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2세기말 북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거란족이 세운 북중국의 다크호스왕조.

중국대륙이 위나라 , 오나라 , 촉나라로 나뉘어 각축을 벌이던 시절 위나라와 국경을 마주하던 거란족의 족장 타르칸이 중국의 혼란을 틈타 하북의 유주를 함락시키고 북평을 수도로 하여 주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기주를 함락시키고, 촉나라 , 오나라를 견제해야하는 위나라와 휴전하여 유주기주를 할양받고 매년 조공을 받기 시작했다.

중국대륙이 위나라를 대신해서 세워진 진나라에의해 통일되고, 진나라에 갔던 주나라의 외교사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그것을 핑계로 서쪽의 병주를 함락시킨뒤 한쪽으로는 황하를 건너 낙양의 첫 관문인 하내(河內)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뒤, 군사적우위를 앞세워 진나라와 다시 화친을 맺고 진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진나라가 내부의 권력투쟁과 각지방의 할거로 혼란스러운틈을 타서 주나라는 2대황제 슈퀴르가 직접 친정하여 낙양을 단번에 함락,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여러지방을 병합하여 양자강이북의 북중국일대를 모두 장악, 강대국으로 성장하였고 뒤이어 등장한 여러 북방민족들의 국가들을 하나둘씩 정복하여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주나라
AD.2XX년AD. 5XX년
수도 북평
정치
공용어 거란어 한어(漢語) 알타이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황제 1대 태조 타르칸
2대 태종 슈퀴르
3대 문종 테무르
4대 경종 구르칸
5대 무종 카사르
6대 영종 카르타크
7대 덕종 후르타이 등등...
기타
국교 불교 거란무속신앙 유교

민족구성은 거란족 한족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어있다.


역사

초기

주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초기에는 중국의 북방일대인 내몽골의 대흥안령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부족으로써 주기적으로 흉노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거란족은 위나라의 용병부대가 되어 위나라의 힘을 빌어 흉노족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고 족장 타르칸은 위나라로부터 거란왕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점점 힘을 기른 거란족은 흉노족을 우랄산맥으로 몰아내고 선비족을 정벌한뒤 몽골고원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요하를 사이에두고 국경을 마주하는 위나라와 교역을하였다.

그런데 거란족의 상인들이 위나라의 변경인 양평에서 그곳 태수에게 피살된것을 계기로 거란족은 대군을 몰아 양평을 함락시키고 뒤이어 북평까지 함락시킴으로써 유주일대를 모두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서 군사를 둘로 나누어서 장군 카자크차하르가 기주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위나라는 여러 논박끝에 대도독 사마의를 사신으로 보내어 거란족과 휴전하여 휴전의 조건으로 유주와 기주를 할지하고 매년 거란에 조공을 바치는 굴욕을 맛보게되었고, 타르칸은 북평을 수도로하고 주나라를 세운뒤 1대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가 된 타르칸은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한족백성들과 거란족간의 혼인을 장려하였으며 유주전투때 포로로잡혔던 위나라 포로들과, 그곳에 거주하는 고구려출신 포로들을 공평하게 등용하여 농업과 공업을 발달시켰으며 이것으로 거란족의 주나라는 위나라와 고구려출신 포로들을통해 병력을 늘리고 기술자들을 통해서 각종 공성병기를 사용할수있게 되었으며, 농업의 발달로 거란인들도 농사를 지을수 있게 되어 세금을 걷어 나라의 경제가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주나라는 이제 삼국을 위협할수도있는 다크호스로 서서히 급부상해가고있었다.

이렇게 하북일대와 몽골고원일대를 제압한 주나라는 서역으로 진출하여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의 국가들을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았다.

주나라 2대황제 슈퀴르제위시절, 위나라에서 사마의가 반란을 일으켜 반대세력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반 사마씨 인물들이 대거 주나라로 망명하여 위나라의 모든정보를 제공하였다.

