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클레치아 왕국의 보수정당
군주당 자유군주당 자유군주당 자유군주당
(율리우스파)
통합군주당
자유시민단 (일부 제외) 분당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엠페로우파)
자유군주당
Liberal Monarchist Party
약칭
LMP
표어
자유와 왕국을 위하여
(For Kingdom and Freedom)
창당일
117년 4월(1917년 4월)
당명 변경
200년 3월(2000년 3월, 통합군주당)
통합한 정당
사클레치아 파시오당(137년 9월 흡수합당)

제국당,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가톨릭보수당, 혁신당[1](200년 3월 신설합당)

전신
자유시민단
군주당
중앙 당사
사클레치아 일리오스
이념
국가자본주의
절대군주주의
사회보수주의
권위주의

내부계파:
이계-오크 평등주의
신자유주의
반공화주의
파시오이즘
반공주의
국수주의
자유방임주의

스펙트럼
우익(율리우스파 주류)
우익 ~ 극우(엠페로우파, 비주류)
국왕 겸
최고지도자
율리우스 카파스카
부지도자
율리우스 모니키아
원내지도자
율리우스 랑케
사무총장
율리우스 폰 아이슬레아
국민의회
70석 / 100석 (70%)
지방의회
1100석 / 2600석 (42%)
선제후지사
9석 / 15석 (60%)
이세계 의회
396석 / 2200석 (18.15%)
당색
분홍색 (#EF426F)
당가
자유군주당가
국제 조직
국제이세계자유연합
EU 교섭단체
유로아 군주보수와 개혁
당원 수
750,093명(200년 3월 합당 전 기준)
학생 조직
자유군주정치학단
청년 조직
청년군주연합조직
준군사조직
자유십자단(146년 유로아스피아 전쟁 종전으로 해산)
홈페이지

자유군주당 (영어: Liberty Monarchist Party of Saculechia, 自由君主黨, LMP)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집권여당이자 군주주의, 강성 국민주의 성향의 정당이었다. 상징색은 핑크, 정식으로는 자유군주 핑크이다.

IY 200년 4월에 친귀족 성향의 자유귀족당, 전체주의,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제국당, 대안 우파 성향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여 통합군주당이 되면서 소멸되었다.

IY 116년 2월 사클레치아 왕국을 지도하던 헨리 4세가 끝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2월 혁명으로 폐위되고, 이를 주도한 세력들이 군주당에 대거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자유시민단과 흡수하여 탄생하였다. 이후 전제군주제를 주장하는 율리우스가 세력과 국가주의 성향의 엠페로우파 세력이 등장했으나 전당대회를 통해 율리우스 이메타리우스가 당선되면서 율리우스가가 당권파가 된다.

120년 4월 제12대 의회선거에서 35석으로 선전하였으나 다수당인 자유당을 막지 못했으며, 124년 4월 율리우스 1세 사후 율리우스 2세가 취임하였으나 일명 필리노이의 난이라는 반군주당 운동이 터져 백성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결국 130년 7월 제13대 의회선거에서 13석으로 참패한다. 그러나 전당대회와 계파 갈등을 거쳐 140년 12월 제14대 의회선거에서는 연립 다수당이 되었으나 이 선거를 계기로 율리우스파 급진파인 알버트 작센이 선출되면서 다시 율리우스파 급진파들이 당권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141년 6월 알버트가 사클레치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독재 정치를 벌여 유로아스피아 전쟁의 부역조직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제15대 의회선거에서는 80석으로 제1당이 되었지만 제16대 의회선거에서 카이포스의 중도화로 대부분의 양 파벌이 카이포스의 퇴진을 빌미로 탈당을 주도하여 대규모 분당 사태를 겪었고, 166년 보궐선거에서 자유당의 돌풍으로 제4당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이후 제18대 의회선거에서 선거연합을 통해 다수당이 되었다가 엠페로우파 의원 35명이 탈당하였고 친귀족정당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결성하였다. 그 후 195년 5월 초대 지방선거에서 1,100석을 흭득했고 198년에는 자유귀족당, 제국당과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200년 3월 자유귀족당과 제국당 뿐만 아니라 일부 엠페로우파가 탈당하여 결성한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기타 중도, 보수우익 정당, 시민단체 등과 합당하면서 통합군주당이 되었다.

