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의 변 (서태평양 연대기)

개요

천보의 변(天保之變)은 1437년 북원이 장성 이남을 침공, 회수 이북을 점령하고 명을 회남으로 밀어낸 사건이다. 이 때가 명 제4대 황제인 천보제 시기(천보 15년)였으므로 천보의 변이라 부른다. 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이른바 한족 3대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이후 한족은 두 번 다시 회북을 회복하지 못한 채 현대에 이르고 있다.

발단

1368년, 원 제11대 황제인 토곤 테무르 카안이 명군의 북진으로부터 대도 사수를 포기하고 상도로 이어함으로써 명의 북벌은 완수되었고 몽골은 장성 이북에서 북원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1388년 쿠빌라이 칸의 직계인 우스칼 카안이 명의 침공으로부터 도주하던 중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게 사망하고 예수데르가 조리그투 카안으로 즉위하면서 쿠빌라이가 선포한 대원 황제 지위를 폐지하였으나, 이와는 별개로 몽골 대칸의 권위와 약탈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호시탐탐 관내진출을 노렸고 이에 명은 영락제 즉위 이후 5차에 걸친 막북친정으로 대응했다.

정난의 변과 이에 이은 영락년간은 명실상부한 명의 최전성기였으나, 막북친정, 정화의 원정, 교지정벌, 모굴리스탄 칸국 원정 등 지속적인 대외사업은 명의 재정을 상당히 소진시켰고, 태종 영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천보제 주고후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심각한 상태로 몰고 갔다. 원래 영락제의 차자였던 그는 형인 연왕세자 주고후가 정난의 변 당시 금릉(남경)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다가 조정에 의해 주살당하자[1] 정난 이후 조카인 주고치의 장자 주첨기를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어 황위에 오른 것으로, 무용이 뛰어나 정난의 변 당시 많은 군공을 세웠으나 성정이 난폭하고 교만하다는 이유로 태자 책봉 당시에도 조정에서 의견이 엇갈렸을 정도였다. 그 포악한 성정에 정통성 문제가 겹치자 즉위하자마자 신료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는데, 우선 영락 말엽에 주첨기의 황태손 책봉을 밀었던 해진(解縉)을 겨울철 눈속에서 얼어죽게 한 데 이어, 즉위 2년차인 1426년에는 하원길을 비롯한 640명을 처형하고 동복동생 조왕 주고수를 비롯한 2,200여명을 폐서인하고 유배보내거나 변방으로 쫓아내는 대규모 숙청을 벌였다. 그나마 그 막장 인성 속에서도 남들 눈치는 보였는지 주첨기와 그 일족들은 건문제 때 불타버린 남경 고궁에 유폐하는 선에서 그쳤으나, 이 때 수많은 무장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고, 황제 스스로 군사력의 약화와 반황제여론의 성장을 유도한 꼴이 되어버렸다.

천보제는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를 치유하기 위해서인지 무리한 대외원정과 토목사업에 계속해서 재정을 투입했다.[2] 그러나 이렇게 무자비한 숙청을 벌인 뒤인지라 막북이나 서역으로의 원정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3] 남방의 교지 반란은 천보 원년부터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황제로써 사치스러운 생활에 물든 치세 중반부터는 군사력 투사에도 흥미가 떨어졌는지 항해원정이나 토목공사에 돈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자연히 악화된 재정을 직격타로 맞은 농민들의 봉기가 빗발쳤고, 심지어 천보5년(1429년)에는 우량하이의 회주(現 간쑤성 후이닝현) 침공을 막지 못하면서 이후로 몽골이 지속적으로 변경을 침탈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명은 영락제 시기부터 몽골 지역을 제어하기 위해 서쪽의 오이라트를 지원하고 동서몽골을 분열시키는 전략을 취해왔으나, 영락 초기부터 시작된 모굴리스탄 원정의 여파로 이 지원의 규모가 차츰 커지더니, 아버지와 같이 몽골을 확실하게 제어할 능력이 없었던 천보제는 동몽골의 위협이 커지자 균형을 신경쓰지 않고 오이라트에 퍼주기 수준의 지원으로 일관하면서 결국 1332년 서몽골의 타이순 칸이 케룰렌강 이서 동몽골을 정복하고 사실상 몽골 전역을 통일하는데 이바지했다.