사마의는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고, 사마의가 죽은뒤 그 아들들인 사마사 , 사마소 형제가 위나라의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대항했던 황제를 살해했고, 주나라황제 슈퀴르는 이것을 위나라를 침공할 명분으로 여긴뒤 우선 사신을 보내어 위나라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위나라가 내분으로 흔들리고 위나라를 대신하여 진나라가 세워지고 중국대륙은 284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때 오나라의 유민들이 바닷길로 주나라에 망명을 왔는데, 슈퀴르는 오나라 망명객들을 대거 등용하여 그들을 통해 선박건조와 항해술을 익히게되고 유목민족인 주나라도 드디어 수군을 보유하게된다.

진나라는 초기에 주나라와 화친하는데, 그 화친도 주나라사신이 낙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것을 계기로 깨지고 슈퀴르는 군사를 둘로나누어 2군은 서쪽의 병주를 함락시키고 1군은 슈퀴르가 직접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낙양으로 가는 첫 관문인 하내(河內)를 공격한다.

그러나 진나라의 용장 문앙의 유인책으로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슈퀴르 본인은 화살에 부상을 입고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함곡관으로 일시 퇴각했다가 문앙이 모함을 받아 사형을 받은것을 계기로 재차 하내를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낙양의 턱밑에 이르렀다. 진나라는 결국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황자를 인질로 보내는조건으로 화친하게된다.

굴욕적인 평화를 얻은 진나라도 삼국통일의 주역인 초대황제 사마염이 죽고 태자사마충이 황제로 즉위한뒤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게된다. 사마충은 백치황제여서 국정운영에는 아예 문외한이었다. 결국 낙양은 권력을 차지하기위한 다툼이 치열해지고 각 지방은 다시 군웅할거를 하게된다.

그것을 기회로 슈퀴르는 다시 친히 군사를 몰아 낙양을 함락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여러 지방의 군웅세력들도 모두 정벌, 북중국일대를 완전히 정복하게된다. 그리고 진나라의 살아남은 황족들과 대신들은 강남으로 피신하여 나라를 다시세우게되고 양자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대치하게된다.

중기

주나라의 정복군주 슈퀴르가 죽고 아들 테무르가 3대 황제에 즉위했다. 그 무렵 북방에서는 거란의 중원정벌의 영향으로 모용선비의 군주 모용황이 동북지방에서 연나라를 세웠고, 우랄산맥으로 쫓겨났던 흉노족이 유연의 영도아래 몽골고원으로 다시 진출하여 한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갈족의 추장 석륵도 이에 질세라 조나라를 세웠으며 익주에서는 티벳계 유목민족인 강족이 촉나라를 세웠으며 청해일대에서는 저족의 추장 부견이 서진을 세워 북방에 혼란이 일어났다.

연나라의 황제 모용황은 직접 군사를 몰아 고구려의 요동을 공격했고, 수세에 몰린 고구려는 테무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나라에서는 카자크가 7만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서 모용황과 담판을 지어 모용황의 연나라군을 요동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테무르는 연나라와 화친하였다.

주나라와 연나라의 화친은 연나라의 모용황이 죽을때까지 계속되고 모용황이 죽은뒤, 모용황의 아우이자 권신인 모용평이 조카인 모용각을 모함하여 변방으로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라 전횡을 일삼았다. 테무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직접 군사를 몰아 연나라를 공격하여 연나라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고 수도까지 함락시켜 연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모용평을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에서 참수되어 목은 테무르에게 보내졌다.

테무르는 다시 서쪽으로 진군하여 익주의 촉나라를 멸망시켰고, 국경을 넘어온 부견의 10만 대군은 단 3만의 군사로 노수에서 격파하였다. 그무렵 몽골고원일대에서는 조나라의 석륵이 흉노의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테무르의 치세는 그야말로 주나라의 황금기였다. 삼한의 백제에서도 고구려를 막기위해 주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하국을 자칭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견제하였으며 수시로 양자강을 넘어 공격해오는 진나라군대도 막아내었다.

