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만주전쟁 (서태평양 연대기)

제1차 만주전쟁 (서태평양 연대기)
날짜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장소대청제국(만주 6로지역)
상태 종결
교전국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대청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대한제국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우량카이공화국
대화제국(서태평양 연대기)대화제국
일본제국(서태평양 연대기)일본제국
만주제국 만주제국
지휘관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 아이신교로 푸이(서태평양 연대기)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 아이신교로 시하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 아이신교로 시치아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 타타라 알러하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 마기야 잔샨
대한제국 이철
대한제국 강현
틀:나라자료 후룬공화국 오로고드 아바타이
대화제국(서태평양 연대기) 위안커쥔
대화제국(서태평양 연대기) 우페이푸
대화제국(서태평양 연대기) 쑨촨팡
일본제국(서태평양 연대기) 미나미 지로
일본제국(서태평양 연대기) 혼조 시게루
일본제국(서태평양 연대기) 이시와라 간지
만주제국 장기야 조린
군대
청나라(서태평양 연대기) 300,000명
대한제국 8,500명
틀:나라자료 후룬공화국 7,850명

총 합: 387,000명
대화제국(서태평양 연대기) 270,000명
일본제국(서태평양 연대기) 3,600명
만주제국 28,400명

총 합: 302,000명

개요

제1차 만주전쟁은 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기간동안 대청제국과 대화제국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후룬공화국, 대일본제국, 만주제국 등이 참전한 전쟁이다. 1918년 2월 청국의 '관내상실'과 대화제국 건국으로 촉발된 양국간의 갈등과 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사건이며, 1세기에 걸친 한만동맹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동아시아 최초 공화혁명인 만주혁명의 촉발과 만주 국민국가 체제의 형성, 정복왕조 체제의 종식 등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나 만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제2차 만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배경

요동과 만주의 영유권은 동아시아사에서 남방-북방간 오랜 갈등의 소재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은 평양-요동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번, 돌궐, 거란 등과의 전쟁을 겪는 와중 발해의 서진으로 요동 영유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만주는 요, 금, 원 북방 정복왕조의 영토가 되어 장성 이남의 정주민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으로 통치되었다. 명이 흥기하여 요동에 총병관을 두면서 700여년만에 화하계 왕조가 요동을 지배하였고, 정통의 변(서태평양 연대기)으로 수립된 후원 왕조 역시 요동과 만주를 강역에 두었다. 1580년 후요가 건국되면서 만주는 잠시 회북과 단절되었으나, 1636년 청의 입관으로 만주와 회북은 다시금 연결되었다. 역사적으로 936년 요의 연운 16주 획득 이후 1918년 청의 관내상실까지 거의 1천년 세월동안 만주와 회북, 특히 연 지방은 서로 다른 혈통, 언어, 풍습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국가로 지낸 역사가 채 100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만주는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부양력으로 인해 회북을 침공하지 않고서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회북은 북방인들이 언제든지 자신들을 공격, 정복할 수 있는 거점인 요동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이유가 없었다.

1918년 2~3월에 걸친 직례지역 반만주 폭동과 이로 인한 관내상실을 겪은 청조는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산해관 이동지역을 건사하고 이른바 북청으로 불리는 체제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청 시기 관내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잊지 못했던 관내파 만주인들은 금, 청에 이은 제3의 입관, 관내 회복을 주장하며 만주 내 민권운동을 탄압했고, 청조를 회북에서 축출하고 건국된 대화제국 역시 국내 공화주의자들과 군벌들을 진압하고 제국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중화 회복을 부르짖으며 그 첫 과제로 고토 요동 회복을 제시했다.