역사

사클레치아 2월 혁명

평범한 그리스계 농민이었던 율리우스는 일리오스에서 그의 형제였던 올리베르를 만났고, 올리베르는 자본가, 농노, 평민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해자는 제의를 거쳐 이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한편 율리우스는 더 많은 조직원을 확보하기 위해 자유주의를 내세웠고 올리베르는 헨리 2세를 반전통주의자, 반자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115년 3월 두 형제는 일리오스 전역에 의 가입을 호소하는 공보문을 뿌렸으나 헌병군에게 걸려 반역죄로 체포되지만 석방된다. 5월 헨리 2세에 반감을 가진 자본가들이 찾아오면서 동맹을 제안했고, 이들의 제안을 수락한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빛을 해산하고 자유시민단을 조직한다. 자유시민단은 이후 자본가, 국수주의자, 국민주의자, 귀족들과 합류하여 헨리 2세의 폐위 운동을 전개했다. 115년 11월 헌병군의 대대적인 시위 진압으로 인해 물러난 자유시민단은 무기를 이용해 싸우자는 방식으로 혁명을 준비하였고 116년 2월, 마침내 10만 명이 무기를 들고 일리오스 궁전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헨리 2세는 참수형으로 처형당했고, 내각 역시 붕괴되어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자유군주당의 탄생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향후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대해 두 형제는 자유군주제와 절대왕정을 주장했지만 곧 충돌하게 된다. 때문에 자유시민단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으나 자유시민단에 소속된 대부분은 군주당에 합류하기 시작해 당내 우익계열이 형성되었다. 당수 밀로스 욜라키치는 자유시민단을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밀로스와 지도부들을 끌어냈다. 이후 이메타리우스 체제의 군주당과 잔류된 자유시민단은 통합하여 자유군주당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117년 5월 율리우스가 이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올리베르는 지지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모아 엠페로우파를 이끌게 되고 율리우스파와 경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120년 4월 12대 총선에서, 전체 의석인 100석 중에 35석을 흭득하여 돌풍을 일으킨다. 하지만 자유당에겐 어림도 없었고, 120년 8월에는 율리우스가 자동으로 국왕이 되면서 탈당 처리되었으며 율리우스의 동생인 율리우시아 이메타리우스가 최고지도자가 된다.

필리노이의 난과 13대 총선 참패

123년 11월 율리우스 1세는 동상을 세우기 위해 총 100만 보루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자 필리노이가 유일하게 반대했고 분노한 율리우스 1세는 필리노이를 경질, 동시에 제명과 입당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후 필리노이는 정치 탄압이라고 비판하여 여러 지식인들과 해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후 해방조직은 자유군주당에 실망한 백성들이 모이면서 조직원 수가 10만 명을 넘었으며 중도파 의원들 역시 여기에 가담한다.

124년 2월 중도파 의원들은 동상 건설을 중단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엠페로우파는 필리노이 측에 가담한 중도파들을 일부 제명시켰다. 하지만 율리우스 1세는 건강이 쇠약해지며 국정 지지도까지 떨어지자 퇴위하게 되고, 이듬해 4월 율리우스 케로베스가 최고지도자 겸 국왕으로 거듭났지만 율리우스파 내 중도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절정에 달한다. 124년 5월 새벽, 필리노이 장군을 중심으로 무려 3만 명의 백성들과 해방조직 세력이 일리오스 시내를 점거하여 을 일으켰다. 당사에서는 중도파와 온건파 정치인들이 점거한 상태에서 엠페로우파 의원들의 사과를 촉구했다. 율리우스 2세가 시위의 강경한 대응을 펼치자 자국민 학살이라는 불명예를 안기고 물러났다.

율리우스 2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위기가 더욱 악화되었음에도 율리우스 1세가 백혈병으로 죽게 되자 조금씩 모면하는 모습을 보였고 군주당은 북부 지역의 귀족,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 원내 진입 5%를 넘으면서 9%를 기록했다.

결국 율리우스파가 끝내 힘을 잃고 엠페로우파는 잠시 동안 당권을 잡고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30년 3월 군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페페르치니 베뢰스티가 자유당 내부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제명되자 율리우스파 정치인을 제명시켰다는 이유로 지지층이 분산되어 7%를 기록하면서 원내 진입률 5% 이하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결국 당 쇄신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당 쇄신을 시작했다며 당내 비판이 이어졌으며, 13대 총선에서는 13석으로 대참패를 당해 엠페로우파는 초국가주의와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과격파와 국민주의를 주장하는 온건파로 쪼개진다. 양 측은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비난했고, 일부는 몸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한편 엠페로우파의 창시자 올리베르는 율리우스 1세의 사망, 엠페로우파의 분열과 처참하게 패배한 자유군주당의 상황에서 탈당 및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당 내 혼란 극복, 14대 총선 약진

130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엠페로우파에 유리 소크토라바, 율리우스파에 율리우스 코루바 주니어, 중도파에 앙리 존슨이 출마하였다. 전당대회 결과 새 최고지도자에 율리우스 코루바 주니어가 선출되었다.