그렇게 영토를 넓힌 테무르는 역사상 최초의 고속도로인 직도(直道)공사를 시행하게되었다. 이유는 수도인 북평에서 전시에 병력을 이동하려면 몇일전부터 병력과 물자를 인근 전초기지에 배치해야 했는데, 그런 번거로움을 덜기위해 북평을 시작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로 연결되는 직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직도 공사는 테무르가 죽고 그 아우인 구르칸이 4대황제에 즉위하면서 모두 중단된다. 구르칸은 황제에 즉위한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의 평생 숙원이었던 천하통일을위해 남정(南征)을 시행하였으나 강릉성에서 진나라군과 대치중에 악천후로 별 소득없이 철군하기에 이른다.

그무렵 서쪽에서는 연나라 황족출신이자 부견의 장군이었던 모용수가 서쪽의 신장일대에서 독립하여 우루무치를 수도로 후연을 건국, 초대황제에 오른다.

모용수가 세운 후연은 서쪽의 군소 부족들을 모두 평정하였으며 석륵 사후 내분으로 혼란스러워진 조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서진까지 멸망시켰다. 이제 중국대륙과 북방일대의 판도는 후연 , 주나라 , 진나라로 삼분되었다.

후기

후연에서도 대도독이자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의 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을 일으킨 모용희는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에 보다못한 고구려계 이민자인 장군모용운풍발을 비롯한 뜻있는 청년장교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모용희를 축출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 후로도 후연은 황제들이 칼부림끝에 자리바꿈을 하게되었고 구르칸의 뒤를이어 즉위한 5대황제 카사르는 친정하여 후연을 멸망시켰다. 그 무렵 남조에서도 수많은 내전으로인해 정권이 수차례 교체되는 혼란을 겪게되는데, 혼란끝에 군부의 최고실력자인 소연이 부하인 진경지의 도움으로 거병하여 내전을 진압하고 양나라를 세운다.

양나라는 북벌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진경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주나라가 차지한 형주를 탈환하고 기세를 몰아 수춘과 낙양과 장안까지 모두 점령한다. 그러자 주변에 주나라의 여러 성들이 모두 양나라에 항복하게되고, 설상가상으로 북방의 흉노족 , 돌궐족 , 설연타 등등 이민족이 국경을 위협하게되자 카사르는 황하이남일대를 모두 양나라에 할양하는조건으로 화친을 하게된다.

카사르황제의 치세동안에는 아직은 국력이 약하지않아서 북방민족들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그리고 양나라황제 소연과 양나라군대의 총사령관 진경지의 사후 내분으로 혼란스러워진 양나라의 후방을 남쪽의 월나라가 공격하게되고 주나라는 월나라와 함께 남북에서 양나라를 협공하여 황하이남일대를 모두 탈환하고 양자강을 경계로 월나라와 주나라는 서로 마주하게된다.

카사르 사후, 주나라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있었다. 황위쟁탈전과 각종 내전과 관리들의 잦은 수탈, 그리고 북방민족들의 침략으로 주나라는 서서히 기울어져가고 7대황제 후르타이의 치세에는 과거 주나라에 패한뒤 시베리아로 밀려났던 우문선비가 주나라를 침략하여 북평이 함락되고 주나라 조정은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우문선비의 족장 우문태는 북평을 수도로 위나라를 세우고 1대황제로 등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 양충독고신이다.

주나라는 점점 팽창해지는 위나라와 여러 북방민족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북중국일대는 위나라에의해 서서히 점령당하게되고 결국 AD.5XX년경, 양충의 아들이자 위나라 군부의 총사령관인 양견에 의해 중국대륙의 다크호스였던 강대국 주나라는 멸망하고 양견이 수나라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