전개

교지 원정

이런 상황에서 천보제는 나름대로 황권을 되찾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바로 즉위초부터 골칫거리였던 교지의 레 응우엔롱(黎元龍) 세력에 대해 친정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는 태자 시절 주고후의 몇 안되는 성과라 할 만한 것이 바로 교지 원정이었기 때문에, 몽골이나 서역에 대해서는 현상유지만 어찌어찌 취한다 해도 교지 문제만은 직접 나서서 일단락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 내각태사 왕빈을 비롯한 조정과 군부의 강력한 반발로 친정은 취소되었으나, 50만의 대군이 움직이는 대원정에 천보제는 남경에 진수하여 전쟁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교지 원정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천보제는 시작부터 병력의 규모를 50만으로 못박았는데, 이유는 다른 거 없이 영락제가 1·2차 막북친정을 갈 당시 동원한 병력이 50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 영락친정도 3차부터는 30만 이하로 병력이 줄어들었고, 천보2년 막북친정 역시 25만 정도를 동원했던 것을 보면 이미 50만 원정군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천보제는 병력 편성의 지지부진함을 군부의 무능함으로 돌리며 태감 산수를 최고책임자로 임명했다. 황제의 명을 받들지 못하면 죽음뿐인 환관조직은 그야말로 전국을 달달 볶아 병력을 긁어모았고, 천보제는 1436년 8월 베이징에서 출정했다.

그러나 출정 후에도 문제는 계속되었다. 애초에 농번기에 끌려온 병력들이, 그것도 북쪽 끝 북경에 집결하여 다시 남쪽 끝 교지를 향해 진군하니 보급 소요는 한없이 늘어났고, 이 보급을 맡은 상인들이 대금을 높여 부르며 교섭이 난항을 겪을 때마다 병사들은 눈앞에 군량을 두고도 쫄쫄 굶어야 했다. 그나마 북경에서 남경까지의 잘 개발된 지역을 이동할 때에는 대금 문제만 해결되면 보급에 큰 문제는 없는 편이었으나, 양광지역을 거쳐 교지로 진입하자 30만이 넘는 대군이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보제는 그나마도 정예병력 20만은 따로 남직예에 주둔시키고 교지까지 보낸 것은 어린아이와 노인들까지 섞인 2선급 부대였다. 습한 남방에서 굶주리고 지친 원정군은 전염병까지 돌며 곳곳에서 월군의 공격에 무너졌다. 그 와중에 천보제는 대운하에 그야말로 수양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용주를 띄워 수천명의 인원을 동원한 뱃놀이를 즐기며 이동했고, 20만 대군에 북경 조정의 신료들과 그 가족, 궁인들까지 수십만 인원을 떠안고 황제가 거처할 궁의 수축에 동원된 남경과 남직예 또한 부담이 가중되면서 원성이 드높았다.

후정난(後靖難)

앞서 1435년 11월, 정이장군 왕통은 탕롱에 대한 공세를 시도했다가 전사자만 5만이 넘는 대패를 당하자 월과의 화친을 청하였으나, 천보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436년 3월 독단으로 후 레 왕조와 화의를 맺고 병력을 광서로 철수시킨 상태였다. 뒤늦게 이를 알고 분개한 천보제는 귀환한 왕통에게 사형을 명하고, 나아가 온 조정의 만류에도 10만이 넘는 귀환병력들을 노비로 삼도록 하는 한편 남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을 선포하였다. 남경으로 이동하던 도중 이 소식을 들은 귀환병들은 이판사판이 되자 남녕(南寧)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마침 천보제가 군사검열을 이유로 남경을 떠나 태호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틈을 타, 친정군 사령관을 떠안은 태감 산수는 학사 양영, 양무후 설록 등과 모의하여 조천궁에 유폐되어 있던 한왕 주첨기를 구출, 천보제 주변의 간신을 처단하고 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목으로 1436년 4월 20일 이른바 후정난(後靖難)을 선포하였다.

