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 Erster Weltkrieg by Ernst |  데스크톱  크롬  벡터 스킨 지원
제3차 발칸 전쟁
발칸 전쟁의 일부

제3차 발칸 전쟁으로 변경된 발칸반도 내 국경과 국가별 영토 변화
날짜1914년 7월 28일 ~ 1915년 1월 19일
장소발칸 반도
결과

발칸 동맹의 패배
1915년 빈 조약의 체결

교전국

독오 동맹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전투 파병국
독일 제국 독일 제국


간접 지원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발칸 동맹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물자 지원국
영국 영국
프랑스 프랑스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지휘관

독오 동맹 지휘관
독일 제국 빌헬름 2세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제국 헬무트 폰 몰트케
독일 제국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란츠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아르츠 폰 스트라우센부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제코프
불가리아 왕국 게오르기 토도로프
불가리아 왕국 블라디미르 바초프
불가리아 왕국 스테판 토셰프

불가리아 왕국 클리멘트 보야드지예프

발칸 동맹 지휘관
세르비아 왕국 페타르 1세
세르비아 왕국 라도미르 푸트니크
세르비아 왕국 지보인 미시치
몬테네그로 왕국 니콜라 1세
몬테네그로 왕국 얀코 부코티치
몬테네그로 왕국 크르스토 포포비치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루마니아 왕국 콘스탄틴 프레잔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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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발칸 전쟁(Third Balkan Wars)은 1914년 7월 28일 ~ 1915년 1월 19일에 사라예보 사건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발칸 반도에서의 세 번째 전쟁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슬라브 민족주의 조직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 당하자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하며 시작되었다. 이전부터 발칸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민족주의를 퍼뜨리던 세르비아의 관계는 이전부터 굉장히 악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절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세르비아는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분할 점령되었으며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편입되었고 그리스루마니아제2차 발칸 전쟁으로 불가리아에게 얻어낸 영토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배경

세르비아에서 청년 보스니아 소속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발칸 민족주의 봉기를 촉진하던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체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붕괴를 촉진하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인사는 세르비아를 확실히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 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백지 수표”를 약속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준전시 관계에 러시아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7월 위기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발칸에 표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세르비아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했다. 발칸반도 내에서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발칸 동맹과 발칸으로 게르만의 확장을 막으려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들에게 암암리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역시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불가리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의 국가에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발칸 동맹과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고 도브루자마케도니아의 수복과 에게 해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가 전쟁에 휘말린다면 언제든지 독오 동맹의 약속을 받고 참전할 작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동맹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전쟁에 개입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평화 협정에 관여하여 그리스, 알바니아의 독립은 보장해야 한다고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투 서열

독오 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2군 제5군 제6군 뵘에르몰리 분견군제2군

루카바츠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남작
원수

  • XII 군단
    • 제16보병사단
    • 제35보병사단
    • 제38 '혼베드' 보병사단
  • III 군단
    • 제6보병사단
    • 제28보병사단
    • 제22 란트베어 보병사단
  • 제11보병사단
  • 제43 란트베어 보병사단
  • 제20 '혼베드' 보병사단
  • 제1기병사단
  • 제5 '혼베드' 기병사단
  • 제8기병사단

바치카팔란카
리보리우스 리터 폰 프랭크
야전사령관

  • VIII 군단
    • 제21 란트베어 보병사단
    • 제9보병사단
  • XIII 군단
    • 제36보병사단
    • 제42 '혼베드' 보병사단
  • 제13보병여단
  • 제13행군여단
  • 제11산악여단
  • 제104 란트슈투름 여단

브르샤츠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대장

  • XV 군단
    • 제48보병사단
    • 제1보병사단
  • XVI 군단
    • 제18보병사단
    • 제1산악여단
    • 제2산악여단
    • 제13산악여단
    • 제17산악여단
  • 헤르체코비나-코토르 집단
    • 제40 '혼베드' 보병사단
    • 제3산악여단
    • 제15산악여단
    • 제16산악여단
    • 제47 '혼베드' 보병사단
  • 제107 란트슈투름 여단
  • 제109 란트슈투름 여단

루카바츠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남작
원수

  • VII 군단
    • 제17보병사단
    • 제34보병사단
  • IV 군단
    • 제31보병사단
    • 제32보병사단
  • 제7보병사단
  • 제23보병사단
  • 제29보병사단
  • 제10기병사단
  • 제4행군여단
  • 제7행군여단
  • 제8행군여단
 불가리아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1군 제2군 제3군 제4군

