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멕시코 내전
Second Mexican Civil War
Segunda Guerra Civil Mexicana
날짜
1994년 1월 1일 ~ 2002년 11월 4일
장소
멕시코 전역과 과테말라 북부
원인
페소 위기, 치아파스 반란 격화
결과
멕시코 연방정부 해체, 남미 정세 혼미, 과테말라 내전 연장
영향
전후 조직 범죄 급증,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 전면화, 멕시코 전역 황폐화, 미주 대륙 내 국가간 분쟁 격화
교전 세력
멕시코 합중국
미합중국
과테말라
EZLN
EPR
FARC
MCP(1998~2000)
유카탄 공화국(1998~2000)
시날로아 카르텔
걸프 카르텔
후아레스 카르텔
로스 카바예로스 템플라리오스
지원국
캐나다
콜롬비아
칠레
이스라엘
호주
OAS
쿠바
베네수엘라
URNG
FMLN
ELN
중화인민공화국(1996~2000)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1997~1999)
MS-13
지휘관
에르네스토 세디요†(1994~1996)
에밀리오 추아페트(1996~2000)
빈센트 폭스(2000~)
부사령관 마르코스†
사령관 라모나†
사령관 사파타†
에드먼도 레예스†
캡틴 에밀리아노†
엘 마요
엘 차포
나초 코로넬†
엘 차피토
병력
xx명 xx명 xx명
피해 규모
(피해규모) (피해규모2) (피해규모3)

개요

제2차 멕시코 내전(스페인어:Segunda Guerra Civil Mexicana)은 궁극적으로는 멕시코 정부 및 친정부 세력과 치아파스 반군을 포함한 멕시코 내 좌익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의 멕시코 정부로부터 분리되고자 한 치아파스 반란 세력과 다른 국내외 좌익 게릴라, 그리고 마약 카르텔이 포함된 비대칭 분쟁이었다.

멕시코 정부의 위기는 1994년, 페소 위기 및 1994년 EZLN의 멕시코시티 폭탄테러와 그 직후의 멕시코 정부군이 EZLN 수뇌부를 암살한 것에서부터 촉발된 후 전면적인 내전 형태의 무장 충돌로 확전되었다. 치아파스의 반란을 시작으로 같은 해 결성된 EPR이 벌인 전쟁은 미국의 참전과 베네수엘라, 쿠바의 직접적인 개입 이후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

멕시코군과 멕시코 연방정부, 그리고 미국 및 과테말라로 알려진 동맹국은 멕시코 정국의 안정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반면 멕시코 정부 전복 및 적화를 목표로 베네수엘라, 쿠바, 중국 등의 지원을 받고 있는 좌익 야권 세력과 대규모 게릴라 군벌의 연합 그룹이, 또 다른 진영은 처음 멕시코 정부에 의해 용역되었으나 게릴라 군벌화된 다수의 카르텔 조직들이다.

참전 세력 거의 대부분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치아파스 반란세력(EZLN)과 내전이 고조되며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들이 19세기 유카탄 공화국의 후신으로서 건국한 유카탄 공화국이 설립되는 등 분리주의가 난립하며 전쟁의 향방은 극히 혼란스러워졌다. 내전은 1996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2000년 이후 잠정적으로 모든 교전 및 폭력행위는 중단 및 축소되었다.

미국과 과테말라 같은 많은 인근 국가들이 내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멕시코 정부를 지원했다. 쿠바와 중국, 북한, 그리고 FMLN과 ELN, URNG 등 남미 게릴라들은 멕시코 내전의 좌익 반란군에게 군사 부문의 지원을 보였으며, 베네수엘라는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해 멕시코 내 정부군에 대한 공습 및 광범위한 파병으로 멕시코의 신생 MCP 정권을 후원했다.

미국과 과테말라는 멕시코 정국이 파탄적인 상황에 이르렀을때, 자국 내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하여 멕시코 정부 및 친정부 군대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왔으며 미국은 1996년 멕시코 정부의 요청으로 치아파스 지역에 미 해병대 일부를 파병하였으나 1997년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발생한 멕시코계 좌익 반란의 동조자들에 의한 폭동과 테러리즘으로 1997년 이후 직접 개입을 택했다.

미국은 1996년부터 치아파스 반군과, 1997년 이후부터는 EPR 등의 좌익 반란세력 등과 싸워왔으며, 멕시코 내 반정부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여러번의 대규모 지상 교전 끝에 멕시코 내 북서부 지역들을 점령하고 있다. 동시에 2001년 이후부터는 멕시코 정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화 된데다, 카르텔 및 남은 좌익 반군에게조차 밀리자 빈센트 폭스의 멕시코 자유정부로 대체하였다.

1996년과 1999년 사이에 멕시코에서만 발생하기 시작한 전투가 과테말라로도 확산되었다. 멕시코 정부군에게 밀려난 사파티스타나 몇몇 EPR 파벌들이 URNG의 호의, 그리고 지원들을 바탕으로 아예 과테말라 국경 너머에서로 교전이 이동, 확대되면서 과테말라군과도 직접 교전을 벌였다. 이는 남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과테말라는 기존에는 멕시코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나, 대규모 난민들이 북쪽 대신 남쪽으로 도망쳐와 냉전 종식 직후 혼란스러웠던 과테말라 국내의 상황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난민 수용의 억제와 국경에서의 산발적인 분쟁들, 무엇보다 국내 좌익 게릴라였던 URNG가 무장해제를 이행한지 고작 2년 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했다.

실제로도 다수의 URNG는 유엔의 감시 하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정부에 대한 무력 행위를 포기하고 무장해제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유한 군사 자산들을 대거 멕시코 남부의 사파티스타 반군에게 넘겨주고, 옛 URNG의 방식을 포기하지 못한 URNG 내의 호전적인 성향의 파벌들이 멕시코로 직접 이동해 EPR과 EZLN을 지원했다.

또한, 내전에 대해 불개입을 선언한 콜롬비아는 자국 내 게릴라가 멕시코 반정부 세력을 돕기 위해 베네수엘라에 의해 용병처럼 투입되고, 나아가 2000년 이후부터 베네수엘라가 직접적으로 멕시코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규모 군사 원조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콜롬비아 군을 파병하고, 국경에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양 군이 대치했다.

이 전쟁으로 약 200,000여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며 멕시코 내전은 20세기 냉전 종식 직후 냉전 당시부터 이어지던 이념간의 충돌로 인해 벌어진 마지막 제1진영과 제2진영 양측의 대리전이자, 동시에 최초의 냉전 이후 이념 전쟁이었다. 이런 경향은 21세기 들어 대부분 해체되거나 정당조직으로 변화한 옛 좌익 게릴라들이 멕시코 내전을 위해 결집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멕시코 내전 동안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심지어 동북아시아와 북아메리카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던 수 많은 해산되거나, 해산중인 많은 무장 좌익 세력들, 또는 그들에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이들이 멕시코 반정부 세력에 개인 단위부터 조직 전체가 가담했다. 이들 대다수는 전쟁이 끝난 뒤 멕시코 정부에게 그들의 신변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다.

구 멕시코 합중국이 아닌 신생 멕시코 정부는 이러한 반란이 재차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이념형 전쟁범죄를 엄단하려했으나, 이들 대부분의 국적이 외국인인 이상 극형에 처하는 것은 내전 이후 신뢰를 잃은 멕시코 정부로서는 우려되는 일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내전이 끝난 2002년 이후부터 그들의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러나 송환된 이들 대부분은 마치 이슬람 지하디스트들 처럼 다시 본국에서 재무장하거나 유사 조직을 지원하는 등, 냉전 종식 이후에도 좌익 게릴라들의 뿌리가 완전히 일소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멕시코 내전 이후 북남미는 베네수엘라와 쿠바, 또 룰라 정권의 브라질이 포함된 반미 진영과 미국을 위시로 한 친미 진영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한편 내전 이후 터키의 시리아 침공과 이라크-쿠르드 전쟁 이후 레반트 내에서 전반적인 혼란과 국내적인 갈등이 발생하면서 취약해진 레반트 지역에서 알 카에다와 지하디스트가 본격적으로 레반트 내에서 궐기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무장 행위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국외의 지하디스트와의 연계가 문제되며 이 시절 멕시코 반란에 가담했던 국외의 동조세력과의 연계가 다시금 조명받았다.

분쟁은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미국, 캐나다,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와 같은 이웃 국가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멕시코 내전 당시와 그 뒤로 상당한 난민들이 발생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멕시코 난민들에 대해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미 서해안 및 남부 등의 히스패닉 거주지역에서 발생한 폭동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우려해 제한적으로 받았다.

반대로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는 그러한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 시기보다 조금 더 미국으로의 이주를 완화하였으나, 9.11 전쟁 이후 불거진 안보 문제로 다시금 축소되었다. 이러한 멕시코 난민들의 대대적인 미국 이주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초당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은 남쪽의 이웃국가보단 미국으로의 이동을 택했다.

텍사스에서만 수십만명의 난민들이 축적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내전 이후 훗날 멕시코 국가 전반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한 거대 마약 카르텔들에게 동조하면서 난민 중 절반 이상이 카르텔의 공범이자 미국으로의 운반책, 공급책으로 변했다. 이들은 2002년 이후 시작된 마약과의 전쟁이 전면화되자 대부분이 미국을 떠나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 동안 여러번의 평화를 이행하기 위한 시도가 벌어졌다. 1996년 치아파스 반란이 멕시코군의 강경대응으로 촉발되면서 미 해병대의 파병과 주둔 이후 미 정부의 중재 하에 치아파스 측과 멕시코 정부 사이의 협상이 그 해 11월 뉴욕에서 있었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치아파스 반란은 그대로 벌어졌고, 멕시코군을 상대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 공군이 공습을 개시하면서 협상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0년 6월, 유엔이 직접 주도적으로 나서 제네바에서 양측의 휴전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베네수엘라의 개입, 그리고 신생 MCP 정권의 탄생이 겹치며 결렬됬다. 이후 2002년 캐나다의 중재 하 뉴욕에서 치아파스 반란의 중지를 골자로 한 종전 선언이 성사되었다.