소주에서 주첨기의 반란 소식을 들은 천보제는 남경으로 귀환하려 하였으나, 남경 교외에 주둔하던 20만 원정군은 이미 정난군으로 변신하여 금의위를 이끌고 이동하던 천보제를 구용[4]에서 요격하였다. 대패한 천보제는 호위 수천기와 함께 간신히 장강을 건너 제남(濟南)으로 가려 했으나, 이미 남쪽에서 벌어진 반란 소식을 접한 제남의 군민들은 황제의 군세가 초라함을 확인한 후 산동도지휘 근영을 포박하고 문을 걸어잠근 채 황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천보제는 낙안(樂安)에서 직예, 산동의 병력 5만을 모아 손무호(孫武湖)를 끼고 진을 쳤으나, 양무후 설록이 이끄는 선봉 병력에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간신히 경사로 돌아왔다.

천보제의 구원요청과 몽골의 개입

사실 북경 조정이 통제하는 병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요동, 대녕, 만전 등 국경지방의 수비병력이었고, 북직예의 병력 상당수는 이미 교지 원정군으로 차출되어 있었던데다가 산동과 산서의 병력들은 정난군에 가담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었다. 급한대로 요동군 4만을 차출하여 북경 수비에 투입했으나 정난군은 선봉만 30만, 그 뒤에는 50만의 대군을 추가로 편성하여 북진하고 있었다.

이에 천보제는 최후의 카드로 몽골, 조선, 여진 등에 잇달아 구원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과 여진은 이미 몰락이 예견된 황제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5] 몽골의 실권자였던 오이라트의 토곤 역시 이제 막 몽골을 통일한 상황이라 개입할 여력이 없다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몸이 단 천보제는 날려서는 안 될 공수표를 꺼내고 말았다. 바로 섬서성의 섬서행도사 전역과 영하제위(寧夏諸衛), 연수진의 할양을 약속한 것이었다. 당연히 과거 석경당의 연운 16주 할양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이 결정에 태사 왕빈을 포함한 모두가 경악하며 말렸으나, 반란군이 들이닥친 후 건문제의 운명을 면할 길이 없음을 아는 천보제는[6] 우격다짐으로 이같은 친서를 토곤에게 보냈다.

그동안 애매하게 간을 보던 토곤은 장성 이남으로 진출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자 몽골은 물론 카자흐, 준가르 등을 통틀어 10만의 기병을 동원해 1437년 1월 연수진을 돌파하여 베이징에 이르렀고, 선무문 밖에서 설록의 병력 10만을 기습, 섬멸한 것을 시작으로 다섯번의 교전을 거쳐 총 30만에 달하는 정난군의 1진 병력을 모조리 궤주시켰다. 정난군 1진 병력은 교지원정군을 포함한 나름 정예병력이었으나, 기본적으로 북방이 아닌 남방 원정을 위해 마련된 병력이라 대기병전 훈련을 받지 못한 데다가 그동안 북경에서 남방으로, 다시 남방에서 북경으로 대륙을 가르며 종횡무진하는 와중에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월동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총지휘관이었던 설록이 첫 교전에서 전사하면서 남은 20만의 병력은 제대로 된 지휘체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부대 단위로 몰살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믿었던 정예병력을 모조리 상실한 실로 충격적인 결과에 남경의 정난군 진영은 당황하여 황하에서 진군을 멈췄고, 북경은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천보제는 또다시 딴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서북제진의 할양이 아까워진 것이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은 통일을 이루기는 했다지만 직접적으로 화북을 침공, 점령할 역량을 갖추지는 못한 채 주로 대동이나 선부 등의 요충지를 침범, 약탈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고, 천보제 자신이 보아온 옛 정난군의 몽골인 부대나 지금의 몽골군 모두 야전에서는 매우 강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공성능력은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몽골군을 한 번 장성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왕빈을 비롯한 조정 신료들 역시 서북제진 할양을 극력 반대하면서 기름을 부었다.