몬타나
클리멘트 보야드지예프
장군

  • 제1 '소피아' 보병사단
  • 제1기병여단
  • 제6 '브딘' 보병사단
  • 제8 '툰자' 보병사단
  • 제9 '플레벤' 보병사단

블라고에브그라드
게오르기 토도로프
중장

  • 제3 '발칸' 보병사단
  • 제7 '릴라' 보병사단
  • 제11 '마케도니아' 보병사단
  • 혼성기병사단
  • 오팔체니 연대
  • 에타페 연대

슈멘
스테판 네레조프
장군

  • 제4 '프레슬라프' 보병사단
  • 제5 '다뉴브' 보병사단
  • 제12 혼성보병사단
  • 제5기병여단
    (독일 원정군)I 바이에른 군단
  • 제1바이에른 왕립사단
  • 제2바이에른 왕립사단

스몰랸
스테판 토셰프
장군

  • 제10 '에게' 보병사단
  • 제2기병사단
    (독일 원정군)X 군단
  • 제19 하노버 사단
  • 제20 하노버 사단
  • 제10 하노버 엽병대대
  • 제10 하노버 공병대대

발칸 동맹

 세르비아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1군 제2군 제3군 베오그라드 분견대

파라친
Petar Bojović
장군

  • I 드리나 보병사단
    • 제5보병연대 (I)
    • 제6보병연대 (I)
    • 제17보병연대 (I)
    • 제3보충연대 (I)
  • II 드리나 보병사단
    • 제5보병연대 (II)
    • 제6보병연대 (II)
    • 제6보병연대 (III)
    • 제5보병연대 (III)
  • 브라니체보 분견대
    • 제7보병연대 (III)
    • 제5보병연대 (III) 일부
  • 자다르체트니크 분견대
  • 군 휘하 포병대

브라네
Stepa Stepanović
장군

  • I 모라바 보병사단
    • 제1보병연대 (I)
    • 제2보병연대 (I)
    • 제3보병연대 (I)
    • 제16보병연대 (I)
  • I 통합 사단
    • 제1보충연대 (I)
    • 제2보충연대 (I)
    • 제5보충연대 (I)
    • 제6보충연대 (I)
  • I 슈마디야 보병사단
    • 제10보병연대 (I)
    • 제11보병연대 (I)
    • 제12보병연대 (I)
    • 제19보병연대 (I)
  • I 도나우 보병사단
    • 제7보병연대 (I)
    • 제8보병연대 (I)
    • 제18보병연대 (I)
    • 제4보충연대 (I)
  • 군 휘하 포병대

아란젤로바츠
Pavle Jurišić Šturm
장군

  • 기병사단
    • 제1기병연대
    • 제2기병연대
    • 제3기병연대
    • 제4기병연대
  • I 티모크 보병사단
    • 제13보병연대 (I)
    • 제14보병연대 (I)
    • 제15보병연대 (I)
    • 제20보병연대 (I)
  • II 티모크 보병사단
    • 제13보병연대 (II)
    • 제14보병연대 (II)
    • 제15보병연대 (II)
  • II 모라바 보병사단
    • 제1보병연대 (II)
    • 제2보병연대 (II)
    • 제3보병연대 (II)
  • 오브레노바츠 분견대
    (II 도나우 보병사단)
    • 제7보병연대 (II)
    • 제8보병연대 (II)
    • 제9보병연대 (II)
    (기타 부대)
    • 제9보병연대 (I)
    • 제8보병연대 (III)
    • 제9보병연대 (III)
  • 군 휘하 포병대

베오그라드
Miloš Božanović
장군

  • II 슈마디야 보병사단
    • 제10보병연대 (II)
    • 제11보병연대 (II)
    • 제12보병연대 (II)
    • 제4보병연대 (I)
  • 베오그라드 여단
    • 제4보병연대 (II)
    • 제4보병연대 (III)
 루마니아군 전투 서열 ↓
제3군

부쿠레슈티
미하일 아슬란 소장

  • 제9보병사단
  • 제17보병사단
  • 제19보병사단
 그리스군 전투 서열 ↓
IV 군단 (국방군)

카발라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요안 하초폴로스 중장

  • 제6보병사단
    • 제17보병연대
    • 제18보병연대
    • VI 산악포병대대
  • 제7보병사단
    • 2/21 크레타연대
  • 제7야전포병연대
 몬테네그로군 전투 서열
몬테네그로 군

