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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 국가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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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소비에트대표자대회 초대 의장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제3대 주석
윤주용
Yun Ju-yong
출생 1997년 5월 13일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군
사저 동아 SFSR 조선 부산시 영도구
재임 소련 전소비에트대표자대회 초대 의장
2053년 6월 1일 ~ 2061년 6월 1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3대 주석
2061년 6월 1일 ~ 2077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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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자: 尹周勇
(병음: Yǐn Zhōuyǒng)
본명 이민준
국적 대한민국
→ 독일
소련(동아시아 SFSR)
신체 176cm
배우자 레나 발렌스카
종교
없음(무신론)
정당 소련 공산당(동아시아 공산당)
약력 아메리카 과도위원회 부주석
통합혁명군 통수권자
과도위 국방위원
과도위 군수위원
남부군정청 부사령관 겸 행정장관
북미FSR 내무인민위원
북미FSR 외무인민위원
북미FSR 국방인민위원
소련 외무인민위원

개요

대한민국 출신 독일, 소련의 혁명가이자 정치인, 사상가. 소련 전소비에트대표자대회 초대 의장, 인민위원평의회 3대 주석을 역임했다.

미국 혁명 이후 분열된 북미 대륙을 다시 통일하여 소련이 옛 미국의 지위로 올라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세계 주요 국가의 공산정권 수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소련의 주도로 2040년대부터 이어진 세계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력수단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고 비도덕적인 정책까지 펼쳐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으며 민주 국가의 지도자 답지 않은 독재적인 성향까지 내비쳐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21세기 중반부터 22세기 초까지의 세계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며 이에 따라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생애

초년기

신원 미상의 친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졌으며 만으로 2살에 입양될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양부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었고 양어머니는 세무직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6살에 양부모가 이혼하면서 다시 보육원에 맡겨졌고 3년만에 양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양어머니와 생활하는 도중에도 몇년간 양부쪽의 잦은 언어적 폭력에 시달렸다. 그는 어린 시절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평생 양극성 장애에 시달렸고 가족이라는 것에대해 집착했다. 그의 어머니는 높은 교육열로 인해 양부가 집앞에 찾아와 폭언을 퍼붓는 와중에도 결코 이사하지 않았고 접근금지 소송까지 벌이면서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과목에서 모두 낮은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사회, 물상 과목은 항상 높은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윤주용은 물질적으로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가 이혼하면서 얻어온 상당한 금액의 위자료가 있었고 어머니의 소득도 낮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대학에 들어갔으나 마찬가지로 공부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놀러다니는데 열중해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군복무를 마치고 난 뒤인 2020년 중반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해 인생 최악의 해를 보냈다고 술회했으며 그 다음해에도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채로 대학생활을 보냈다. 2024년 평범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변변찮은 취업도 못한채 언어능력을 살려 중국어, 영어, 일본어 통역,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회주의를 접했고 각종 좌파 잡지에 글을 투고하며 지냈다. 그러다 2027년 독일로 떠났고 2031년 공학 석사 과정을 수료 했다.

윤주용은 이 시기의 자신을'철부지 사회주의자'라고 평했다.

독일 생활

2033년 에어버스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드레스덴 공과 대학에서 공학 박사 과정을 밟았으나 중퇴하고 몇몇 대학의 철학과 청강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동시에 독일 좌파당과 좌파 잡지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독일내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했하였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 세력에게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으나 외국인 신분으로는 상당한 지지자를 얻었다. 2034년 자신이 청강하던 철학과 조교수 레나 발렌스카와 결혼했다. 그녀는 폴란드계 독일인이었고 윤주영보다 3살이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1980년대 초반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인해 폴란드에서 박해받던 자유노조원중 하나였고 천신만고끝에 서독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면서 그곳에 완전히 눌러앉게 되었다. 이 때문에 레나의 부모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윤주용을 썩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후 윤주영이 모리셔스로 떠났을때 레나에게 이혼을 종용했었다고 한다. 2037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다.

