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

1938년 7월 9일 규슈동아제국일본군 병력 예상도.
날짜1938년 8월 11일 ~ 12월 24일
장소일본 규슈혼슈, 시코쿠
결과

동아제국의 승리

교전국

동아제국 동아제국


동아 협력국 :

하코다테 막부 하코다테 막부
히가시에조 공화국 히가시에조 공화국
몽강제국 몽강제국

일본 일본제국


해외 물자 지원국 :

미국 미합중국
소련 소련
중화민국 중화민국 연합정부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지휘관
동아제국 아이신기오로 푸이
동아제국 리웨이룽
동아제국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동아제국 장쉐량
동아제국 신순성
동아제국 권준성
동아제국 정일권
하코다테 막부 도쿠가와 이에사토
히가시에조 공화국 미즈노 모리페이
몽강제국 데므치그돈로브
일본 히로히토
일본 스가야마 하지메
일본 하타 슌로쿠
일본 가와베 마사카츠
일본 도요다 소에무
일본 요나이 미스마사
일본 스즈키 간타로
병력
1,230,000여 명
항공기 2,000여 기
전차 3,600여 대
2,423,000여 명
항공기 800여 기
전차 1,230여 대
피해 규모
245,000 여 명 전사 및 실종
73,000 여 명 부상
총손실: 318,000 여 명
362,000 여 명 전사 및 실종
257,200여 명 부상
422,000 여 명 포로
총손실: 1,041,200 여 명
동아시아 전쟁
20세기 ~ 21세기
1939~1951
동중전쟁
1943~1951
태평양전쟁
1952~1954
동아전쟁
관련문서 : 냉전 | 제3차 세계대전 | 중국내전 | 일본 침공 | 황색 상황

일본 침공(일본어: 日本侵攻)은 동아제국(東亞帝國)이 일본제국(日本帝國)을 침공한 사건을 일컫는다. 1938년 7월에 시작된 규슈 작전(九州作戰)과 시코쿠 작전(四國作戰)을 기초로 하여 진행되었으며, 일본제국 남부의 규슈 섬과 시코쿠 섬 점령을 목표로 했었다. 그 후, 1938년 말의 몰락 작전(沒落作戰)을 통해 혼슈(本州) 섬의 도쿄(東京) 근처 간토 평야(関東平野)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뒤 규슈 작전에서 점령된 규슈 섬을 이용해 동아제국 육군 항공대(東亞帝國陸軍航空隊)의 공중 지원을 받아 12월 11일을 기점으로 일본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본제국동아제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결호작전(決号作戦)을 세워 동해(東海) 및 북태평양(北太平洋) 일대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수호하고자 했으며, 한반도(韓半島)를 통해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일본제국군(日本帝國軍)의 방면 제대를 제편했으나, 동아제국의 한반도 상륙루트 기만 및 규슈 작전시코쿠 작전으로 인해 방어 계획은 실패하였으며, 태평양동해의 제해권 및 제공권을 지킬 일본군 해군(日本軍海軍)이 동아제국군잠수함(潛水艦)과 함재기(艦載機)의 공격에 의해 격파되면서 해상 전선이 붕괴되었으며, 이후 본토에서 동아-일본 조약(東亞-日本條約)으로 일본 내각이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일본 총독부(日本總督府)가 설치되어 1951년, 동아제국의 패망전까지 유지되었다.

일부 내각 구성원들을 비롯해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하와이로 정부를 이전할 것을 선언, 일본 총독부의 해체 및 일본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한 일본 해외정부(日本海外政府)가 수립되었다. 동아제국제국주의에 기인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유지를 선언하고 동중전쟁(東中戰爭)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의 인적 자원 및 기술 자본 등을 이용해 동아제국 연합함대(東亞帝國聯合艦隊)를 창설함으로서 이들 함대를 이용해 1943년, 진주만 공습(眞珠灣攻撃)을 통해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을 발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배경

일본제국의 상황

일본제국(日本帝國)은 제2차 서남전쟁(第二次西南戦争, 1903-1904)을 거쳐 20세기 초에 들어 부분적인 정권 통합을 이룩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통치권을 선언한 홋카이도(北海道) 일대를 제외하고서, 일본 열도의 통일을 선포한 일본제국은 오랜 기간의 내전으로 내부 막번 출신간의 대립이 극심했으며, 명치정변(明治政変) 이후 대거 막번 장교들이 낙향을 선언하면서 군사개혁은 일시적인 동결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이었던 조슈 번 출신의 가쓰라 다로(桂太郎)는 프랑스 제3공화국(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과 독일제국(Deutsches Kaiserreich) 군대의 영향을 받은 서구식 군 편제를 도입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여 근대 국군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으나, 낙향했던 사쓰마 번 출신 장교들의 반발에서 시작된 사족내란(士族內亂, 1907-1908)으로 불필요한 군비 예산이 소모되면서 지리멸렬한 국가 상황에 이르렀다.

하코다테 막부와의 북방항전(北方抗戰)에서 하코다테 상륙전(函館上陸戰) 당시에도 제국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막번 출신의 육군사령관이 독단적으로 군사 파병을 개시하고 이틀치 소총 탄약이 남은 상황에서도 총검 돌격을 지시하는 등 군사 규율조차도 엉망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심각한 군사 문제에 대해 인식한 초계파적 일본 장교들과 내각 구성원들은 1910년대부터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에 대한 전쟁 개념을 도입하고 제국군사학교(帝國軍事學校)를 열어 해외 군사 전문가들을 초빙하는등 이른바 '2차 군사개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을 통한 전시 호황으로 군사력 증대가 용이해지면서 일본 제국은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과 서구 열강 수준에 이르는 군사 수준을 이룩해 냈으며, 동아합중국의 소속국, 대한제국(大韓帝國)과의 대한해협 대립(大韓海峽對立)에서는 대한제국 해협함대(海峽艦隊)를 상대로 T자 진형 전술을 선보여 일본 군함들이 대한제국 군함을 향해 측면 방향으로, 집중적인 함포 사격을 개시하면서 상당한 승전을 거두웠다. 대한해협에서의 해상 대립 이후로 대한제국 해군은 주춤하게 되었으며, 이 때의 전훈을 받아들인 일본 제국군은 자잘한 중소구경의 주포 무장을 생략하고 대구경 주포에 올인한 전함(戰艦)들을 건조하기 시작하면서 거함거포주의(巨艦巨砲主義) 사상이 팽배해지기 시작하였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