체티네
얀코 부코티치 장군

  • 로브첸 분견대
  • 헤르체코비나 분견대
  • 플레블라 분견대
  • 구 세르비아 분견대
  • (그 외 2개 분견대)

전쟁 과정

사라예보 사건을 명목으로 발칸 반도의 과격한 민족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받아들이지 못할 4개의 조항을 들어 최후통첩을 보내었다. 세르비아는 결국 3항까지 허용했으나 4항을 거절하며 1914년 7월 28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의 교섭을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다음 날에 급히 테살로시키에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스의 주재무관과 발칸반도 사태에 대응을 촉구했다. 그 결과 몬테네그로그리스8월 1일에 세르비아에 가담했고 8월 3일부터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그리스에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보호를 약속받은 불가리아가 8월 7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가담했다.

루마니아 당국은 8월 7일까지도 참전 의사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8월 20일부터 불가리아가 도브루자 국경으로 병력을 증강시키자 도브루자 방어와 트란실바니아에 거주중인 루마니아인의 해방을 위한 참전 의사를 내비쳤으며 8월 30일 끝내 루마니아 마저 세르비아 측에 서서 참전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참전

그리스 왕국은 8월 1일 세르비아를 옹호하는 담화를 공포했으나,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세과 왕실은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그와는 상충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양자간에 불화를 빚자 국왕이 베니젤로스를 총리직에서 해임하면서 두 사람 개인은 극심하게 갈등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양자의 지지자로 갈라져 그리스 사회 전반이 분열되었다. 그리스는 두 정치 진영으로 갈라져,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북부에 대립 정부를 세웠으며 이에 가담한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와 일부 그리스군이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봉기했으며, 이들은 9월 20일부터 당글리스를 사령관으로 불가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10월로 넘어가면서 국론 분열은 극에 치달았고 영국프랑스 지원을 받아 10월 8일 왕을 폐위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세 초기

베오그라드 공방전

개전 초기 드리나 강에서 저항하는 세르비아군
베오그라드, 아다 시가니리야 섬에 주둔한 세르비아 보병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여전히 러시아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에 따라 세르비아와 갈리치아 두 전선 중 한 곳으로 전개될 'B제대'를 세르비아 전선으로 배치할 것을 이른 시기에 결정했다. B제대발칸 집단군에 합류하기 위해 열차계획부는 이 가정에 따라 시간표를 준비했다. 8월 1일, 콘라트는 B제대의 세르비아 공격 참여를 허용했으며 그들의 임무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주축에서 세르비아군을 멀리 유인해내는 '양동 작전'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군 수준을 심각하게 평가를 절하했지만 그들이 이전 전쟁에서 보여준 잔혹하고 야만적인 면과는 별개로 충분한 수의 기관총대포와 같은 현대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훌륭한 징병 수단으로 소년부터 노인까지 대부분의 남성을 높은 비율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40만 명을 전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이는 제6군, 5군, 2군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의 B제대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시작은 오스트리아 군에게 유리했다. 세르비아군 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가 오스트리아군이 헝가리 북쪽에서 다뉴브 강을 건너 베오그라드로 공격해 들어오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콘라트의 계획은 그 대신 서쪽 보스니아에서 드리나 강사바 강으로 둘러싸인 세르비아 영토의 돌출부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세르비아 돌출부는 세르비아에 몇 없는 평탄한 지형이었으며 8월 12일에 시작된 공세는 오스트리아가 사바 강 건너편에서 남쪽으로, 드리나 강에서 동쪽으로 집중 공격할 수 있었기에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다. 하지만 신중한 베테랑이었던 푸트니크는 주요 저지선을 평원 뒤쪽 바르다르 강과 그 너머의 고지대를 따라 설정했다. 방어군은 8월 14일 밤이 되어 방어선에 자리잡으면서 강력한 저항을 이어갔다. 이에 오스트리아 군의 오스카 포티오레크 사령관은 콘라트에게 제2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전투가 한창 격해지던 8월 16일에 이르러서 지원군은 세르비아의 견고한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8월 18일부터 불가리아 군의 협공이 시작되면서 세르비아 방어선은 크게 위축되었다. 절반에 달하는 병력이 차출되어 불가리아 전선에 급하게 배치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확인한 포티오레크는 8월 20일 새벽부터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일부 독일군의 지원도 있었다. 취약해진 방어선에 가해진 공세는 격한 전투로 소모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기를 안겨주었다. 8월 27일에 이르러서는 아란젤로바츠를 점령했고, 베오그라드를 포위하고 포격을 시작했다.

