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격변의 시대)

세계 대전
1902 ~ 1908제1차 세계 대전 1908 ~ 1931전간기 1931 ~ 1941제2차 세계대전
관련문서: 7년 전쟁 | 연표 | 대공황 | 냉전 | 제3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第一次世界大戰
기간 1902년 1월 19일 – 1909년 6월 13일
장소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원인 러시아 제국의 부상과 범슬라브적 팽창주의 대두에 따른 기존 열강과의 충돌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연맹군 혁명군
영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스페인 왕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국
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핀란드 왕국
지휘관 조지 5세
빌헬름 2세
메흐메트 5세
프란츠 요제프 1세
니콜라이 2세
병력 독일 제국 8,080,172명
대영 제국 7,782,116명
오스트리아 제국 4,620,581명
오스만 제국 2,701,681명
스페인 왕국 2,275,988명
총합 25,160,537명
러시아 제국 17,000,000명
프랑스 제국 8,294,300명
이탈리아 왕국 5,461,288명
루마니아 왕국 1,609,477명
남슬라브 연맹 3,919,785명
핀란드 왕국 500,000명
총합 36,784,850명
피해 민간인 사망 1,859,892명
민간인 부상 3,429,478명
군 병력 사망 4,419,489명
군 병력 부상 7,344,207명
실종 3,029,171명
총합 20,102,237명
민간인 사망 3,642,740명
민간인 부상 5,630,239명
군 병력 사망 8,042,887명
군 병력 부상 13,688,206명
실종 5,492,227명
총합 36,496,299명
결과 러시아 제국의 몰락, 동유럽 대혼란, 슬라브 대분열 사태 초래,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수립
영향 제2차 세계대전의 단초 제공, 슬라브인 제노사이드 발생, 독일의 준초강대국 등극, 민족주의 발흥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은 범슬라브주의에 입각한 슬라브 통일 운동의 일환으로 팽창하는 러시아 제국 및 독일을 견제하는 프랑스 제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 영국의 충돌으로 발생한 전쟁이다.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02년 1월 19일부터 1909년 6월 13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결교ㅏ적으로 대략 6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민족주의가 대규모로 발흥하였으며 슬라브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풍조가 프랑스와 슬라브권 국가들을 제외한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이는 제노사이드와 슬라브 대분열, 민족주의에 입각한 소 중규모 국지전과 내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발단 및 배경

전개와 종결

피해

영향

독일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취했다. 우선 러시아 제국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가 영유해오던 폴란드 지역을 독일의 보호국으로 전락시켰고, 발트 지역은 독일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라트비아 공화국과 에스토니아 공화국이 건국되게 하였으며, 각각 벨로루시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해 러시아와 국경을 멀찍이 떨어뜨려 본국에 가해지는 위협을 덜었다. 또한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현대 기준 약 4,000억 루블을 러시아로부터 납부받았으며 이는 전쟁 후 러시아의 경제 파탄과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이후 민족주의로 찢어진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부코비나 지역을 제외한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을 흡수하여 1억 인구와 탄탄한 경제력, 강력한 국력을 가진 준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대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이후 불어온 민족주의의 여파로 인해 해체된다. 