133년 5월 자유당이 신생정당인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려 하자, 자유군주당이 반대했다. 만약 자유당이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할 경우 55석인 자유당은 미래당 7석을 합친 62석이 되며 개헌선을 넘기 때문에, 개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러던 중 윌리엄스 1세 내각 기간 동안 각종 사건에 휘말리면서 지지도가 40%로 떨어지고, 군주당은 미래당에 군주당 세력을 영입해 미래당을 자신들만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한편 미래당 대표 오라니아 헤스는 자유군주당을 비판했지만 후에 군주당 세력들이 미래당 지도부를 감금시키고 당권을 장악했다. 미래당 당원들은 군주당을 피해 탈당했고, 미래당 지도부는 군주당 세력들에 의해 쫒겨났다. 이후 미래당은 이름을 개발당으로 바꾸고 사실상 위성정당의 일부가 되었다.

136년 5월 국왕 윌리엄스 1세가 독살당하면서 자유당은 이 사건의 배후에 자유군주당이 있다고 주장했고 자유군주당은 이를 부인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14대 총선에서 관련 이슈로 꼽힌다. 이후 코루바는 율리우스 3세로 국왕 자리에 올랐고, 자유당과 야당은 꼼수 정치라고 비판하였다. 137년 4월 자유군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원내지도자에 중도파 율리우스 네막시스, 부지도자에 온건파 율리우스 아르시스를 선출했으며, 9월에는 파시오이즘을 표방하는 정당인 파시오당을 흡수합병했다.

그리하여 140년 7월 14대 총선에서는 39석으로 약진했고, 개발당 의석만 합쳐도 50석이 되어 처음으로 제1당을 차지한다. 그리고 140년 9월 중도파와 온건 율리우스파 의원들이 선거인단 100인을 통해 실시되는 간선제로는 선거에 한계가 있다며 백성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직선제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140년 10월 자유당 당수 빌헬름 폰 파우스트와의 회동 끝에 찬성 85인, 반대 3인, 기권 22인으로 정족수인 60석 과반을 넘기게 되면서, 건국 114년만에 간선제가 폐지되고 직선제를 실시하게 된다.

율리우스 4세의 독재와 당의 극우화

14대 총선 이후 전제정치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율리우스가 중도파인 율리우스 3세와 군주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율리우스파 중도파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율리우스가 급진세력은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엠페로우파의 온건파 대다수는 율리우스파 급진파로 전향하였고 과격파와 소수 온건파만 남아 엠페로우파 역시 힘을 잃었다. 140년 10월 급진파와 중도파, 엠페로우파 중도세력들이 11월에 전당대회를 열기로 합의하였고, 11월 전당대회에서 율리우스가 급진파인 율리우스 알버트 작센이 중도파인 제네로 아루파치와의 대결에서 알버트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고, 141년 3월에는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기간

쾨니히스오스테 사건 이후 벌어진 유로아스피아 전쟁 기간 동안에는 침공에 대비하여 지하당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다. 군주당은 정부 홍보와 징집 홍보를 통해 다수의 백성들을 전쟁에 참가하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전후 처리 및 사클레치아 재건 운동

자유군주당 지도부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여 전원 사퇴하였고 율리우스파 중도파인 율리우스 카이포스가 곧바로 최고지도자 겸 국왕이 된다. 150년 9월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사클레치아 재건 정책에 관한 백성들의 큰 지지로 80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한편 율리우스 4세의 출당에 반발한 율리우스파 급진파 정치인들은 엠페로우파와 손을 잡고 반카이포스 연대를 만들어 카이포스 사퇴 운동을 벌였고, 카이포스는 불순 세력, 분열 종자라고 비난해 반카이포스 연대를 비판하였다. 심지어 151년 4월 첫 보궐선거에서는 친카이포스파인 말리코 에보니가 반카이포스파 에르빈 폰 루터의 지역구인 루스메카르주 6구에 출마해 당선되는 등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151년 7월에는 자유당 의원 13명이 발의한 징수세 인하 법안이 자유당+친카이포스 의원들의 찬성으로 의결되자 반카이포스파가 징수세 인하를 반대하는 장외투쟁을 벌였다. 카이포스는 이들을 영구 제명하였으며 영구 제명에 반발한 반카이포스파는 카이포스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 무소속 의원들과 혁명당을 결성한다. 그 후 카이포스는 여러 부정부패와 당 내 갈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졌고 동시에 군주당 내 중도층, 무당층이 자유당과 혁명당에 분산되면서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예상을 딛고 자유당과의 연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그 후 자유당과 수차례 접촉하여 연정을 제안했으나 어떠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가, 156년 1월 자유당에서 좌파 성향의 크리스 반 루게스테른이 당대표에서 선출되자 자유군주당과 협력하지 않겠다고 밝혀 연정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분당과 카이포스의 사퇴

