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중화민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이다.

역사

신해혁명과 건국

북양정부 시절


중화민국 북양정부 정부수반
북양정부 국무총리
1대 2대 3대 대행 4대
탕샤오이
루정샹
돤치루이
슝시링
쑨바오치
대행
위안스카이
정사당국무경 (중화제국)
5대 직무 폐지 6대 7대
쉬스창
홍헌제제 쉬스창
돤치루이
북양정부 국무총리
8대 대행 대행 9대 10대
돤치루이
우팅팡
장차오쫑
리진시
돤치루이
대행 11대 12대 대행 13대
왕다셰
왕스젠
돤치루이
찬넝쉰
대행 대행 14대 대행 15대
공신잔
진윈펑
사전빙
진윈펑
대행 16대 대행 17대 18대
옌후이칭
량스이
저우지치
옌후이칭
탕샤오이
19대 20대 대행 21대 대행
왕총후이
왕다셰
왕정팅
장샤오정
가오링웨이
22대 대행 23대 대행 직무 폐지
쑨바오치
구웨이쥔
옌후이칭
황푸

24대 25대 대행 대행 대행
쉬스잉
자더야오
후웨이더
옌후이칭
두시구이
대행 26대 27대
구웨이쥔
판푸

쑨원의 북벌

중일전쟁

국공양당체제의 확립과 쑨원의 사망

1945년 8월 30일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중화민국도 승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쑨원은 소련군이 한반도와 혼슈섬 중부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화민국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는 것을 우려해 미국과 함께 소련에게 일본 열도의 한시적인 분할통치를 제안했다. 이는 소련군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어느정도 제약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쑨원을 어느정도 신뢰하고 있었던 스탈린과 미국 모두의 찬성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분할통치가 시작되었다.
한편 쑨원은 중국 내에서 일본군 패잔병 문제와 전후처리가 마무리 되는 대로 국민대회와 입법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표, 신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에게 당부했다.
1947년 5월 17일, 국민대회 선거가 이루어졌다. 국민당이 630석중 424석을 차지하며 제1당이 되었고 저우언라이, 마오쩌둥등 유력 공산당 정치인들도 국민당 당적으로 의원이 되었다. 5월 23일, 쑨원이 594표를 득표하며 중화민국 총통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쑨원은 새로 구성된 입법원의 동의를 얻어 저우언라이를 행정원장에 임명했다. 당초 행정원장에는 왕징웨이 또는 장제스가 유력하였으나 본인들이 고사했다.
1948년에 들어서며 쑨원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국민당 내 우파 세력은 공산당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만류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커지고 있는 공산당의 영향력은 그 둘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어찌되었든 철저한 국공합작을 주장한 ‘국부’ 쑨원이 존재하는 한 공산당든 국민당이든 서로를 몰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중일전쟁이 일단락되고 쑨원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국공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1948년 공산당 당대회에서 저우언라이가 총서기에 추대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원장으로서 국공간의 갈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국공간의 내분이 벌어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천두슈등 원로 공산당 인사와 장궈타오, 취추바이, 리리싼과 국민당 측의 우파, 중도파 인사들이 모여 총통, 부총통직과 행정원장, 부행정원장직은 각각 다른 정파 인물이 맡고 각 부서의 장에도 다양한 정파의 인물을 임명하는 일종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대다수의 공산당 인사와 국민당 인사들은 이에 동의했으나 일부 국민당 우파 세력은 여전히 공산당 세력과의 타협을 원치 않았다.
1949년 2월 17일, 쑨원이 눈을 감았다. 마지막 까지도 그의 유훈은 ‘국공합작을 통한 중화 인민의 평안, 반분열’이었다. 차기 총통에는 부총통이었던 탄옌카이가, 부총통에는 천두슈가 선출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원장직을 유지했고 부행정원장에는 탕성즈가 선출되었다. 권력기반을 잃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공직도 맡지못한 장제스는 미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저우언라이의 타협안이 유지되면서 국공갈등은 어느정도 진정되었고 쑨원의 유훈인 국공의 합작은 연립정부의 형태로 어느정도 지켜지는 듯 했다.

장제스의 철권통치

1950년대에 들어서며 저우언라이에 대한 군권 장악 시도와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국민당의 불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의 사회주의 정책은 국민당 우파, 중도파들에게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들었으며 더불어 반체제적이라는 급진 우파 인사들의 힐난까지 들어야 했다.
점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자 1953년 초 저우언라이는 행정원장직을 사임했고 그 자리를 국민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쑹자오런이 대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의 저우언라이 비판은 해외로 외유를 떠났던 장제스 파벌의 공작이었다. 저우의 사회주의 정책은 반체제적인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장제스는 이를 이용해 저우가 국민당 좌파와 손을 잡아 중화민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바꾸려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중도파의 불안감을 고조시켰고 저우를 비판해 실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1958년, 장제스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명령한다.