역시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배상금과 영토를 받아내었고, 러시아라는 후원자를 잃은 남슬라브 연방과도 소피아 조약으로 영토를 받아냈지만 전쟁 전부터 오스트리아의 중앙 집권 능력은 지방을 원활히 통치하는 데에 역부족이였으므로, 제국 곳곳에서 일어난 봉기와 독립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1910년 헝가리에 자치권을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두 지배 민족의 인구를 합쳐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40%에 미치지 못했고, 헝가리는 영내 타민족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불어온 민족주의가 유럽에 들끓는 가운데 이러한 선택은 피지배민적으로 하여금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 정당성에 의문을 갖게 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어떻게든 제국의 명맥을 잇고 새로 얻은 보스니아+북부, 중부 세르비아 지역의 반발심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남슬라브인들과 타협해 1922년 삼중제국을 구성하였지만 이 역시 헝가리의 반대로 인한 빈번한 군사적 충돌로 얼마 가지 못 해 의미를 상실한다. 더 버틸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1933년 제국의 해체를 선포하고, 오스트리아 지역과 티롤을 위시한 오스트리아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를 위시한 헝가리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위시한 체코 왕국,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위시한 흐르바츠카 왕국으로 분할되게 된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광풍은 끝나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는 루마니아인들이 독립을 요구하여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에 슬로바키아인들까지 가담해 전쟁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예로부터 세르비아인들과 충돌을 일으켜왔었고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흐르바츠카 왕국에 세르비아의 역사적 영토가 포함되어있었으므로, 그리고 보스니아에는 이 둘 뿐만이 아닌 무슬림 보슈냐크인들도 살고 있었으므로, 두 민족간의 충돌은 전쟁까지 이어지게 된다.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지역은 폴란드인들이 다수인 서갈리치아와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수인 동갈리치아로 분리되었지만, 폴란드는 독일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우크라이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는 친독국가였기에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민중의 의지에 굴복한 합스부르크 황가에 의해 1935년 독일 제국과 평화 통합을 이루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고, 헝가리 왕국으로 분가하여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국이 건설된다. 또한, 헝가리는 영내 소수민족 문제로 발발한 루마니아-헝가리 전쟁에서 트란실바니아 사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루마니아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역부족이였으므로,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허용하게 된다. 흐르바츠카 왕국은 세르비아 왕국과 흐르바츠카 제1공화국으로 분리되었지만, 보스니아를 차지하기 위한 피 튀기는 싸움이 계속된다. 이후의 역사는 독일 제국, 헝가리 왕국, 흐르바츠카 왕국, 체코 왕국,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문서로

전쟁 직후, 오스만 제국(녹색)의 영토. 주황은 이란 제국, 연초록은 헝가리 왕국, 붉은색은 오스트리아 제국, 노랑은 루마니아 왕국이다.
오스만 내전 초중기. 진주황색이 아르메니아 인민공화국, 파란색은 조지아 공화국, 자주색은 그리스 비잔티움 왕국, 민트색은 불가리아 제3제국. 루마니아 왕국도 오스트리아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브루자 지역을 먹었다.
오스만 내전 중기. 오스만 제국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리스와 불가리아에게 서부 해안 일대와 코스탄티니예를 점령당했다.