157년 3월 엠페로우파의 급진파 의원인 에케로스 디오니소스가 카이포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자신은 국왕을 암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카이포스는 디오니소스가 암살을 시도한 것이 맞다며 디오니소스에게 입당 금지와 징계 처분을 내렸다. 엠페로우파 급진파들은 디오니소스의 복당을 요구했고 카이포스는 각 파벌과의 회동을 제안했지만 엠페로우파 급진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159년 7월에는 보수당, 개발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해 160년 3월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는 91석으로 연립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앨리스 소피아보른 의원이 실종되고, 이에 대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혁명당과 혁명당이 꾸민 음모라고 주장하는 카이포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앨리스 의원의 실종 사건을 정치쟁점화하려는 카이포스를 비난하기 시작한 혁명당과 엠페로우/율리우스파 일부가 합치면서 반카이포스 연대를 다시 형성한다. 카이포스는 혁명당을 반정부단체로 간주하여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결국 165년 11월 엠페로우파 중립파였던 율리우스 프타니아가 카이포스의 행보에 실망하여 탈당을 선언한 이후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 세력들이 줄줄이 탈당하였으며 165년 12월에는 47명의 반카이포스 의원들이 탈당하였다. 결국 이들은 탈당하여 국가당, 애국당, 귀족당, 정의개발당, 백성의지당, 혁명군주당을 결성했다.

결국 카이포스는 앨리스 의원의 실종 사건의 책임을 받아들임에 따라, 최고지도자와 국왕직에서 사퇴하였고 동시에 지도부도 총사퇴를 하면서 원내지도자인 유리아 율리시아가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았다.

제3당으로 추락

율리시아는 166년 1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최고지도자 직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동시에 보궐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군주당이 자유당에 30%p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고 다른 지역구의 역시 모두 자유당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보수 텃밭이던 일로키구에서는 자유당 후보가 40%를, 예르산체구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60%를 넘겨 군주당 후보를 앞서는 등 참패가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166년 보궐선거에서 4석만 건진 채 참패했고 자유당이 30석을 얻어 제1당에 올랐으며 무소속 의원들도 당선되면서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복당했다. 참패 이후 지도부의 일부가 사퇴하자 율리시아는 168년 12월 보궐선거대책위원회를 해산하고 선거대책위원회를 마련해 선대위장이 되었고 보수당과 다시 한번 선거연합을 치뤘으나 17대 총선에서 개헌저지선 (30석)마저 확보하지도 못해 군주당은 아예 원내교섭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다.

율리시아는 이번 선거의 책임을 지고 지도부와 함께 총사퇴하였는데,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았던 율리우스 레카가 3개월만에 사퇴하자 율리우스파 급진파인 율리오스 히페리우스가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그 후 율리우스파 내 카이포스 세력을 소수로 밀어낸 후 혁명당에 있던 대부분의 율리우스파 급진파들을 흡수하면서 다시 율리우스 4세 시기 당 체제로 환원시켰고 루이스 1세 사퇴 직후 국왕직을 맡게 된다. 율리우스 5세는 다시 한번 군주당에 힘을 실어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하였으나 백성들은 율리우스 5세를 싫어했었고 이를 의식한 히페리우스는 백성을 호응하기 위한 정책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당의 재도약기, 2차 분당 사태

173년 4월 사클레치아 마르크스당이 적색 테러를 벌이면서 300명이 사망하였고, 자유당 정권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자 군주당 내에서도 공산주의를 척결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율리우스파 급진파는 강경 대응, 비주류 계파였던 엠페로우파도 강경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당은 폭력적인 공산당은 척결하되,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공산당은 척결하지 말아야 하는 온건적인 반공주의를 주장하였고 동시에 적색 테러를 벌이는 마르크스당을 척결하여 그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율리우스 5세는 만약 군주당이 자유당과 힘을 합친다면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겠다고 밝혔으나 자유당 지도부는 "굳이 우익 군주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174년 3월 마르크스당의 지도부가 대법원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자 율리우스 5세는 "마르크스당은 사라졌지만 아직 우리 국가와 타국의 사회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어나더어스라는 이세계에는 곧 20년 안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사라질 것"이라며 유엔에이에 경고하는 발언을 했으나 유엔에이 측은 "어나더어스의 모든 사상은 지구의 모든 사상과 비슷하지만 율리우스 5세의 발언은 지구에서 전파된 사회주의 이론과 사상을 아예 멸종시키려는 발언이다"라고 밝혀 그의 주장을 비판했다.