같은 해 멕시코 내에서 자체적으로 EZLN과의 교전 중단에 대한 협상을 타진했다. 11월 4일, 치아파스와 유카탄 지역의 특수 자치를 허용하는 해당 협상은 선언 즉시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이때 대부분의 EZLN 및 특히나 쿠바의 지원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던 유카탄 지역의 반란군은 대부분 협상 결과에 따라 투항했다.

하지만 그들 중 EZLN의 일부 파벌의 잔당들은 EPR에 합류하거나 오지로 숨어들어 투쟁을 계속했다. 이들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과 활동 영역이 겹치는 이웃한 카르텔에게 흡수되었고, 대부분은 몇년 후의 마약과의 전쟁 동안 미국에 의해 토벌되었고 마약과의 전쟁 이후 소탕되어 2000년대 초반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배경

페소 위기

1994년, 멕시코의 카를로스 정부는 OECD에 가입함으로서 국내 금융 시장을 개방했으며 NAFTA에 가입한 후 이전에 비해 보다 투자자들에게 높은 신용과 또 다른 투자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더 많은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미국 채권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가졌던 자국 채권 상품을 적극적으로 발행했다.

미국의 많은 단기자본이 멕시코로 넘어가는 등, 당시 멕시코 경제는 금융 부문으로부터의 성장으로 장차 미래가 유망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으나 치아파스 주에서 EZLN의 반란이 일어나고 대통령 후보인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가 암살당하는 등, 멕시코 내의 정치 불안은 잠시나마 성장세를 띄던 멕시코 금융 경제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겼다.

외국인 투자자들과 멕시코 국내의 부는 자국의 혼란으로 인해 만성적인 정치 불안으로부터 야기된 멕시코 자산에 대한 높은 위험 리스크가 높아짐에 따라 국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공채를 무리하게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페소와 달러간의 페그를 유지했고, 페소화 가치는 그 가치가 30% 씩 과대평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고금리 정책에 대처하기 위하여, 또 당장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멕시코 중앙은행은 1994년 12월 페소화 평가 절하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자본 이탈을 억제하기 위해 멕시코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했지만 이는 멕시코의 마지막 남은 성장 동력을 저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평가 절하된 페소로 달러를 구매할 수 없게 되자 멕시코 경제는 국가부도에 직면했다. 이때의 멕시코 경제는 약 52%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로인해 발생한 심각한 경기 침체인 "페소 위기"는 멕시코 국내의 불안을 더욱 가속화 했다. 특히 1994년 대선 국면 당시 사파티스타 내 일부 용공분자들에 의한 테러 공격 이후로 상황은 더욱 악화됬다.


뱀의 심장 작전(Operation Heart of the Serpent)

1994년, 멕시코 시티에서 사파티스타의 열성적인 용공분자들이 모여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멕시코 시티의 다운타운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탄 테러로 2명이 사망했으며 47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는 사파티스타의 일부 통제되지 않은 강경 반정부 노선의 사파티스타 내 그룹이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이를 치아파스 주의 분리주의자들이 벌인 도발로 판단했다. 멕시코 군대는 대선 국면을 앞두고 집권 중인 PRI가 느끼는 정치적인 압박에 의해 평소보다 더욱 예민했고, 특히 이런 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는 그만한 보복 작전이 수반되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군 수뇌부는 보복 작전을 수립했다.

뱀의 심장 작전으로 불리우는 사파티스타 수뇌부에 대한 암살 작전은 순조롭게 준비되어갔다. 오히려 과테말라의 비공식적인 협조와 미 CIA의 직접적인 지원,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정찰 자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멕시코 정부는 EZLN의 조직 구조와 명령-지휘 체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성공한다.

멕시코 특수부대인 GAFE는 뱀의 심장 작전에서 40명 가량의 조직 지도부가 포함된 EZLN 측 조직원을 사살했다

CIA에 의해 잘 조율된 작전은 허점 투성이인 기존의 멕시코 군부의 계획과 달리 매우 용의주도하게 EZLN의 명령체계를 추적한 뒤 수뇌부만을 사살하는데 성공한 뱀의 심장 작전은 그 자체로 미국의 강화된 정보 수집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이때 투입된 GAFE가 사살한 EZLN 조직원과 수뇌부의 시신을 참수하고 코와 귀를 절단한 사실이 밝혀지며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폭탄 테러가 발생한지 5개월만에 이루워진 보복 작전은 치아파스에서 멕시코군의 공격헬기가 포착된 치아파스 내 EZLN 반란 세력들의 지휘부를 매우 효과적으로 타격했고, 부사령관 마르코스로 대중에 알려진 EZLN의 수괴를 포함한 EZLN 조직의 상부 구조에 위치한 다수의 지휘 그룹을 사살함으로서 작전은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이런 멕시코 군대의 암살에 더욱이 분노한 EZLN은 이전의 수세적이고 보다 온건적인 방향의 지휘부가 멕시코군에 의해 몰살당한 뒤, 그들의 후신으로서 새로이 조직을 장악한 강경파들은 멕시코 정부에 대한 또 다른 보복을 위하여 이전보다 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선회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나선다.

EZLN은 콜롬비아 FARC과 과테말라 URNG의 간접적인 지원을 통해 빠르게 무장 투쟁에 필요한 만큼의 재원과 군사적 자산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당해에 베네수엘라의 떠오르는 권력인 남아메리카 사회주의 세력의 또 다른 거성, 우고 차베스의 원조에 힘입어 EZLN의 적극적인 무력 투쟁 노선에 박차를 가한다.

한편, 이때 뱀의 심장 작전을 실행에 옮긴 GAFE는 전쟁 5년차에 접어든 1999년, 다수의 GAFE 출신 탈영병들이 범죄 조직, 로스 제타스를 구성하기 위해 합류하면서 그 충의에 의구심을 남긴 멕시코 육군 특공대는 전쟁 당시의 미진한 성과로 인해 2000년 해산되어 미국에 의해 레인저 형태의 새로운 특수전 전력으로 재편되었다.


가시화된 내전

집권당인 PRI의 부정부패와 무능, 그리고 페소 위기로부터 이어진 경제적 침체에 반발하기 시작한 멕시코 국민들은 서서히 좌파 성항의 단체들 및 당(PRD)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하고, 집권 기반이 부실한 세디요 대통령과, 정부는 이번 위기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미흡한 대처로 경제 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이전 카를로스 대통령 시절부터 쌓여온 멕시코의 필연적이며 또한 지울 수 없는 문제인 정부의 높은 부패율은 멕시코 경제의 또 다른 암적인 존재였으며, 치아파스에서 봉기한 EZLN과, 지역 원주민 반군과 이를 진압하고자 하는 정부군의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장기적인 소모전을 예상한 반군은 더욱 오랫동안 무장투쟁에 나섰다.

1994년 8월부터 11월까지, 치아파스 주 전역에서 확산되는 무장 투쟁과 반란, 폭동 등의 상황이 이전처럼 단순히 지역 원주민들이 일으킨 저강도 분쟁, 즉 평소의 폭동이 아님을 확인한 세디요 대통령은 오히려 이를 기밀에 부쳤다. 치아파스 주 전역이 반란에 휩싸였다는 사실이 외부, 특히 미국으로 유출될 경우 그때의 여파는 멕시코 정부가 통제할 수 없었다.

당시 세디요 정권의 입장에서 겨우 몇일 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낮은 정권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더욱 잦아진 외국의 무력 개입과 군사력 투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폭동이 벌어지는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아예 영변 핵시설을 기습적으로 공습함으로서 자칫 잘못하면 전인류적 핵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이 오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확전이 벌어져 세계 제3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대신, 한반도에서 양측 군대의 국지적인 제한전이 벌어지는데서 그쳤으나, 세디요 대통령에게 있어 멕시코 내전이 미국에게 확실히 보여진다면 이는 반드시 미국의 무력 개입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당시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정권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한 에밀리오 추아페트는 세디요 대통령이 치아파스 주에서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반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자 세디요 대통령은 특히 미국에게 유출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며 미국이 개입할 시 멕시코는 지옥도가 된다, 고 이를 우려했다며 이를 회고했다.


전개

멕시코 정국의 혼미

1995년, 이때 미국은 수백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멕시코 정부에게 지원하지만 아직까지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벌어진 반란이 사실상 내전에 준할 만큼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일부 치아파스 주 출신 이민자들이나, 그곳을 작년에 거주하거나 체류한 일부 외국인 및 자국인에 의한 소문만이 돌 뿐, 확인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반란은 지속적으로 규모를 키워갔으며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멕시코군 내 병사들이 진압 명령에 불응하고 외려 사파티스타 반군에 가담하는 등의 문제가 속출했다. 이 사실은 1995년 3월, 치아파스 주에 파견됬던 의료봉사단이 고국으로 돌아가며 그간 치아파스 주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터넷에 개제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사진에는 사파티스타 군대가 반란을 획책하였으며, 실제로 이행됬다는 여러 명확한 정황 증거가 포착되었고, 비슷한 시기 CIA는 멕시코 내 반란 사실을 포착해 정부에 보고한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를 보고받고는 국 남부에서 멕시코 이주민 및 치카노와 같이, 내전이 벌어질 시 미국 내에도 이 여파를 불러올 수 있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을 우려하는 보고가 이어진다.

텍사스, 뉴멕시코, 유타, 캘리포니아 등을 포함한 몇몇 주에서 치카노 공동체에 의한 여러 폭력적인 운동이 사파티스타의 반란과 유사한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미국은 멕시코 반란에 대해 예의주시하기 시작한다. 1995년 6월이 되서야 멕시코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에게 치아파스 주에서 반란이 발생했음을 전한다.

당시 미국 남부와 서해안에서 발생하는 잦은 히스패닉계에 의한 폭동 범죄를 사파티스타와 연계되었음으로 판별하면서 미 정부는 사파티스타를 공식적으로 테러리스트 그룹으로 분류하게 된다. 물론 사파티스타는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사파티스타와 무관하다 밝히며 멕시코 정부와의 투쟁을 지속한다.

