나아가 우왕에게 만주를 지원한 것에 대해 크게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정작 필요한 시기에 도움을 받지 못하자, 만주 조정은 고려에게 분개하였으며 조선의 건립 과정을 달가워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세종 시기까지 조선과 일절 외교 관계를 체결치 않았다.[4]

위화도에서의 회군

최영의 부재 속에 군대를 이끌고 나선 이성계조민수 등은 압록강을 건너가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이성계, 조민수 등은 우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물이 불어나 군대가 오도가도 못할 지경에서 수백명이 익사하였으며, 군량미도 떨어져가 요동은 물론이고 요서까지 가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현명하게 잘 사는 길은 큰 나라를 잘 섬기는 것인데다, 아직 명나라에 보낸 외교 사신 박의중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군대를 일으킨 것은 현명하지 못하니 어서 회군을 시켜 달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대신 환관 김완(金完)을 과섭찰리사(過涉察理使)로 임명해 원수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며 출진을 독려하게 했다. 종종 환관을 감찰사로 임명하는 일이 있다는것을 생각하면 이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성계, 조민수를 감시하기 위한 최영과 우왕의 판단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성계, 조민수는 환관 김완을 되려 억류하고, 다시 한번 아사자가 많고 군대가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최영과 우왕은 다시 이를 거절했다.

조정의 사람을 억류하고 회군을 요구한 시점에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반란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군대라고 모를 리 없었을테니 지원군은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가 군대를 버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달아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령관 중 한 사람이 이탈하다는 소문이 돌자 군대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으며, 혼자 어쩔 줄을 모르던 조민수는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자신이 이탈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뒤 장수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하고 만주를 도와 명군을 공격한다면 천자로부터 벌을 받게되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고려사》 우왕 14年 5月

이에 장수들이 동의함으로써, 원정군의 회군은 결정되었다.

지원군의 회군에 대한 의견으로는 장맛비에 기인한 우발적인 일이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 철저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라는 의견 등이 있다. 이후 전황을 보면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본거지인 동북면에서 여진족을 포함한 병사들이 이성계를 지원하기 위해 천여명[5]이나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회군의 속도를 고려해보면 회군을 하며 동북면에 소식을 알리고, 소식을 들은 동북면의 군사들이 달려왔다기 보다는 회군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동북면의 군사들이 이동한 것이니, 양쪽에서 협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1차로 회군 요청이 이루어진 직후에 우왕은 왜구를 막기 위해 남은 군대를 이동시켰는데, 회군 요청을 통해 정보를 얻은 이성계가 2차로 회군 요청을 하는 동시에 군사를 진격시켰다는 것이 이 주장의 일부다.

설사 회군 자체는 위화도에서 결정된 일이라고 해도, 그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이 회군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성계는 이미 요서 공격 이전부터 노골적으로 이를 반대하고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면 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불온한 감정을 가졌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고, 이러한 점은 최영 또한 고려했던것으로 보인다. 최영은 만주 지원에 나선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을 계획이 있었는데, 위화도 회군이 너무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기에 이를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다. 최영이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야 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면 군대는 출발 직전부터 불만에 가득 차 있었을 수 있고, 위화도에서 어려운 상황을 당하자 염두에 두고 있던 회군 계획이 빠른 속도로 실행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준비된 계략이었던 우발적이었건 회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의 사기를 잃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만들며 바람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려사의 남은전에 따르면, 당시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까지 갔던 남은조인옥(趙仁沃)은 회군하자는 의견을 내어 필요한 명분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일단 회군이 결정되자, 지원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다. 군대가 1일 30리를 간다해도 12km인데, 당시 지원군의 회군 루트에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등이 있어 도하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더욱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지원군의 총 숫자는 7만으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숫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400km를 10일만에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다. 내키지 않은 채로 북상하던 원정군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음을 고려하면, 회군 당시에는 두배 먼 거리를 오히려 절반의 시일만에 남하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속도라고 한다면 병자호란 당시 만주 조정의 진격 속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볼때 사서에 묘사된 사냥을 하면서 천천히 갔다는 언급은 과장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이렇게 하여 5월 22일 출발한 군대는 6월 1일 개경 근처에 도착했는데, 본격적인 싸움은 6월 3일에 벌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때 비록 기록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6월 1일 당시 도착한 부대는 경기병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발대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선발대와 불과 이틀 뒤에 병력이 도착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 점에서 볼때 후발대의 속도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기록에서는 회군 당시에 고려 백성들이 회군 병사들에게 술 등을 나누어 주며 환호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서술은 보통 과장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다만 회군의 속도를 고려하면 이동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이나 반발을 받지 않은것은 사실로 보인다.

