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프랑스 전쟁
제2차 반도전쟁
Iberian-French War
Second Peninsular War
날짜 1936년 10월 ~ 1937년 11월
장소 북이베리아, 북이탈리아, 남프랑스
결과 반프랑스 전선의 승리
영향 이베리아 연방국의 프랑스 남부 합병
이탈리아 왕국의 사보이 전역 및 코르시카 합병
프랑스 공화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대거 상실
프랑스 혁명 발발 및 프랑스 식민제국 붕괴
교전국 프랑스 군사동맹 반프랑스 전선
프랑스 공화국 이베리아 연방국
이탈리아 왕국
지휘관
[ 펼치기 · 접기 ]
모리스 가믈랭
막심 베이강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알퐁스 조르주
샤를 드 골
앙리 지로
조르주 카르투
르네 앙리 올리
프랑수아 다를랑
조제프 비유맹
[ 펼치기 · 접기 ]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오 살라자르
무함마드 메지안
호세 미얀 아스트라이
호세 미아하 메난트
에밀리오 몰라
후안 모데스토
호세 아센시오 토라도
로돌포 그라치아니
피에트로 바돌리오
이탈로 발보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
아달베르토 공작
조반니 메세
마리오 베르첼리노
에치오 로시
병력 약 2,479,050명 약 1,920,610명
피해 군 피해
사상자 762,590명
항공기 1839대 파손
민간 피해
주택 피해 4천 7백만 프랑
군 피해
사상자 985,260명
항공기 1028대 파손
민간 피해
주택 피해 5천 1백만 프랑
개요

제기랄, 빌어먹을 프랑스 놈들!
- 호세 미아하 메난트

이베리아-프랑스 전쟁 (영어: Iberian-French War) 혹은 제2차 반도전쟁 (영어: Second Peninsular War)는 1936년 10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벌어진 전간기의 주요 사건이다.

1936년, 5월 쿠데타 이후 프랑코-살라자르 연립정부가 구성된 이베리아에서는 자치주 대반란 이후 파괴된 이베리아 재건을 위하여 독일과 이탈리아의 투자 제의를 받았는데, 이를 추축국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간주한 프랑스 측이 이를 안보의 위협으로 받아들여 1936년 10월 3일, 카탈루냐 내의 이베리아 경찰을 우선 포격하면서 벌어졌다.

보통 이 전쟁은 프랑스 측이 일방적으로 선전하였다 이탈리아의 개입 이후 무마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는 바르셀로나 공방전갈리시아 해전에서 막강한 프랑스 육군과 해군을 상대로 선전해나가던 이베리아군을 엿볼 수 있다.

전개

자치주 대반란의 영향

1936년 5월 벌어진 자치주 대반란은 프랑스의 심기를 건들기에 충분했다. 충분히 대화로 해결 가능한 문제였지만 이베리아 측은 대화를 거부하고 무력 개입에 나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측은 이베리아 측에 평화적으로 대하라며 압박하고 나섰다.

자치주 대반란이 정리되고 연립정부의 출범 이후 이베리아 측은 추축국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산업적 원조를 받기 위해 힘쓰고 있을 당시, 이베리아 측은 파시즘에 우호적이고 그들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프랑스 측을 자신들도 모르게 압박하고 있었다. 20년간의 평화와 그에 대해 잠이나 자고 있던 프랑스 측은 먼 미래 열릴 2번째 반도전쟁은 없어야만 했고, 이에 어쩔 줄 몰라하던 프랑스 정계에서 프랑스 군부는 한가지 카드를 제시하고 나섰다.

예방전쟁

프랑스 군부는 어차피 2번째 반도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면, 차라리 우세한 육군병력의 수와 막강한 최신 기술의 군을 동원해 '예방전쟁'으로 그들을 먼저 깔아 뭉개자는 의견을 정계에 내놓았다. 이 의견이 갓 나왔을 당시에는 헛소리라고 일축되었고, 이에 격분한 프랑스 군부는 정계 몰래 침공 준비에 나섰다.