1918년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청조는 만주에서 군사력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의 악화와 국내외의 반발로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관내 청조는 만주가 한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인 부를 수도 북경으로 거둬가는 데 급급하여 만주의 통치·행정체계 구축과 정비에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주 현지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구축한 통치체계는 청조가 그 때 그 때 정치상황에 따라 만주 왕실을 폐하고 복설하고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웃한 한국 사례를 익히 듣고 보아왔던 관외 만주인들은 만주 방위가 아닌 재입관, 자신들은 통관조칙[1]으로 가보지도 못한 관내 회복을 위해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데 극력 반발했고, 징병령에 대해 헌법, 의회, 선거로 대표되는 민권 보장을 요구했다. 요동 침공을 벼르고 있던 화국은 당연히 청의 재입관론을 들먹이며 화-만 분쟁이 '내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변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고, 안그래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청은 1920년대 패전국들의 가입 행렬과 상임이사국인 한국 및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2] 화국과의 분쟁을 선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국제연맹 가입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1918년 이래 양국의 국력은 잘 개발된 농업생산력과 산업시설, 1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갖춘 화국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화국이 만주를 곧장 침공할 수 없었던 것은 우선 한국과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것과 함께, 화국 내부의 정치투쟁과 옌시산 등 서부 군벌과의 내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19년 홍헌제 위안스카이가 붕하고 함원제 위안커원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장자 위안커딩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 틈을 타 공화주의, 공산주의 혁명이 빈발했고 펑궈장을 위시한 군부는 이런 혁명과 시위들을 때려잡으면서 발언권을 키웠다. 1924년 이후 화국 정권은 펑궈장-우페이푸로 이어지는 군부세력이 주도하였고, 1926년 산시의 옌시산 토벌과 내몽골 독립 저지에 성공하면서 만주 침공을 위한 국내 여건 조성을 착착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또한 화인들의 만주인 학살로부터 숨어지내던 청 황실 인사들을 보호하는 대가로 만주에 잠입, 쿠데타를 사주하는 등 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들 쿠데타는 단기적으로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귀환 황족들의 잇따른 쿠데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이른 청 황실은 급기야 1924년 2월 모든 귀환 황족들의 황위 계승권을 영구히 박탈해버리면서 수만명의 귀환 황족들과 황위계승권을 유지한 순친왕계가 대립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그러던 와중 1927년 5월, 일본이 화국과 전격 수교했다. 이는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 한계가 한국의 견제로 한계에 부딪치자 팽창주의 성향의 타나카 키이치 내각이 기존의 동아시아 정책을 바꿔 화국에 접근한 것으로, 대놓고 화국의 만주 침공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청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한국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정작 한국 역시 재입관을 주장하며 한국의 동아시아 구상을 어그러뜨리는 청조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청이 만주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를 개발하고(그 과정에서 한국도 한몫을 챙기고)[3] 한국과 함께 회북을 견제하는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재입관주의로 만주 내부 정세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화국의 팽창주의만 가속화시킨다고 보아 불만이 컸다. 특히 1927년 8월 한국의 만류에도 청이 일본과의 전격 단교를 선언하자 한국 역시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던 와중 전 만주국왕 훙루이의 딸 아이신교로 시하 공주가 그 해 10월 벌어진 할빈 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신병을 확보, 망명을 성공시켰고 청조는 만주 왕실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손에 넣은 한국을 극도로 경계하며 양국의 관계는 한국이 언제 만주에서 쿠데타를 사주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이어 일본은 1929년 3월 자허에서 상국군 내 공화파 군인들을 지원, 3.13 상해 봉기를 일으켜 이른바 중화민국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상국은 이같은 사태에 당황하여 회수 전선의 병력까지 차출하여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노골적인 지원과 견제로 결국 자허를 회복하는데 실패하였고, 일본군 3개 사단이 자허에 주둔하여 화국의 최대 난적인 상국의 후방을 교란해주는 한편 6개 독립대대 규모의 북화주차군이 창설되어 러허 일대에 주둔하면서 화국은 본격적으로 만주 침공 준비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발단

대공황과 사르투 유전 문제

화국이 이미 건국 당시부터 만주 침공을 계획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그 개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의외로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개전을 앞장서서 이끈 것은 화국 정부도, 황제와 그의 친위대인 북양군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바로 일본군, 정확히는 1929년 창설된 북화주차군 참모진이었다.