결단(?)을 내린 천보제는 토곤에게 재물을 보내면서 서북제진 할양을 물려보려 했으나, 명운을 걸고 출병한 토곤은 당연히 이를 단칼에 거절하며 오히려 남쪽으로 진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몽골군은 남통하(南通河)에 이르렀고, 이들이 이르는 곳마다 보급이란 명목으로 약탈이 자행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약탈을 막으려는 지방관이나 명군 지휘관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에 천보제는 더 이상 몽골군과의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강경한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려 했다.

후원 건국과 남명 정권 수립

1437년 3월, 천보제는 환관 후태(侯太)를 사신으로 보내 사과의 뜻을 전하며 토곤을 비롯한 몽골 장수들을 경사로 초대했다. 그러나 그동안 말을 바꾸며 신의를 깬 천보제가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저의를 모를 정도로 토곤과 몽골군은 어리석지 않았고, 이대로 몽골로 철수하느냐, 아니면 다시 한 번 명운을 걸고 도박을 벌이느냐의 갈림길에서 이들은 후자를 택했다. 소요성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토곤과 1천여명의 친위대는 일순간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금의위 군사들을 닥치는대로 베어넘기며 덕승문에 당도하는 데 성공했고, 한 번 성문이 열리자 그대로 10만의 몽골기병이 성내로 들이닥쳐 대살육이 벌어졌다. 천보제는 소요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지하통로로 달아나려 했으나, 소요성을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에게 붙잡혀 황족, 대신 및 환관 5천여명과 함께 응창으로 압송되었다.

1368년 서달이 대도를 함락한 이래, 68년만에 몽골군은 다시 북경을 장악했다. 토곤은 그 해 6월까지 회수 이북을 무인지경으로 휩쓸었고, 회북의 명군은 제남과 장안 등지에서 몽골에게 저항했으나 내부에서도 정난파와 반정난파가 대립하는 등 지리멸렬하면서 각개격파당했다. 당초 토곤은 화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이미 주고후의 삽질로 북경에는 고위관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데다가[7] 과거 금나라의 한족 괴뢰정권들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지적한 항장 근의(靳義)[8]의 말에 결국 포기했다. 마침내 1437년 9월 타이순 칸이 북경에 도착했고, 1438년 4월 스스로 타이시를 칭한 토곤이 타이순 칸을 대원황제로 옹립하면서 후원(後元)이 선포되었다.

회북에서 이렇게 숨가쁜 일정이 이어지는 동안, 남경에서 출발한 후정난군은 사실상 북경 진공의 목표가 좌절된 채 회수 일대의 방어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예 선발대는 북경 일대에서 모조리 소진되었고, 남은 병력은 숫자는 50만에 달했으나 대부분 후방인 남경 일대를 경비하던 병력과 막 징집해 급조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북진을 감행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남경은 영락 이후 사실상 버려져 황실과 조정이 거처할만한 건물이 남지 않았고, 남경 조정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천보제를 따라 남하했다가 북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부 관료들이 그대로 후정난군에 합류하여 급한 일들은 처리할 수 있었으나, 50만 대군으로 북진을 수행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후정난군 입장에서 천만다행이었던 점은,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있던 천보제의 황자들이 교지원정과 근황 과정에서 천보제를 따라 모두 북경에 모여있다가 사이좋게 몽골군에게 사로잡혀 압송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를 후원 측에서 자랑스럽게 선전하기까지 한 덕에, 이후 천보제의 황자나 자손을 자칭한 수많은 사기사건들은 대부분 큰 반향을 끼치지 못한 채 - 심지어 후원 측의 협조까지 받으며 - 처리되었을 정도였다.[9] 어쨌거나 천보제 계열의 황실이 사실상 멸망했음이 확인되자, 주첨기 역시 1438년 2월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선덕(宣德)으로 정하니 공식적으로 남명(南明)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1279년 남송의 멸망 이래 159년간 이어져온 중화 통일왕조 시대는 종식되고,[10] 이후 1726년 또 다른 회북왕조인 청이 강남 원정으로 남국(南國)을 멸망시킬 때까지 총 288년에 걸친 남북조시대가 열렸다.