175년 2월 자유당 정권의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군주당은 이 때를 노려 재건을 시작하엿다. 그 결과 175년 3월 어스미터에서는 57.1%로 자유당을 앞질렀고 히페리우스가 차기 국왕 선호도에서 1위를 차지했다.

175년 12월 애국당이 명칭을 우리애국당으로 바꾼 후 군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을려고 했으나 율리우스 5세는 곧바로 거절하였고 "보수당과 선거연합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보수당이 데이비드 밀리아의 정책에 반발하여 당 내 분열이 일어나 친밀리아파와 반밀리아파로 분열, 그 중 반밀리아파가 탈당을 선언하자 보수당은 9석이 되면서 원내교섭 지위를 상실했고 동시에 보수연립의 개헌저지선 역시 상실했다.

다행히 여론조사에서 군주당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곧바로 18대 의회의 다수당일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고, 보수당도 제3당으로 약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애국당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군주당의 강성 지지층을 흡수하는 양상을 보이자, 군주당은 애국당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율리우스파 세력이 공석이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차지하면서 엠페로우파 후보들을 줄줄이 컷오프시켰고 이에 반발한 엠페로우파는 만약 율리우스파가 선대위에서 떼지 않는다면 탈당도 불사하겠다며 율리우스파의 행보를 비판했다. 179년 6월에는 보수당은 물론, 공명연단의 전신인 니치렌당과 선거연합을 맺었으며 그 결과 18대 총선에서는 군주당은 78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보수당은 21석을 얻어 예상 밖의 제2당이 되면서 니치렌당의 의석만 더해도 100석에 가까운 의석을 가져갔으며 군주-보수-니치렌 연립 정부가 탄생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의 재도약기가 이루어지면서 집권 연장으로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듯 했다. 그러나 민주 야당은 대패했으며 백성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민주국민당과 다른 야당들도 0석을 얻으면서 야당들은 정당연합인 입헌민주동맹을 결성하였고 군주당을 비판하였다. 율리우스 5세는 이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체포하면서 대부분을 정치범 수용소로 수용시켰고 반정부 행보를 우려하면서 자유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했다. 그러나 군주당 내부에서도 탈당 움직임이 일어났고 율리우스파는 이들을 수습하여 사태를 잠재우려고 했으나 엠페로우파는 "율리우스파는 당의 정통성을 버리고 독자적으로 가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당의 배신이며 우리는 사클레치아의 자유군주주의, 사클레치아만의 시장경제, 사클레치아라는 조국을 위하여 당을 떠난다"며 탈당을 선언하였다. 심지어 35명의 엠페로우파 의원들도 이에 동참해 탈당을 선언했고 181년 8월에는 당원 65,000명, 의원 35명을 포함하여 새로운 친귀족정당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창당하였다. 결국 군주당의 의석이 53석이 되면서 제1당을 유지하는 대신 의석이 줄어들었다.

율리우스 6세 체제

186년 9월 자유당의 민주계, 민주국민당, 사회당, 입헌민주당, 카네이션 연합 등 30여개의 정당과 정치단체, 시민단체들이 뭉치면서 중심이 된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군주당과 정부는 민주당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고 해산을 시도하였으나 민주당원의 수가 폭발적으로 급증하면서 정치 탄압 반대 집회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자 결국 자유당의 정치 활동 금지를 해제시켰고 민주당을 정당으로 인정하였다.

187년 3월 율리우스 5세는 68세의 나이로 폐암에 걸려 정상적인 집권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국왕에서 사퇴했으며 율리우스 카프카샤 로이치가 곧바로 국왕이 되었고 부국왕에 율리우스 카프카샤 로이치 주니어를 선출하자 백성들은 세습 정치라고 비판하였다. 또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은 자유당도 동시에 율리우스 6세를 비판하면서 율리우스 독재 체제의 부활이 아니냐고 우려하였다. 하지만 190년 4월 19대 총선에서 59석을 얻었으며 보수당 11석, 공명당이 3석을 흭득하였고 18대 국민의회와는 달리 의석 수가 73석으로 26석 줄었다. 이 때부터 민주당이 12석, 자유당이 14석을 얻어 진보야당이 다시 원내에 입성하였다.