2039년 딸 마우고시아 발렌스카가 태어났으나 세계 정세의 불안은 점점 심화되었다. 중국은 시진핑 사후 내부분열로 인해 혼란스러워졌고 미국도 극우 정권이 들어서고 인종갈등과 빈부격차로 시위와 폭력이 격화되면서 몰락해가고 있었다. 강대국들이 하나둘씩 몰락하면서 세계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야말로 세계는 자력으로 살아남지 않으면 안되는 ‘야만적 시대의 한창’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독일 내부도 극우와 극좌파가 갈등하고 있었고 정국의 혼돈이 이어졌다. 1년 간격으로 좌우정권이 교체되었고 동서대립도 격화되었다. 2042년 연방 하원 선거에서 극우파가 압승을 거두자 극우 정부는 연방헌법수호청을 조종해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극좌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윤주용의 가족은 모리셔스로 떠나는 것을 결정했다.

모리셔스에서

윤주영은 모리셔스에서 독일과 한국내 사회주의 인사들과 접촉하였고 각국의 고압적 극우정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다. 이후 윤주용은 모리셔스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반대로 세계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탄탄하게 다져지는 아이러니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윤주용은 아프리카 인민들과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서는 일단 흑인민족주의를 이용할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미국의 흑표당, 유색인종연대등에 서한을 보내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한편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인종과 정부 문제를 논의했고 극우 파시스트 정부에 대항한 모든 인종의 단결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 반정부단체에 퍼지면서 윤주용의 이름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윤주용은 좌우이념을 떠나 전국가의 권위주의적 정권을 전복하고 전세계가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각 국가간의 전쟁을 막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을 제거하고 진정한 인류애로 뭉치는 ‘야만적 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미지 않는 ‘연대하는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주창했다.

이 시기 모리셔스는 제5인터내셔널이 조직되어가는 시기였다. 각국의 사회주의 조직, 정당들이 거국적으로 참여하였고 제5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 이후 최대의 사회주의 조직이 되었다. 제5인터내셔널은 모든 구성원들이 내셔널리즘을 완전히 탈피하고 애국자(pro-state)이기를 포기하며 친인류(pro-humanity), 친프롤레타리아(pro-proletariat)인 조직을 천명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져갔던 전철을 절대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5인터내셔널을 구성하던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은 본국에서 박해받아 망명중이거나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국가간 불화에 애국주의, 내셔널리즘적 시각을 버린지 오래된 사람들이 많았다.

2045년 4월 25일, 점차 제5인터내셔널의 규모가 커지자 이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모리셔스의 정부는 위협을 느끼고 이들을 탄압하려 하자 제5인터내셔널에 참여하던 모리셔스인들이 정부를 단 하루만에 무너뜨렸다.(모리셔스 혁명) 다만 윤주용은 모리셔스 구정부 인사들을 탄압하지 않았고 전 총리 아크샤이 암두카르와 회동을 가진 뒤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았고 모리셔스 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소비에트 신정부는 즉시 빈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농업에 종사할 수 있게하는 한편 산업별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를 소집하고 사탕수수에 의존하던 농업을 여러 작물로 다각화 시켜나가며 자급자족을 위한 기반을 닦았으며 모리셔스 인민공화국은 이후 대대적으로 수립되는 사회주의 공화국들과 소련 체제의 프로토타입으로 높이 평가된다. 소비에트 신정부 선포 이후 윤주용은 이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서한을 각국의 노동자조직에 보냈고 즉각적인 동시혁명을 촉구했다.