이후 군부의 비밀스러운 반이베리아 선전과 그에 대한 침공 준비를 남몰래 마친 프랑스군 측은 마침내 1936년 10월 오전 4시, 프랑스군의 의심스러운 행보를 정찰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국경을 정찰 중이던 이베리아 병사 한명에게 사격을 개시한 이후, 이를 뒤늦게 파악한 프랑스 정부가 군부를 진정시킬 틈도 없이 프랑스 군부가 선전포고문을 이베리아에 전달하면서 마침내 '이베리아-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비시' 대공세

오전 4시, 프랑스군의 이베리아 병사 한명의 사격 이후 진행된 본격적인 대공세에서 이베리아군은 패퇴를 면치 못했다. 급작스러운 침공도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육군은 자치주 폐지 이후 자치주에서 들끓는 반이베리아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국경선에는 소수의 국경경비대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소수의 국경경비대와 카탈루냐에서 주둔중이던 제23보병사단 '바르셀로나'의 긴급한 무전 아래에서 자치주에 주둔중이던 모든 이베리아군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급히 프랑스 전선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허나 프랑스군은 피레네 산맥에서 이베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을 마주하길 원치 않았고,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오전 5시에는 프랑스 해군의 주도로 갈리시아-발렌시아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때 갈리시아항에 정박중이던 이베리아급 전함 '이베리아'가 프랑스 항공모함 '베아른'에게 적발되어 급히 갈리시아항을 떠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각각 갈리시아와 발렌시아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마드리드와 리스본을 목표로 재빨리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허나 갈리시아에는 대규모의 이베리아군이 주둔중이였기에 프랑스군이 루고라는 소도시의 점령 이후, 재빨리 전선을 재정비한 갈리시아 주둔군에게 프랑스 상륙군은 패퇴하며 결국엔 발렌시아 상륙군만이 상륙에 성공하였다.

이때 발렌시아 상륙군은 카탈루냐까지 진군하여 피레네 산맥의 군과 최대한 빨리 조우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고, 상륙군은 잠도 자지 않고 오전 5시 30분 상륙 이후 다음날 오전 2시까지 발렌시아-카탈루냐를 일제히 점령해 나갔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한달간 이베리아의 동부를 완전 점령한다는 '비시 대공세'를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이 대공세가 시행된 1936년 11월부터 이베리아군은 끝없는 프랑스군의 전차와 항공기에 대항하여 저항을 나섰다.

바르셀로나 공방전

프랑스군의 카탈루냐 장악 이후, 프랑스군은 카탈루냐의 대도시이자 이베리아의 3번째 대도시인 바르셀로나 점령을 위해 진군하였다.

프랑스군의 침공을 최초 보고한 제23보병사단 '바르셀로나'는 당시 카탈루냐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카탈루냐까지 후퇴한 상황이였고, 카탈루냐 저항군들이 후퇴를 방해하여 전력의 76% 가량을 잃고 바르셀로나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중이였다.

허나 제23보병사단은 신의 가호를 받지 못했다.

발렌시아 상륙군조차 카탈루냐에 도달하였고, 카탈루냐가 완전 포위되기까지는 며칠 남지 않은 상태에서, 바르셀로나 보병사단은 준공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 숨어들어가 저항을 계속하겠다고 군부에 마지막 무전을 보냈다.

갈리시아 해전

프랑스군의 카탈루냐 장악과 아라곤 진군 이후, 프랑스 해군은 자신들의 입지를 보다 더 다지기 위해 이베리아의 항구들을 포격하고 다니고 있었다.

허나 이를 가만히 볼 이베리아군이 아니였고, 이베리아군은 엑스트레마두라 항에서 정박중이던 이베리아 해군의 '이베리아' 전함과 '카나리아스' 중순양함 총합 2대를 내보내 프랑스군의 구축함들을 격침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1936년 12월 13일, 두 함선과 프랑스군의 구축함 전대는 서로 조우하였고, 교전에 나섰다.

물론 구축함 전대의 완파와 함께 이는 첫 이베리아군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대공세 종말점 도달

그리고 1937년 4월, 새해가 되고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는 기간까지 프랑스군은 계속 대공세를 연장하여 이베리아를 완전히 무릎꿇이고자 시도하였으나, 이베리아군의 강력한 저항과 이베리아 내에 즐비한 산악 지형, 그리고 갈리시아 해전 패배의 여파로 결국엔 대공세 종말점에 도달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