1929년 말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동아시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는 단연 일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의 피해를 미처 복구하기도 전에 금해금으로 대표되는 긴축재정 기조를 유지하던 중 대공황을 맞이하여 농촌 경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참사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이웃한 한국이 지속적으로 빈곤층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동시에 만주와의 경제블록화를 추진하는 모습은 일본 극우파를 자극하였다.

일화수교 당시 일본의 계획은 1930년경에는 화국과 함께 만주를 동서 양면에서 침공하여 무단강 이동지역을 할양받고, 만일 한국이 반발할 경우 한국계 인구가 많은 - 그리고 한국이 군사 점령하기도 한 - 남부 7~9개 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계획은 하마구치 내각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으나, 대공황은 일본의 긴축 기조를 전면 붕괴시켰고 역시 대공황의 여파가 불어닥친 화국은 연일 일본 군부에 만주 침공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화국 역시 만화분단 이후 한국과 영사관조차 개설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무역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대공황이 닥쳤기 때문에 만주를 전면 합병하여 한국에게 관계개선을 강요하는 것만이 돌파구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변수가 발생했다. 1931년 2월 눈이우라로의 사르투라는 작은 마을에서 당시 추산으로만 가채량 수억 배럴 규모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일화 양국에서 당장에라도 만주를 침공하자며 난리가 났지만, 군축주의자였던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경제회복에 있어 서방 및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사르투 유전 개발 및 동청철도 개량에 일본이 참여하는 등 최대한 온건한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였다. 한국 역시 일본 측의 움직임에 호응했으나, 이번에는 청 정부가 외국 자본의 사르투 유전 참여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1923년 무리한 자무하 천도로 재정지출이 겉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청국은 사르투 유전으로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고, 무엇보다 수백년간 만주의 경제권을 쥐고 흔들며 만화분리를 책동했던 한국이[4] 이제는 만주의 새로운 젖줄이 될 유전에까지 손을 댄다는 데 대한 황실과 관내계 조정 인사들의 반감이 매우 컸다. 그렇다고 대놓고 화국과 손을 잡아버린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청조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외국 자본을 배제하고 유전을 자체 개발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사르투 유전 탐사를 위해 미국 스탠더드 사에 보증을 해가며 기술진을 불러온 것은 청이 아닌 한국 금강진흥이었기 때문에 반감이고 뭐고 간에 그냥 통수와 먹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5] 청국도 나름대로 탐사비용 지불 의사를 내비쳤으나 당연히 개발이익에 비하면 택도 없는 규모였으니 금강진흥은 국제소송까지 걸어가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한국 정부도 이미 전세계적으로 최중요 자원으로 떠오른 석유가 엮인 사건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청 정부를 압박했다.[6] 덩달아 미국 언론들마저 청을 강도(Robbery)라 부르며 맹비난했고 이는 이후 전쟁 초기 서방권이 對만주 지원에 시큰둥한 입장을 보이는 빌미가 되었다. 그나마 검은 황금이라 불리던 석유의 국유화 소식에 관내인과 관외인을 가리지 않고 일단 전국적으로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는 효과는 있었는데, 이게 전쟁 초기 암울했던 상황에서도 전국민이 단합할 수 있는 계기 중 하나가 된 것이 아이러니.