한편 우왕은 여기에 더해 외교관인 설장수를 보내 다시 한번 회유를 시도했으나, 군사들은 도성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며 굳게 버티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동북면에서 여진족들이 포함된 병사 1천여명이 도착하여 지원군의 세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위화도 회군이 벌어질 당시 고려의 주력은 모두 지원군에 속했으며, 그나마 남은 병사조차 왜구를 막기 위해 파견이 된 상태였다. 지원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군하자 우왕과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이동해 모병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창고를 털어도 별다른 전력은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계는 요서 지역과 요동에 명군들의 군사력이 집중되었을 때 회군을 단행햇으며, 조민수 등은 이에 협력하였고 설사 불만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장수들은 일단 대세에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최영과 우왕은 병력의 부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위화도에 병력이 집중된 상태에서도 왜구 토벌에 5명의 장수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시점에서도 우왕과 최영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병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우왕과 최영이 별도로 다룰 수 있었던 병력은 추정이 어렵지만 모두 합하면 2만 여명이 되지 않을까 추정되는데, 앞서 말했듯 대부분이 왜구 토벌을 위하여 나가 있던 상태였기에 그 2만 여명 조차 모두 모을 수도 없었다.

만일 우왕과 최영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모든 병력을 소환하고, 또한 징병을 통하여 어떻게든 2만 이상으로 병력을 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전투병력이 5만을 넘는다고 하나 공격측과 방어측의 상황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싸울 수는 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것은 우왕과 최영이었다. 회군을 감행한 지원군은 요동 지원과 요서 공략의 난점이라는 명분은 있었으나, 엄연히 왕명을 거역한 입장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왕은 실제로 지원군에 대하여 회유 작전 또한 시도하고 있었기에, 싸움이 생각만큼 쉽게 끝나지 않고 길어진다면 지원군은 분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무시무시한 속도의 회군은 그런 변수를 모두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성계급 장수가 하루에 군사가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하지 못할 리가 없고, 시일이 길어지면 결국 불리해지는 건 이성계쪽이니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회군하여 최영과 우왕이 대비할 시간 자체를 막아버린다는 의도도 추측된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6월 3일, 고려의 존망을 건 사투가 시작되었다.

개경 공방전

지원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개경 동쪽의 숭인문 밖, 좌군은 개경 서쪽의 선의문 밖에 주둔하였다. 좌우군은 이 나성(羅城)을 돌파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최영은 열세의 전력에서 좌우군의 첫 공세를 막아내었다. 당시 지원군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회군 했기 때문에, 공성전에 필요한 장비를 전혀 챙겨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의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의 높이는 27척, 두께는 12척이라고 하는데 이는 높이 8,1미터, 두깨 3.6미터에 해당한다. 별다른 장비 없이 함락시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좌군의 유만수(柳曼殊)의 패배에 대해 이성계는 유만수가 나가기 전부터 "저 놈 눈은 큰데 광채가 없고 담력도 없으니 패배할 것이 뻔하겠다."(曼殊目大無光, 膽小人也. 往必北走) 라고 했다는데, 질 것이 뻔한 장수를 이성계 같은 지휘관이 내보냈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는 일이므로 이는 유만수의 패배를 미화시킨 기록으로 보인다.

유만수의 패배 이후 이성계는 한동안 느긋하게 있으며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이성계는 아예 말의 안장까지 풀고 있었는데, 이후 기록을 보면 난데없이 숭인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적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이성계는 좌군과 협공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숭인문 대신 선의문을 공격하는 좌군은 성 내 진입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일부러 유만수의 패배 이후 숭인문을 공격할 태도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숭인문의 병력은 더 급한 선의문 방어에 투입되고, 그 사이에 이성계는 방어가 허약해진 숭인문을 공략했다는 것이다.