오스만 제국의 반격. 네 전선 모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크림 반도와 아르메니아를 위시한 캅카스를 얻어내고 남슬라브 연방과 소피아 조약을 맺어 그리스와 불가리아, 남부 세르비아를 차지하였다. 루마니아도 원래대로라면 몰다비아 지역은 헝가리에게, 왈라키아 지역은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가 갈갈이 찢길 예정이였으나 두 제국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 남겨두자는 의견에 합의해 간신히 국체를 보존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베사라비아를 얻어낸 건 덤이다. 다만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그러나 이쪽도 인종 구성이 다양하였기에 오스트리아 제국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우선 불가리아 지역은 세르비아의 강압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남슬라브 연방에 가입했고, 대전 말기에는 독립을 선포하여 연맹국 측에 가담해 싸웠기에 동정표를 받아 광범위한 자치를 누려 사실상 독립 상태나 다름없었고, 그리스 지역은 메갈리 이데아를 통한 게릴라전으로 자꾸만 오스만 제국을 귀찮게 굴었다. 게다가, 이 쪽 역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제1차 세계대전 승리로 틀어막은 것에 가까웠기에 제국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1915년,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진압되었지만 가뜩이나 휘청이던 정부는 이로 인해 직격탄을 맞게 된다. 오스만 제국 내 쿠르드인 대학살이 벌어졌으며, 정부는 이를 통제할 힘도 의지도 없었기에 400,000명 이상의 쿠르드인들이 학살당하고 300,000명 이상의 쿠르드인이 추방되었다. 이렇게 제국이 저물어가던 중, 설상가상으로 오랜 숙적인 페르시아에서 왕조 교체와 함께 군사력을 강화시킨 후 제국 영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1915년 9월 11일, 사산조의 영광을 표방한 신(新)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1대 황제 레자 칸은 오스만 제국의 쿠르드인 학살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추방된 쿠르드인들을 대거 수용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두 국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리게 된다. 게다가 이 두 국가 간에는 남아제르바이잔 문제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인 추모는 아제리인들은 탄압하는 이란이 할 입장이 아니라고 맞섰고, 페르시아 제국은 이에 자국 영토 내 쿠르드 자치구까지 설립하고 이제는 오스만 제국 신민이 된 아제리인들을 더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대놓고 아르메니아 독립 운동, 그리스 독립 운동을 지원한다. 이란의 비호 아래 아르메니아는 1917년 1월 22일 아르메니아 인민 공화국을 선포, 지금의 에르주룸을 포함한 동튀르키예, 나흐츠반, 나고르노카라바흐, 예레반 등 100,000km²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을 싹 긁어모아 영토로 삼았다. (오스만 내전 발발.) 그리스도 이에 지지 않고 그리스 왕국을 수립하여 그리스 독립전쟁을 치른다. 특히 그리스의 경우에는 불가리아와 연대한 탓에 오스만 제국이 쉽사리 진압하기 어려웠다. 또한 수도는 이교도 코스탄티니예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리스인이였고, 수도가 그리스에 저당 잡힌 꼴이 된 오스만 제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쿠르드인들과 연대해 아르메니아-쿠르드 독립전쟁을 발발시켰고, 조지아인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받아 조지아 제1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내전 초기, 동터키 지역에 아르메니아인들, 트빌리시 일대에는 조지아인들, 테살로니키, 아테네를 비롯한 일대에는 그리스인들, 플로브디프, 소피아를 비롯한 발칸 동남부에는 불가리아인들이 봉기했다. 내전 초중기,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쿠르드, 조지아를 상대로는 연전 연승을 거두며 승리가도를 달렸지만, 그리스에게는 테살로니키 공방전 패배 이후 차츰차츰 밀리기 시작했고, 불가리아군의 진격 역시 소피아 전투에서 패배해 막지 못했다. 결국 1918년 12월 23일 불가리아-그리스군의 합동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코스탄티니예 공방전에서 패배, 제국의 수도가 함락당했다. 이후 방어선 붕괴와 병력 부족으로 서부 해안이 점령당한 것 역시 뼈아픈 타격이였다.

그리스군의 공수작전 성공.
오스만 제국 내전 말기. 불가리아군이 해방되며 무서운 속도로 진격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게 반격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독립을 염원하며 이를 갈고 군인을 양성했지만 원체 국가 체급이 오스만 제국보다 훨씬 작았던 터라 군대 수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과도한 공세와 무리한 코스탄티니예 점령으로 힘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원을 빼면 시체에 불과할 아르메니아군과 조지아군은 더더욱 그랬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와 인구에서부터 나오는 힘이 있었다. 메흐메트 술탄은 즉시 동원령을 선포하여 1차적으로 500,000명 가량의 군인을 집결시켰다. 