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갑
李龍甲
김다람 대리 제작 및 채색
김다람 대리 제작 및 채색
생애 1887년 3월 6일 - 1952년 4월 17일
출생지 대한제국 대한제국, 공주부 회인군
사망지 만주국 만주국, 흑룡강성 이춘시
별명 몽강의 국부(蒙疆の國父)
정당 몽강군정당(夢疆軍政黨)
학력 동아합중국 합중국 육군대학교 졸업
복무 동아합중국 합중국 육군 소속 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09년 ~ 1945년
최종 계급 참장 참장(參將)
지휘 보병 제2연대 연대장
참모본부 제2국장
제16사단 사단장
주요 참전 동일 전쟁(東日戰爭)
동중 전쟁(東中戰爭)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
기타 이력 몽강 제국 집정관
(1933년 ~1935년)
헤이허 대학 명예교수
(1939년 ~ 1940년)

석원완이(石原莞爾)와는 무언가 마음이 맞는 것 같다. 본화(本和)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는 현명한 왕들과 본화(本和)를 믿지 않으려는 많은 어리석은 왕들의 다툼이 될 때에는, 여기서 세계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는 공통의 생각…비로소 전 세계 국가들이 참회하고 깨달아, 본화(本和)의 큰 위신력을 두려워해서, 세 가지 큰 비법의 큰 진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세계 각국의 왕과 신하 모두가 이 평화로운 시대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1932년 세계평화회론(世界平和悔論)

이용갑(중국어: 李龍甲, 1887년 3월 6일 - 1952년 4월 17일)은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과 동중전쟁(東中戰爭) 동안 활약했던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의 소속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 군인이자 사상가이다. 동북관군(東北關軍)의 실질적인 지휘관으로서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킨 뒤에 몽골의 왕공족,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를 내몽골의 황제로 추대하여 몽강제국(蒙疆帝國)이라는 괴뢰국을 건국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처럼 아시아주의자(東亞論自)로서 몽강 제국만족협화(萬族協和)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다민족 공상 사회로서 구상하며 최종적으로 단일동아연방(單一東亞聯邦)을 건설하여 동아시아(東亞細亞)의 화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범한 사상가였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데므치그돈로브의 철권 통치와 자신의 이상 통치를 두고 대립하였으며 동북관군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진웨이화(金伟華) 참장(參將)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만주국(滿洲國)으로 귀국하였으며, 합중국 참모본부(合衆國 參謀本府)의 부국장, 장쉐량(張學良)의 제1 합중병단(第日 合衆兵團) 내 제16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생애

1887년 3월 6일, 공주부(公州郡) 회인군(懷仁郡)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대한제국(大韓帝國) 내 종8품 문관이었다. 당시 충청남도(忠淸南道) 지방은 산업 개발이 지지부진한 지역이었으나, 1890년대 후반부터 고종(高宗)과 개화당(開化黨)을 주도로 이루어진 광무개혁(光武改革) 이후로 군사력 강화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장교 및 군사 엘리트 양성을 위해 지방 주요 거점 내 군사유년학교(軍事幼年學校)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1903년에 '공주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에는 '제국중앙유년학교'에 진학, 1909년에는 대한육군무관학교(大韓陸軍武官學校)에 16기로 졸업했다.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 체제의 확립 이전 기간인 1911년부터 1917년까지는 대한제국 상무영(大韓帝國 商務營) 소속의 정보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이용갑은 상무영에서 활동하는 동안 대한제국의 지방 군사 상황은 물론, 일본제국(日本帝國)과 도쿠가와 막부국(徳川幕府國)간의 군사 대립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시아주의(興亞論)는 이 기간동안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동래부(東萊郡)에서 만난 일산회(一山會)[1] 신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국수주의적 종교였던 일산회 신도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한 덕치(德治)'가 동아시아(東亞細亞)는 물론 전세계의 평화를 이끄리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1918년, 동아합중국이 표면적인 독립 연방 국가로 승인 받으면서 그의 발길은 대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만주국(滿洲國)의 설치된 장교 양성 학교인 합중국 육군대학교(合衆國 陸軍大學敎)에 1기 학생으로 입학하여 물량전·소모전·보급전·과학전의 중요성을 배움으로서 본격적인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이 종전된 이후에 일시적인 전간기를 맞이하면서, 특히 만주 지방이 중공업, 교통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등 경제적 융성을 얻었고, 자유주의(自由主義)에 기인된 문화 사조가 활발하는 장소로 변화함으로서 이용갑은 자신의 사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과 상황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24년, 이용갑은 상무영에서 활약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합중국 참모본부(合衆國 參謀本府) 정보본부과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정보본부과장으로 부임하는 동안 중원(中原)의 정치 상황을 눈여겨 보았으며, 후에 내몽골(內蒙古) 지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한 위치로서 낙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상과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이 기간 동안에, 이용갑은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군사 학습 모임의 대표로서도 활동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사적 지식과 조사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양상을 예측하고 내몽골 지역에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얘기했다.