베이핑 혁명과 중국의 민주화

1976년 7월 16일, 중화민국을 23년동안 통치한 장제스가 죽었다. 장제스의 국장이 끝난 후인 8월 1일, 국민대회 의석의 8할을 차지하고 있던 국민당은 차기 총통으로 옌자간을 선출했고 이에 반대하는 군발적인 소규모 시위가 난징, 베이핑, 상하이 일부 대학가에서 일어났으나 금방 해산되었다.
1976년 8월 3일, 마오쩌둥도 베이핑에서 사망했다. 이에 8월 5일 마오쩌둥의 장례식에서 일부 사회주의 성향 대학생들이 국민정부의 타도와 총통 직선제, 다당제 실시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고 베이핑 공안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3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50명의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중국 전역에서 사망한 학생들을 추모하고 국민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쑨원과 저우언라이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에 나섰으며 ‘삼민주의, 총통직선, 반장반옌(죽은 장제스와 현 총통 옌자간을 반대한다는 뜻)’을 외쳤다.
8월 17일, 베이핑 국립대학 학생 4천500여명은 천안문 광장 쑨원 동상 앞에 모여 쑨원의 삼민주의 국가, 정의로운 중화민국이 위협받아 왔다는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쑨원의 초상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베이핑 공안국은 시위대를 향해 세차례 해산하라고 경고한 뒤 최루탄을 발포했다. 시위대측은 이 시위에서 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8월 23일, 총통부는 베이핑 지역에 3개월간 한시적인 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국영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서 중화민국을 전복하려는 사회주의 세력이 베이핑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고 보도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그 시점에서 거의 없었다.
8월 27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등 서방국가 수반은 중국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려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특히 미국은 모든 경제원조, 협력 중단을 포함하는 총통 성명을, 의회에서는 중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계속되는 대내외적 압박에 국민대회는 9월 19일, 계엄을 철회하는 안을 통과시키고 옌자간을 탄핵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국민당이 옌자간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다며 국민대회의원 재선거와 총통 직선제 개헌, 다당제 실시와 숙청된 공산당 인물의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해서 벌였다.
결국 10월 3일, 총통 대행 천청과 국민대회는 국민대회의원 재선거 실시를 제외한 시위대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시위대중 일부 인원이 사망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10월 17일, 국민대회와 입법원은 왕밍,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취추바이, 린뱌오, 펑더화이, 류샤오치등 숙청된 중국 공산당 인물을 복권시키고 공산당의 활동 재개를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10월 30일, 국민대회는 입법원에서 제출한 다당제 실시, 총통 직선제가 포함된 개헌안을 가결시켰고 총통 선거를 12월 8일에 실시한다고 밝혔다.
11월 22일, 생존한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화궈펑 3인 중심으로 재건된 중국 공산당은 당대회를 개최해 주더를 총통 후보, 당 서기장과 행정원장 후보에 저우언라이를 각각 추대했다. 반면에 11월 13일 국민당에서는 옌자간을 그대로 차기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12월 8일, 총통 선거에서 옌자간이 60.4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77년 1월 1일 취임식에서 옌자간은 소요사태의 책임을 지기 위해 국민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는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1977년 1월 13일, 옌자간 총통은 저우언라이를 행정원장에 지명했고 부총통 겸 국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천청과 저우언라이가 회담하면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중국 정치 일선에 나왔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손을 잡는 동시에 정치적 라이벌 관계로 돌아왔다. 이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망명과 유폐기간동안 장제스에게 쌓인게 많았는지 ‘인민을 탄압하던 폭군이 드디어 사라졌다. 폭군 밑에서 부역한 자들도 처단해야 마땅하지만 중국 인민이 다시 하나로 뭉쳐야 할때이므로 그만둔다.’라고 말하며 그답지 않게 다소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며 장제스를 비판했다.