미국 내전에 뛰어들다

미국 내부의 정치상황은 점차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인종갈등, 빈부계층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2045년 12월 8일 뉴욕, 시카고등지에서는 연방정부에게 긴급 식량을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경찰과 주방위군이 발포하면서 시위가 격화되었으며 아예 몇몇 도시에서는 시위대가 자경단, 민병대를 조직하여 주방위군과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2046년 1월 8일에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오리건, 일리노이, 인디애나주 의회가 주방위군 철수와 경찰 발포 중단, 빈민들에게 식량지급을 결의했지만 대니얼 맥클레이브를 위시로하여 제5인터내셔널에 공명한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은 결국 친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며 전국적으로 민중이 연대하여 체제를 엎을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2046년 2월 1일 미국 전국의 사회주의 조직들이 모여 새크라멘토에서 미국 통일공산당(America Communist Unification Party, CUP)을 결성하였고 제5인터내셔널에 참여, 캘리포니아주 내부의 빈민 민병대와 자경단을 결집시켜 노동자적위군(Worker's Red Guards)을 결성했다. 046년 2월 19일 노동자적위군이 포함된 시위대와 민병대가 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리건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일으켜 주방위군과 투입된 일부 연방군과 나흘에 걸친 전투끝에 각 주의 주청사, LA시티홀등을 장악하였고 아메리카 과도위원회(American Interim Committee)를 수립한뒤 연방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봉기와 동시에 유색인종 비율이 높거나 빈부격차가 심한 다른 5개의 주에서 동시다발적 봉기가 일어났고 주방위군, 연방군과 충돌했다.(2.19 봉기) 이에 연방정부는 2월 24일 이 봉기를 분리독립 시도로 간주하고 연방군을 통해 과도위원회를 분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본격적인 2차 미국 혁명이 막을 올린다.

서부 태평양 지역에서의 봉기 성공 이후 CUP는 LA로 윤주용을 초청하였지만 과도위원회에서 CUP는 절대 다수가 아니었고 크게 주목받는 집단은 아니었다. 과도위원회 일부는 이념 없이 국가 체제를 뒤엎는데에만 목적이 있었고 그 이후의 방편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족한면이 있었으며 사회주의라는 것에 대해 미묘한 반감도 있었다. 이에 CUP에서는 제5인터내셔널의 지도자격이었던 윤주용을 초청하여 순회연설, 토론 참여등을 요청한 것이었다. 2046년 7월 16일, 윤주용은 아내 레나와 함께 혁명의 파급력이 덜하던 덴버 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 시기에는 시카고 항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시기인데 윤주용은 북미 각지를 돌며 연설과 강의를 하며 커다란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다. 몇달간의 순회연설덕에 미국 내에서 CUP의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였고 윤주용은 그해 말의 추수감사절 전투에 직접 총을 들고 참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반년도 안되어 과도위내 유력 정치인으로 급부상한다.

워싱턴 봉기 이후 과도위는 남부와 뉴욕주를 비롯한 동북부 지방, 보수적인 서부 산악지역 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석권하였고 2047년 2월 1일에는 혁명군이 솔트레이크 시티를 확보하고 철도회사 유니언 퍼시픽과 BNSF를 국유화 하면서 동서 육로의 연결고리까지 만드는데 성공했다. 과도위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 윤주용은 과도위원회 내의 군수담당위원과 내무위원을 맡았다. 이제 과도위 체제를 청산하고 본격적인 공식 국가 건설 계획까지 짜며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던 다른 인사와 달리 그는 오하이오의 클리블랜드에서 머물며 남부와 북부가 이상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중앙정부에 계속해서 알렸고 징병제와 전시산업체계 가동을 주장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과도위는 빠르게 전시체제를 가동하여 남북동맹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2047년 8월 22일, 남북동맹군의 침공으로 아메리카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자 윤주용은 동부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한다. 하지만 이 부사령관은 사실상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정치장교와 같은 직책이라 사령관과 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동부전선군 사령관 대니얼 애스틴은 처음에 윤주용의 존재를 불안해 했으나 윤주용의 존재로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고 그의 군사적 안목도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인물치고는 놀라운 수준이라 곧 안심했다. 북부군의 침공인 1차 오대호 공세에서 윤주용의 작전술덕에 대승을 거두자 군부는 윤주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 3년뒤 엔칠라다 작전 당시에는 아예 작전을 입안하고 야전사령관으로 직접 전선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 군부 내에서 확고한 인기와 지지를 누리게 되었다. 전쟁에서의 이러한 활약과 군부라는 든든한 지지기반의 확보로 전쟁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 무렵에 윤주용은 과도위 수반이었던 대니얼 맥클레이브를 제치고 과도위 내의 사실상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집권기

전후 윤주용은 애틀랜타에 계속 머물며 군정청 부사령관으로 취임해 지역현안을 직접 해결하는등 행정가로서의 모습도 보인다. 이 시기 윤주용은 남부의 정치인, 장교와 사병, 민간인을 가리지않고 닥치는대로 수사하여 전범재판에 회부하였고 총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됐다. 재판 이후에는 328명이 처형됐고 2만명은 유죄를 선고받아 대규모 포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윤주용은 강경책과 공포정치를 펼쳐나가면서 대남유화책을 지지하는 대니얼 맥클레이브 주석과 시시각각 충돌하였는데 남부에게 뭘해도 상관없다, ‘마땅한 처벌(Proper Punish)’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우세해지자 결국 맥클레이브 주석은 군정청이 하는 일을 용인했다.