베오그라드 수비군은 3일간 전투로 크게 소모되었고 고지대 방어선에서 패퇴한 일부 병사들이 막대한 보급품을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과 군부, 정부는 베오그라드를 포기하는데 동의했다. 다행히 베오그라드 포위망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8월 30일 새벽을 틈타 일부의 베오그라드 수비군을 제외한 군과 민간인의 피난민 행렬이 베오그라드를 빠져나갔다. 이들은 다음 날까지 스메데레브스카팔란카에 임시로 방어선을 펼진 세르비아 예비군의 보호를 받으며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1914년 8월 12~18일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 병력을 전개했다.
1914년 8월 19~31일 동안 세르비아의 저지선은 돌파되었고 베오그라드는 포위되었다.
1914년 9월 1~8일 동안 오헝과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를 양분하기 위해 공세를 전개했으나 세르비아의 완강한 저항에 돈좌되었다.
베오그라드에서 후퇴하는 세르비아군

불가리아 전선

불가리아 군은 약속대로 8월 18일 6개 사단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의 동부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했다.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빼앗겼던 마케도니아 지방을 향해 제2군을 모두 투입하며 불가리아 예비군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8월 23일 즈음에 바르다르 강에 방어선을 구축한 세르비아군의 저항에 진격을 멈추었다. 게오르기 토도로프 사령관은 병력을 북쪽으로 이동시켜서 세르비아군 방어선을 우회하여 측면에서 공격하려했다. 하지만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세르비아 군에 의해 1914년 9월 1일, 모라바강에 가해진 첫번째 공세는 저지되었다.

루마니아의 참전으로 축소된 병력에도 9월 8일, 토도로프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2번째 공세를 강행하면서 스코페에서 5마일 남짓한 거리까지 세르비아 방어선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에 이어서 9월 11일니슈를 향한 공세가 예정되었지만, 별 성과 없이 강 서안을 장악하고 다음 날 패퇴했다. 불가리아군 여전히 공세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9월 20일까지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방어선의 강한 저항을 받아 최대 15 마일 남짓한 거리만 진격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9월 21일이 되어 북쪽으로 진격하던 불가리아 침투대는 파라친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만나면서 세르비아 북부는 완전히 동맹군에게 점령되었다.

세르비아 남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로 향하는 세르비아 피난민

세르비아의 영토가 동맹군에 의해 점령되고 있었지만, 세르비아 성인 남성의 군 자원입대자 수는 사상 최대를 갱신했고 군의 사기도 매우 높았다. 또한, 동맹군이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명령체계는 재정비를 필요로했고 동맹군의 공세를 저지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지보인 미시치토도로프 사령관의 부상이 회복될 동안 전선 지휘를 맡았다. 그는 바르다르 강의 방어선 강화하고 북부 전선의 대부분의 병력을 프리슈티나에서 남부 고지대로 이동시켰다. 코소보 평야까지 밀린 세르비아 정부는 결국 알바니아 영내의 스쿠타리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9월 25일부터 루마니아트란실바니아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하면서 -비록 패퇴했지만- 세르비아 전선에 가해지는 압박을 상당량 해소시켜주었다. 9월 27일에는 영국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그리스 군이 불가리아가 점령한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공세를 펼치면서 한동안 세르비아군이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스 전선

9월 말 동안 그리스 군의 공세는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의 지휘를 받았다. 그들은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와 남부 불가리아에 집중적인 공세를 강행했는데,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가 현저했다. 따라서 불가리아의 측면이었던 게브겔리아 방면으로 7마일 진격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즉시 돈좌되었다. 오히려 다음 2일동안 원위치로 밀려났다. 불가리아 방면으로 강행한 돌격도 불가리아 수비대에 저항에 막심한 피해를 입으며 페트리치크산티를 점령했으나 뒤이어 반격한 불가리아군에 의해 획득한 영토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10월 2일에 이르러서는 모든 군이 불가리아에서 밀려나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에서 전투가 이루어졌다.