멕시코 치아파스 분리주의를 위해 나타난 사파티스타 반란은 불안정한 멕시코 국내 혼란에 의해 순식간에 멕시코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사파티스타 반란은 치아파스 주 전반과 주요 도시에 걸쳐 크게 확산되었고, 폭동과 기습적인 게릴라 전술에 의해 궁지에 몰린 멕시코 군, 경은 상황이 통제되지 않음을 보고하고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 또는 잠정적으로 예상되는 남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간 통신을 완전히 차단할 것을 선언한다.

한편 상황이 또 다른 국면에 맞이한 것은 멕시코 남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지는 폭동에 의해서였다. 다수의 멕시코 남서부 지역의 농민들이 멕시코의 경기 침체 상황에 대한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고, 치아파스 반란 이후로 극도로 예민해진 멕시코 정부는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게레로 지역에서 농민들이 산탄총을 비롯한 기타 엽총으로 무장한 채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위해 이동하는 긴 행렬을 형성했고, 이는 당시 게레로 주의 경관들에게는 반란에 가담하기 위한, 또는 이미 반란에 가담한 무장 세력의 반란 활동으로 포착되었다. 경찰들은 중무장한 상태로 이들의 이동을 즉시 제지하였다.

그러나 이때 게레로 주의 성난 농민들은 군경의 지시에 불응, 되려 자신들이 들고 나온 엽총과 산탄총을 겨누며 위협하였고, 당시 치아파스 반란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했던 현장의 경찰 병력들이 대응 사격을 개시하면서 다수의 농민들이 사망하는 아구아스 블랑카스 사건, 또는 게레로 6.11 사건이 신호탄이 되어 구 게릴라 잔당과 극좌파 골수 좌익분자들이 결집, EPR을 결성한다.

2만명 이나 넘는 단체로 성장한 EZLN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온 "의로운 젊은이(Juventud Justa)"로 불리던 사실상의 마지막 좌익 의용부대의 대대적인 참전과 베네수엘라 및 쿠바의 원조를 받은 무기로 멕시코 정부군과 얼추 동동하게 싸울 수 있었다. 이때 이 지원을 적극 받아들인 파벌들이 훗날 MCP로 발전하게 된다.

신생 MCP의 창설에 후신이 된 사파티스타 내 용공주의자들은 성공을 거듭하며 더욱 심리적으로 고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치아파스에 "갇혀있으며" 동시에 외부의 인민혁명군(EPR)과 더욱 협력하여 본래 자신들이 치아파스 주로 온 목적인 멕시코의 적화를 위하여야 한다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냉전 이후 몰락한 좌익 이념의 또 다른 확장을 꾀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점차 중남미에서 온 지원까지 합세하면서 치아파스 주 내에서 한정적으로 분리를 꾀하던 본래의 사파티스타 수뇌부를 서서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EPR의 게릴라 활동이 전면적으로 개시되었다.

주로 빈곤한 멕시코 남부 주들에서 정부군과 교전, 동시에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지원을 등에 업기 시작하자 오히려 정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멕시코 서해안 전역에 점조직 형태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당시 멕시코 국내 상황은 파탄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한다.

멕시코 지도층의 부패는 군경의 부패로 이어진지 오래였다. 고착화된 상황에 신물이 난 일반 병사들은 대거 탈영해 좌파 게릴라들에게 투향하던가, 무기를 팔며 내통했다. 이들은 개인 단위에서 때로는 부대 단위로 멕시코군에서 이탈했따. 서서히 정부군의 전투력은 최전방의 교전 부대들에 한하여 심각할 만큼 저하되기 시작했다.

멕시코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폭동과 시위가 계속되고, 멕시코 정부는 이들을 진압하는 것을 돕기 위해, 몇몇 카르텔들에게 "하청"과 같이 정부의 사주를 통해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문제는 이들 중 절대다수는 내전이 지속되며 자체세력화 되기 시작, 점차 기존의 게릴라들을 흡수하거나 압도하며 아예 독립적인 군벌로 변해갔다.

멕시코군이 7월 동안 전선이 크게 뒤로 밀리며 이런 거대화된 마약 카르텔들은 훗날 미국과 멕시코 정부가 멕시코 국내에서 벌인 비대칭 분쟁인 멕시코 마약 전쟁으로 이어진다. 부패와 빈곤 사이에 카르텔들이 때로는 지역 정부랑 유착하며, 어느 지역에서는 정부랑 교전하면서 서서히 하층민들 사이에서 세를 불리기 시작한다.

상황이 악화되며 최전방의 멕시코 군대는 일단 철수 후 몇번의 포격과 공습으로 당장의 반군들을 화력으로 제압해 잠시나마 전선을 유지하며 퇴각하고 강제소개령을 내려 대응했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반란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일반 시민들의 상당한 반발로 이어졌다. 무책임하게 상황을 방치하는 중앙 정부에 대한 신용은 점차 낮아졌다.

반대로 내전 상황에서도 지역 사회를 유지시키고자 무어라도 하는 현지 카르텔에 대한 신용만은 높아지며, 동시에 또 일반 서민 사회가 점차 카르텔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이 당시 멕시코 북부의 주요 정, 재계 인사들이 미국으로 대거 떠나면서 멕시코의 상황은 점차 내전에 거의 근접하게 된다.

치아파스에서 EPR과 EZLN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꽤나 큰 게릴라 단체들로 성장한 두 단체는 서서히 정부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오히려 FARC의 구성원들이 베네수엘라의 지원을 받은 대량의 군수물자를 통해 멕시코군을 서서히 압도한다. 한편 FMLN과 ELN 등의 남미 단체들 또한 정당 조직으로서 개편되는 와중에 무장 투쟁의 지속을 원하던 이들은 멕시코로 이동했다.


야곱의 사다리 작전(Operation Jacob's Ladder)

멕시코 정규군은 미군 없이 치룬 대부분의 전투는 패배했는데 이는 낮은 사기와 무능이 큰 원인이었다

궁지에 몰린 멕시코 정부군은 1995년 10월 4일,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미사일과, 특수전 전력을 통해서 이미 반란 지역을 다수 점령하고 북상을 준비중인 반군을 향해 참수작전인 야곱의 사다리 작전(Operation Jacob's Ladder)만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나마 EZLN에 남아있던 전선의 확대에 반대하던 이들마저 이때의 참수작전에 의해 대부분 사망한다.

이로서 EZLN의 극단화는 사실상 막을 길이 사라졌다. 이때의 일 이후로 '사령관 사파타'가 등장하며, EZLN은 강경한 좌익 무장단체로 다시 거듭나며 사실상 이후로는 완전히 강경 일변도로 이어진다. 같은 해 12월, 치아파스 주 대부분에서 정부군이 패퇴하며, 정부군은 더 많은 전력을 치아파스 주로 투입한다.

국면의 전환은 멕시코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오악사카로 향하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채 정부군이 오악사카를 무인지대로 설정하고 퇴각을 결심하면서 게레로와 치아파스 두 지역이 연결되고, 남부 방면의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멕시코 군대가 전방으로 투입되면서 벌어졌다.

대부분의 군대가 남부로 향하는 동안, 멕시코 북부 유전은 EPR의 대담하고도 야심찬 공격에 노출되었을때 멕시코 내전의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된다. EPR은 12월부터 동시다발적으로 다수의 미국인 사업가들을 표적으로 납치하거나 암살을 벌였으며, 수 많은 북부 유전지대와 가스관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이러한 시도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 마이크 맥커리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국가 및 사회 공동체의 공통된 안보에 위협을 주는 행위라며 강하게 경고했다. 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에도 다시 한번 더 멕시코에서 벌어진 정국의 혼란이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면 초당적인 강력 대응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마침 빌 클린턴에게는 다음 대통령 선거가 1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빌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더 많은 정치적인 호의를 얻어내기 위할 목적으로, 영변 핵공습 이후로도 또 한번의 또 다른 군사작전을 벌이려 했다. 미국 네이비씰이 직접 멕시코 게레로 주로 투입되었다.

미국의 참전과 세디요의 암살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자 게레로 주에 있는 EPR의 지휘 가옥을 네이비씰을 통해 타격하여 다수의 EPR 가담자들을 사살하고 그들의 중요 현장 지휘관들을 사살하면서 서해안 EPR의 몇몇 통신 기지나 지휘 가옥들을 위장에도 불구하고 찾아내 연이어 공격함으로서 잠시나마 EPR의 진군을 주춤시키는데 성공한다.

미국은 이 이후로도 사파티스타나 EPR 등이 미국을 상대로 한 테러 공격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데에 대해 더욱 강력한 분노를 얻었고, 멕시코 정부와 함께 사파티스타의 치아파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약 8,000여명 규모 이상의 미 해병대를 멕시코로 파견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 되자 EPR을 위시로 한 멕시코 내 좌익 반란 집단은 베네수엘라를 통해 중국과 북한과 접촉했다. 북한은 그 이전부터 쿠바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경우 본격적으로 내전이 개시된 1996년부터 사실상 EPR과 그 후신 세력, 그리고 PRD 등이 결합한 신생 MCP를 정부로 인정할 가능성을 약속하고 비공개적 군사 원조를 실행했다.

정부군의 패전과 좌익 반군의 여러 승전보들, 무엇보다 당시 부패한 정부와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 심각한 경기 침체에 지치고 분노한 민중은 3월 24일부터 3월 30일, 일명 세마나 산타라 불리는 휴일 기간때 멕시코 시티에서 가두행진, 시위를 벌였다. 연이은 패전 이후 극도로 예민해져있던 군부 내 강경파는 대통령을 압박, 군이 직접 시위를 진압한다.

이 당시 3,000여명의 군경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분노한 민중들과 군경의 대대적인 충돌로 3월 31일 부터 4월 6일까지 수도인 멕시코 시티는 일대가 혼란에 빠지며 멕시코 시티 전역이 폭동에 휩쓸렸다는 사실이 미국에까지 보고된다. 한편 멕시코 남부의 반란세력들은 과테말라 국경까지 치닫았다.