결과와 영향

남명

한족은 영가의 난, 정강의 변에 이어 3번째로 회북을 상실하는 굴욕을 경험하였다. 그것도 태조 주원장과 재조(再趙) 태종 주체가 총력을 다해 밀어내고 사실상 멸망시킨 것으로 여겼던 몽골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주체의 아들인 천보제 주고후에 의해 재입관에 성공하여 북경을 함락시키고 회북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명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천보제가 아무리 국정을 엉망으로 돌보았다 해도 홍무-영락기에 걸쳐 쌓아올린 명의 막강한 국력은 하루아침에 북방민족에게 수도와 핵심지역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문약하다던 송조도 9대 167년간 통일국가를 유지했으니 그야말로 대망신이라 할 만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당대에나 지금이나 천보제의 어리석인 행보가 초래한 황당한 사건으로 인식되었고, 남명에서는 옛 금이나 원나라 사례를 들어 이들이 제대로 된 회북 통치가 불가능할테니 몇년간 허리띠 졸라매고 양병하면 북진할 수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들을 떠들어댔지만, 당장 국초부터 홍무(대숙청)-영락(정난의 변)-천보(천보의 변) 3연타를 맞으면서 박살난 관료조직과 행정체계를 제대로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남명 초대 황제인 선덕제 주첨기가 재위 1년만인 1439년에 사망하고 만11세의 어린 경태제가 즉위, 관료체계의 회복은 사실상 물건너간 채 환관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가 가속화된데다가,[11] 경태제 사후 계속해서 성인 황제의 단명과 어린 황제의 즉위가 반복되면서[12] 회북 회복은 고사하고 당장 국내 반란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5세기 말엽부터 백, 남, 촉 등의 독립과 대월 후 레 왕조의 주강 남안지역 북진을 허용하는 등 그나마 있던 회남 영토마저 갈갈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진이나 남송도 100년 이상 장강에서 주강 하구까지 확고하게 통치했던 것과 비교하면 어지간히 답이 없었고, 특히나 송대 이래 중원의 판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촉, 남이 이탈한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답 없는 남명도 후초를 거쳐 어쨌든 1720년 청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회남지역 최대 국가 지위를 무려 260년 이상 유지했다. 회북을 차지한 후원 역시 강남을 평정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 말이 몽골이지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칸도 아닌 오이라트의 타이시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좌우하는 상황은 남명에서 기대했던대로 후원의 회북 통치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특히 후원은 전원의 '관대했던' 강남 통치가 결국 주원장과 장사성 등 한족 군벌들의 발호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아 실로 혹독한 한족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여 멸망하는 그날까지 한족 봉기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농서의 하, 산동의 제 등이 연달아 독립하면서 중원의 지배권에서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초래했고, 이런 혼란상은 중원 왕조의 간섭을 약화시켜 한국에게 있어서도 조선의 북진이나 이어의 주호 정벌 등 단기적인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통일왕조의 조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동아시아 전체의 무역구조를 붕괴시키고 경제사정을 악화시켰으며 통제되지 않는 밀무역상과 이를 노린 해적, 마적들 간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도래했다. 그나마 명과의 관계가 좋지도 않았고 거리가 멀어 조공무역 의존도가 낮았던 월은 오히려 주강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면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류큐 역시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는 했지만 국가 규모상 남명-후초와의 조공무역으로 국가 재정을 유지할수는 있었다. 반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대중 교역의 파탄으로 인한 재정난과 지방 통제력 상실이 겉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결국 센고쿠시대가 도래했다.