북화주차군의 대사기극

어쨌든 사르투 유전 문제로 한청관계가 파탄 직전 상황에 이르고, 일본 내에서도 더 이상 만주와의 타협은 없다는 여론이 우세해졌다. 때마침 6월 묵던에 주둔하던 청군 제8사단장 구왈기야 파우타이가 화국 스파이인 탕룽칭(唐龍靑)과 내통한 혐의로 함께 체포,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7월에는 긴조우에서 니칸계 마을과 만주인 마을 간에 농수로 사용을 두고 충돌이 벌어지던 중 경찰이 니칸계 마을 주민들을 살해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청화간 긴장도 고조되어갔다. 그러나 이미 자허 사태로 육군의 독단적인 행태에 경악한 히로히토 덴노와 와카츠키 총리는 만주에 대한 직접 개입은 절대 반대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육군 대신 미나미 지로, 참모총장 카나야 한조 등을 닦달해 만주 침공 계획을 접도록 하였다. 육군 중앙이 이렇게 태도를 바꾸자 북화주차군 참모부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작전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 등은 단독으로라도 만주 침공을 추진하려 했으나, 당장 개전의 명분을 확보하기도 곤란할뿐더러 한국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전혀 자신이 없었다. 결국 참모진은 방향을 바꾸어 우선 화국의 침공을 후방에서 지원하고, 화국의 점령지를 따라 북화주차군이 동진하는 방안을 채택, 결행 일자를 9월 28일로 잡아 9월 11일 혼조 시게루 사령관에게 보고하여 묵인을 받아냈다.

여기까지는 북화주차군 참모진의 생각대로였고, 이타가키는 이 계획을 화국의 황제친위대인 북양군 사령부 측에 전달했는데, 그와 동시에 혼조가 북양군의 원로인 펑궈장과의 회담에서 만주 침공 지원구상을 알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혼조는 일단 북화주차군이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침공하는 것이 아니니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완전히 결정된 것도 아닌 구상임을 전제로 발언했지만 이후 펑궈장이 이를 여기저기 옮기는 과정에서 화국 외무부와 주화일본대사관이 자신들이 쏙 빠진 채 일화간에 만주 침공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는 바로 일본 외무성에 이 사실을 알린 것이다. 화국 군사부 역시 국군이 배제되고 북양군만이 참가하는 만주 침공 논의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태를 파악한 히로히토는 경악하여 미나미 지로를 소환해 추궁했고, 덴노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린 미나미는 9월 14일 타테카와 요시츠구 소장을 화국으로 급파해 계획을 저지하려 했으나, 강경파인 타테카와는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톈진을 거쳐 느긋하게 움직였고, 참모본부 러시아반장 하시모토 킨고로 중좌가 이타가키 등에게 이 사실을 전보로 알렸다.

이타가키는 베이징으로 달려가 주화일본대사관 무관 토이하라 켄지와 함께 북양군 작전참모 푸바이더와 접촉해 대책을 논의했고, 푸바이더는 즉각 북양군사령관 쑨촨팡과의 접견을 주선했다. 안그래도 북양군은 1929년 일화수교 이후 일본에서 내각이 교체될때마다 만주침공 계획이 이리저리 뒤집어지는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쑨촨팡은 또다시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만주침공이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는 말에 9월 15일 밤 급거 입궁하여 함원제에게 침공 결행을 주청했다. 위에서 일본 위주로 설명해서 그렇지, 화국이야말로 대공황의 해결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사르투 유전의 확보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더 이상 만주침공을 미룰 수가 없었다. 다만 역시 한국에 대한 대응책이 신경쓰였던 함원제는 재차 일본의 보장을 요구했고, 이타가키는 이에 양면 공수표를 날렸다. 우선 함원제의 면전에서는 이미 육군 중앙은 개전에 동의하였고, 북양군이 행동에 들어가면 내각을 설득하여 일본군을 증파, 참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단언했다. 동시에 북화주차군 사령부와 참모본부에는 이미 화국이 모든 개전 준비를 마쳤으며 일본의 동의 없이도 만주를 침공할 것이라는 사기 전문을 보냈는데, 상관인 혼조 사령관은 자신이 배제된 채 일개 참모가 베이징에서 북양군 사령관에 황제까지 알현하고 다니는 상황을 그저 묵묵부답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주화일본대사관은 센고쿠 미츠구 대사가 하필 건강 문제로 9월 7일 급거 귀국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고,[7] 토이하라는 대사관 내 외무성 직원들을 따돌린 채 이타가키와 작당중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일본 내각은 9월 15일 센고쿠 대사를 경질하고 전 경시총감 오오타 마사히로를 신임 대사로 내정하였으나 화국 측의 아그레망[8]을 받아 공식 임명된 것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11월 2일이었다. 결국 이 사기극이 진행되는 동안 주화일본대사관은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었고, 단교 이후 대사관이 철수하고 대신 대표부 역할을 한 주 묵던 일본영사관 역시 정보 수집에 한계가 있었다.[9] 일본 외무성은 마지막 희망으로 한국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 하였지만 이 역시 적시에 전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9월 16일, 이타가키의 공수표에도 함원제는 다시금 일본 내각의 동의를 요구했고, 마침 같은 날 오후 도쿄에서 하시모토의 전문이 도착했다. 이타가키의 사기 전문을 받아본 참모본부 내 소장파 장교들이 미나미 대신과 카나야 참모총장에게 몰려가 개전 허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고무된 베이징의 이타가키와 토이하라, 제홀의 이시와라 한 번 더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우선 본국에는 북양군이 이미 화청국경을 넘어 진격하고 있으며 요동지역 일본인 거류민의 안전 확보를 위해 북화주차군의 출동이 필요하다는 사기 전문을 보냈다. 이와 함께 시카이군 작전참모 칸다 마사타네 소좌에게도 한국 견제를 위한 시카이군의 한일 국경지대 기동, 필요 시에는 일만국경 돌파와 동러시아군의 동원을 요청했다.