2051년 북아메리카 FSR 건국 이후에는 외무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 인민위원평의회 부주석직, 남부군정청 장관직을 맡았고 맥클레이브 주석으로부터 외정과 군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윤주용은 북미FSR 정부가 추구한 ‘재건과 팽창(Reconstruction and Expansion)’ 정책에서 팽창을 담당한 것이다. 미국 내부가 미처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윤주용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쳐 나갔는데 2051년 초에는 멕시코는 물론 쿠바나 니카라과 같은 중남미 카리브 국가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경제협력까지 약속하였으며 2051년 12월 1일에는 아예 휴스턴 조약기구(HTO)까지 창설하여 남미 몇몇 국가들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확인했다. 2052년 아메리카 대륙의 몇몇 사회주의 국가와 소련을 건국한 뒤 국가원수 급인 전소비에트대표자대회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태평양으로 눈을 돌려 태평양 도서 국가들과 미합중국 시절부터 계승되어온 군사동맹을 재확인하고 일본, 한국과 접촉하였다. 2052년 4월 일본 한국에 순회방문하였고 옛 군사동맹을 복원할 것을 제안했다.

퇴임

평가

긍정적 평가

북아메리카 전쟁에서 출중한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고 동시에 선전, 연설과 본인의 능력을 온전히 대중에게 드러내는데 능하여 정권을 잡는 것에 뛰어났다. 이후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데도 유능하여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데는 뛰어났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국가를 다스리는데는 부족한 면을 드러냈던 여타 지도자들보다 고평가를 받는다. 북미 대륙을 미국 혁명을 통해 접수하여 권좌에 올라 40년대 말엽부터 이어진 혼란을 빠르게 수습했다. 또한 사회주의 강령에 다소 위배되더라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민생 안정과 경제 회복, 그리고 전쟁으로 크게 손실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각종 현실주의적 정책을 펼쳤으며 이를 통해 전후 10년도 안되어 소련은 옛 미국 수준의 국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 혁명이라는 이상적이게 보일 수도 있는 구호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외교와 군사적 방책을 적절하게 조절해가며 남미에 대한 미국 시절의 패권을 소련이 되찾아오도록 하는데 성공했고 세계 각지에 연쇄적으로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친미 국가였으나 극우 정권이 들어선 후 반목하게 된 영국과 독일에도 대내외적인 압박을 가해 60년대 말 끝끝내 사회주의 정권을 들어서게 하여 소련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다.

부정적 평가

그의 집권기 소련 체제는 인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운영되는 민주주의 체제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윤주용 개인의 카리스마와 능력에 의해 운영되는 참주정이었다.
주앙 아세베도, 정치학자
윤주용은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새로운 정권은 민중의 힘을 온전히 이용하면서도 그들의 힘이 항상 그 자신들을 위해 쓰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가야마 준코[1], 정치가
카이사르, 비스마르크,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는 인물. 그들의 단점 까지도.
아서 윌프레드[2], 역사학자

그 자신은 부인했지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연설과 매체를 통한 선전, 선동에 매우 능했고 이를 통해 민중의 분노를 이끌어내 파괴적인 효과를 내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이런 선전 선동에는 가짜뉴스나 부풀리기등이 다분히 섞여들어가있었다는 것. 현대에 들어오면서 명확한 실체가 없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적을 인물, 집단으로 한정시키면서 부유층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초래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프롤레타리아의 적은 인물 집단뿐만이 아니라 인민 개개인을 압박하는 시스템 자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중 한명한명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시스템이 다시 침투할 빈틈을 주는 것이 된다며 ‘급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특정 인물, 집단에 대한 분노를 부추겼다. 아울러 뛰어난 연설 실력과 선전선동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드높이는 동시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완전히 억눌리고 깎아내려졌으며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이런 배경과 그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미국 혁명 말엽에는 그는 공산당은 물론 소련 내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확실한 ‘저 너머의’ 존재가 되었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때문에 윤주용을 보고 히틀러나 괴벨스가 생각난다는 의견도 있으며 소련 전체를 개인숭배 광풍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