정권교체와 덩샤오핑 시대

1979년, 저우언라이의 행보에 대한 지지속에 국민대회의원와 입법위원 총선거에서 공산당이 크게 약진하면서 국민당은 간신히 1당 지위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공산당 총통 후보 화궈펑이 당선되며 중화민국 최초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저우언라이가 행정원장에서 물러날때까지 옌자간과 저우언라이의 국공연립정권은 계속되었다. 화궈펑은 총통에 당선되자 국민당이 1당인 현실을 인정하고 저우언라이가 추천한 덩샤오핑을 행정원장에 지명했다. 덩샤오핑은 원래 마오쩌둥 계열의 인물이었으나 마오의 몰락 이후 특정 정파에 휩쓸리지 않는 무당파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던 터라 국민당 측의 불만도 딱히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
그러나 실상은 화궈펑이 덩샤오핑이나 저우언라이에 비해서는 한세대 젊었던 터라 젊은 인물을 요구하는 공산당 내부의 목소리에 부응해 총통 후보로 지명된 것뿐 모든 권력을 휘두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원로격인 덩샤오핑을 행정원장으로 지명한 것. 이후 화궈펑 집권 8년간 실질적인 행정권력도 화궈펑보다는 덩샤오핑이 휘두르게 된다. 이런 상황은 권력욕이 강한 화궈펑이 불만을 품게 만들었고 80년대 내내 공산당 원로와 갈등을 빚다 동유럽 혁명과 맞물려 공산당의 본격적 내분을 일으켰다. 결국 1989년, 신임을 잃은 공산당은 총통직을 잃고 말지만 덩샤오핑에 대한 지지가 국민들 사이에서 강했기에 1991년까지 덩의 행정원장직은 유지되었다.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 중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제스의 폭정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농업 정책을 제외하고 경제발전 계획의 방향성이 옳았음을 인정하였으며 전임 총통인 옌자간을 재정경제부장에 임명해 장제스의 경제개발노선을 따라가는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를 부행정원장 겸 외교부장으로 입각시켜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를 놀라게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이런 상황이 탐탁치 않았고 덩을 반프롤레타리아, 친유산계급으로 몰아세우며 1982년 중국 공산당 당대회를 계기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덩을 실각시키려 하였으나 저우언라이와 국민당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1983년 6월 29일, 국민대회와 입법위원 선거에서 공산당이 압승을 거둔 직후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다. 초창기 리더와 마오 이후 공산당을 이끌던 저우언라이가 죽자 공산당 내부는 급속도로 혼란해졌지만 화궈펑은 이를 이용해 덩을 몰아내고 자신이 당권을 잡기위해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4년 공산당 대회에서 화궈펑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대다수의 당원들은 덩샤오핑을 지지했고 덩의 직계였던 후야오방, 자오쯔양등 기존 주류세력은 당 중앙위원으로 진출, 장쩌민등 덩이 발굴한 신진세력 또한 중앙위원으로 선거되면서 그가 건진것은 85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 후보에 추대된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미국이나 서방의 지원을 통한 경제발전에는 한계가 있다며 적극적인 자력갱생과 사회주의에 기반한 토지, 농촌개혁을 추진했다. 그가 가장 먼저 착수 한것은 농촌개혁이었다. 우선 그는 장제스 시절 폐지된 쌀과 밀등 농산물 수매, 정부비축농산물 제도를 부활시켜 농민의 이윤을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지역별 자율 농업정책을 펼침으로서 보다 효율적인 농산물 생산을 추진하였고 1984년에는 잉여농산물이 생길 정도로 중국의 식량자급률이 큰 폭으로 상승하였다.
두번째 그의 공업부흥정책은 장제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기반이 없어 미국과 서방국가에 의존하던 중공업에 무리하게 치중한 장제스와는 달리 경공업등 소규모 공업발전 또한 추진했고 자력 기술 개발을 위해 교육의 보편화, 인재양성을 외치며 1982년 전국 각지에 초등, 중등교육기관을 증설하고 10년간 단계적으로 무상, 의무화 하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우수 인재를 정부의 지원을 통해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으로의 유학을 도왔다.
그리고 또한 금융개방을 추진했다.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설립이 그 예시.
외교적인 성과로는 영국으로부터 홍콩의 반환을 약속받았다는 것이 있다. 반대파 탄압, 장제스 1인 독재등으로 한걸음 멀어졌던 서방국과의 외교관계도 개선되었다.
1986년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롄잔이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유력한 차기 총통 후보로 급부상했다. 반면에 공산당은 화궈펑파의 방해로 당대회가 한차례 연기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당대회는 두차례 연기 끝에 국민대회와 입법원 선거 넉달 전에 덩샤오핑이 당주석에 추대되면서 권력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1987년, 공산당은 1당 지위를 국민당에게 다시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혼란속에서도 국민당의 과반 차지는 저지했고 일부 국민당의원들도 덩샤오핑을 지지해 정권은 이어갈 수 있게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1991년, 소련 붕괴와 덩샤오핑 퇴임 이후 공산당은 급격한 내분을 겪었다. 아예 친미, 중도 우파로 전향한 민주당파가 일부 탈국민당 세력과 연합하여 빠져나갔고 그 직후 당 대회에서 당 노선에 대한 수정을 거치면서 정통 공산주의 진영을 자처하는 인민파가 공산당을 수정주의자라고 공격하며 탈당했다. 이후 중도 좌파, 온건주의를 표방한 사회당파가 또다시 공산당과 결별하면서 공산당계 정당들은 별볼일 없는 소수 세력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후계자였던 후야오방이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정권을 창출해내면서 공산당이 표면적으로나마 정권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1995년 후야오방 퇴임 후 국민당 독주체제가 시작되었다. 롄잔이 차기 총통으로 당선되었고 원자바오를 행정원장으로 임명하며 공산당에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원자바오 집권 이후 현대 중국이 사실상 완성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을 통해 급격한 양적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고 소수 민족 탄압 같은 반인권적 정책도 대부분 철폐되었다. 성 정부와 성 의회, 자치성이 설치되어 지방자치가 실현되었으며 선거제도 개혁 또한 이뤄졌다.
티베트인 학살이나 홍콩-마카오 침공 같은 사건에 대한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꾸려져 대규모 조사, 배상이 이뤄졌다.

현재

2020년 1월 5일, 개헌안이 발표되었다.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국민대회가 부활하여 양원제 의회가 되었으며 헌법재판원이 사라져 사법원으로 그 기능이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