10월 10일부터 독일 1개 사단과 함께 불가리아 예비군 사단이 남서쪽으로 진격해서 세레스를 점령하면서 공세군을 양분했고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가 5일동안 테살로니키 외곽 방어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적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독일군이 전선을 돌파하며 테살로니키에서 시가전이 계시되었다. 그리스군은 테살로니키에 병력을 집중시켰으나 증원된 독일군에 의해 후방이 위협당하자 후퇴했다. 그리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테살로니키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지만, 불가리아 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그다지 없었다. 10월 21일 끈질기게 저항한 연합군은 테살로니키에서 패퇴했다. 이에 그리스군은 남은 병력을 모두 본토 깊숙이 자리잡은 2차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11월 세르비아가 사실상 점령되면서 그리스도 불가리아에 항복했다.

몬테네그로 우회

1914년 10월 15일,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물자가 상당히 비축되자 세르비아군은 교착된 전선을 향해 반격을 재개했다. 북부로 진격해서 프리슈티나 일대의 평야를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했다. 토도로프 사령관은 다시 전선에 복귀해서 공세 계획을 지휘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오스트리아 민병대의 방어와 프리슈티나 수비대를 상대로 여전히 전투 중이었고 남부 고지대에 대한 방비는 아직 완전하지 못했다. 일부 오스트리아군은 몬테네그로 국경에 배치되기 위해 후방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병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세르비아의 공세는 첫날부터 거세게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군의 전선이 프리슈티나 방면으로 돌파되며 오스트리아군은 즉시 평야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10월 28일에 이르러서는 프리슈티나 민병대가 페치를 점령하면서 몬테네그로와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전력을 크게 소비한 세르비아 군이었지만, 그들은 강행군을 계속해서 몬테네그로 북부와 프리슈티나 평야에서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몬테네그로 전선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2차 공세 3일 째인 11월 2일 세르비아군은 패퇴하여 몬테네그로 영역으로 다시 밀려났다.

동맹군의 동계 공세

11월에 이르자 전선의 상황을 대부분을 장악한 동맹군은 세르비아 남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동계공세의 물량은 동맹군이 세르비아군을 압도했다. 또한 세르비아군은 몬테네그로 영내에 상당 부분 남아있었기 때문에 예비군이 부족했다. 따라서 바르다르강 방어선 곳곳에서 세르비아군이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후 전군은 알바니아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11월 9일에 이르러서 키체보비톨라 수비대가 전멸하면서 세르비아 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철수에 성공한 병력은 몬테네그로 방어선으로 차출되었지만, 이마저도 11월 15일부터 시작된 동맹군의 공세에 몬테네그로 전역이 힘없이 점령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일부 군부 인사와 왕가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그리스를 거쳐 영국 본토로 망명했다.

도브루자 전선

9월 1일부터 콘스탄틴 프레잔 사령관은 도브루자 방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공세를 시작했다. 불가리아군은 이미 도브루자를 탈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배치한 상황이라 루마니아 군의 공세는 금세 돈좌되어 밀려나 도브루자 영내에서 전투가 지속되었다. 루마니아 군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9월 중반이 되어가면서 그 기대는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러시아 주재무관이 루마니아에서 철수하면서 루마니아는 러시아와의 외교 채널이 끊어졌다.

9월 25일에는 예비군을 동원하고 일부 도브루자 수비대를 차출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방인 트란실바니아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갈리치아 방면에 주둔하던 병력에 의해 저지되어 밀려났다. 결국 루마니아는 도브루자와 트란실바니아 양측면에서 가해져오는 압박을 견뎌야했고 그럴 수 없었다. 루마니아 군은 아직 정비되지 못했고 다량의 물자를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10월 12일 불가리아의 선동대가 두브루자보다 더 깊숙이 본토를 위협하게 되었다. 10월 20일이면 콘스탄차를 넘어 불가리아 군이 공세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10월 30일 툴체아를 넘어 러시아 국경까지 진격하며 동부 해안을 완벽히 장악했다. 그러는 동안 불가리아의 확장된 군은 전선의 서부에서도 공세를 시작하여 10월 26일 부쿠레슈티 수비대를 제압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루마니아군은 러시아 접경지역의 산악지대에서 여전히 부분적인 저항을 지속하고 있었고 루마니아 정부나 왕실 또한 마찬가지 였다. 이들은 빈 회의가 계최되고 승인될 때까지 극심한 손실을 입었다.