4월 후반부터 5월 동안 반란군은 북진을 포기하고 대신 쿠바의 군사 원조와 중국이 배후에서 벌이는 지원을 통해 각종 중화기를 지원받으며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정부군의 고가치 자산을 무력화, 파괴시킨다. 다다음 6월 동안 수도 멕시코 시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미 정부는 멕시코 시티에 유사시 군 투입을 고려한다.

미국이 멕시코로 파병한 미 해병대의 첫번째 대열이 멕시코 국내에서 남부를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멕시코 북부와 접하고 있는 국경 부근에 남부 주들의 방위군과 경찰 병력을 크게 증가시킨다. 이 무렵 대규모 난민 대열이 형성되면서 미 남부의 난민에 대한 억제력 행사는 점차 강해진다.

6월 22일, 세디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평소 극좌적 성향을 가졌었던 경호원이 세디요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하고 자신은 다른 경호원에 의해 사살당하면서 멕시코 정국은 다시 한번 일대가 정치적 혼란에 빠진다. 내무장관인 추파에트 장관이 임시 대통령 대리로 정무를 수행하는 동안, PRI 당 내에선 대통령 대리 선출을 둔 내부 갈등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다.

이때부터 멕시코 전역에서는 폭동, 방화, 그리고 시위가 지속되며 이미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지역이 속출하였고, 정부군은 반란에 동조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군에 적대적인 반정부 세력들이 점령한 지역을 배제하고, 또는 공격을 염두에 둔 새로운 방어선을 다시 재설정해야했다.

CIA의 멕시코 내 대전략을 본격적으로 수정,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미군의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판단과 그에 따른 결론으로 더 많은 미 "육군"이 미 해병대를 대체해 약 1만여명 규모의 미 육군이 지상에 투입될 것이 검토되었으며, 이는 실행에 옮겨졌다. 당시 미군 내 일부 장성 및 미 국방성의 주요 관계자들은 이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미국의 본격적인 대 멕시코 군사 개입이 남미 전체에서 더 많은 반미 기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우려였다. 미 육군은 남미 정글이 과거의 베트남전처럼 부진한 성적을 낸 채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미국은 먼 아시아 지역이 아닌 바로 남쪽의 멕시코에서 벌이는 작전에 그렇게까지 많은 유예기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멕시코에서 내전의 주 전장인 멕시코 서남부와 남부 지역 사람들은 수도권인 중부 지방으로 향하거나 아예 북쪽으로 끝까지 올라가 미국 국경을 넘어 어떻게든 피난을 이어나갔다

북폭을 위해서 너무 많은 정치적 논의와 공방이 오간 것에 대한 반성으로 미국은 조기에 공습을 가했다. 초기 며칠 동안 레이저 유도 폭탄과 순항미사일 수십발이 게레로 주와 치아파스 주에 발사되었고, 미 육군 레인저와 해병대는 사파티스타가 우위를 점한 치아파스 지역에서조차 상당한 승전보를 올리며 연승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EPR을 비롯한 반군은 미군의 본격 개입이 시작되면서 기존 동안 약간의 공세를 포함한 작전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고,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들을 수비하는 것 조차 벅차했다. 8월 동안 미군은 게레로 주의 주도, 칠판싱고를 점령한 EPR을 주도에서 몰아내고 게레로 주의 절반 이상을 되찾아 정상화 시켰다.

9월 7일, 6개월 전에 있었던 시위를 재현하기 위한 소규모 시위가 멕시코 시티에서 발생한다. 시위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때 군경의 잔혹할 만큼 몰아세운 탓에 여론상 불리했고, 설상가상 미성년 시위 참여자 다수가 시위 중 죽거나 중상을 입은 것에 대해 국민적인 분노가 팽배해지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미국의 지상군이 최전선에서 반군으로부터 다시 정부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동안, 멕시코 시티에서 대규모 폭동이 다시금 일어나며, 의회와 정부는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서 철수하여 과달라하라 시로 대피했다. 사실상의 수도 천도를 결정한 만큼 멕시코 정부군은 과달라하라 시로의 철수가 결정된 후부터 크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무질서한 군중들이 9월 9일, 의사당을 점거하고, 이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의사당에서 '혁명 선언서'를 낭독했다. 철수한 일부 정부군 병력을 이용해 멕시코 시티 재점령을 시도하였으나 다수의 군중들이 진입을 막아 실패했으나, 하루 뒤, 군경이 이들을 도로 진압하면서 멕시코 시티의 점령 상황 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멕시코 시티 혁명 선언서의 여파는 실로 굉장했고, 멕시코 전역에서 암약해 있던 좌익 단체들과 함께하는 군중에 의하여 곧곧에서 '혁명'이 선언되었다. PRD는 여기에서 둘로 분열되며, 분열된 강경파는 이러한 '혁명'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하며 "해방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남부 주들에서 관공서의 파괴, 악탈, 그리고 공무원들의 린치가 계속되며, 주둔해있던 일부 부대들도 총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며, 치아파스, 게레로, 그리고 오악사카 이 세 주에서, 멕시코 정부의 통제는 완전히 사라진다. 미 육군 레인저와 미 해병대는 이제는 탈영한 멕시코 정부군과도 교전해야 했다.

중부와 북부에서의 여러 좌파 점조직들의 봉기가 일어나고, 일부 지역은 아예 점거당하는 상황 속에서 멕시코 정부는 현 상황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좌익 민병대들이 결집되고, EZLN 및 EPR의 대대적인 공세가 결정된다. 10월 공세로 불린 멕시코 반군의 대규모 공세는 12월까지 약 2개월간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공습을 통하여 공세를 돈좌시켰고, 미군에 의해 그나마 남아있던 멕시코 정부의 충성파 군대는 빠르게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베라 크루즈 주로 반란세력들이 북상하였고, 머지않아 유카탄 주의 마야인들까지 반란에 가담했다. 마야인들은 1940년대 이후 50년간 멕시코 정부에 대한 투쟁을 멈췄다.

그러나 아직까지 마지막 유카탄 지역의 혁명가들이 남아있던 시점에서 벌어진 이러한 반란은, 다시금 고무된 마야인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마야 해방구"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유카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쿠바의 막대한 군사 원조까지 겹치면서 멕시코만 지역은 순식간에 정부군의 또 다른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과테말라 분쟁

한편 미국의 지속적인 군사 개입이 이어지는 동안 과테말라 국경수비대는 점차 국경을 넘으려하는 멕시코 반군 세력과 교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이지기 시작했으며, 아예 이에 동조하는 과테말라 내 옛 게릴라들이 오히려 가담해버려 함께 국경 내 상황을 악화시킴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정권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과테말라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시 대통령인 라미로 데 레온이 비교적 온건했던 좌익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과테말라 내전을 종식시킨 것에 대한 공로는 인정됬지만, 파키스탄이 알 카에다의 생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자양분이 되었듯, 과테말라 또한 혁명의 후방기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했다.

라미로 데 레온 대통령은 공식 성명을 통하여 과테말라 내에서의 동요와 멕시코 내전으로 인해 겨우 종식시킨 과테말라의 평화가 다시금 전쟁으로 물드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정작 구 과테말라 게릴라들은 오히려 그러한 성명 이후 그가 "정치적 배반"을 택했다고 보았으며 비겁자란 비난이 잇따르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후 선거에서 알바로 아르주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과테말라 신민당은 적극적으로 멕시코 내전에 의해 과테말라 북부 국경으로 향하는 모든 반군 세력을 격퇴할 것을 명령했다. 1996년 초반부터 과테말라는 본격적으로 사태에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치아파스를 포함한 많은 남부 주에서 남하하려는 좌익 반군들을 공격했다.

1996년 11월에는 미국과 과테말라간의 장관급 외무 인사간의 회동이 있었으며, 양측은 비공개된 회의를 통하여 멕시코 내전으로 인해 양국에게 미칠 영향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엘살바도르 또한 머지않아 국내의 구 게릴라들이 휴고 차베즈의 부상 이후 본격적으로 멕시코 상황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알바로 아르주 대통령은 과테말라의 정보당국에 의해 URNG가 정당조직으로 개편되는 와중에도 몇몇 이들이 멕시코 내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였고, 이에 대해 "URNG가 과테말라의 평화를 배신했다."는 선언을 통해 과테말라 또한 자유를 위협하고, 다시금 내전의 위기로 몰아가는 위험세력을 격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URNG와 과테말라 내 야권 좌익 세력들은 결집하여 과테말라가 미국의 괴뢰국이냐는 원론적인 비판을 포함해, 또 다시 과테말라 내전을 종식시켰음에도 반복할 것이냐며 위협적인 반론으로 대처했으나, 과테말라 정부는 멕시코 내전에 국내 좌익 집단이 간섭하는 순간 내전의 위험은 불가피하다는 뜻만을 밝혔다.

한편 CIA는 과테말라 정부에게 유사시 과테말라 내부의 옛 좌익 게릴라들이 또 다시 정부 상대로 궐기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문건을 전달했다. 이것을 통해 과테말라 측의 경계도는 더욱 높아졌으며 멕시코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반란 행렬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의 포격이 시작됬다. 그러나 여기에 사파티스타가 박격포로 대응사격을 벌이며 과테말라 또한 군사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멕시코 반란에 본격적으로 미국 외의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과테말라 국내에선 주저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점차 도가 넘는 멕시코 내 좌익 반군 세력에 의한 과테말라를 향하여 오는 공격을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 또한 국경수비대와 몇몇 좌익 반란군의 하위 점조직간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전쟁의 여파는 멕시코 국외로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LA 시청 인질극

미군의 본격적인 멕시코 내전에 대한 군사 개입이 시작된데에 대한 보복으로 사파티스타는 미국 내 치카노, 또는 라티노 동조자들을 이용해 미국 국내에 테러 공격을 가함으로서 전쟁이 남일이 아닌 자국의 일로서 인식되게끔 하려했다. 사파티스타 내 일부 특공조가 편성되었고 그들은 미국 국경을 넘어 현지의 치카노와 라티노 동조자들과 접촉했다.

