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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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역대 국왕
핀란드 왕정
건립 선언
1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2대 에르비히 마리아
만네르하임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Carl Gustaf Emil Mannerheim
Mannerheim.jpg
1940년의 만네르하임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출생지 핀란드 대공국 아스카이넨
사망지 스위스 로잔
종교 루터교
생몰 기간 1867년 6월 4일 ~ 1951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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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전쟁원수(Sotamarsal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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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백위군 최고사령관
1918년 1월 25일 ~ 1918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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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왕국 국왕
1919년 7월 25일 ~ 193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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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왕국 6대 섭정
1944년 8월 4일 ~ 1946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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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왕립군 총지휘관
1939년 10월 17일 ~ 1945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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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의장 각하, 우선 각하께서 저에 관해 고마운 말씀을 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어린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명예로운 의회 의원 여러분, 민족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섭정직을 받아들임에 있어, 저는 제게 주어진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고난은 너무나 거대합니다. 이 순간 제 마음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제 전쟁 5년차를 맞고 있는 핀란드의 국군 장병들입니다. 전능하신 신께 바라건대, 의회와 내각과 우리 뒤에 서 있는 하나된 민중들의 지지와 함께라면, 우리의 독립과 우리 국민의 존재를 보존케 할 수 있음을 희망하고 또 믿습니다
핀란드 의회가 특별 법안을 통과하여 그에게 섭정직을 수여하자, 다음날 발표한 그의 취임 선서 중 일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핀란드어: Carl Gustaf Emil Mannerheim)은 핀란드의 정치가, 군인이었으며 핀란드 내전 이후에 핀란드내 군주주의자들의 왕정 운동을 통해서 국왕으로서 추대되기도 했으나, 계속 전쟁의 준비를 위하여 퇴위를 선언하여 핀란드 왕립군의 총지휘관으로서 활약하였다. 이후 소련과 독일과의 외교전을 위해서 섭정직을 역임하였으며, 현재까지 핀란드에서 유일한 "전쟁원수" 칭호를 수여받은 인물로서 핀란드의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핀란드인들은 그를 가르켜 "핀란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핀란드인이자 국부"로서 칭송하고 있다.

혈통 및 초기 경력

만네르하임 가는 함부르크의 사업가, 제분소 사장이었던 하인리히 마르하인(Heinrich Marhein, 1618년–1667년)이라는 독일인을 선조로 한다. 마르하인은 스웨덴 예블레로 이주하였고 이름을 스웨덴식으로 "헨리크(Henrik)"라고 고쳤다. 헨리크 마르하인의 아들 아우구스틴 마르하인은 성을 "만네르헤임"이라고 바꾸었고 1693년 칼 11세가 그를 귀족으로 승격했다.

아우구스틴 만네르헤임의 아들 요한 아우구스틴 만네르헤임은 포병대령이자 제분소 공장장이었는데 1768년 남작(핀란드어: Vapaaherra 바파헤라, 스웨덴어: Friherre)의 작위를 받았다. 만네르헤임 가는 18세기 하반기에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로 이주했다. 오랫동안 헨리크 마르하인이 네덜란드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들이 돌아다녔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이 통설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요한 만네르헤임 남작은 부계 혈통에 스코트인 조상도 있었다. 그 조상은 조지 라이트(George Wright)라는 이로 17세기에 던디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핀란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폰 브리그트 가의 시조가 되었다.

만네르헤임의 증조부 칼 에리크 만네르하임(1759년–1837년)은 핀란드가 러시아령으로 넘어가 핀란드 대공국으로서 자치를 누리던 초기 시절 많은 공무원직을 역임했다. 만네르헤임 백작은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초대 원로원 경제부서장(핀란드 총리직의 전신)을 지냈다. 1825년, 칼 에리크 만네르헤임은 백작(핀란드어: Kreivi 크레이비, 스웨덴어: Greve)으로 승격했다. 만네르헤임의 조부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1797년–1854년)은 유명한 곤충학자였으며 비푸리 항소재판소 재판소장을 지냈다. 만네르헤임의 조모 에바 빌헬미나 만네르헤임 백작부인(본성 폰 샨츠)은 핀란드 상류사회의 선도적 인물이었다.

만네르헤임의 부친 칼 로베르트 만네르하임 백작(1835년–1914년)은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극작가였으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업가이고 경영주였다.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은 북유럽에서 최초로 윤번 제지에 성공한 유한회사 쿠산코스키(Kuusankoski Ltd.)의 사장이었고, 쉬스테마(Systema)라는 회사로 근대적 사업기계를 수입해 왔다.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의 자녀들은 1914년 쉬스테마를 경영자매수로 매각했다. 만네르헤임의 모친 헤드비히 카를로타 헬레네 폰 율린(Hedvig Charlotta Hélène von Julin, 1842년–1881년)도 부유한 경영주였던 요한 야콥 폰 율린의 딸이었다. 폰 율린 가는 피스카르스 철공소와 피스카르스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은 아스카이넨의 빌내스 장원에서 태어났고, 네 자녀 중 셋째로서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백작 작위는 장남만 물려받는다).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의 부친은 사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1870년대 후반에 경조성 인격장애를 앓으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은 재무 문제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고 도박에까지 빠지면서 결국 1880년에 파산했다. 빚을 갚기 위해 만네르헤임 백작은 빌내스 장원을 비롯한 다른 부동산들과 예술품 컬렉션을 자기 누이에게 모두 팔아야 했다. 백작은 아내 곁을 떠나 정부와 함께 파리로 가서 보헤미안이 되었다. 백작은 1887년 헬싱키로 돌아와 쉬스테마 사를 세웠고 죽을 때까지 회사를 경영했다.