한국

천보의 변은 한국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원명교체기 명의 발흥에 발맞추어 성리학 이념을 전면에 내세워 수립된 국가였으나, 명의 통일제국 체제 붕괴와 회북의 몽골 복귀는 그 조선의 개국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문제였고, 이에 조선이 택한 것은 고려가 끝내 이루지 못했던 북방 고토의 수복이었다. 명이 요동에 개입할 수 없게 되면서 조선은 4군 6진 개척을 통해 벼르고 벼르던 압록-두만강 국경선을 확립하는 한편 건주위에 대한 무력 정벌을 감행하는 등 활발한 북진 정책을 펼쳤고, 문종-신종(이홍위) 시기 철령이씨 가문 등 조선계 군벌에 대한 지원과 발해인, 여진족 회유를 거쳐 성종대에는 마침내 강북20군 (서태평양 연대기)으로 불리는 북방 영토를 확보하는 데 이르렀다.[13]

그러나 북진정책과 북방개척은 자연스럽게 조선의 재정부담을 가중시켰고, 하필이면 생산성이 낮은 요동 편입 직후 즉위한 의종(이융)대에 무리한 토목사업과 왕실의 사치가 이어지면서 국력에 심대한 타격을 불러왔다. 특히 완충지역이었던 요동의 편입 이후 격화된 후원과의 군사적 충돌과 16세기 왜구의 남부지방 침략이 양면으로 겹치면서 재정을 채워줄 무역활동을 방해했으며, 일각에서 논의된 재정 및 조세개혁 또한 지지부진하여 어렵게 확립한 요동 지배권에도 균열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방계승계를 통해 즉위한 하성주는 칭제를 감행, 대진(辰)제국을 선포하며 여진 등 북방에 대한 군사력 투사를 진행했으나, 정작 일본의 침공으로 15년 전쟁 (서태평양 연대기)이 발발하자 졸렬한 전쟁지도 끝에 강서군의 반란에 휩쓸려 원명교체기의 시류 속에 건국된 조선(진)의 역사는 그 명 중심 동아시아 질서의 파탄 속에서 막을 내렸다.

명-일 간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던 이어는 더욱 사정이 좋지 않아 재정난 속에서 몇 차례의 반란이 이어진 끝에 일본의 전면적인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조선 또한 일본의 침공으로 같은 운명을 걸을뻔했으나 태조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여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결국 이어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조선에 흡수되어 한국이 형성되었고, 조선이 상실한 요동에 건국된 후요는 건주의 성장을 막지 못해 후금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후금은 다시 청나라가 되어 조선반도와 이어, 대만, 류큐, 일본열도를 제외한 동아시아 전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하게 고수하려던 청의 정책은 화하족은 물론 동아시아 제 민족의 반발을 불러왔고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투와 결탁한 각국의 봉기와 독립으로 동아시아 중부의 통일기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기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자체적인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동아시아사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양녕공 개입 의혹

이 사건이 한국에 미친 영향뿐만 아니라 한국이 이 사건에 미친 영향도 놓칠 수 없는데, 바로 양녕공 이제(李褆)의 역할 문제이다.

중국 측 『명대실록』 및 『명사』와 한국 측 『조선왕조실록』 에서는 양녕공이 이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다소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선 조선에서는 양녕공이 국내에 있을때면 몰라도 국외에서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를 소상히 파악해서 기록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폐세자로 왕실 정통성에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눈에 불을 켜고 행적을 감시하려 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매일같이 자금성이니 소요성이니 불러들여 옆에 끼고 앉아있는데 고작 번국인 조선 관원 따위가 꼬치꼬치 캐묻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명 측 기록 역시 황제가 양녕공을 불러들인 기록이 일부 보이지만, 대체로 정사와는 관련 없는 사안들이었기 때문에 그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고 외국인이니 열전도 따로 내지 않았다.

우선 정사에 남아있는 기록만 보자면, 1418년 폐세자가 된 양녕공은 당초 경기도 광주에 유배 형식으로 안치되었는데, 7년 후인 1425년, 황제가 된 천보제는 자금성의 새 건물들에 현판을 써야 한다는 이유로 양녕공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양녕은 앞서 1407년에 북경을 방문하여 영락제를 알현한 바가 있었는데, 이 때 태자였던 14살 연상의 주고후를 만나 그 특유의 음주가무(...) 실력으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해져 귀국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당연히 선왕의 적장자인 이 인간 시한폭탄을 그냥 외국도 아닌 천조의 황제에게 보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으니 조야가 모두 반대했는데, 세종이 "마침 태종의 삼년상이 끝난 직후인데 선왕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냐"는 명분으로 이를 강행해버렸다.[14]

