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李會昌
조선의 제10대 총통
재임기간
2005년 2월 1일 ~ 2010년 2월 1일
전임: 김대중(제10대)
후임: 노무현(제12대)
일국당의 제3대 대표
재임기간
1998년 3월 3일 ~ 2009년 12월 11일
전임: 노태우(제2대)
후임: 원희룡(제4대)
황해도의 민선 3,4기 감사
재임기간
1994년 7월 1일 ~ 1999년 11월 2일
전임: 이은우(제2대)
후임: 박형규(임시대행)
신상 정보
국적
조선민주국 조선민주국
학력
한양대학교 법학과 법학 학사
부모
이홍규, 김사순
출생일
1935년 6월 2일
출생지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사망일
2022년 2월 22일 (86세)
사망지
황해도 사리원시 태평동
정당
자유당
종교
천주교 (세례명:올라프)

이회창(李會昌)은 조선민주국의 정치인, 법조인이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조선민주국의 총통을 맡았다.

생애

그의 아버지는 이홍규로 법조인이었다. 1954년 전후 혼란기때 이홍규는 일민통일당 간부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받고 구속되었으며 이회창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받았다. 이홍규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에 의해 곧 풀려났으나 이회창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천주교에 귀의해 올라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황해고 시절에는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대입고시도 상당히 잘본편이어서 일류 대학인 한양대학교의 법학대학에 입학했다. 법학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딴 이회창은 한양 지방법원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법조계 경력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한다. 그는 10월 유신에 적극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10월 유신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당시 판사와 대법관들은 10월 유신의 찬성과 반대를 놓고 둘로 나뉘어 있었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법관시절 군사정권하에서는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에서 정부측 압력과는 상반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1965∼70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71∼73년 사법연수원 교수, 1973∼75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81년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기피인물로 낙인찍혔으나,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때 그는 판사로 임용된 노무현을 만났는데, 둘은 뒷날 총통 선거에서 라이벌로 맞붙는 악연이 되기도 한다.

1981년 최연소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사법적극주의나 법관에 의한 법형성의 강조, 정권의 입맛과 배치되는 소수의견으로 유명하였으며 법관 재직 중 권부와 타협하지 않아 '대쪽판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대한변호사협회의 학술지인 《인권과 정의》에서 특집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각 분야별 판례 20선"를 선정했을 때, '주요 대법원 판례 민법총칙 분야 20선'에 그가 대법원에 재직하면서 참여한 판례가 포함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기피 인물로 꼽혀서 1986년 연임을 못한채 대법관에서 퇴임하였다. 1989년 민주화 이후 복직되었고, 대법원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동시에 그는 1990년 1월 중앙 선관위에 발탁되어 선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선관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불법선거 풍토를 끝장내겠다며 재선거의 당선인 거의 전원을 당선무효화 시켰다. 신민당과 일민당 등 거의 대부분의 정당의 후보가 불법 선거를 저질렀다며 비판했고, 김영삼 신민당 대표에게 경고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몇년만에 스스로 사표를 쓰고 선관위원장을 그만 뒀다. 노태우 일국당 대표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영입하려 하였으나 이회창 스스로가 거부했고,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정치 경력

1995년 일국당에 의해 영입되어 부대표로 활동했다. 1998년 3월, 경선에서 크게 승리해 일국당의 대표직에 올랐고 이듬해 10월 경선에서도 승리해 1999년 대선에서 일국당의 총통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압도적 지지를 받고있던 민주투사 출신의 김영삼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하게 되었고, 이내 당 내에서 쇄신론이 일게 되었다. 이회창은 이때 보수 대통합론을 펼쳐 민주정의당, 보수통일당 등 1999년 대선때 분산되어있었던 여러 정당들을 통합하려고 하였고, 일국당의 독재 출신 인물들을 물갈이해 일국당에 대한 지지율을 높이려고 하였다. 이러한 결과 2001년 명예총재 노태우가 퇴임하자 압도적 지지로 이회창은 대표로 재선출되어 당을 이끌게 되었다.

2003년 총선에서 이회창이 이끄는 일국당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득표율이 7%p가량 증가하였고 의석도 167석에서 203석으로 크게 늘었다. 차기 총통 지지율에서 이회창은 압도적인 선두를 달렸고 2004년 10월 당내 경선에서 95%에 달하는 득표를 받아 총통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4년 총통 선거에서 신민당 출신 이인제가 잠시 돌풍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병역문제로 이회창의 지지율이 흔들리기도 하였으나 이인제의 모호한 이념은 대부분의 유권자에게 공감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회창의 지지율이 더 높은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회창과 이인제의 토론이 펼쳐졌고, 이회창은 이인제의 논거를 대부분 반박하며 국민들에게 호감을 샀다. 선거 결과, 이회창은 52.18%를 얻어 압도적으로 총통에 당선되었다. 다음날 아침 6시 이인제가 자택 앞에서 패배를 승복함에 따라 이회창은 조선의 제10대 총통으로 재임하게 되었다.