1920년대 말부터 보병 제2연대, 동북관군으로 불리는 병력을 직접 지휘하기 시작하면서 퉁랴오 사건(通辽事件)[2], 우하이 참변(乌海慘變)[3]과 같은 내몽골 내에서 국지적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이에 동조하거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입지를 다지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기회를 확보해 나가는 동안 그는 '《세계평화회론》'(1932)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이상 사회 건설은 다음과 같이 두리뭉술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화(仁和) 성인은 장래에 대한 거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고 본다. … 그것이 어떤 것이냐면, '동아국'(東亞國)을 중심으로 세계에 일찍이 없던 큰 화(禍)가 반드시 일어난다. 그때 예화(豫和) 성인이 다시 세상에 오셔서, 본천(本天)의 계단을 동아화국(東亞和國)에서 세우고, 거기서 '동아국'의 국체를 중심으로 하는 만국통일을 실현할 것이다. 그렇게 예언하시고 돌아가 세상은 평화의 귀의하게 될 것이다.

1932년 세계평화회론(世界平和悔論)

열하 사변과 몽강국의 건설

의화(義化) 8년 늦가을, 금황사(錦皇寺)[4]에서 참배를 하고 내몽골로 돌아온 그는 남만주 철도주식회사(南満州鉄道株式会社)의 총재였던 서상헌(徐相憲)과 동북관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허뤼안(許瑞安)을 부추겨 내몽골 침략을 준비했다. 특히 우하이 참변을 일으켜 하급 장교로 좌천되었던 탕시옌과 죽을 맞추어 내몽골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공통으로 가지게 되었다. 허뤼안은 부임하자마자 이용갑을 데리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와 시린하오터(锡林浩特) 등지를 시찰한 뒤 8월 17일에 외만주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 허뤼안서상헌의 승인을 받아 내몽골 내 철로를 폭파시키는 적봉사건(赤峰事件)을 일으킨 뒤 이를 중화민국 정부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우려고 했으며, 이 사건을 구실로 내몽골 러허성(熱河省)에 위치한 중화민국군(中華民國軍)의 군사 기지를 전면적으로 침략함으로서 열하사변(熱河事變)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후 유관전투(榆關戰鬪)에서 이용갑 자신이 속해 있던 제5사단을 비롯해 제19사단제18혼성여단, 제32혼성여단, 29식 경전차(二十九式輕戰車)[5]로 무장한 제11기병여단, 제3특수전차연대가 참여했으며 탕위린(湯玉麟)과 쑨뎬잉(孫殿英)이 구이쑤이(歸綏, 현재의 후허하오터)에서 제5사단에 대한 반격 작전을 펼치면서 고전하기도 했으나, 17식 중전차 룽먼(十七式中戰車 龍門)으로 무장한 제3특수전차연대의 기병이 구이쑤이를 함락함으로서 중화민국군은 패주하게 되었다.