192년 3월 어스미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과 군주당의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에서 치열하게 다투다가 193년 1월 여론조사에서 추월당했고, 국가시장제도로 인한 반대 시위, 단식 투쟁으로 인해 지지율이 더 하락하였다. 194년 6월 부국왕을 폐지하고 총리를 신설하여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로 선출하는 방법과 지방선거 실시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총리를 신설하였고 195년 1월에는 초대 지방선거에서 2,600석 중에 1,100석을 얻어 지방선거에서도 제1당을 차지했다. 196년 3월 구색정당인 미래당이 신화당과 합당하여 미래신화당이 되자 신화당은 군주당과 정당 연합에 참여하였고, 197년 3월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에서 분당된 자유귀족당제국당이 군주당과의 정당연합을 추진하자, 신화당과 공명당, 보수당은 이를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군주당은 신화당과 공명당, 보수당과의 정당연합에서 결별하기로 결정하면서 귀족당, 제국당과 함께 정당연합인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군주정당 통합

율리우스 6세는 196년 12월 여러 명의 지식인들과 싱크탱크인 자유군주연구원 직원들이 모여 결성한 국가플랫폼 자유통합은 사클레치아 내 친왕정 보수단체 대표들을 만나 군주 보수세력의 통합을 주장했다. 이에 동참한 30여개의 왕정보수단체들은 율리우스 6세의 획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중도층을 확보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고 율리우스 6세는 다수의 중도층부터 보수층까지 대변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기로 했다.

198년 3월에는 귀족당, 제국당과 정당연합을 구성하여 공명-보수-신화 연합과 결별해 미래군주연합을 탄생시켰고 군주보수통합론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하였다. 198년 6월 급진중도 성향인 중도당이 보수통합에 찬성하자 중도좌파 세력과 충돌하면서 끝내 불참했으며 9월에는 빌헬름 쿠르츠 당수와 회동을 한 끝에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지도부가 통합신당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99년 1월, 군주당은 군주정당 통합을 희망하는 전당원투표를 실시하였고, 99.9%로 찬성하면서 의결되었으며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도 전당원투표에서 88.6%로 의결되었고 자유귀족당과 제국당도 전당원투표에서 의결되었다. 199년 5월 율리우스파와 엠페로우파 정치인들은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하나 된 통합신당과 함께하자는 서약을 만들었으며 율리우스 6세와 쿠르츠를 통합신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보수성향 시민단체 출신 빌헬름 안과 루이스 미테랑, 제국당의 에릭 소크라티나,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의 빅토르 체트셴코를 창당지원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합당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99년 11월까지 20여개의 보수 시민단체들과 원외 중도우파 ~ 우익정당인 국가부활대혁명당가톨릭보수당, 혁신당 등 8개 정당이 통합신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200년 1월 율리우스 6세가 전제군주제를 포기하고 입헌군주국임을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었고 200년 2월 신당명칭 선정에서 군주당과 6개 정당이 추천한 통합군주당과 기타 정당이 추천한 통합동맹당 중에서 통합군주당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200년 3월, 군주당은 통합신당에 참여했던 모든 구성 정당과 합당하여 보수 진영의 통합정당인 통합군주당을 출범시킨다. 이로서 자유군주당은 창당 89년만에 자연스레 해산되었고 모든 권한은 통합군주당 중앙당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통합군주당은 기대와는 달리 중도층과 온건 보수층의 질타를 받아 지지층이 이탈하면서, 결국 최저 지지율인 19.1%을 기록하다가 20대 총선에서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성향

자유군주당은 전제군주제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율리우스파는 자유보수주의와 사회보수주의를, 율리우스파보다 파시오 성향이 강한 엠페로우파는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 다만 양측 모두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율리우스파는 유럽식 시장 경제를 국가의 경제 체제로 내세우자는 반면 엠페로우파는 사클레치아만의 시장 경제를 주장한다. 그 중 극소수는 시장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중도 세력이 존재한다. 다만 과거 대부분의 중도파들은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자본가, 성직자, 귀족, 영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길드도 이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세계 가톨릭교회를 내세우는 당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지지 세력도 대부분 존재한다. 농촌, 중소 도시, 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하는 자유당과는 달리, 자유군주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강경 스탠스를 취하며 양 파벌에서는 동성애자는 백성이 아닌 반역자며 이는 국내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6세 정권 초기 동성애자를 국내에서 추방시키는 정책을 폈는데 사클레치아 정부가 발표하는 인구 조사에서 188년에 1%였던 비율이 189년에 0.1%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어나더어스 허가 비영리단체인 이세계 성소수자 연합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면서 동성애 박해에 대해 비판적이다.

사클레치아의 주변국에 많이 분포하는 엘프인들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며 이들마저도 반역자 취급을 하고 있다. 엠페로우파의 경우 오크족들은 소수의 인간보다 우월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오크 우월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율리우스파는 오크족과 인간들의 평등을 추구한다며 오크와 인간간의 평등주의를 주장한다.