아홉차례에 달하는 연쇄적인 공권력에 대한 공격과 테러가 벌어졌다. 캘리포니아 남부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한 테러 행위는 서해안 전역에 안보 위기를 초래할 것으로 예측되는 시각이 존재했지만, 이는 당시 진행중인 멕시코 내전의 또 다른 영향일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또는 낮게 취급하였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199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최악의 테러리즘은 LA 시청에서 행해졌다

그렇게 1976년 12월 10일, 방탄복을 입고 돌격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LA 시 청사를 점령하려했고, 같은 날 일부 공범들을 LA의 은행으로 보내 은행 강도로 위장된 양동 작전을 벌이는 동안 다수의 사파티스타 테러리스트가 LA 시청으로 향했다. 이들을 막기 위한 LAPD의 초기 대응이 실패하면서 테러리스트들의 진입을 성공시켰다.

특공대는 시청 내에 갇힌 사람들을 인질로 사용하며 LAPD의 진입을 거부하는 동안, 식별되지 않은 사파티스타 특공대가 인근을 포위한 LAPD 병력들을 향해 기관총을 사용했다. 사건이 벌어진지 2시간만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LA 시청 인질극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같은 시각 LAPD SWAT가 현장에 배치됬다.

SWAT을 이용한 진압 만큼은 빌 클린턴 행정부가 히스패닉계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받았으며, 다수의 히스패닉 유권자들을 지난 선거와 현 선거에서 확보했고, 또 확보해야 했던 만큼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비춰지는 SWAT을 통한 진압보단 협상을 우선하려했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 차원에서 협상단을 구성해 다음날 12일 협상이 시작됬다.

사파티스타는 미군의 멕시코 철수와 빌 클린턴 행정부의 멕시코 내전의 개입 중지 선언을 요구하였으며, 치아파스 독립국가를 미국이 나서서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최종적으로 협상은 13일 까지 이어졌으나 끝내 결렬되었다.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고 하루 뒤인 14일, 상황 해결을 위해 SWAT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SWAT 저격수와 타격팀이 현장에 배치되었으며, SWAT는 신속하게 내부로 진입했다. 3시간 동안의 총격전 끝에 사파티스타 테러리스트는 전원 사살되었다. 그러나 공격이 개시된 직후 시청 내에서의 대규모 총격전에 의해 인질 7명이 사망했다. 비록 성공적이었으나 당시 많은 이목을 끈 사건인 만큼 당시의 참혹한 현장이 고스란히 녹화되었다.

건물 안, 밖에서 SWAT와 총격전을 벌이는 무장 괴한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인질들, 여러곳에서 특공조에 의한 파괴 활동이 끊임없이 이루워지면서 순식간에 유래없는 지옥도가 고스란히 녹화되었다. 이러한 당시 LA의 상황은 이후 멕시코 내전을 조명하는 또 다른 문화적 상징이 되었고, LAPD를 포함 미국 각지의 경찰들이 조금 더 중무장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로스 앤젤레스 시청 인질극은 딱 3일만에 진압되었으며, 시청을 점거하거나, LA 곳곳에서 사보타주를 했던 테러리스트와 그 동조자들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으며, 그 후로도 미국은 사파티스타의 미 본토에 대한 테러 행위와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하고 미국에서 재판에 세우기 위한 전국적인 색출 작업을 벌였다.

FBI 요원들은 사파티스타 특공조와 이에 동조한 라티노나 치카노들이 무기를 획득한 루트를 마약 카르텔과 같은 히스패닉 조직범죄로 추정하였고, 이들에 대한 높은 강도의 색출 작업은 더욱 강박적인 체포와 기소로 이어졌다. 한 해가 끝나갈 시기에도 수천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체포되었다.

테러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이들은 FBI의 대규모 색출 작업이 개시되면서 점차 수사망이 좁혀오자 쿠바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쿠바에게 즉각 이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쿠바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빌 클린턴은 다음 대선을 앞두고 라틴계 미국 시민의 권리와 라틴 아메리카의 주권과 안보를 지킬 것을 약속했다.

또, 빌 클린턴은 대선 기간 동안 미국 본토에까지 내전의 화가 미친 것에서 댓가를 치루게 해야 한다는 높은 유권자들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서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군대를 멕시코에 투입해야했다. 사파티스타의 LA 시청 인질극 이후 미군은 순항미사일을 게레로의 반군 근거지를 향해 발사했다.

1997년, 캘리포니아와 미국의 남부, 서부에서 주요 관심 거리는 이제 전년도 LA 테러 공격으로 인한 여러 체포 및 재판, 그리고 폭넓은 라티노 사회에 대한 감시와 색출 작업으로 분노한 히스패닉계의 인종 폭동이었다. 연쇄적으로 발생한 인종 폭동은 직접적으로 멕시코 반군의 영향력 안에 있지는 않은 것 처럼 보였다.

같은 해 10월 17일, 쿠바에서 체 게베라의 장례식이 치러진 뒤 쿠바 정부는 캘리포니아 주와 미국의 법에서 사형이 확실한 상황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테러리스트들을 미국으로 송환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쿠바가 미국인을 살해하고 끔찍한 범죄를 자행한 살인마를 보호하려 한다며 비난했다.

미 국무부는 22일 미국 국내에서 벌어진 테러리즘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행위는 엄정히 조치될 것임을 밝혔다. 10월 26일 미 국무부는 성명을 통하여 쿠바에서 테러리즘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혔다. 이런 미국의 선언은 또 다른 안보 불안으로 보여졌으며 아시아발 금융 위기와 함께 미국 내 주식 시장이 급락했다.

쿠바의 개입과 멕시코 공산 정부 탄생

1997년, 베네수엘라와 쿠바, 중국, 북한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한 신생 MCP 조직은 멕시코군이 철수하고 무인지대로 선포한 뒤 한동안 반군과 정부군간의 교전만이 있던 멕시코 시티에 침투한 4월 13일, 반군은 수도에서 급조된 선언을 낭독했다. 무정부 상태에 빠진 멕시코 시티에 진입한 반군은 이 역사적인 선언을 통해 내전 이후의 신정부를 구축하려했다.

MCP에 의해 동원된 인력들이 시내 거리를 적기로 장식하였고, MCP가 최종적으로 당선시킨, 사실상 베네수엘라의 멕시코 총독이었던 새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취임할 무렵부터 반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반군에 의한 체포가 이어졌다. 이들은 "반동 인사"로 규정된 멕시코 정부와 유관된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멕시코 시티 거리는 반군 측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 행렬이 진입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보낸 것으로 추정된 식별되지 않는 전차까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남아있던 경찰들은 반군에 의해 린치 끝에 살해되거나 체포, 구금되었다. 초법적인 사형이 남발되면서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멕시코 시티 수도 곳곳에서 무절제한 약탈과 혼란이 가중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방송을 통해 수도로 군이 향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방송했으나, 머지않아 해당 방송 대신 MCP에 의하여 멕시코 독재세력의 또 다른 반란 시도가 포착되었다고 선언했다. MCP의 신정부는 현재 멕시코 전역에 반군이 승리하고 있으며 이전 헌법은 필요에 따라 무효될 수 있음이 선언되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사실상의 계엄을 선포하였고, 많은 이들에게 반군에 규정하는 "반체제 인사", 또는 속된 말로서 "반동"으로 불리는 이들의 체포를 돕지 않으면 같은 정치범으로 판단하여 사살할 것임을 반복적으로 방송했다. 고압적인 태도에 의한 몇몇 멕시코 시민들의 많은 반대 목소리는 쉽게 묵살되었다.

결국 다수의 멕시코인들은 고향을 버리고 더욱 북쪽 지역으로 떠나는 것외에는 계속 남아있다 반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미군의 미사일에 의해 사망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MCP의 이러한 수도에서의 선언은 미국에 대한 도발이 되었고, 미 해병대 5,000여명의 추가 파병이 결정되었다. 수 많은 미 해병대가 멕시코로 향했다.

한달 뒤인 5월 16일, 미 육군 레인저가 포함된 미 지상군이 멕시코 연방군과 함께 남하해 수도 멕시코 시티를 재탈환하였다. 애초에 멕시코 시티로 군이 향하자 반군은 모두 점령지를 버리고 철수하거나 민간인을 고기방패로 삼아 아예 도시째로 버티면서 미군은 멕시코의 수도와 그 인근 지역에서 산발적인 교전에 부딪혔다.

식별되지 않은 다수의 쿠바군이 신생 MCP 정권을 돕기 위해 멕시코로 이동했다. 이들은 멕시코 정규군을 단기적으로는 능가하였으나 미군이 투입되는 전투에서는 패배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MCP는 국내의 정치적 반체제 인사와 반혁명분자를 체포하는데 더 집중했다. MCP 측은 남은 점령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불법적인 구금, 고문, 살인을 벌였다.

쿠바는 대외적으로 군사 원조를 부정했지만 치아파스와 유카탄 지역에 쿠바군의 중고 전차를 대여할 만큼 전쟁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미군 및 멕시코 군대와 전투가 벌어지면 MCP가 모집한 구 멕시코 연방군 출신 탈영병으로 이루워진 멕시코 인민군은 전투가 시작되면 대부분 도망가버렸으며 비교적 질이 낮은 EPR과 일부 사파티스타 출신 병력들만이 도망치지 않았다. 쿠바군 장교들은 MCP가 싸울 의지가 없다고 판단했으며 일부 부정적인 보고가 쿠바 본국으로 올라갔다.

쿠바군이 멕시코에서 미군과 직접 충돌하면서 처음 양국 모두 멕시코에서 대리전을 치루면서도 상대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기피했으나 1998년 1월부터 이러한 시도는 모두 해제되었다. 1월부터 3월까지 양측 군대는 상호간의 교전으로 수십에서 수백여 전사자, 또는 부상자를 발생시키며 싸워갔다.

쿠바군의 증원군이 멕시코로 도착하고, 중국이 비공식적으로 원조한 군수 물자가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뒤 공해상을 통해 멕시코 남부로 전해졌다. 반군이 점령한 지역에 도착한 중국산 중화기들은 FARC와 다른 좌익 게릴라들에 의해 운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좌익적 사상에 물든 게릴라를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고용해 멕시코로 보냈다.