이후 조명 양측 기록에서 양녕공의 행적은 하나같이 천보제의 연회나 각종 사치행적에 연관되어 있다. 어쨌든 황제는 이 동국의 폐세자를 어지간히 좋아했는지 교지원정 때에도 그 문제의 용주에 태워서 데려갔는데, 후정난이 터지기 딱 1주일 전에 정실인 수성부부인 김씨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며 급히 경사로 돌아가니 황제가 아쉬워하며 태호에서 전송연을 벌였다는 것이 명사의 마지막 기록이다. 그런데 이 시기 조선 측 기록에서는 수성부부인이 위독하기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나타나지 않는다. 북경으로 돌아온 황제가 조선에 구원을 요청할 때에도 조선관을 통해서 기별이 왔지 양녕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양녕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해를 넘긴 1438년인데, 엉뚱하게도 태사세자, 즉 차기 타이시인 에센의 보좌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물론 황실과 조정이 송두리째 뿌리뽑혀 북방으로 끌려가는 난리통에 멀쩡하게 북경에 남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후원 조정에 눌러앉아 한자리 차지하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천보제 옆에서 벌이던 그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은 어디로 가고 후원 시기의 기록들을 보면 그냥 주색잡기에 좀 능한 상식인 수준으로 사람이 완전히 변해있다. 타인이 사칭했다고 하기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해서도 세종이든 문종이든 효령공이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인다.

이를 토대로 양녕공이 사실은 계획적으로 천보제에게 접근해 명나라를 파탄 수준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나아가서는 조선과 몽골이 처음부터 손을 잡고 짜고 친 판이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온다. 물론 가능성은 적은데, 애초에 조선은 골수 반몽주의 사대부들이 주축이 되어 원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수립한 국가인만큼 몽골의 재입관은 애초에 바랄수가 없는 일일 뿐더러, 이 시기를 전후해 조선이 몽골, 정확히는 이 사태를 주도한 오이라트 측과 별 다른 통교를 시도한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단순히 천보제의 몰락에 일조한 양녕을 우대해줬을 뿐이라는 해석이 우세하기는 하나, 그렇게 보기엔 양녕의 극적인 태도 변화와 함께 후원 측에서 그렇게 양녕을 우대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문제 때문에 이 사안의 진실은 미궁 속에 빠져있다.

