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틀:대한국의 대외전쟁

인도네시아 전쟁
Indonesian War
기간
1961년 12월 15일 ~ 1962년 8월 5일
장소
인도네시아 전역
원인
인도네시아의 서파푸아 침공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갈등
결과
한국의 승리
영향
인도네시아의 말라야 연방 독립 인정
인도네시아 정부의 지방 장악력 약화와 분리독립 가속화
교전국
대한국
말라야 연방
영국
서파푸아 공화국
남말루쿠 공화국
폰티아낙 술탄국
인도네시아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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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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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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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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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인도네시아 전쟁은 1961년 12월 15일부터 1962년 8월 5일까지 한국과 영국-말라야 연방 연합군과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벌인 전쟁이다. 연합군은 서파푸아를 침공한 인도네시아군을 몰아내는 동시에 인도네시아 내에서 분리독립을 원하는 지역을 해방하였다.

한국에서의 정식 명칭은 인도네시아 전쟁이며 약칭으로는 인니전이라고 부른다.

배경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갈등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말엽 한국은 이위종-수카르노 회담을 통해 전후 인도네시아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그들의 독립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영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인니를 침공했고 한국은 인니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서방국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미 인니 민병대와의 전투에 당황해 전쟁 지속을 망설이던 영국은 곧바로 철군하였고 1946년 네덜란드도 마지못해 인도네시아 임시정부를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47년 1월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명목상의 출범이었다. 여전히 많은 친란 번왕국들이 인니 내에 남아있었고 이들은 공화국으로의 통합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네덜란드에 밀려 쫓겨났던 술탄 가문이 자기 영지에 돌아와 술탄국의 재성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한국은 서방국의 식민지 재획득을 막기위해 하나의 단결된 정부를 원하기는 했지만 말라카 해협 입구 부분에 있어 대단히 중요했던 리아우링가 제도와 칼라만탄, 술라웨시, 말루쿠등에 위치한 유전지대 또한 원했기에 인니 중앙정부와 번왕국들을 중재하며 최대한의 이득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수카르노와 우익 군부 및 인니 민족주의자들에게 대단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결국 1950년대 중반부터 인니 정부군은 각 번왕국을 무력으로 공략하며 완전히 합병하기 시작했고 번왕국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던 한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과 인니의 갈등은 1957년 동티모르 봉기와 1959년 리아우링가 조차 문제, 1960년 서파푸아 문제로 극에 달했다. 인도네시아 측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이 자신들에게 속해야 한다며 동티모르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서파푸아 합병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게다가 한국이 리아우링가 자치정부와 따로 협상해 얻어낸 조차권도 59년 인니 정부군이 리아우링가 제도를 침공하면서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인니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라야와 인도네시아 갈등

1952년 영국령 말라야가 독립하며 말라야 연방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수카르노가 말라야를 영국 신제국주의의 발판이라고 발언하며 두 나라는 완전히 적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인니가 말라야계 인종이 많은 리아우링가를 차지하고 보르네오 북부 지역까지 노리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북보르네오는 말라야 영토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말라야 민족이 이슬람교를 믿으며 다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말라야 연방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1961년 봄에는 인니가 지원한 브루나이 공산당이 봉기를 일으키며 북보르네오 지역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말라야 연방의 술탄들과 지역 유지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언제든 자신들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이들을 지원하는 인니를 확실히 손봐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서파푸아 침공

1961년 9월 15일, 인도네시아군은 네덜란드령 파푸아를 침공했다. 네덜란드군은 최대한 방어하며 시간을 벌었고 나흘 뒤 UN 긴급총회가 열려 인니군의 침공을 규탄하고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인니는 철수를 거부하였고 결국 9월 22일 한국이 먼저 나서 1주일 내로 인니가 유엔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고 리아우링가 조차권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 상태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인니 정부는 끝내 이를 무시했고 한국은 10월 1일을 기해 인니내 모든 외교관을 철수시켰다. 말라야 연방도 뒤이어 브루나이에 일어난 소요사태와 말라카 해협에서의 안보불안 조성행위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모든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개

호명(糊名) 작전

이 작전은 1958년부터 입안되었다. 해남성에 주둔하는 해병대를 빠르게 리아우링가에 전개시키는 것이 목표로 폭격기를 동원해 인니군의 주요 거점을 폭격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장악하는 것이 대략적인 과정이었다. 한국은 리우링가에 주둔한 인니 정부군의 역량을 과대평가하여 철저하게 준비했다. 인적정보를 활용하여 리아우에 주둔하는 인니군의 수가 1만 5천여명이라는 정보를 확보하였음에도 2만에서 3만을 상정하고 작전을 수립했다. 게다가 작전 수립후 2년 뒤인 1960년 더 큰 위력과 정확도를 자랑하는 함대지 미사일 갑호 신전(新箭)이 개발되며 곧바로 실전 투입되어 작전의 성공을 한층 높이게 되었다.

12월 15일 해남성 삼아시를 떠난 해군 5함대가 탄중피낭 앞바다에 정박했고 곧바로 14연대의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전날 있었던 포대와 인니군의 주요거점이 폭격당한 탓에 직접적인 저항은 없었으나 상륙후 탄중피낭 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약 3천여명의 한국측 해병대원은 시내에 약 2천에서 5천여명의 인니군이 있다고 파악했고 섣부르게 진격하지 않았다. 탄중피낭은 반도 지형이라 이튿날 20연대와 37연대가 반도 입구 부분의 남북에 각각 상륙하여 탄중피낭 시내를 봉쇄하였다. 약 나흘간 몇차례의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양측 모두 인명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2월 21일 20, 37연대의 봉쇄를 돌파하려는 인니군의 기동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측이 피해없이 이를 저지하면서 약 3천여명의 인니군 포로가 사로잡혔고 탄중피낭은 점령되었다. 이로써 탄중피낭 전투가 막이 내렸다.

12월 16일에는 바탐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나 닷새뒤 인니군측이 항복하면서 양측 모두 큰 피해없이 종료되었으며 한국의 1차 목표인 리아우링가 장악은 닷새만에 완료되었다.

보르네오 진공

한국 정부는 리아우링가를 점령하고 난 직후 인니 정부에게 48시간 내로 최후통첩에 적힌 내용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인니 정부는 무응답이었고 한국은 다음 목표인 보르네오를 향해 진공했다. 폰티아낙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던 해병대 50사단은 1962년 1월 2일 즉시 폰티아낙 시내를 장악했다. 일부 인니군이 있었지만 빠르게 항복하면서 상호 큰 피해는 없었다. 폰티아낙 함락 직후 말라야 연방 정부도 인니를 향해 선전포고 했다.

  1. 국방대신
  2. 해군통령
  3. 육군통령
  4. 해병대사령관
  5. 야전군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