비록 재정 적자로 무기의 질은 적들보다 낮았지만, 양은 그들을 압도했기에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였다. 1919년 3월 3일, 충원된 군인을 합쳐 도합 950,000명 가량의 오스만군이 네 갈래로 나뉘어 진격하기 시작했다. 오스만이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던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은 패퇴를 거듭했고, 1919년 6월 24일 제2차 코스탄티니예 공방전, 1919년 7월 13일 테살로니키 공세 작전, 1919년 8월 30일 제2차 플로브디프 공방전을 통해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부에서도 이란군과 조지아, 아르메니아군을 격퇴하고, 아제르바이잔인과 연대해 추가로 150,000명가량을 징집해 1919년 11월 3일 트빌리시를 탈환하고 조지아-아르메니아 간 연결을 끊는 데 성공한다. 이에 멈추지 않고 오스만군은 아르메니아의 카잔 호에 집중폭격을 가해 그들의 식수원을 끊어버리고 예레반을 위협하여 아르메니아 외무장관 아람 사르키샨(1862~1947)를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조지아는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고, 발칸 방면에서의 진격이 1919년 12월 5일 소피아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더뎌진데다 그리스 역시 아테네를 중심으로 무려 5차례의 공성에도 버텨내고 있어 상황은 다시금 오스만에게 불리하기 돌아간다(공세종말점 도달). 1920년 1월 2일, 오스만 제국은 이 부담을 덜기 위해 아르메니아 인민공화국과 예레반 화친조약을 맺는다. 조약의 골자는, 아르메니아와 오스만의 무기한 휴전, 카잔 호에서 오스만군 철수, 아르메니아의 예레반 일대 대략 30,000km² 지역 영유권 인정, 아르메니아는 오스만의 보호를 75년간 받음 등이였다. 오스만 제국은 한 숨 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재정비 후 반격을 시작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참전하며 아르메니아 인민공화국은 이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1920년 7월 19일, 연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항전하던 그리스군이 오스만군이 힘이 빠진 틈을 노려 대대적인 포위섬멸에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전선은 테살로니키 근방까지 밀린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반란군 중 가장 강력한 불가리아군을 압박하여 전(全) 영토의 85%를 상실시키는 기염을 토했고, 불가리아는 항복 직전에 몰렸다. 그리스는 시간이 없었다. 아르메니아는 무기한 휴전에 들어가 해볼 수 있는 게 없었고, 조지아는 아르메니아 못지 않은 약체였으며 페르시아 제국은 예상 외로 간만 보며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전쟁의 전황을 바꾼 공수작전이 성공한다. 1920년 8월 11일, 그리스군은 키프로스와 도데카니사부터 차근차근 점령하고 이즈미르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후 해안가를 빠르게 점령한다는 작전을 성공시켰고, 오스만 제국은 이즈미르, 쿠사다시, 아이든 방어에는 성공하지만 보드룸이 함락당해 남부 전선이 열린다. 그리스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데니즐리를 점령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군대의 90%를 타 전선에 보내둔 터라 어쩔 수 없이 아르메니아-조지아 방면 군대를 빼와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이 우왕좌왕하던 사이 다시금 이즈미르 방면 공세를 시도하고 결국 방어를 뚫어내 이즈미르를 점령하고 스미르나로 개칭한다. 불가리아 방면의 군대까지 빼온 오스만 제국은 결국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으며 페르시아 제국도 이때다 싶어 참전하며 동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며 시리아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아르메니아는 화친조약을 사뿐히 무시하고 페르시아군의 지원으로 서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 트라키아, 에르주룸 등을 재점령하였고 조지아는 인구셰티아, 다게스탄을 집어삼켜 영토를 불렸다. 그리스는 꿈에 그리던 에디르네를 손에 넣었고 오스만의 서부 해안선을 대부분 점령하였고, 불가리아는 미친 듯히 진격해 코스탄티니예, 앙카라, 아크히사르를 손에 넣고 제국 아나톨리아의 65% 이상을 점령한다. 서진해온 페르시아와 동진해온 불가리아, 남진한 그리스가 만남으로써 제국의 내전은 종결지어졌으며 이 시점 제국의 남은 영토는 도데카니사 일부, 남시리아, 크림 반도, 다게스탄밖에 없었고 결국 1921년 4월 5일 콘스탄디누폴리 조약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공식적인 역사는 막을 내린다.


