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총서기
1대
1949 ~ 1953
2대
1953 ~ 1960
3대
1960 ~ 1974
4대
1974 ~ 1990
5대
1990 ~ 1998
모택동 팽덕회 주은래 등소평 조자양
6대
1998 ~ 2006
7대
2006 ~ 2010
8대
2010 ~ 2016
9대
2016 ~
강택민 호금도 후택상 온가보
범례
공산당 민입회 사회당 헌일당 태평운
趙紫陽
조자양, 자오쯔양
조자양, 1990
제 5대 총서기
전임
등소평 (4대)
후임
강택민 (6대)
근무기간
1989년 ~ 1997년
민주입헌회 서기
전임
초대
후임
유경시 (2대)
근무기간
1989년 ~ 1997년
의정의원
지역구
광주 특별행정구 15구
정당
중국 공산당 -> 민주입헌회
근무기간
1974년 ~ 1997년
신상 정보
출생
1919년 10월 17일, 중화민국 화현
사망
2006년 1월 9일, 중국 북경 (87세)
종교
무교 (마르크스주의자)
정당
중국 공산당 (1932 ~ 1989)
민주입헌회 (1989 ~ 2006)

조자양(趙紫陽), 병음으로 자오쯔양중화인민공화국의 제 5대 총서기이자, 중국의 사회주의 정치인, 민주주의 운동가, 의정의원 그리고 민주입헌회의 창립자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등소평이 서기직을 사임하자, 공산당을 탈당해 중도좌파 정당인 민주입헌회를 창당했다. 민주입헌회는 자유 선거에서 승리했고 조자양은 총서리로 집권하였다. 그는 주은래 중국 민주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2018년 중국 CCTV 조사 결과, 조자양은 손문, 모택동, 공자, 강희제, 홍수전 다음으로 중국인이 존경하는 인물로 조사되었다.

정치적 입장

수정 마르크스주의

조자양은 수정 마르크스주의자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정통 좌파에 있어서 수정주의자, 경제 자유주의자로 비판받기는 하지만 그의 경제정책으로 해외 투자가 활발해져 중국은 등소평 이후 제 2의 경제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대학 강연에서도 독일같은 무한 경쟁 자본주의야말로 인민의 주권을 해치며, 빈부격차를 늘리는 지름길이라고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전 총리인 마거릿 대처를 비판하며 그의 행보는 오직 친 기업, 친 상류층, 친 독일적인 반동파라고 했다. 민주입헌회에 참여하려고 한 신자유주의 계열 인사들의 입당을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자

그는 사회주의자이며 강력한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인민의 자발적 정치참여만이 강력한 사회주의를 만들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었으며, 이에 따라서 인본주의진보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자양은 기술적 진보와 사상적 진보 등 공산당 주류와는 다른 과학적, 사회적 분야에서의 진보를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입헌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즉 총서기 때에 조자양은 중국 과학기술 연구에 크게 투자하였다. 또한 특기점으로 조자양은 보수적인 중국 사회에서 여성주의와 LGBT 인권에 동정적이었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민주입헌회는 조자양의 영향을 받아 현재도 성 소수자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있다.

평가

긍정적 평가

그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은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발전하였다. 중국 헌행일치당같이 탄압을 받던 보수 정당의 정치 참여를 허가하였으며, 종교적 자유 또한 허용하여 시민적 자유를 크게 증진시켰다. 이로 인해 중국은 프랑스보다도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국가가 될수 있었다. 실제 2018년 CCTV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자양을 존경한다는 시민들의 이유로 80% 이상이 민주주의 증진을 꼽았다.

민주주의 증진 뿐 아니라, 조자양 시절에는 성 소수자와 종교 소수자, 소수민족 등 소수자의 인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조자양은 티베트 독립주의자들과 타협하여 최대한 많은 권리를 티베트에 부여했으며, 만주와 신장, 서벵골의 민족 자치를 허가하기도 했다. 성적 인권 또한 조자양때 크게 늘어나서 동성애도 부분적으로 허용되고, 여성 의원들이 의정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부정적 평가

조자양은 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는 정치인이다. 그의 사회민주주의적 행보는 중국을 더욱 크게 양극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중국 공산당은 등소평주의 한계를 직감하고 강택민과 호금도 시절 복지 지출을 최대 30%까지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조자양은 반대로 기업과 타협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조자양 정권때 중국의 지니계수는 등소평 이후로 1.5배 가량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