이 희대의 사기극은 그대로 들어먹혔다. 일본 내각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화국 외무부 등을 통해 진위를 파악하려 하였으나 하필 사기극에 가담한 것이 국군이 아니라 황제 친위대인 북양군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화국 외무부를 비롯한 내각 전체가 혼란에 휩싸인 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상황을 아는 총리 우페이푸는 그 본인이 북양군 출신으로 그들의 지지로 총리직에올랐기 때문에 오히려 내각에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와카츠키 총리는 각의를 소집하였으나 미나미 육군대신은 만화국경 문제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각의는 점점 이미 청화간 전쟁이 발발했다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상황에 쐐기를 박기 위해 북화주차군 참모진은 두 가지 계획을 진행했다. 첫번째로 국경 일대에 주둔하던 제38연대 2대대장 하나야 타다시 소좌를 동원하여 예하 병력을 청군으로 위장해 국경수비대를 습격하게 했다. 9월 17일 저녁, 해당 병력들은 그저 모의훈련으로 아는 상태에서 국경수비대를 향해 공포탄을 사격했으나 일부 공포탄을 실탄으로 교체해놓아 화국 국경수비대에 사상자가 발생했고 국경수비대는 즉각 청측을 향해 보복사격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2대대 특임대는 마침 국경수비대 보급열차가 정차해 있던 인근의 양슈링(杨树岭)역에 폭탄테러를 가했고, 작은 시골 국경역이긴 해도 역사 건물과 열차가 불타는 상황에 화국 측은 러허성 경찰 2개 중대와 국군 5사단 예하 1개 대대를 급파하여 청국 영토를 향해 보복(?)을 가했다.[10] 다음은 9월 17일 저녁 톈진에 도착한 타테카와 장군이었다. 애초에 만주 침공을 취소하는 임무에 부정적이었던 그는 도착하자마자 이타가키의 손에 이끌려 일본식 요정으로 들어가 질펀하게 술을 마셨는데, 이 때 토이하라가 몇 명의 북양군 무관들과 함께 도착해 수시로 이타가키를 불러내 북양군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타테카와의 추궁에 이타가키와 토이하라는 준비해 둔 북양군의 날조된 기동상황을 설명했고,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방문한 북양군사령부에서는 전날 만주군의 공격에 대한 대응작전으로 분주했으며 작전참모 푸바이더는 바쁘다는 이유로 타테카와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제대로 낚인 타테카와는 그대로 북양군사령부를 나와 오전 7시 30분 도쿄에 자신이 들은 내용을 그대로 타전했다.