남슬라브 연방은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과는 소피아 조약을, 러시아 제국과는 연맹국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는 동슬라브를 비롯한 슬라브족과 연합하지 말 것을 골자로 한 벨리코터르노보 조약을 맺는다. 이로 인해 남슬라브 연방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소피아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와 중부, 남부 세르비아는 오스만령으로, 보스니아와 북세르비아,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 제국령으로 귀속되었다. 또한 러시아와의 접촉이 향후 100년간 금지당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연맹국 측에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남슬라브 연방은 본디 러시아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세르비아 왕국이 불가리아 왕국에 압력을 넣어 사실상 종속국으로 만들어 형성된 반쪽짜리 국가였고, 범슬라브주의에 입각해 러시아 제국과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의 크로아티아-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며 세계 대전 발발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기에, 연맹국 입장에서는 세르비아와 러시아에 반감을 품고 있는 굳이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를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특히 불가리아는 전쟁 후반부에 독자적으로 남슬라브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해 베오그라드까지 몰아붙이다 눈 돌아간 러시아에게 국토 전역이 점령당하고 괴뢰정부가 세워지기까지 했우니 말이다. 따라서 연맹국 수장인 독일은 불가리아와 크로아티아를 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귀속시키되 자치령 이상의 자치권을 부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체제가 날이 갈수록 불안해지자 더 이상 크로아티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이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며,( 당시 헝가리 왕국 내 마자르인의 비율은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루마니아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의 반발, 오스트리아 제국과 마찰 등으로 크로아티아인들까지 적으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헝가리 왕국 총리 라코시 페렌츠는 이들에게 유화적 태도를 고수하였으며 이는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 해체 당시 헝가리인들이 트란실바니아 봉기와 슬로바키아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크로아티아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로 흐르바츠카 왕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삼중제국을 구성해 제국의 지배자로 발돋움한다. 오스만 제국은 인종 분포 문제로 내전과 반란에 시달리다가 붕괴하였고, 이 틈을 노린 불가리아 제3제국은 독립하여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까지 합병하고 내전의 승리자인 그리스 왕국과 콘스탄티노폴을 공동통치하며 발칸의 강국으로 성장한다. 또한 불가리아 왕국은, 오스만이 멸망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들을 위협할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까지 자신들보다 광대했으므로, 내전 당시 같이 싸웠던, 누구보다 오스만을 혐오하는 그리스 왕국과 연대를 꾀하였고, 양국 수상의 논의 끝에 1928년 그리스-불가리아 연합왕국, 일명 비잔티움 제2제국을 건국하여 더욱 강대한 국력을 갖추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비잔티움 제2제국 문서로.

남슬라브 연방의 또 다른 구성국인 세르비아 왕국은 반으로 갈려 한쪽은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로, 한쪽은 오스만 제국 치하로 들어갔지만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령 세르비아는 그리스, 불가리아, 이란, 아르메니아, 조지아와 대립으로 정신없어진 오스만 제국의 승인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금전적인 배상을 한 후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악감정이 오스만 제국보다 강했기에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르비아는 끊임없이 독립 운동을 벌이나 이에 지친 오스트리아 제국정부가 세르비아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크로아티아인을 제국의 또다른 지배자로 인정하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오스트리아령 세르비아를 떼어 흐르바츠카 왕국으로 주권을 인정시켜 주었고, 이에 따른 크로아티아인의 보복을 받게 된다. 크로아티아는 불가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세르비아가 강제로 남슬라브 연방 구성국으로 참여시켰기에 반감이 상당한 상태였기에 이 시기 세르비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급증하였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남슬라브 연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동등한 주권을 갖기를 원했다. 