동아합중국 육군 참모본부(陸軍 參謀本部)는 의화제계운제(啓運帝)에게 "러허 성(热河城)의 중국군"에 대한 전략작전의 재가를 뒤늦게 요청했으며, 이 지역에서 군사 작전은 사실상 마지막이 될 것이며, 내몽골 문제의 종지부를 가져 올 것이라는 얘기를 꺼낸 후 동북관군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두 황제는 작전을 재가했다. 허나, 이들의 재가를 받았을 당시에는 이미 내몽골 일대의 주요 전략 거점들이 동북관군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전쟁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던 장제스(蔣介石)에 의해 탕구협정(塘沽協定)을 체결한 뒤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를 황제 및 정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수도를 칼간(张家口)로 하여 몽강국(蒙疆國)을 건국한 시점이었다. 황위에 오른 데므치그돈로브동아합중국허뤼안 동북관군 사령관, 일부 몽골 왕공들의 동의와 승인을 얻어 이용갑을 몽강국집정관(執政官)으로 임명하였다. 집정관에 오른 이용갑은 훗날 일어날 세계최종전쟁(世界最終戰爭)에 맞설 단일동아연방의 물자 생산 기지로서 몽강국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경제 모델로서 당시 눈부신 경제발전을 했던 소련 5개년 계획을 따와 '제1차 몽강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제 정책은 상당히 부실했으며, 1939년에는 실제 계획 성과의 절반밖에도 미치질 못했었다. 그는 세계대공황(世界大恐慌)의 발생으로 인한 전세계적 경제 위기를 지적하여 1960년대 즈음에는 동아합중국이 단일 다민족 국가로 통합하며 미합중국(美合衆國)에 맞설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보았다.[6]

대동아연맹의 주창과 좌천

1935년 이용갑은 경제 정책에 대한 부실한 성과를 이유로 집정관 직책에서 해직된 뒤 허뤼안의 도움을 받아 요직인 합중국 참모본부(合衆國 參謀本部)의 제2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아합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내몽골, 중국,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연맹체인 대동아연맹(大東亞聯盟)을 구상했고, 이를 위해서는 소비에트 연방(蘇聯)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연방을 패배시킨 후,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인 동남아시아(東南亞細亞)로 진출하여 이들 국가들을 "해방"시키고, 이후에 미합중국과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동중전쟁(東中戰爭)의 발발을 야기하는 노구교 사건(盧溝橋事件)과 같은 동북관군의 확전 태도는 자신의 지론인 소련과의 전쟁에 방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반대했다. 특히 그는 전선을 확대시키려는 부하들의 발호를 막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각하께서 (열하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섞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또, 새롭게 부임한 동북관군헌병 사령관진웨이화(金伟華)와의 갈등으로 인해 좌천됨으로서 만주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사정을 들은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제16사단사단장으로 부임함으로서 겨우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좌천되던 시점에도 '확전 불가론'(擴戰不可論)을 내세워 육군 수뇌부(陸軍首腦部)와 마찰을 빚었으며, 만주국으로의 귀국 이후에도 그는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고, 지배자의 지위만을 향유하는 동북관군의 지휘부를 비판하였고, 동북관군 장교들의 월급을 삭감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특히 불필요한 군벌들의 건국운동(建國運動)을 극렬히 비난했으며, 가네야마 사건(金山事件)을 일으킨 진둥허(金東河)와 김석범(金錫範)을 "자신만의 왕국 만들기에 빠진 하찮은 잡졸"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각주


  1. 입정종(立正宗) 계열의 신흥 종교로서 황제와 그 일파를 현인신(現人神)으로 떠받드는 등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2. 내몽골 퉁랴오시(通辽市)에서 합중국군 소속의 간첩이 임무 도중 중화민국 국민정부(中華民國國民政府)에게 억류되어 살해당한 사건을 말한다.
  3. 내몽골 우하이시(乌海市)를 동북관군의 대교였던 탕시옌(汤憲)이 이끄는 대대가 인위적으로 침공하여 내몽골자치정부(內蒙古自治政府)를 수립시킨 뒤 한족들을 척살한 사태를 말한다.
  4. 동래부(東萊郡) 양산군(梁山郡)에 위치한 제국신사(國家神祠)중 하나로서 대한제국(大韓帝國) 창세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마고할미(麻姑)를 주로 섬긴다.
  5. 동아합중국의 첫 국산 탱켓(小戰車)이다. 기병대에서 정찰과 보병지원 용도로 1930년부터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6. 「空想家이자 樂觀論者 - 李龍甲의 建國理想」(대한국 임시교육위원회,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