덴노의 질책으로 육군성이 파견한 연락관마저 이모양이었으니 이제 내각은 더 이상 육군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외무성은 한국을 통해 정확한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고 맞섰으나 이미 1929년 자허 사변 이후 덴노의 불신임과 비리사건 등으로 내각이 줄줄이 갈려나가는 상황에 질린 와카츠키 총리는 또다시 내각 붕괴를 맞이할수는 없다며 육군의 손을 들어줄것을 결심했고, 내각의 의견이 기운 것을 확인한 히로히토 역시 일본군이 직접 만주를 침공하지는 않는다는 단서를 붙이며 동의했다. 이에 참모본부는 9월 18일 오후 6시, 북화주차군 사령부에 북화주차군의 작전범위를 '대화제국의 영토 이내'에서 대화제국의 군사력 일체가 미치는 전역으로 확대함을 통지했다.

사실상 일본의 지원을 확인한 북양군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함원제 위안커원은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화청국경 전역에서 청군을 격파하여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10시 40분 량치엔밍 소장이 지휘하는 북양군 제2사단이 국경을 넘어 청 제32국경수비대대를 공격함으로써 제1차 만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청의 인지와 대응

일화 양국이 이렇게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청과 한국에게도 탐지가 되었다. 특히 일본 내각이 9월 16일부터 한국을 통해 계속해서 청화국경의 상황 파악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국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양국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사태를 맞이한 청의 태도였다. 만일 청이 일본 외무성의 요청을 전달받은 즉시 사실 확인 결과를 회신했다면 외무성은 덴노와 함께 화북주차군의 폭주를 막을 마지막 기회를 잡았을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일본에 대한 청의 극심한 불신이었다. 청은 일본이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것들 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청의 선공을 유도하려는 일본과 화국의 수작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고, 1927년 이후 껄끄러운 관계인 한국에게도 역시 전쟁을 빌미로 다시금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며 현황을 공유하는 것을 꺼려했다. 이 때문에 9월 18일 오후까지도 계속해서 사실 확인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청국 내 일본영사관은 물론 주청한국대사관에까지 철저히 정보를 통제했다.

한편 청은 9월 16일 일본 측 요청을 전달받자마자 국경수비대 전 부대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했으나, 정규군에는 별도의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지 않았다. 청화국경에서의 무력충돌은 1918년 이후 일상다반사였고, 높은 봉급과 엄격한 인원 선발로 사기가 드높았던 국경수비대에 비해 후방의 정규군은 친위사단을 제외하면 대우도 열악했고 아예 부대 단위로 돈벌이를 하던 판이라[11] 비상경계령이 지속되면 배고픔을 못 견딘 병사들의 탈영이 빈번할 정도로 군기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12] 9월 17일의 총격전도 수십분간의 대응사격 이후 항의 방송을 하는 수준으로 마무리했으나, 다음날인 9월 18일이 되자 국경지대에 북양군 정규사단들이 속속 집결하는 정황이 포착되어 내무부와 군무부에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청 외무부는 9월 18일 오후 4시 경 반신반의하면서도 한국 측에 북양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국경수비대의 비상경계를 강화했음을 알렸고, 한국 외무부는 해당 내용을 주한일본대사관과 주일한국대사관에 동시에 전달했는데, 이 때는 일본 내각이 북화주차군의 북양군 지원을 결정하고 와카츠키 총리가 히로히토를 알현하고 있을 때였다. 외무성은 주한대사관의 전문을 받고 급히 외무대신과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이미 참모본부의 통지가 날아간 뒤였다. 와카츠키는 오후 8시 경 각의를 재소집하려 하였으나 늦은 밤에 각의 소집에는 1시간이 넘게 소요되었고 그나마도 미나미 육군 대신은 이미 군사작전이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각의 소집에 불응했다.