공화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율리우스파는 자국의 소수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나 다름이 없다며 소수 공화주의자들의 척결을 주장하지만 엠페로우파는 공화주의를 아예 사회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중 자본가경제협의회, 사클레치아 경제인연합, 캐피탈리스트 유니온 등의 친자본가 길드 단체들과 기독교신앙회, 신성자유단, 하나님의 축복단 등 이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신흥 종교 교단들도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

계파

자유군주당의 계파로는 율리우스파와 엠페로우파로 나뉜다. 그 중 율리우스파는 충성파, 신파, 개혁파, 급진파, 변혁동맹, 사회정의혁명단 등이 존재하며 엠페로우파는 전진 사클레치아, 자유의 아침, 국가혁명연합, 사클레치아 애국동맹 등이 존재한다. 극소수로는 중도주의/중립파적인 스탠스를 띄며 구 율리우스파 중도파와 온건파들이다.

과거에는 율리우스파의 파벌 중 급진파, 중도파, 온건파 등 다양했으나 중도/온건파는 인도네시아 출신 중도파 정치인인 필리노이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벌인 필리노이의 난으로 인해 중도파와 온건파가 비주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후 중도파 정치인들을 당 지도부에 유입시겨 사실상 당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중도파와 온건파는 율리우스 4세 체제부터 당권을 빼앗겼으나 전후 처리에서 당권을 다시 탈환하였으며 16대 의회선거부터 카이포스가 집권하면서 양 파벌의 실망으로 탈당을 겪다가 자신 역시 은퇴함에 따라 결국 대부분이 쪼그라들고 사실상 사라졌으며 통합군주당부터는 대거 탈당하여 중도정치연합에 들어간다. 충성파는 초기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신생 충성파, 구 급진파 세력들이 다수 들어오면서 주류 세력이 되었다.

과거 카이포스파와 반카이포스파라는 두 개의 세력이 등장했으며, 카이포스파는 실용주의, 자유주의 우파를 지향하는 반면 반카이포스파는 권위주의, 정통 보수주의 우파를 지향하는 편이지만 이후 반카이포스파가 분당으로 타 정당으로 넘어갔고, 그 후신이 되는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는 반카이포스파와는 달리 약간 급진적인 형태를 띈다.

선거 결과

국민의회 의회선거

선거년도 합계 득표율 의석 +/– 집권 여부
120년
35 35%
35 / 100 (35%)
증가 35 야당
130년
13 13%
13 / 100 (13%)
감소 22 야당
140년
50 50%
50 / 100 (50%)
증가 37 여당(LMP-DPP)
150년
6,792,840 71.3%
80 / 100 (80%)
증가 30 여당
160년
6,792,840 71.3%
69 / 100 (69%)
감소 11 여당
(LMP-DPP-CP)
170년
3,210,091 43.3%
12 / 100 (12%)
감소 57 야당
(LMP-CP)
180년
4,989,071 43.3%
78 / 100 (78%)
증가 66 여당
(LMP-CP-NCP)
190년
3,912,203 51.3%
59 / 100 (59%)
감소 19 여당
(LMP-CP-NCP)

지방선거

선거년도 합계 득표율 지방선거의원 +/–
195년
6,985,103 69.9%
1,100 / 2,600 (42%)
신생

논란 및 사건사고

백성 대변 능력 부족

백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율리우스 1세 당시에는 신경제계획을 주장하였으나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 간의 갈등이 있었고, 이 때문에 국왕의 예상보다 실행이 늦춰지는 사태가 발생하여 백성들의 공분을 샀으며, 덩달아 이에 반감을 가진 백성들이 필리노이의 난을 주도하면서 결국 사퇴까지 이어졌으며 율리우스 5세 당시 백성들이 이를 싫어하자 백성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으며 지지율은 점점 줄어든데다가 폐암으로 인하여 사퇴했고, 율리우스 6세 역시 임기 초반에선 백성들의 비판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임기 중반부터는 국가안정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십자단의 만행

유로아스피아 전쟁 당시 군주당은 지하당사를 만들어 활동하였었고, 중소 준군사조직이었던 자유십자단은 이를 동원하여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4세를 홍보하는 등의 부역 행위를 저질렀다.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문을 당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 십자단은 사람들을 일리오스 지하수용소라는 곳에서 수용시켰고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또, 수용된 사람 일부를 실험에도 쓰이기도 했다. 한편 여성들은 이들에게 성고문을 당했었는데, "생명의 잉태"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무려 30,000명의 남성 십자단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19세 청소년은 물론, 49세 중년까지 다양한데다가 이 곳에서 무려 10,000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205년 조사 결과 350,000명이 강간을 당했으며 2,500명이 임신, 170명이 야외 노출을 강제로 시키기도 했고 4,000명은 불법으로 성노예가 되었다고 과거사조사위원회가 밝혔다.