그는 총통으로 재임하는 5년간 여러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것은 법치주의 정책으로, 조선의 법을 좀더 투명하고 약자에게 공평하도록 만드려고 하였다. 그는 사법 부패가 심각한 원인이라면서 사법 개혁을 감행하였으며, 그의 기간 중 사법 부패를 근절하려는 여러 법안들이 시도되었다. 또 조선 최고재판위원회 위원들의 업무를 공개하게 하는 최재위 투명화 정책을 실행하였고 이 정책은 많은 국민들에게 호감을 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각을 세우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들과는 어느정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이북지역 철도화 계획을 통해 평의선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또, 공명정대한 공무 업무를 위해서 청탁 금지법을 일부 시행하였으나,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사법 개혁적 행보로 초반에는 60에서 70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점차 지지율이 떨어졌고, 야당에서 새로운 정치인인 노무현이 부상하는것을 막지 못했다. 복지정책 축소 정책을 발표했다가 지지율이 폭락했고, 거기다가 권위주의 논란이 나오면서 지지율이 40%대로 떨어졌다. 그는 한국일보 기자에게 '고려대 나와서 어디 기자 하겠냐'는 폭언을 하였고 대대적으로 기사화되었다. 여러 지식인들의 그의 엘리트주의적 성향을 비판하였고 이회창은 이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여당의 지지율도 함께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2007년 총선에서 일국당은 크게 패했고 본인의 차기 대권 지지율도 떨어졌다. 야당에서 돌풍을 일으킨 노무현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연합해 지지율이 40%대를 찍었으나 이회창은 30%대 언저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기 대권에 도전하였고, 노무현에 맞서 싸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지지율이 떨어진 상태에서 재선은 무리였기에 1:1 대결에서 노무현에 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일국당의 당대표직을 사퇴하였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평가

긍정적 평가

사법 부패 청산

그는 총통으로 있으면서 여러 사법 부패를 청산하려 하였고, 또 그에 맞는 법안들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을 통해 현재 조선의 법조계는 이전과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청렴해졌다. 또, 그가 대법관으로 재직하기 전에는 사법계는 정권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으나 그의 재직 이후 그런 현상이 현저히 줄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회창은 총통으로 있으면서 확실한 3권분립을 주장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법계는 정치계와는 떨어져야 한다며 사법 부패를 청산하려 했다.

청렴성

이회창은 그동안 박정희 정권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부패 추문이나 성추문에도 휩쓸린적이 없었다. 비록 정치계 입문 후에는 말이 많았으나, 법조인으로 있으면서는 어떤 뇌물도 받지 않고 정의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는것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정받고있다. 실제로 후일 신민당의 총통 후보로 출마하기도 한 문재인 역시 그를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중 한명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부정적 평가

엘리트주의, 학벌주의

그는 2008년 당시 야당의 대표였던 노무현을 향해 김대중도 그렇고 요즘 고졸들이 너무 사회에 많다며, 부정적인 어투로 노무현과 김대중의 학력을 폄하했다. 또 한국일보 기자에게 고려대 나와서 기자 노릇 하겠냐며 폭언을 하기도 했고, 사법계에는 한양대, 평양대같은 일류 명문대 출신이 많아야 한다며 학벌주의적인 면모를 많이 드러냈다. 심지어 한겨레 신문 기자가 자신에 대해 나쁜 어조의 기사를 쓰자 쓰레기 같은 대학 나오니까 저런 쓰레기 같은 기사나 쓴다며 막말을 한적도 있다. 당시 마인츠 대학에 재학중이던 경필석 박사는 최악의 엘리트주의라며 그를 비판했다.

20만불 수수설 의혹

2002년 설훈 당시 신민당 의원이 재기한 의혹으로, 20만달러에 달하는 돈을 받고 최규선씨를 정책특보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설훈 의원은 증거를 녹취한 테이프가 있으며 증인도 충분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조사를 해보니 설훈 의원은 충분한 증거를 재출하지도 못했고 증인도 찾지 못했다. 결국 설훈 의원은 허위 사실 유포로 의원직을 상실했으며, 이회창은 그를 정치공작에 미쳐 조작까지 벌인다며 지적했다.

역사관 논란

그는 2006년 대조선제국 때문에 일본이 그래도 근대화를 겪었다면서 제국주의를 옹호하는듯한 발언을 했다. 남,북일본 모두 그의 발언을 비판했으며, 북일본은 미사일 발사로 조선을 위협하는 등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남일본 총리였던 오카다 가즈오는 그를 두고 저런 자가 있어서 조선이 제국주의로 회귀하는게 아니냐며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회창은 그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며, 제국주의를 옹호하려던 의도가 있었던것은 아니라고 변명하였으나 이 발언이 또 논란이 되었다.

지역감정 유발

그는 그가 태어난 황해도 지역의 지역감정을 부추겼고 보수정당을 찍을것을 종용하였다. 진보적인 지역으로 손꼽히는 황해도에서 이회창이 30%대 득표를 하기도 하는 등 여러 반향을 낳았지만, 동시에 그는 황해도의 지역감정을 통해 표를 늘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2009년 대선에서 그는 황해 홀대론을 들고 나왔으나, 이에 비례해 황해도에서 이회창에 대한 나쁜 감정이 커져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지기도 했다.

역대 선거 결과

같이 보기

역대 조선민주국 대통령
2022년 기준
1대 2대 3대 4대 5대
이승만 이기붕 박정희
6대 7대 8대 9대 10대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이회창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노무현 오세훈 반기문 노웅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