한편, 좌군을 이끌고 선의문을 돌파했던 조민수는 영의서교(永義署橋)까지 나아갔으나, 여기서부터 최영에게 다시 밀리게 되었다. 영의서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조민수가 서쪽 선의문을 통해 진입했던 점으로 볼때 선의문과 남산 사이에 있던 교각으로 보인다. 당시 개경의 수비군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징발하여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하는 바리케이트를 만든 참이었다. 따라서 조민수의 병력으로도 최영의 부대를 깨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민수는 검은 색의 큰 깃발,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있었다. 최영의 군대는 흑대기를 든 조민수의 부대를 쫓아내는 분전을 했는데 바로 그 순간, 이성계의 군대가 나타났다. 이성계의 군대는 쫓겨가는 조민수의 흑대기 대신에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나니 그 위엄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당시 남산은 최영의 휘하인 안소(安沼)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나,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자 두려워한 나머지 속절없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이성계는 이로 인하여 남산을 점령했는데, 개경 도성 내의 공간은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동, 서 경계선이 이루어졌기에 남산은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이 남산이 지원군에 점령되면서 사실상 개경 전투도 승패가 결정되었다.

최영은 패배를 직감하고 물러났는데, 이 시점에서는 최영에게 당하던 조민수의 부대도 물러나는 최영의 부대에게 역공을 취했을 것이다. 최영은 궁궐의 화원(花園)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는데, 새까맣게 몰려온 이성계의 병력은 화원을 수백겹으로 포위했다. 이어 이성계는 암방사(巖房寺)로 올라가 병사들에게 대라(大螺)를 불게 했다. 수백겹으로 포위한 병사들이 대라를 불며 최영이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성계의 병사들만이 대라를 불었기에 대라 소리만 듣고도 개경 사람들은 이성계의 군대가 온 줄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내 담장이 무너지자, 최영은 자신의 손을 잡고 우는 우왕에게 두 차례 절을 하고 곽충보(郭忠輔)를 따라 밖으로 나가 이성계를 보았다. 이성계는 최영을 보자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고려사》우왕 14年 6月 27日

이후 이성계와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때 이색은 이성계를 만났고,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이색과 대화를 나눈 이성계는 군사를 전문(殿門)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개경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결과와 영향

이성계가 잠시 동안 허수아비 왕들을 앉혔다 갈아치운 뒤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500년 왕조인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500년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었다. 지난 두 차례의 삼국통일도 수십년은 걸렸는데 여말선초의 교체는 단시간에 끝났으므로, 단순히 사건의 임팩트로만 따지면 한국사에서도 이 같은 대사건을 보기 힘들 것이다.

이성계 이전에도 고려를 무신들이 권력을 쥐고 뒤흔든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성계는 이전까지의 무신들과는 다르게 압도적인 명망과 사대부들의 지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모두 결합한 인재였다. 그 후 위화도 회군에서 같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조민수의 도전과 정몽주(鄭夢周)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으나 자신의 실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대부들(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이 모든 도전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기에 필요한 명분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었다.

또한, 명나라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고 북원이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던 역사적 전환기에서 나올 뻔한 고려의 마지막 북진정책인 요동 전투가 엮여있어, 여러 모로 가히 한국사에서도 최고 수준의 떡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문에 만주국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만약 고려 지원군이 만주군을 도왔다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갔을 지 분분히 일구어지고 있다.

각주

  1. 실제로 본 사태를 주도한 이들은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으로 책봉된다.
  2. 일화에 따르면 나하추가 직접 개경으로 나아가서 과거 국경 침범에 대한 사죄를 위해 머리를 3번 조아렸다는 설이 있으나, 학계에서는 분분하다.
  3. 명나라 군 일부가 지휘없이 요동 지역의 상륙하여 피해를 입히자 이에 만주 조정이 고려에게 요청하여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진행되었던 일련의 전투를 말한다.
  4. 만주 조정이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게 지원군을 약속한다고 했던 고려가 정작 요동에서 사활을 걸고 있을 무렵에 발을 뺀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었으며, 나아가 만주 정벌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모든 여진족들이 요동 전투에서 만주군을 지원한 것은 아니다. 만주 조정과 어느정도 협력 관계나 상호 관계에 기인한 각각의 부족들이 자원해서 만주군으로서 지원했을 뿐이며, 대다수의 여진족들은 요동 전투에서 활약하려는 행동조차 보여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