같은 해에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빌 클린턴의 지지율이 크게 추락한데다, 쿠바군의 직접 개입, 중국의 대규모 군사원조- 로 추정되는 -멕시코 반군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면서 미군의 더 많은 피해로 이어지자 클린턴은 3월 20일까지 쿠바가 테러리스트를 미국에 인도하지 않을 시 군사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선언했다.

3워 15일, 베라크루즈로 진입하려하는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쿠바군 병력이 해상에서 멕시코 해군에 의해 포착되었다. 그러나 쿠바 잠수함이 멕시코 해군 측 함정을 위협하면서 교전을 회피해버린 탓에 쿠바군 병력은 순조롭게 유카탄 반도 방면으로 향했고, 이들은 곧바로 베라크루즈 지역에 투입되었다.

3월 18일, 미국령 관타나모에서 쿠바군의 우발적인 도발과, 그로인한 미 해병대간의 총격전이 발생한다. 이로인해 쿠바군 1명이 사망하고, 미 해병대 4명이 기습적인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사고에 대해 미국 정부는 쿠바를 향해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쿠바는 미군 병사가 국경을 넘어서 사살한 것으로 발표했다.

반대로 미국 정부는 쿠바군이 우발적, 또는 의도적으로 미군 진영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이에 미군이 단순히 반격했다고 반박했다. 총격전은 관타나모만을 쿠바군이 포위하기 시작하면서 중지된다. 존 F. 케네디 함을 포함한 미 해군의 항모전단이 관타나모만을 포위한 쿠바군을 압박하기 위해 배치된다.

존 F. 케네디 함은 쿠바의 관타나모에 대한 공격의 보복으로 쿠바에 대한 즉각적인 무력 시위를 시작했다. 3월 20일 한 쌍의 F/A-18 호넷이 모함에서 출격했다. 그들은 불시에 쿠바를 공습했고, 레이저 유도 폭탄이 하바나에 떨어지면서 많은 쿠바군이 관타나모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돌아가야했다.

불확실한 정보였으나 미 공군의 공격에 의해 쿠바 지도자인 카스트로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쿠바와 미국 각지에서 들려왔다. 쿠바군은 관타나모에 직접적인 공격을 개시했고 4월이 되자 미 USMC는 전술기를 이용한 "전략" 공습을 통해 하바나 시 중심부를 타격했다. 쿠바군은 하바나가 공습을 당하자 관타나모에 대한 공격을 포기해야했다.

베네수엘라와 몇몇 다른 국가들이 미국이 쿠바를 공격했고 그러한 행위를 비난함에 따라 더 많은 게릴라들을 용병으로서 사들인 베네수엘라에 의해 멕시코로 향하는 국제의용군의 탈을 쓴 베네수엘라의 증원 병력의 수는 이때 최고조를 이룬다. 유카탄 반도로 이루워진 대규모 파병으로 인해 마야인들은 쿠바군과 힘을 합쳐 멕시코 정부군을 완전히 유카탄 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유카탄 주의 주도 메리다로 집결하여 새로운 유카탄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유카탄 공화국을 인정하는 나라는 오로지 쿠바 뿐으로, 이듬해인 1999년에는 베네수엘라와 북한이 이를 인정하면서 3개국의 인정을 받게 된다. 미 해병대의 추가 파병이 한번 더 또 결정되면서 누적 3만명의 미군이 멕시코로 투입되었다.

큰 피해를 입은 멕시코군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원조를 바탕으로 군을 다시 무장시키면서 내전 4년차 이후부터는 완전히 미군과 이스라엘군 처럼 변해갔다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의 여파와 쿠바에 대한 우발적인 교전의 시작으로 빌 클린턴이 폭주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 유권자들은 곧 치뤄질 1998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서 대대적인 이탈을 하게 되는 이유였다. 공화당은 평화적인 불개입을 모색하겠다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며, 전쟁을 원하고, 또 전쟁을 벌이는 무절제한 빌 클린턴을 겨냥한 캠페인을 벌였다.

동시에 내전 이후 발생한 다수의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오면서 미국의 원주민주의는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민주당이 당 내 라티노가 발생시킨 분열로 곤욕을 치루는 동안 공화당은 빌 클린턴의 간음과 잦은 대외적 무력 개입을 강조하는 부도덕성을 정치 선전에 적극 이용하면서 선거에서 크게 이기는 쾌거를 거두었다.

11월 치뤄진 공화당 주지사와 상원의원이 미국의 남서부 주에서 더 많은 득표수를 올리면서 다음 대선에서 공화당의 승리는 이미 확실시 되었다. 한편, 미국 내에서 빌 클린턴에 대한 탄핵 요구가 끊임없이 재기되지만 실제로 이루워지진 않았다. 선거 이후 미국은 콜롬비아와 접촉하며 베네수엘라를 견제했다.

1998년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개입, 나아가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에 대해 분노한 공화당원들은 쿠바, 이라크, 수단, 발칸 반도, 아프가니스탄의 분쟁을 걸고 넘어지며 민주당의 지나친 개입주의는 전쟁광적인 행보라고 비판했다. 이런 공화당의 비판은 아이러니하게도 몇년 뒤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의해 스스로 부정된다.

12월에는 베라크루즈가 반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다시 멕시코군에게 탈환되고, 반군이 재점령 하였다가 미군이 재탈환 후 반군이 또 점령하려다 미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지리멸렬한 국지전이 반복되면서 양쪽 모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전선이 점차 둔화되고 있었다. 사상자만 늘어나자 공화당은 다시 또 빌 클린턴 정권을 비판했다.

1999년에 접어들며 대선을 1년 앞두며 미국 대선의 결과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상황이 오면서 이목은 대선으로 집중되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빌 클린턴이 전형적인 미 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멕시코에서 이루워지고 있는 전쟁이 미국의 안보와 민주주의 보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갈등은 부시가 2000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다음 대선을 앞두면서 양당의 갈등 상황이 더 깊어져갔다. 베네수엘라와 석유 파트너쉽으로 맺어진 중국은 내전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공식적으로는 처음 이루워진 행보였다. 또 중국은 베네수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지원하고 있는 MCP 정권에 중국 대표단을 보냈다.

베네수엘라의 참전

1999년 1월 28일, 클린턴 대통령은 멕시코 전쟁에 대해 미국의 개입이 그만한 리스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미국에게 있어 멕시코는 우리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 중 하나이며, 안보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반드시 멕시코 정국을 정상화 시키고 마약 문제와 사파티스타 테러리즘을 근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천명했다.

시애틀에서 반 세계화 추종 세력에 의한 WTO 뉴라운드 출범과 미국의 멕시코 개입 반대하는 폭력 집회가 벌어졌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향한 정치적 경쟁이 시작되면서 11월 30일 시애틀에서는 반세계화론자에 의한 폭력 집회로부터 야기된 약간의 소요가 발생했다. 당시 WTO의 뉴라운드 출범 반대와 함께 또 다른 화두로는 미국의 멕시코 개입에 대한 일체의 반대였다. 이때의 사망자는 없었지만 현재 치뤄지고 있는 미국의 멕시코 내전 개입에 관한 또 다른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될 뿐이었다.

시위대와 이를 지지하던 계층에서, 적어도 미국이 멕시코 내전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과거 미국-멕시코 사이의 전쟁에 비유하는 구좌파와 반세계화론자들의 반미 정서가 더욱 커지고 있음이 확실시 되어갔다. 그들은 현 클린턴 행정부가 더 많은 저임금 노예를 확보하는 경제 제국주의를 위해 멕시코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음을 강조했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2000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는 후보가 반전 성향을 띌 가능성을 낮게 판단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는 협상의 여지가 존재하는 행정부가 존재하길 기대했지만, 실제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의 면면들을 살펴보았을때, 이전 베트남 전쟁과 같이 군사적 열세를 정치적 우세로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주어지지 않았다.

멕시코 남부에서의 내전은 서서히 소강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1999년 이전과 비교해 전투의 발생 빈도수는 전쟁이 처음 시작된 1994년 초창기 사파티스타의 군사 반란과 비교하여 약 20% 가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우고 차베스는 멕시코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더 빠르게 종식시킬 생각이 없었다.

베네수엘라는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사파티스타가 통제하는 영토에서 공식적인 멕시코에서의 분리 독립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다. 이는 미국이 에밀리오 추아페트의 임의적인 정권을 해산하고, 미국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민선 정부를 선출할 것이 머지않았다는 예측에 따른 결정이었다. 1999년 12월 5일, 치아파스 내에서 자체적인 분리독립 찬반 투표가 시작됬다.

이제 사파티스타 일당 독재로 수립된 치아파스 인민 공화국 정부는 자신들이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멕시코에서 분리했다고 선언한다. MCP 내부에서는 치아파스 주의 분리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지지가 없으면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반발은 즉시 철회되었다.

내적으로는 몇차례 논의되었으나, 사실상 치아파스 주의 분리를 막을 방법도,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합중국과 멕시코 정부 모두 이런 치아파스 주의 분리 시도에 불쾌하다는 뜻과 함께 치아파스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치아파스 주를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와 쿠바를 포함한 반미적 성향의 남미 국가, 그리고 구대륙 국가 일부일 뿐이다.

치아파스 주의 독립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 안보리의 멕시코 평화 유지군 파견 투표는 정작 미국이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하던 러시아와 중국에 의해서 무산되었습니다. 지나치게 높은 분리독립 찬성에 관한 득표율은 진정 민주적으로 선거가 이루워졌는지 의문을 자아냇지만 반란으로 거의 모든 반 사파티스타가 그 지역을 떠난 탓이 컸다.

인민 공화국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는 베네수엘라다. 다음은 함께 치아파스 주 독립을 시도하는 쿠바이며, 뒤이어 석유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려는 중국이다. 그런 다음 많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UN의 강력한 감시 하에 새로운 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확실히 하며 이에 뒤따라 동참했다.

