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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1]
  1. 대한제국대연국의 통제 및 간섭을 받는 자치국 형태에 놓여 있다.
청화국
淸華國
state of Cheonghwa
국기 국장
표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민족
국가 청화가(淸華歌)

붉은 색 영역
수도 금양부(錦陽府)
최대 도시 군천부(郡泉府)
정치
공용어 한국어
국왕 최환崔煥
내각총리대신
의정원 의장
유덕민劉悳珉
이화윤李在喜
 
 • 청화왕국 건국 1288년 5월 3일
 • 건융 유신 1858년 2월 2일
 • 한성조약 1897년 12월 18일
 • 입헌군주정 선포 1899년 3월 14일
지리
면적 97,530km²
시간대 UTC (UTC+9)
인구
1910년 어림 3,573,981명
경제
통화 ()


청화국(淸華國, 영어: State of Cheonghwa)은 동해(東海)에 위치한 국가로서 동쪽으로는 일본 열도, 북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한반도와 접해 있다. 수도는 금양부(錦陽府)이며, 입헌군주정을 채택한 왕정 국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서구 열강과의 교류 아래 입헌 정치와 이른바 속전속결 근대화로 범한세계(汎韓世界)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상당한 지역 강국으로 성장한 추세이다.

역사

청화국은 시대를 지나오면서 기록이 많이 소실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6세기 무렵에 신라 계통의 김월지라는 사람이 이라는 중앙 집권체제 나라를 건국한 것을 청화국의 역사의 시초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김씨왕조인 진은 고구려, 신라를 통해 신진문물을 받아들였던 터라 발전이 많이 늦었으나 1세기가 지난 7세기 무렵에 현덕왕이 즉위하자 청화도 내부에 정복하지 못했던 을 정복하여 청화도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바다를 뺑 둘러서 중국과 교류하였으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연해주, 일본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중국본토까지 공격하는 등 급진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시행하였다.

더더욱 청화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통일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신라를 지원했으며 더더욱 발전해나갔으나 흥덕왕이 사망하자 진의 중앙집권체제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호국인 신라가 무너지자 진은 서서히 붕괴되어 갔으나 김월우가 왕위에 즉위하자 국호를 한으로 바꾸고 국가체제 정비를 시도했으나 결국 태종이 암살당하고 진의 장군이었던 최동진이 정변을 일으켜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딸이었던 김희혜(혜종)를 왕으로 세웠다. 결국 1년도 안 되서 다시 한번 정변을 일으켜 혜종을 폐위시키고 최동진 자신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청화로 바꿨으며 혜종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1]

청화국의 왕위는 장자가 계속 계승하면서 이어져 왔으나 1626년 9월 17일 순종가 자신의 여동생이었던 혜원공주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오빠인 순종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자신과 혼인을 하게 하였으며 순종을 폐위시켜 본인이 왕위에 올랐으다. 비록 정변으로 오르기는 했지만 인조는 중원 왕조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개혁적이고 과감한 정책으로 청화국을 부강한 국가로 만들어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때를 청화 역사 상 가장 번성했던 시대로 보고 있다.

순종 최영주와 인조 최연지의 사이의 자녀인 효종 최연빈, 숙종 최찬부터 계속 장자가 왕위를 계승해나가던 도중 청화국의 해안지역에 이양선의 출몰이 급증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청화국의 조정은 두 파로 나뉘었는데 막아내자는 보수파와 그들과 통상하여 개항하자는 개화파로 나뉘어서 살벌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당시 왕이었던 최원은 개화파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국내의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선교사들을 이용해 남해사건을 고의로 일으켜서 그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보수파는 강력반발하였으며 최원은 1858년 건융 유신을 일으켜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하고 왕이 아닌 황제 중심의 국가로 재편하여 연호를 건융으로 바꾸고 청화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청화국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개혁군주로 손꼽히는 건융태황제가 1894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최환이 황위에 즉위하자 청화제국은 보수파의 잔재들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여 결국 1897년 12월 18일 굴욕적이지만 안정을 되찾기위해 대한제국과 한성조약을 체결하면서 황제국에서 왕국으로 격하되고 대한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대한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건융 유신을 치르면서 건융태황제가 설치해놓았던 의정원[2]에서 민선 의정원이 구성된지 1년 뒤인 1899년 3월 14일 왕실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기습적으로 입헌군주정 선포를 하게 되면서 국왕 최환은 총리임명권과 일정 권한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의정원에 넘겨주게 되었으며 의정원의 입헌군주정 선포를 인정하게 되었다.

각주

  1. 김희혜는 처음에는 최동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동진은 계속 김희혜의 마음을 돌리려 온갖 노력을 했으며 결국에는 최동진이 왕위에 오른지 4년 뒤에 이 둘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지금 청화국의 황족은 모두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다.
  2. 당시 의정원에는 건융태황제를 따르던 사람들과 그때로 회귀하려는 사람이 대다수여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의정원이 주도해서 왕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버리자는 의견이 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