  1. 우유부단하기로 소문난 건문제 주윤문은 그의 처분을 미루려 했으나, 주고치의 억류를 주도했던 강경파 제태는 끝내 그를 암살했다. 반대로 함께 금릉에 체류했던 주고후는 주체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들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황자징의 주장으로 동생 주고수와 함께 금릉을 빠져나와 정난의 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후 정난의 변에서 활약한 주고후는 살려보내주고 정작 주고치를 계속 억류하면서 연왕 측의 불신만 샀던, 건문제 측의 이도저도 아닌 일처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였다.
  2. 사실 태자 재위 시절에도 영락제가 친정 등으로 자리를 비우면 주고후가 대리청정을 했는데, 그 때마다 국정이 엉망으로 돌아가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 불만이 드높았고 태자 친위세력인 구복, 왕녕선 등은 이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결국은 영락제마저 어느정도 장성한데다가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장손 주첨기로의 후계자 교체를 고려했으나, 건문제의 트라우마가 워낙 심했기에 주고후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3. 막북 원정은 이미 영락년간에도 황제의 위엄을 보여주는 무력시위 성격이 강했지, 몽골 측에서 유목민족답게 초원지역에서 굳이 정면대결하기보다는 빠른 철수 후 복귀를 선호했기 때문에 실제 군사적 성과는 얻기 힘들었다.
  4. 句容; 현 전장군 쥐룽시
  5. 당연하지만 천보제는 조선에게도 매우 가혹한 조공을 요구해 조선의 불만이 높았다.
  6. 특히나 한왕 주첨기의 장자인 주기진은 일가를 남경 고궁에 유폐한 천보제의 학대의 끝에 고작 2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주첨기는 스스로 폐서인을 자처하면서까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천보제는 주첨기를 폐서인하지도, 아들을 살려주지도 않았다. 정작 주첨기는 몽골군이 개입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천보제를 사로잡은 뒤에는 귀양을 보낼지 폐서인하고 유폐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지 죽인다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7. 북경 조정의 관료 대부분을 남경까지 데리고 갔기 때문에 북경에 남은 인원들은 정말 부서 유지에 필수적인 하급관료 뿐이었고, 천보제가 남방에 주재하는 사이에는 이 인원들이 남경 조정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나마 태사 왕빈처럼 천보제의 곁에 있다가 함께 도망친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대혼란의 와중에 우왕좌왕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거나 북상 중 몽골군에게 사로잡혀 포로로 압송되었고, 일부는 정난군 진영에 합류해 남경 조정에서 그대로 기용되기도 했다.
  8. 제남에서 군민에게 포박되어 죽은 산동도지휘 근영(靳榮)의 아들이다.
  9. 선덕제 이후의 남명은 대체로 회남 영토를 지키는 쪽에 만족했고, 심지어 천보제가 열심히 놀아제꼈던 북경을 혐오하는 정서까지 만연했기 때문에, 후원 입장에서는 굳이 긁어 부스럼으로 천보제 계열이 집권하거나 해서 그 가공할 물량으로 북벌을 시도하는 시나리오를 최대한 막고싶어했다. 무엇보다 전원 시기와는 달리 이미 회북의 생산력 저하가 눈에 띌 정도로 심화되고 있었고, 등 뒤의 만주를 석권하지 못한 채 조선의 요동 북진과 기타 각 지역의 분리독립을 허용했기 때문에, 최대한 남명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식량 및 각종 재화를 공급받을 필요가 있었다.
  10. 중간에 17년간의 원-명교체기가 있기는 했으나, 남북 왕조가 고착화되어 대립하는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11. 남명 조정에 출사해 관료 자리를 채워줘야 할 강남의 신사층들은 남송 멸망 이후 거의 한 세기동안 중앙에 출사할 길이 사실상 막힌 채 향촌자치로 만족해야 했고, 기껏 한족 국가인 명이 들어선 이후에는 홍무 연간부터 끝없이 이어진 중앙관료들의 대수난을 지켜보면서 아예 중앙 출사를 단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총명하기로 이름났던 주첨기가 제대로 치세를 이어갔으면 또 모르지만, 그라고 해서 무려 3대에 걸쳐 망가진 관료층을 치세 내에 복구하고 환관정치의 폐단을 끊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12. 경태제는 후사 없이 죽었고, 선덕제의 직계는 단절되어 (추존)인종 주고치의 차남인 정정왕 주첨숙의 손자 주견자가 만5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성화제 주견자 또한 1479년 만2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다시 장자인 주우심이 만8세의 나이에 홍치제로 즉위했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1507년 아우 주우택이 정덕제로 즉위하고나서야 간신히 어린 황제 즉위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13. 이 과정에서 신종대에는 그 북진정책의 상징인 정도전이 복권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조정에서 일부 반대도 있었으나, 왕조 최초의 적장손 출신으로 막강한 왕권을 휘둘렀던 신종은 "태종께서는 손수 처단하신 정몽주도 복권시키셨는데 개국에 공도 있는 정도전 정도면 본인이 손수 신원해주려 하시지 않았겠나?"라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14. 대신 조선 한정으로 해금령을 풀어서 이전까지 육로로만 가능했던 조천(朝天)과 칙사의 조선 파견을 해로로 가능하도록 했다. 조천은 그렇다쳐도 칙사를 육로로 맞이하는 것은 평안, 황해 각 지역에서의 접대비용에 도로 보수까지 엄청난 부담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또 양녕공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육로보다는 해로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양녕의 수발을 든다는 명목으로 북경에 조선관을 설치하고 상주 관원을 두어 수시로 본국과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