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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5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파일:창경궁1.jpg
한성대학교병원에서 본 창경궁의 전경.
파일:명정전.jpg
창경궁 명정전.
파일:창경궁2.jpg
창경궁 전역의 모습.

昌慶宮 / Changgyeonggung(Palace)

개요

대한제국의 궁궐. 조선 시대에 지어진 5대 궁궐 중 하나이다. 한성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로 불리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궁궐 역할을 했다.

역사

조선

1418년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건립 당시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의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으로 지었다.

태종 사후에 한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제9대 성종이 세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생모이자 대비인 소혜왕후, 제8대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1483~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했고,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 으로 고쳐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소실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몽진 후 한양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민중들에 의해 방화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해군 7년 때 중건되었다. 조선후기에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 비해 쓰임새가 대폭적으로 커지게 되었고 여러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피해가 큰 창덕궁 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제19대 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제21대 영조 때는 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서 요절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제22대 정조가 1800년 6월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대한제국

순종효황제가 많이 찾았으며, 다른 황제들은 창경궁을 잘 찾지 않았다. 에마뉘엘 제국 식민 시기에는 에마뉘엘 황제 오펠리 8세가 몰수하여 별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황실 종친이 생활하고 있는 내조와 같은 내금지(內禁地)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구가[1] 개방되어 있다.

금상여제 이주혜는 즉위 이후 가끔 찾기도 하는 듯.

주요 건축

궁문

외조

정전 권역

편전 권역

내조 (침전 권역)

기타 건축

각주

  1. 과거 신하들이 업무를 보던 곳. 이러한 전각들의 기능은 정부한성청사, 정부세종청사, 정부평양청사 등으로 옮겨갔으므로 이제는 아무런 기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