윤주용은 소련 성립 초기인 50년대에 ‘인민들의 새로운 신정권’에 조금이나마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은 모조리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남부군 출신의 투항한 장교 및 여러 인사들은 물론 일반 병사들까지 툭하면 인종학살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가 투옥되거나 유배됐고 심하면 사형까지 당했으며 이것은 북미 연방이나 캐나다 출신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적게는 2만명, 많게는 5만명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됐다. 그중 300여명은 처형됐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2061년 소련에서 사형제는 폐지되었고 제거된 이들도 일부 복권되었지만 50년대의 이러한 숙청 작업은 통합된 북미 대륙에 적지않은 상처를 남겼다. 윤주용은 2057년부터 2063년까지 남부의 파시즘적, 인종차별적 정서를 완전히 뿌리뽑아야 한다면서 남부 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이주 정책을 펼쳤다. 이시기 무려 800만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장을 떠나 캐나다 한지에서부터 북미 대륙 각지로 흩어졌으며 그 빈자리에는 다른 지방에서 온특히 신정권에 우호적인 편인 주민들이 채웠다.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가정이 파탄나는등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남부에 대한 향수(딕시즈텔지어, Dixiestelgia)’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남부 출신 주민들은 오랜기간 고통받았다. 이로인해 오랫동안 축적되어왔던 남부의 경제, 산업기반과 문화까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신정권은 이를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60년대 중남미 정치 위기 당시 윤주용은 남미 우익 반군은 물론 마약 카르텔 조직을 소탕하려 외교부터 무력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자 반군들의 주요 수입원인 마약 생산의 기반을 없애버리기 위해 소련에서 직접 마약을 대량생산하는 기상천외한 정책을 펼쳤다. 중남미 일대에 엄청나게 값싼 마약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자금이 바닥나자 궁지에 몰란 반군들은 무력 시위를 벌였으나 이들은 친소련 정부군 및 소련군에게 잔혹하게 진압당했으며 결과적으로 중남미는 빠르게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재편되어갔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중남미의 마약중독자들이 급증하는 악영향을 끼쳤다.

그는 세계 각지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그토록 비판해왔던 미국의 팽창주의적이고 독선적인 면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는 각종 경제제재부터 걍경한 군사적 옵션까지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로인해 민중본위의 운동으로 수립된 것이 아닌 외부적 추동에 의하여 수립된 중동이나 남아시아의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이 엘리트 관료주의 체제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상

성격과 일화

상술한 유년기의 불행 때문에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었다. 초기에는 우울장애로 판정받았으나 2036년이 되어서야 양극성 장애로 진단받았다. 그럼에도 말을 잘하고 유머러스해서 사람을 빨리 사귀었으며 윌리엄 A. M. 스펜서는 윤주용과 처음으로 만났을때 곧바로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굉장히 예의바르고 듣는 사람이 낯부끄러울 정도로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이었으며 소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양극성 장애로 인해 몇주에서 몇달간 우울감에 빠져있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연설문이나 책을 썼다. 본인은 어렸을 때 조증 삽화가 찾아오면 창문 밖으로 물건을 던지거나 집안의 물건을 깨뜨리는 등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나 점차 자라면서 이것이 파괴적이고 충동적이지만 번뜩이고 획기적인 내적 사고로 대체되어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완벽주의 성향도 갖고 있었고 매사에 철저해서 사소한 것도 잊지 않고 없애고 빼버릴 것과 추가할만한 사항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그러나 무결점을 추구했다는 타인의 평가와는 다르게 그의 방은 몹시 어질러져 있었고 본인도 본인이 완벽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인은 그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본인의 행동만은 철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서 그런 특징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자신의 어질러진 방은 자신만의 공간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어질러져 있었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사실관계나 결과같은 명백한 것을 빼고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윤주용이 토론에서 항상 이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는데 논리나 화술로 밀렸을때는 며칠을 분해하며 잠을 못이뤘다고 하며 끝끝내 여러 근거를 붙이고 논리를 완성해서 재토론을 신청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상대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결말을 맞았다.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군인, 그것도 사병이었던 적은 1년 반에 불과하지만 왠만한 역사속 명장들 수준의 전략전술가였다.
또한 북미 연방에 사형선고를 내린 엔칠라다 작전을 그가 입안, 직접 야전지휘까지 했으며 이후 중국 통일 전쟁에서 쓰촨군벌을 격파하는 작전 또한 그가 지휘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무기를 들어 전장에서 싸운 덕에 많은 군인들이 윤주용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윤주용이 집권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각국에서 그나라 언어로만 연설했다. 다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덕에 그나라에서 손쉽게 인기를 얻었다.