세르비아가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무력을 사용한 점은 대악수로 평가받는다.) 그러다 1933년 오스트리아 제국 해체가 선포되자 세르비아는 즉시 흐르바츠카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전쟁을 선포했고, 이는 흐르바츠카-세르비아 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전쟁 초기 세르비아 왕국은 치열한 전투 끝에 3차 사라예보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크로아티아 영내로 진격하여 두브로브니크, 자그레브 등 대도시를 위협했지만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원조를 요청하고, 헝가리군이 응하여 참전하자 다시 사라예보 근방까지 밀린다. 세르비아군은 4,5차 사라예보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저항했지만 이를 벅벅 갈고 있던 불가리아군의 참전으로 뒤를 찔리며 순식간에 니슈, 크루셰바츠, 크라구예바츠가 털리고 벨리카플라나 중심 900km² 영토만 남자 항복한다. 이후 세르비아는 즈레냐닌 조약으로(헝가리 영토였으므로 공식 명칭은 너지베치케레크 조약) 약소국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스 왕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에 반기를 들어 혁명군 측에 가담할까 생각했지만, 가뜩이나 독립된 주권도 없는데 줄을 잘못 섰다가 독립의 기회가 영영히 박탈될 가능성을 고려한 그리스 독립군 지도자 콘스탄티누스 파파도풀로스의 결정으로 중립을 유지했고, 그의 선택은 오스만 제국이 대전쟁에서 승리하며 탁월하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후 지속적으로 상황을 살피며 힘을 모으던 그리스 독립군은 오스만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그리스 왕국을 수립, 내전에서 승리하며 오스만의 동부 해안선과 콘스탄티노플을 가져간다. 다만 이 일대는 불가리아 점령지였기에 그리스령으로 콘스탄티노폴이 넘어가는 대신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지역을 불가리아에게 양보한다. 이후 오스만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해 불가리아 차르 시메온 2세와 해결책을 강구하던 끝에, 초대 아프토크라토르(차르)는 불가리아와 그리스 혼혈이, 2대부터는 그 자손들이 황위를 맡는 방식으로 입헌군주제를 채택했고, 각 국가의 정부는 따로 두지만 연합의회를 설치해 중대사안은 같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각 나라 간 국경은 철폐하는 것으로, 법은 국가법을 우선시하되 연방헌법을 따로 두는 방식으로 동군연합에 찬성하여(현재의 미국 주정부-연방정부 관계와 유사하다.) 그리스-불가리아 연합황국 일명 비잔티움 제2제국이 건국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혁명군의 일원이였지만 그나마 좋은 미래를 맞게 된다. 러시아로부터는 패전국의 일원이였음에도 이들 간 사이를 이간하려는 독일의 속셈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베사라비아와 오데사 특별시를 뜯어오게 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흐르바츠카와 오스만 제국에게 각각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뺏기며 나라가 아작나는가 싶었지만 독일의 중재와 제국 내 불안정을 감지한 각국의 합의로(각국의 소수민족 포용력이 한계에 다다랐기에) 중립국으로 남게 된다. 단,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군사적 요충지인 카르파티아 산맥의 봉우리가 죄다 헝가리에게 넘어갔고 오스만 제국에게 도브루자, 오스트리아에게 부코비나를 뺐겨 국력은 전쟁 전보다 한참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의 분열로 부코비나는 반환받게 된다. 이후 루마니아는-왈라키아와 몰다비아가 연합왕국으로 합체한 것이 국가의 근본이기에-치솟는 지역감정과 사회 분열로 막장 국가 테크를 타게 된다.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오데사 특별시가 통합되어 영토는 약 130,000km²에서 180,000km²으로 늘어났지만 상호간 갈등이 발발한 것 역시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에게서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뺐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북부 지역이 합스부르크 황가의 직할령으로 넘어가 버렸다. 과거 합스부르크 치하의 이탈리아보다 더 넓은 영토를 할애해 줘야 했으며, 아드리아 해에서의 영향력이 급감하였다. 단,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제외한 직할령은 제국 붕괴를 틈타 오스트리아에게 압력을 행사해 다시 얻어낸다. 이탈리아는 이때 롬바르디아부터 쥐트티롤까지 이탈리아계가 거주 하는 지역은 싸그리 긁어모으고 여의치 않으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해 빈에 진격하고 혼란에 빠진 흐르바츠카에도 선전포고하여 이스트리아를 수복, 다시금 대이탈리아를 이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패배한 혁명군의 일원이라는 낙인으로 실패 시 더 가혹한 조약을 맺을 가능성,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은 남아있었기에 자칫 역으로 로마가 털릴 가능성, 독일이 좌시하지 않고 자신들을 독일령 이탈리아로 만들 가능성을 고려하여 얌전히 북이탈리아 일부만 가져온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러시아를 이어 2번째로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우선 독일과 맺은 파리 강화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을 영구히 상실하는 것도 모자라 조약에 명시된 대로 기본 1년+전쟁 배상금을 모두 갚을 때까지 파리에 독일군이 주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