이제 미군은 조금 더 공세적으로 움직였다. 2000년이 머지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인정하는 멕시코 정부가 민선으로 교체될려면 치아파스 외 지역의 반란세력들은 진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군은 이전 전투에서 탈환한 다수의 주요 지역들을 중심으로 더욱 공세적인 전략을 취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자성적인 결론은 정치적 협상으로 전쟁이 틀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미 지상군의 대규모 공세는 12월 말부터 2월까지 지속되었다. EPR과 MCP 지지 병력들을 멕시코 중부에서 완전히 격퇴시키고 나아가 게레로 주로 고립시키기까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이 "신년 공세"는 게레로 주에 대한 미 항공전력의 대규모 화력 투사로 종지부되었다. 미국의 신년 공세 직후 멕시코 시티가 위치한 멕시코 중부의 "중립 지역"들은 모두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내전 종식과 평화 협상을 향한 길

2000년, 미국은 기존의 멕시코 정부를 사실상에 해산 조치를 취했으며, 멕시코 시티로 다시금 이전된 자유 멕시코 정부를 세웠다. 빈센트 폭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민선 정부를 선출한 멕시코 정부는 치아파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앗지만 사실상 현재로서는 남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2000년 3월 3일, 멕시코 정부와 치아파스 정부 양측은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멕시코와 치아파스간의 휴전 협정에서 치아파스 반란세력과 멕시코 정규군 사이 비무장 지역을 설치할 것이며 과테말라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더 이상 치아파스 반란세력이 국경을 월경하여 과테말라로 넘어가는 일은 철저히 금지됬다.

멕시코와 치아파스간의 휴전 협정 이후 유카탄 반도 지역에서 행해진 대규모 군사 작전 이후 멕시코 중앙 정부가 크게 쇠퇴한 틈을 타 일어났던 유카탄 주의 분리주의 운동도 막을 내렸다. 공화국을 자칭하던 세력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우호적인 국외로 도주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MCP 정권을 자처하던 이들도 게레로 주에서의 EPR 세력이 격퇴되면서, 베네수엘라에 구원 요청을 보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소수의 정치적 망명자조차 받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기 동안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괴뢰정권 노릇을 하던 MCP는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구원을 포기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먼 남쪽 사막에서부터 싸워온 멕시코 군대와 이미 6년간의 소모전 이후 멕시코 정부는 급감한 군 전력을 보강하고, 다음 전쟁에 충분한 병력을 모으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내전 당시 쿠바의 카스트로와 만난 우고 차베스

3월 말, 멕시코군은 분쟁 지역으로 미군이 배제된 최후의 공세를 시작하지만 게릴라 공격과 공급망을 방해하는 사파티스타 게릴라와 신생 치아파스 군대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인해 진격하던 멕시코 정규군이 돈좌당하고 전쟁은 수렁에 빠졌다. 멕시코군은 비효율적인 보급과 처음부터 잘못된 작전 계획, 무능한 리더십 및 군의 낮은 사기로 인해 진격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휴전 협정에서 비무장화된 정글에서 치아파스 군대와 계속해서 싸워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은 DMZ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가 카리브 해를 통해 치아파스 주의 대공 방어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멕시코 공군의 공중 지원은 전투 초기 이후 치아파스 주 내의 베네수엘라에 의해 공급된 방공망이 형성되며 결코 이루워지지 않았다.

치아파스 인민 통치 위원회는 멕시코 정부가 시작한 공격을 비난하고 방어적 목적으로의 베네수엘라군의 직접적 지원과 개입을 요구했다. 두 나라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와 또 다시 대규모 분쟁 상황에 빠질 이유도, 또 그럴 여유도 없다고 내부적으로 많은 목소리가 빗발쳤다.

이미 1998년 당시 전쟁에 대한 열의는 미국 고립주의를 우선하는 공화당과 반전주의적 민주당 사이에서 둔화되고 있었다. 2000년 여름 멕시코에서 미국과 베네수엘라간의 군사 원조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매우 불안정한 남미 상황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베네수엘라가 치아파스로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미국은 점점 더 많은 병력을 멕시코로 파병보냈다.

중국은 새로운 치아파스 인민 공화국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보내며 간접적으로 의사를 내보였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조지 W. 부시가 승리하고 소란스러운 클린턴 행정부의 막이 내리자 미국과 베네수엘라는 비로소 전쟁을 준비한다. 2000년 8월, 미국과 베네수엘라 양국은 제3국인 파나마를 통해 차관급 회담을 진행했다.

치아파스 지역의 분리독립을 막고, 멕시코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미국의 군사 개입을 천명하였기 때문에, 이때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어도, 잠정적으로 그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때의 회담을 통해 양측은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지만, 끝내 결렬되면서, 사실상 양측 모두 서로를 협상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전쟁에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2000년 11월, 레임덕이 오면서 완전히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전쟁에 의한 격류로 표류하는 클린턴 행정부는 마지막 파병안을 계획한다. 차관급 회담 이전 5,000명 규모 미 육군 병력이 파병되었으며 11월 최종 파병 계획에서 약 11,000명 규모 미 육군 병력의 추가 파병이 결정되었다. 이것은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한 최종 파병으로 선전되었다.

2001년 1월, 베네수엘라로부터 조종사와 전투기를 인계받고, 라운델만을 일부 수정한 "치아파스 공군"이 치아파스 주 전체를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진입하는 모든 멕시코 국적 항공기를 격추하기 시작한다. 전년도에 맺은 평화 협정이 완전히 무효화된 상황에서 더 많은 군사력을 얻기 위해 멕시코는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은 멕시코를 보호하고 남미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되찾고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대한 격렬한 연설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연설로부터 3개월 뒤, 멕시코 공군은 치아파스가 자체적인 공군력과 방공망을 구축하며 이전과 달리 처음으로 "격추" 당하기 시작했다.

멕시코군의 공격 헬기가 2001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처음으로 2기가 격추되었다. 이후 이는 5기로 증가했다. 연이은 격추가 불러온 극도의 흥분과 예민감은 현장에서 전투 조종사의 판단력을 격양시켜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국경 분쟁에서 멕시코 헬리콥터 건쉽이 친 치아파스 성향의 민가에서 가해지는 헬기를 향한 공격에 대응하면서 일이 벌어졌다.

남부의 많은 사람들은 멕시코 정부가 자신들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분노했고, 좌익 성향의 빈민들은 반란을 재개했다. 게레로 주에서 밀려난 뒤 괴멸당한 EPR은 이때 이후로 다시 세력을 충원했고, 또 민중 반란이 시작되자 빈센트 폭스 대통령은 멕시코 군대를 불러 여러 차례의 전투와 과격한 진압으로 반란을 침묵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치아파스 공화국 또한 격양되기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부에서 행해진 멕시코 정규군의 과격한 진압에 대해 그들은 6년간 쿠바군의 지원을 받은 좌익 반군에 의해 주 전장이었던 베라 크루즈 지방으로 즉각적인 공세를 개시한다. 쿠바로부터 받은 구형 순항 미사일이 멕시코시티로 날아와 큰 폭발을 일으켰다.

멕시코 공군이 이에 대응하여 치아파스 주에 몇차례의 공습을 시작하고, 사파티스타의 공세는 빈센트 폭스가 과달라하라로 도피하며 큰 공백이 생긴 멕시코 시티였다. 미국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신속하게 대응했다. 겨우 이틀 만에 대규모 미 육군 지상병력이 최전선에 도달했고 치아파스 전군을 완전히 섬멸했다.

신년 공세 동안 누적 47,000명 규모의 미군이 이뤄낸 성과는 지난 수년간 멕시코군이 벌인 모든 군사적 성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실질적으로 베네수엘라군에 가까운 대규모 반란군을 소탕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미 공군은 완벽한 제공권을 확보하고 24시간 이내에 치아파스 전역에 약 반년치 폭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전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막강한 화력을 쏟아붓자 멕시코 내 반란 세력들은 게릴라전을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가 즉각 멕시코에서 철수하기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베네수엘라는 답하지 않았다.

멕시코 남부 지역을 통과하는 미군

5월, 차베스는 미국이 멕시코에서 군대를 철수할 때까지 치아파스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와 길고 긴 장기전을 할 염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햇다. 2002년,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군사적 원조를 위해 멕시코로 향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강화된 검역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베네수엘라의 군사 원조 시도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실패했다. 베네수엘라가 아무리 현상 유지를 원한다 해도, 미 해군을 공격하면서까지 치아파스에 군사 원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강화된 검역이 시작되면서 해상 지원은 더 이상 실시하지 않게 되었다. 베네수엘라가 마지막으로 보낸 선박은 미국에 의해 나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의 폭발적인 진격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멕시코군은 낮은 사기와 불충함으로 인해 불신받았고, 대부분은 작전에서 배제됬다. 미군은 고작 몇일만에 치아파스 주 전지역을 강타했다. 치아파스와 협상할 준비를 하기 위해, 미국은 많은 군사력을 투입했고, 치아파스 전지역을 무참히 초토화 시킬때까지 미국의 반복적인 공습은 지속됬다.

그리고 2002년, 캐나다의 중재 하에, 뉴욕에서 치아파스 반란의 중지를 골자로 한 종전 선언이 성사되었다. 미국과 치아파스는 1차적인 내전 종식에 대한 협상에 나섰다. 더 이상 과거의 멕시코-치아파스 협정때처럼 미군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는 협상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2002년 5월 16일 시작된 미국-치아파스 협상이 성사되며 잠정적으로 교전은 중단되기 시작했다.

이후 11월 4일, 멕시코 정부는 치아파스와 유카탄 지역의 특수 자치를 허용하는 종전 협상으로 내전을 종식시켰다. 대부분의 EZLN 및 특히나 쿠바의 지원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던 반란군은 이후 협상 결과에 따라 투항, 소멸했으며 향후 몇년간 멕시코는 EPR을 비롯한 좌익 반군의 잔당과 멕시코 카르텔과의 잦은 충돌과 소요사태에 휘말리며 불안한 정국을 보내야 했다.

