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대전쟁
날짜1917년 7월 22일 ~ 1920년 8월 8일
장소유로파 대륙
결과 협상국의 승리와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패배
교전국
벨포르 공화국 벨포르 공화국
연합왕국 연합왕국
에쉬르 공화국 에쉬르 공화국
홀란트 왕국 홀란트 왕국
로마냐 왕국 로마냐 왕국
엘라다 왕국 엘라다 왕국
미합중국 미합중국
오스트마르크 제국 오스트마르크 제국
몰다비아 왕국 몰다비아 왕국
셀주크 제국 셀주크 제국
스르프스카 왕국 스르프스카 왕국
지휘관
벨포르 공화국 쥐스탱 카요
벨포르 공화국 앙리 가이아르
연합왕국 에드워드 6세
연합왕국 스탠리 헨리퀴스
에쉬르 공화국 드미트리 파블로프
에쉬르 공화국 알렉세이 바실레예프
로마냐 왕국 움베르토 4세
로마냐 왕국 비토리오 실베리
홀란트 왕국 빌렘 4세
홀란트 왕국 오스마어 판 데어 마르크
엘라다 왕국 요르요스 3세
엘라다 왕국 엘렙세리오스 프테라고스
미합중국 토머스 마셜
미합중국 존 낸스 가너
오스트마르크 제국 페르디난트 3세
오스트마르크 제국 테오발트 폰 지그마어
몰다비아 왕국 보이치에흐 9세
몰다비아 왕국 게오르게 칼리네스쿠
셀주크 제국 셀림 6세
스르프스카 왕국 알렉산다르 2세
군대
에쉬르 공화국 12,000,000명
벨포르 공화국 8,660,000명
연합왕국 8,841,541명
로마냐 왕국 5,615,140명
엘라다 왕국 450,000명
홀란트 왕국 510,000명
미합중국 65,000명
총 합: 36,141,681명
오스트마르크 제국 16,250,000명
몰다비아 왕국 1,200,000명
셀주크 제국 2,998,321명
스르프스카 왕국 310,000명

총 합: 20,758,321명

당시의 유로파 대륙

제1차 대전쟁 (The First Great War)은 1917년 7월 10일부터 1920년 8월 8일까지 일어난 유로파 대륙을 중심으로 한 대전쟁이다. 제2차 대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대전쟁(Great war)이라고 불렸다. 미합중국에서는 유로파 전쟁(Europa War)라고 불렸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고 약 9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지적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는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오스트마르크 제국, 셀주크 제국, 몰다비아 왕국이 몰락하고 나머지 연합왕국, 벨포르 공화국 등도 역사의 주도권을 사실상 상실했다.


배경

서막

1917년 5월 9일, 사실상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보호령이었던 슬로보니아 지역에서 점점 슬로보니아 민족주의 사상이 대두되자, 오스트마르크-슬로보니아 관계를 봉합하기 위해 황태자인 오스카어 폰 합스부르크(Oskar von Habsburg)와 육군원수 슈미트 폰 벨저뫼스트(Schmitt von Welser-Möst)가 슬로보니아를 예방했다가, 극우 민족주의 폭력단체에게 폭탄테러로 암살당하는 반 옐라치치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오스트마르크 제국이 슬로보니아에 강경한 태도로 나설 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자명해보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對슬로보니아 최후통첩에 1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우선적으로 제국 내부의 영방국가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으며, 슬로보니아 정부의 후견국인 에쉬르와 그 동맹국 벨포르의 태도에 주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름입니다, 예: 너무 많습니다

그 때문에 사건으로부터 10여일이 지난 5월 19일에야 제국 내각이 소집되었고,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에 또 20여 일을 보내 6월 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슬로보니아 및 유로파 열강국에게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6월 15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마르크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그 시점에 벨포르 대통령이 에쉬르를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에쉬르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에쉬르-벨포르 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달된 최후통첩은 슬로보니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수많은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 옐라치치 사건에 연루된 관료 및 군인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마르크와 스르프스카 육군이 직접 슬로보니아 영토에 주둔하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때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 최후통첩이 슬로보니아에 도착했을 때 슬로보니아의 수상은 지방 시찰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나마 수도 복귀가 늦어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이 소모되었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결국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타타레스쿠 내각은 이와 같은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하지만 동부 유로파에서의 영향력 약화를 원치 않던 에쉬르 공화국은 6월 16일에 당시 슬로보니아의 수상이었던 게오르기 타타레스쿠(Георги Татареску)에게 밀사를 보내, 지원 의사를 밝히기에 이른다.

이에 고무된 슬로보니아 내각은 오스트마르크 제국에 다시 한번 통첩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했으나, 이미 분노할대로 분노한 페르디난트 3세는 재협상을 요구하는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슬로보니아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국경을 봉쇄했다. 그에 따라 오스트마르크에 상당량을 의존하던 식량 수입 역시 끊어졌다. 그에 따라, 슬로보니아에는 식량 부족 때문에 6월 폭동(Émeutes de juin, Riots of June)이 터지기에 이른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폭동에 타타레스쿠 내각은 통제력을 상실했고, 그 와중에 슬로보니아에 체류 중이던 오스트마르크의 특명전권공사가 살해되기까지 했다.

7월 22일, 오스트마르크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대규모 군 병력을 슬로보니아에 투입했고, 타타레스쿠 수상을 비롯한 슬로보니아의 각료들을 체포했다. 이에 반발한 에쉬르 공화국은 슬로보니아의 자주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에쉬르의 총동원령 공포(公布)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마르크는 자국민이 죽어나간 것을 명분삼아 에쉬르에게 총동원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에쉬르는 타타레스쿠 수상과의 비밀 상호방위 협약을 들어, 총동원령의 철회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8월 1일에 에쉬르 공화국에, 8월 3일에는 그 동맹이던 벨포르 공화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에 8월 4일에는 벨포르 공화국이 의회 만장일치로, 오스트마르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결의하였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름입니다, 예: 너무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스트마르크 제국 육군이 3호 계획에 따라 홀란트 왕국을 침공하자, 홀란트 왕국을 유럽의 교두보로 삼고 있던 연합왕국도 홀란트 방위 및 벨포르 공화국과의 협상 이행 의무를 들어 참전하게 된다.

이 때, 연합왕국의 당시 총리였던 헨리퀴스 경은 이렇게 말했다.

Where in the world are we going?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