이 때문에 전쟁 종료 직전, 수많은 십자단 부역자들은 자신의 자택에 지하실을 만들어 연합군이 오기 전에 노예들을 가져가 계속해서 자신들의 성적 욕구 해소용으로 썼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나돌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십자단원, 십자단 부역자들은 1,500명에 불과하였으며 207년 율리우스 아페렌스 총리의 과거사 청산 캠페인으로 인해 대부분이 사형을 당하거나 종신형으로 수감된 상태이다.

이후 자유십자단은 부역자들과 유사 조직을 수차례 결성하였으나 해산되기도 했으며 이는 180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군주당도 전쟁 협력과 홍보를 위해 부역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고, 지도부 측은 "사실 이건 십자단이 그랬다. 우리는 전쟁 당시에 지하당사로 이전한 것 밖에 없다"고 밝혔는데, 소수당원들은 지하당사에서 십자단의 부역 행위를 위해 돈을 지원해준 거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도부의 발언이 일부 의원들에게 전해지면서 군주당의 십자단 부역 지원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특히 구 엠페로우파 소속 엘리나스 율리오스 의원은 197년 3월 논평에서 "만약 이 당이 십자단 부역행위를 지원했다면, 우리는 파시오스트인가?"라는 망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생명의 잉태 관련 사건에서도 망언은 끊이지 않았는데 율리우스파 급진파 성향의 니키 에로스 의원은 199년 4월 "만약 우리를 전쟁 부역자들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들은 남자들 못 사귀어보고 결국엔 그 남자들한테 훅 가버려서 인권따위 집어쳐버린 창녀들 아닌가?"라고 망언을 하여 윤리위원회까지 간 사례가 있었는데, 니키는 과거 197년 5월 연설에서, "과거사 청산? 필요 없습니다. 부역 행위? 그건 거짓된 사실입니다. 그냥 우리들 보고 나가라는 말 아닙니까?"라고 말하여 보수당 의원들과 야당 의원들이 반발한 적이 있다. 결국 니키는 윤리위에서 제명을 확정했는데, 니키는 "맞는 말 했는데 왜 제명이냐"며 반발했고 결국 제명 처리를 하루 앞두고 탈당하여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에 입당하다가 몇몇 무소속 의원들과 함께 사클레치아의 대안을 창당하였다.

당 내 갈등과 사건사고 미흡

사클레치아 전문가 33인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군주당은 당 내 갈등과 사건사고 대처에 미흡하다는 평이 있다. 필리노이의 난에서는 동상 건설에서 시작된 갈등이 곧 국왕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율리우스 2세는 진압 작전을 펼쳤으나 중소도시, 대도시를 제외한 일부 지역에만 그쳤고, 심지어는 백성들을 색출해내어 시위자가 나올 시 강력 처벌하는 대책을 내놨으나 오히려 백성들만 사망하고 여성들은 고문실로 끌려갔기에 반발이 커지면서 결국 군중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퇴진 운동이 점차 거세졌다는 평가가 있다.

성 관련 논란

189년 11월 티파 율리오시아 의원이 의원실에서 남성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논란이 일었고, 그 후 제명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성폭행 논란이 있었는데, 165년 3월 오카르 네페르시아 의원이 그의 동료 2명과 함께 4명의 여성을 강간한 사고가 터졌었다. 그러나 군주당은 이를 제명하지 않고 오히려 당선에만 집중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에 대한 해명이 나오지 않아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196년 9월 예제프 로베르트 타야프 의원이 10살 어린이를 성추행했다며 제명되었고, 200년 1월 게르마스-앵본계 혼혈인 에르빈 노다카 의원이 앵본에서 살 당시 성인물을 판매하고 있었다는 논란이 드러나자 곧바로 제명을 확정지었다.

군주정당 합당 이후 전망

자유군주당은 통합을 통해 통합군주당으로 합당하였으며, 과연 이번 합당을 통해서 중도부터 우익 내지 극우까지 스펙트럼을 넓혔으나 과연 백성들을 어떻게 대변할지, 당 내 갈등과 사건사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가 문제다.

자유군주당은 필리노이의 난부터 사상 초유의 1·2차 분당 사태 등을 겪었고, 특히 당 내 갈등과 카이포스의 행보가 제1차 분당을 촉발시켰으며 당의 정체성마저 상실해버린 율리우스파의 행보로 인해 엠페로우파 다수가 탈당하여 제2차 분당을 일으켰다.

또한 자유십자단의 만행과 유로아스피아 전쟁 어나더어스 측에서는 경고를 받아 30년 안에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서 군주당은 합당 이후에도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전쟁 방지·과거사 청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는 207년 과거사 청산 캠페인이라는 정책을 실시하여 과거사를 어느 정도 해결하기도 했지만, 아페렌스 총리의 돈세탁 의혹 등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되기도 했다.

각주

  1. 국가부활대혁명당, 애국당 외 4개 원외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