결과

“He struggled with himself, too. I saw it -- I heard it. I saw the inconceivable mystery of a soul that knew no restraint, no faith, and no fear, yet struggling blindly with itself.”
Joseph Conrad, Heart of Darkness

멕시코 내전은 베트남 전쟁 이후 또 다시 미국은 국민의 뜻에 대한 잘못된 오판을 내렸다. 멕시코가 미국의 안보 상황에 극단적인 위험을 끼치게 둘 수는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 아래에는, 전쟁에 개입한 뒤, 너무 많은 인명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불구가 된 것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와 회의가 남아있었을 뿐이다. 이는 또 다시 미국의 문화적 성격을 변화시켰다.

높은 인명 손실과, 그로인한 타인의 강요된 희생에 대한 문화적 코드는 향후 2000년대의 모든 미국의 미디어 컨텐츠의 주요 주제였다. 멕시코 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처음 접근한 것은 2004년에 개봉한 영화 "푸른 정글(Blue Jungle)"에서 전쟁을 겪었던 당시 멕시코의 미 해병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을 묘사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다만,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멕시코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일련의 문화적 흐름과 기조를 나타내지는 못했으며,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개입에서, 오히려 미국이 피해자이자 저항자로 보여지는 새로운 관점 또한 나타나며, 미국의 멕시코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반면, 멕시코에서는 이후 또 다시 멕시코 마약 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며 미국에 대한 책임론이 크게 대두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최소한 구좌파 진영 만큼은 멕시코 내전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공으로 간주한다. 극좌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당 전쟁을 제2차 멕시코 내전이 아닌 멕시코-양키 전쟁으로 명명하곤 하나, 오늘날에도 그렇게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쟁 이후 반혁명 숙청으로 익히 알려지게 될 MCP 정부의 학살은 한동안 멕시코 정계에 좌익 정당이 흥행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한편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검토했다. 베네수엘라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치아파스를 향해 군사 원조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미국은 불가피한 경제 제재를 검토해야 했다. 베네수엘라는 이에 대해 치아파스에 대한 모든 원조는 베네수엘라의 안보를 위한 자위적인 조치라 항의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묵살했다.

MERCOSUR는 미국의 경제 제재 이후 상호 방위에 대한 아이디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가 불황에 빠진 상황에서 잠정적으로 이미 반미적인 경향을 띌 것은 확실해보였다. 이 시점에서 우고 차베스는 초강대국에 맞선 사나이라는 구좌파와 신좌파를 아우르는 반미주의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베네수엘라는 군사력 증강을 앞으로 미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지속해야 했다. 러시아와 함께하는 대규모 군사 체질 개선 사업은 미국을 더욱 자극시켰고 미국은 가능한 모든 부문에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와 중국을 필두로 한 다른 국가들이 베네수엘라와 거래를 추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베네수엘라의 무리한 미국과의 경쟁 시도는 결국 베네수엘라 경제에 대한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졌으며, 몇년 내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총체적인 몰락에 빠져 무너져내릴 것은 자명해보였다. 마치 이를 보장하듯 미국의 대 베네수엘라 경제 제재는 짧은 시일 내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웃한 콜롬비아와 파나마의 군사력을 더욱 증강시킬 것을 주문했다.

콜롬비아와 파나마 뿐 아니라, 캐나다, 과테말라 등이 이에 동참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의 연쇄적인 군사 부문에서의 확장은 빠르게 촉발됬다. 한편 남미 내에서의 불안정한 안보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미국 패권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와 함께 브라질은 반미 진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또한 미국은 단순히 베네수엘라 뿐 아니라 쿠바도 압박해나갔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재개했다. 쿠바가 가장 우려한 멕시코 내전에 대한 개입이 미국-쿠바 관계를 다시 1960년대 초로 돌릴 것에 대한 우려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미국이 더 이상 쿠바에 대한 안보적 위험을 두고 더 이상 과거의 냉전적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낡은 시각이라 판단하는 대신, 쿠바라는 국가 자체가 미국의 국익에 정면으로 반하며, 나아가 실질적인 위험요인이라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류에 이후의 존 매케인 행정부에서는 쿠바 정부 전복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오갔다. 공화당의 쿠바 정부 전복에 대한 고려는 이후에 치뤄진 선거에서 플로리다를 포함한 카리브해 연안의 공화당 지지자들과, 나아가 쿠바계 이민자의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이행되진 않았지만, 쿠바에 대한 강력한 미국 주도의 제재가 지속되는 한 머지않아 쿠바는 무너질 것이다.

새로 선출된 브라질 대통령인 룰라 다 시우바는 브라질 내 강경 좌익 진영의 목소릴 따르기로 결정했다. 브라질의 반미화는 미국에게 미주 대륙 내에서의 또 다른 도전자의 등장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했다. 한동안 미국이 구대륙에서의 대외적 문제보다 미 대륙 내에서의 문제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는, 멕시코 내전의 예상에 비해 굉장히 조용하고 허무한 멕시코 내전 종식으로 과거 치아파스 독립의 근거를 민주적 투표라 선전한 사파티스타 측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받아들여 유럽 내에서 미국에 대한 반미적 성토와 호도로 일관하던 EU의 위선적인 정치가들에게 씁쓸한 뒷맛만을 남겼다.

미국 자체에서 라틴 문화는 치카노와 라틴계 히스패닉의 인종주의 폭동과 테러리즘으로 환란을 겪은 후 복귀하기 시작한다. 수 만명에 달하는 멕시코계 전쟁 난민들로 인해, 머지않아 미국 내 최대 인종으로 자리잡을 히스패닉들은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미국 남부 국경에서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와는 별개로 LA 시청에서 벌어진 치카노에 의한 시청 점거와 뒤이은 총기 난사에서 발생한 테러리즘은 오히려 빌 클린턴과 민주당이 추진하는 더 강력한 총기 규제에 대한 근거로서 사용되었다. 이때 강화된 총기 규제 법안은 후일 빌 클린턴 행정부의 실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외려 인종주의에 입각한 잦은 폭동으로 인해 홈 디펜스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며 생긴 결과였다.

멕시코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은 애리조나, 플로리다, 일리노이,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및 텍사스, 미주리, 오클라호마, 텍사스, 버지니아, 콜로라도 등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다수의 멕시코 난민들은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고, 이질적인 불편한 이웃으로 계속 남았다. 난민에 대한 반감은 지속적으로 커져갔다.

그렇게 2004년부터 2005년 사이 미국 남부에서는 멕시코계 난민과 불법이민, 밀수 문제를 감시하는 다수의 민병대 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미니트맨 프로젝트가 크게 대두되었으며, 동시에 반이민 성향의 민병대 집단인 렌치 레스큐에서 따와 이러한 일련의 멕시코 난민에 대한 미 남부 주민들의 반이민 운동은 "렌치 레스큐 운동"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문화적 흐름은 201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멕시코 마약 전쟁이 시작되며 다수의 난민들이 미국의 초당적인 마약과의 전쟁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이 멕시코 북부로 다시 도망갔기 때문에 렌치 레스큐 운동의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었으며 2010년대 후반에서는 완연한 곡선을 그리며 축소되었다.

다만 그러한 반이민 정서는 미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향후 20년간 미국에서 이민과 망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부작용을 낳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절 가장 크게 주목받던 아시아권의 원정 출산 문제와 결부되며 한동안 이민에 대한 제한 규정이 강화되었다. 이는 2020년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멕시코의 치안이 당분간 안정화되지 않으면서 미국과 멕시코간의 국경이 군사화되었다. 이민자에 대해서 더 이상 정치인들은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미국인의 삶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더 이상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오는 많은 불법 이민자들은 다시금 추방될 것이다. 이런 광범위한 이민자에 대한 규제책은 향후 10년간 유지되었다.

10년간 추방된 불법 이민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적발되지 않은 불법 이민자들 또한 강화된 불법 이민에 대한 처벌 규정에 따라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행렬이 형성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구 수가 단기간에 크게 늘었지만 멕시코 내전 당시 폭력 사태를 주동했던 탓에 정치적으로 고립된 치카노는 문화적 위축을 겪어야 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는 동안 러시아와 중국에서는 미국의 치카노 폭력 사태에 대한 대응, 진압을 체첸인과 신장의 무슬림, 티베트인, 파룬궁에게 가할 훨씬 더 가혹한 탄압과 인권 유린에 대한 명분으로서 삼았다. 마치 하나의 국제적인 유행처럼 이후 10년에서 20년 동안 각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은 보다 잔인한 방향으로 변해갔다.


번외:매케인과 멕시코 전쟁

대통령 취임식에서 중동 문제에 대한 빠른 해결을 약속하는 존 매케인

공화당은 대선 동안 평화적인 접근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W. 부시 정권에서도 이라크전을 치루게 되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한 회의는 더욱 높게 나타났다. 다음 대선인 2008년, 정권 말 이전 경선의 패배자였던 매케인은 다시금 부시 이후의 대안으로서 부상해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서 폴 라이언 의원과 함께 출마하여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때 아쉽게 경선에서 존 매케인이 떨어진 것은 한동안 미국 사회를 배회하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멕시코 내전을 겪고 난 뒤 미국 사회에서의 평화를 향한 기대는 머지않아 조지 W. 부시가 택한 중동에서의 전쟁 개시로 인해 모두 배신당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클린턴 행정부의 멕시코 개입을 비판해오던 공화당 의원들은, 몇년 뒤 이라크 침공에 대한 민주당 의원들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존 매케인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됬다. 그러나 2006년 중간선거에서 뼈아픈 패배는 이후 존 매케인 행정부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최악의 실패였다. 그러나 존 매케인은 부진했던 중동 문제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시키면서 임기 2년차에 맞이한 2010년 중간선거에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면서 상하원 모두 민주당을 압도하게 된 공화당은 일약 공화당 황금시대로 이어진 원동력이었다.

이후에 치뤄진 2014년 중간선거에서 약간의 패배를 얻으면서 레임덕이 시작된 존 매케인 행정부는, 그나마 약간의 레임덕을 겪었지만 성황리에 정권을 끝내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성공적으로 안착 시키면서 공화당 정권 연장을 성공시키며 좋은 마무리를 보였다.

또 다른 이야기:마약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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