1914년 9월 11~21일 동안 루마니아는 도브루자로 진격했으나 불가리아 3군의 반격에 밀려나 루마니아 영내에서 전선이 전개되었다.
1914년 9월 25~30일 동안 세르비아는 북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그리스 국경과 도르부자 너머에서 개전되었다.
1914년 10월 1~15일 동안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평야로 공세를 시작한 것을 제외하면 불가리아와 오헝군의 공세가 전역을 휩쓸었다.
1914년 10월 20~31일 동안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내륙으로 패주했고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북부로 진격했으나 곧 돈좌되었다.

결과 및 영향

1915년 1월 19일 체결된 빈 조약으로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고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와 남부 도브루자를 합병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본토에는 괴뢰정부가 세워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호령이 되었다.
1876년에 독일 지리학자 하인리히 키퍼드가 제작한 발칸반도의 민족지도
이반 아센 2세 시기의 불가리아 제2제국 강역

11월 15일에 이르러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영토 대부분이 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미 10월 26일에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큐레슈티가 불가리아군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은 여전히 북부 산지에서 저항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점령당한 영토를 수복할 힘은 부재했다. 그나마 영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그리스 왕국 또한 발칸반도를 향해 공세를 진행할 힘이 부재했다. 그뿐 아니라 내부 소요는 극심했고 영국프랑스는 이미 패퇴한 군대를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은 그들의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더 보존하기 위해 종전을 중재했다.

러시아의 중재로 12월 1일, 오데사에서 열린 중재회의는 전쟁 당사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외에도 당대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관여했다.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호받기 위해서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의 국력을 확실히 축소시키려 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조약에 관여한 열강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각각 몰도비아와 도브루자로 진출하는 것에 거세게 반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반대로 그리스의 세력권 축소에 부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회담은 12월 10일까지 계속 지연되다 결렬되었다.

  • 루마니아는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할양한다.
  • 루마니아는 올테니아 지역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할양한다.
  •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호령이 된다.
  •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된다.
  • 그리스는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할양한다.
  • 세르비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할양한다.
  • 루마니아는 도브루자 전역을 불가리아에 할양한다.

12월 21일, 이번에는 독일 제국의 중재로 함부르크에서 2차 중재회의가 개최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의 요구를 일부분 받아들여 올테니아를 포기하는 대신 중부 세르비아를 할양받았으며, 세르비아에 보호령 수립을 약속받았다. 불가리아는 열강의 압박에 결국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와 도브루자의 일부 지역을 포기해야했다. 이는 테살로니키 일대, 남부 그리스령 마케도니아, 북도브루자를 포함했다. 대신 그들은 동남부 세르비아 영토를 할양받았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은 불가리아가 새롭게 확장한 도브루자와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는 달리 세르비아에 보호령 수립을 반대했다. 또한, 세르비아 분할에 대한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2월 28일 다시 회담은 결렬되었다.

하지만 함부르크 회의에서 결정된 제안들을 바탕으로 1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최종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불가리아는 여전히 지역강국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북도브루자, 테살로니키, 그리스령 마케도니아 남부를 포기했다. 대신 그들은 -스스로 불가리아 지역이라고 맹신했던- 세르비아의 남동부 대부분의 영토를 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몬테네그로를 -이탈리아의 견제가 있었으나- 합병할 수 있었지만, 올테니아 진출을 포기하며 중부 세르비아를 할양받았다. 또한 이들에게 할양되고 남은 세르비아 영토에는 새로운 세르비아 공국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세르비아 공국은 다시금 베오그라드를 새로운 수도로 기존의 세르비아 왕가가 왕위를 이어갔다. 비록 독립국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지부 행정사무소를 구축했다.

불가리아는 전쟁에서 독일제국의 편에서 섰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견제할 수 있으면, 러시아의 발칸 전략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영토확장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 결과로 불가리아는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잃은 영토 뿐 만 아니라, 그리스와 세르비아의 마케도니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대신 안전장치로 잔존한 서부 마케도니아 지역과 테살로니키에 협상국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러한 영향으로 러시아 제국 중심의 범슬라브주의는 수축했으며, 불가리아 내부에 친독 성향의 세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러시아의 발칸 전략은 패배했음이 확실히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독일의 3B 정책에 진전이 생겼다. 그 일환으로 독일에서 오스만 제국까지의 철도망을 개선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러시아도 약간의 이익은 있었다. 여전히 같은 슬라브 민족으로 우호적인 불가리아를 통해 에게해로 진출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큰 지정학적 세력권 피해를 보상할 수는 없었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