어록

사회주의자는 그 누구보다도 이타적이어야 하며 일신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숭고한 목표가 있음을, 계급과 차별이 없는 사회의 구현에 노력해야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장경제 체제에는 항상 악인이 존재한다. 그 악인은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시스템을 옹호하며 그것을 경쟁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적, 추상적 혁명노선만을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정치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평등이 불가능하다며 그 대안으로 공정한 경쟁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평등은 불가능하다면서 공정한 경쟁은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무지하거나, 자본가를 옹호하는 그들의 하수인입니다.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에게 자신들이 국가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리며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 통제되고 있다고 거짓된 믿음을 준다. 하지만 실상은 선출되지도 않고, 견제받지도 않는 자본권력과 안보상의 문제라는 이유로 통제받지 않는 국가권력이 국가 전체를 좌우하며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선거는 누구를 뽑아도 이 체제를 위해 봉사하는 충실한자가 당선된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합법적 수단과 비선출 권력을 이용해 영구히 인민을 속박하고 착취하는 세계를 만들며 그들의 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의회 내에 프롤레타리아가 있는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들의 대표를 스스로 참칭한 자가 있는가? 의회는 노동자대중을 대표하지 못한다. 거대 자본가 정당에 휘둘리며 그들에게 복무할 바에야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가권력집단은 노동자인 우리를 민족이라는 틀에 가두고 다른 민족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케한다. 하지만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부르주아들이 결탁한 국가권력집단을 위해 우리 노동자들이 해줄 일은 없다. 적은 착취를 해왔던 집단 내부에 있는 자들이지, 다른 민족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에 민족주의는 필요 없다.

인간은 분노와 격정적인 상태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순수한 면모를 내비친다.

불합리함이 느껴지는가? 지금이 바로 혁명을 개시해야할때다.

혁명하기 좋은 시대군!

2041년 독일 사회주의인민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일본 지배층이 한국을 항복시킨다고 해서, 한국 지배층이 일본을 굴복시킨다고 해서 양국 인민의 개인적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굴복시켜 이익을 보는 것은 각국의 지배층과 자본가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 인민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2052년 일본 혁명 직후 도쿄 연설에서

인류의 시대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듯이 인류의 새로운 시대 또한 아프리카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2056년 아프리카 연합 정기총회 기조 연설중

세상이 미쳤을 때는 그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국가에 의한 검열보다 무서운 것은 인민들의 자기 검열이다.

우리는 미국이 여타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자행했던 행위를 완전히 청산하고 평화롭고 수평적인 관계로 재편하려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 세력을 용인하지는 않을겁니다. 이것은 패권과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입니다.

2066년 남미 정치 위기에 대한 개입을 주장하며

자동차는 딱 세가지 요소만 따지면된다. 얼마나 오래달리는가, 얼마나 튼튼한가, 얼마나 편안한가이다. 누가 타고 다니는지, 누가 만드는지,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한테는 입을 옷, 몸을 누일 집, 따뜻한 밥 한공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이상의 것들은 공허할 뿐더러 역설적이게도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각주

  1. 2052년 동아시아 SFSR 참여에 거부하였고 윤주용이 전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직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소비에트는 그녀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54년 미국혁명이 끝나자 뉴질랜드로 떠났다가 2070년 사망했다.
  2. 다만 아서 윌프레드는 윤주용을 전체적으로 호평했으며 스탈린 만큼은 아니지만 명암 자체는 뚜렷한 인물이라고 결론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