  1. 통관(通關), 즉 산해관을 통과하는 데 관련하여 내려진 조칙. 이 조칙에 따라 관외인들의 관내 진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관내에서 발급된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산해관을 넘어올 수 없었다. 만일 관외인이 해로나 몽골 등을 경유하여 관내에 진입했다가 적발되면 최대 참수까지도 가능했다.
  2. 사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가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 만주의 철광석이나 석탄, 목재는 한국에게 오랫동안 인기있는 수입품목이었으나, 19세기 말부터 만주 북부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한국 시장에 저렴한 농축산물을 공급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4. 한국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이야기였다. 청이 1874년 만주를 분리한 것은 한국이 직접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만주내전에서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회북의 민심이반을 우려한 청이 알아서 뜯어먹으라는 식으로 만주를 냅다 떼어서 던져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에게 방패막이로 던져진 만주는 발상지지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청과 한국 사이에서 이후로 수십년동안 숱한 고생을 해야 했고, 한국 역시 청조에게서 배상금 뜯어낼 생각 하다가 건국 이래 언제나 경계했던 만주에 쌩돈 들어가는 상황에 직면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놓고 만주 조정이 허가한 각종 사업들을 이권침탈이 우려된다며 취소시키거나 아예 만주 왕실을 날려버리고 만주 조정을 무력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서 말한 마지막 왕 훙루이도 폐위의 결정적인 계기는 청조가 반대한 만주 총선거의 시행을 강행한 것이었지만 그 전대부터 한국과의 사업 계약 문제로 중앙 조정과 많은 갈등을 빚어왔다.
  5. 청국이 내세운 논리는 당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청국 기업에게 국내 광산의 채굴권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한국 기업의 채굴권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청국 기업이 만주 광산을 놔두고 한일에서 광산 개발 사업을 벌일 일 자체가 없었으니 두 나라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트집으로 치부되었다. 일반적으로 탐사권은 채굴권 획득을 위한 사전단계로 인식되므로 채굴권에 상호주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탐사권부터 불허해야 했는데 한국 기업이 돈 들여 탐사시추 다 해놓으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린 행태는 금강진흥에게서 돈만 받으면 그만인 스탠더드 측에서도 맹렬히 비난할 정도였다.
  6. 하필이면 금강진흥에는 황실 내장원이 대주주(당시 12%)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정원과 추밀원 양원 모두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내장원경 고성배는 압박을 견디다 못해 목을 멜 정도로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 헌정당 이승만 내각은 이 사건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0년 3월 의회에 의해 불신임을 받아 붕괴된다.
  7. 센고쿠 대사는 애초에 외무성 관료가 아닌 기업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설령 화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해도 일화 양국의 군인들이 비선으로 작당하는 상황에서 큰 활약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8. 외교관 임명에 대한 주재국 동의
  9. 특히 청 정부가 자무하로 옮겨간 상황에서 일본영사관은 일본인 거주민이 많았던 묵던과 부르하투에만 개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청 정부와의 접촉이 원활하지 않았다.
  10. 당시 화국 측이 이 테러의 진범을 알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70년대까지도 한국과 만주에서는 양슈링 테러를 비롯한 북화주차군의 공작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만주 침공을 위해 입을 맞췄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1990년대 들어 화공의 개방으로 화국 제정시기의 자료가 다수 공개되면서부터는 화국에서도 북화주차군의 공작에 대해서 일부 짐작을 하는 수준이었지 제대로 된 상황 공유를 받지는 못했다는 분석이 우세해졌다.
  11. 식비의 경우 정부에서는 각 군관구 단위로 주식과 부식을 지급했으나, 중간에 하도 떼어먹는게 많다보니 주식이나 간신히 내려왔고 주로 부대 단위로 인력이나 장비를 동원해 공사를 지원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각종 부식비를 댔다. 물론 이것도 중간에 지휘관들의 횡령과 착복도 비일비재했다.
  12. 통상 국경수비대는 경무장, 준군사조직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 당시 청화국경은 양국 관계가 매우 험악했던 탓에 황제의 내탕금까지 동원하여 거의 친위대 수준으로 운영되었다. 장갑차의 경우 당시 친위사단에 26대가 있었고 그 외 정규군 부대에는 아예 전무했는데 2만명 규모의 국경수비대에도 26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