헬레네 백작부인은 파산과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아 일곱 자녀를 샐비크의 고모 댁으로 보내고 그 이듬해 심장마비로 죽었다. 수치와 우울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모친이 죽자 만네르하임 가 아이들은 친척들에게 맡겨졌고, 외삼촌 알베르트 폰 율린이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집안 재정이 악화되고 만네르헤임의 진학 문제가 심각해지자 알베르트 폰 율린은 자립할 수 있는 방법과 직업을 찾으라는 뜻에서 1882년, 외조카를 하미나의 핀란드 간부후보생 학교에 보냈다. 간부후보생 학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군사학교로서 귀족가의 소년들을 핀란드 대공국군 및 러시아 제국군 군인으로 훈련시켰다.

만네르헤임은 가정의 재정적 악화로 인해 일찍이부터 절약하고 저축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소액의 구매를 위해 외삼촌에게 번번히 손을 벌려야 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게다가 외삼촌을 비롯한 친척들의 절약과 근검에 대한 셀 수 없는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만네르헤임의 진학 문제는 계속되었다. 그는 간부후보생 학교와 하미나의 좁아터진 사교계를 끔찍히 싫어했다. 결국 1886년 무단외출로 반항을 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군의 일부이기는 하나 핀란드의 군대인 핀란드 대공국군에 들어갈 길은 막혀 버렸다. 유일한 선택권은 러시아의 장교훈련기관을 통해 러시아 제국군에 들어가는 것 밖에 없었다. 젊은 만네르헤임은 이 생각을 딱히 꺼리지 않았다. 본래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간부후보생 시절부터 생각해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립 수습기사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었으나 핀란드 간부후보생 학교에서 그의 비행을 보고하는 바람에 불가능하게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에서 외삼촌의 동서 에드바르드 베르겐헤임(Edvard Bergenheim)과 얼마동안 같이 지내며 거기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만네르헤임은 헬싱키 사립학원에 등록하여 1887년 6월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이제 간부후보생 시절보다 훨씬 나은 성적표를 얻게 된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황실에 인맥이 있는 대모 알프힐드 스칼론 드 콜리그니 남작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니콜라이 기병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했다. 만네르헤임의 본래 지망은 친위기사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친척들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해서 포기했다. 1887년 여름, 만네르헤임의 대모는 그를 루키아노브카의 자기 남편 집으로 초대했다. 거기서 만네르헤임은 러시아어 실력을 좀더 쌓고, 추구예프의 군부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군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결정을 굳혔다.

러시아 제국 육군 장교

1887년 7월 말, 만네르헤임은 니콜라이 기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네르헤임은 시험을 통과하고 1887년 9월 16일 러시아 차르에 대한 충성맹세를 했다. 만네르헤임은 1889년 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10등이었는데, 본래 차석을 할 수 있었으나 술을 마시고 상급장교와 핀란드의 자치권에 대해 싸움을 벌인 일로 미끄러졌다. 만네르헤임은 다시는 과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만네르헤임은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러시아-독일 국경지대 칼리시의 제15용기병연대 알렉산드리스키에 배속되었다.

1891년 1월,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폐하의 친위기사연대"로 배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187 센티미터에 달하는 장신의 키가 이득이 되었고, 또한 덕분에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잘 보이는 자리에 서기도 했다. 1892년, 만네르헤임의 대모 알프힐드 스칼론 데 콜리그니 백작부인이 러시아-세르비아 혈통의 부유한 귀족 영애와의 결혼을 중매했다. 니콜라이 아라포프 소장의 고아가 된 딸 아나스타샤 아라포바(1872년–1936년)가 그 상대였다. 만네르헤임은 그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나스타시에(1893년–1978년)와 소피에(1895년–1963년) 두 딸을 두었다. 셋째아이는 아들이었는데 사산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02년부터 아라포바와 별거했고, 1919년 이혼했다.

만네르헤임은 1904년까지 친위기사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97년에서 1903년 사이에는 황실 마료 관리 일을 맡았다. 만네르헤임은 말에 대한 전문가로 종마와 육군에서 쓸 수 있는 군마를 구입했다. 1903년, 만네르헤임은 교도대 대장으로 발령받고 기병연대 훈련소의 승마 담당 교관 중 하나가 되었다.

만네르헤임이 아내와 이혼한 뒤 그의 재정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도박에서 돈을 잃으면서 더욱 궁핍해진 만네르헤임은 우울증에 빠졌고 환경의 변화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만네르헤임은 1904년 러일전쟁에 자원 참전했다. 1904년 10월, 만주의 제52용기병연대 네진으로 배속되며 중령으로 승진했고, 1905년 봉천 전투에서의 용맹을 인정받아 대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잠시 비정규군사인 홍호자 부대를 지휘하며 내몽골 탐사 임무를 떠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비밀 첩보장교로 투르키스탄을 거쳐 베이징으로 향하는 여행을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러시아 제국 총참모장 팔리트신 대장은 청나라의 개혁과 근대화 시도에 관한 정확한 현장 첩보를 원했다. 러시아는 중국 서부 청해, 감숙 등지를 침공할 수 있는지 효용성 여부를 알고 싶어했다. 이는 러시아와 영국이 아시아 내륙을 놓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였다. 고민 끝에 만네르헤임은 민족학 수집가로 위장하고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의 사마르칸트(당시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현재 우즈베키스탄령) 원정에 동행했다. 1906년 7월 안디잔의 카스피 철도 종점역에서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만네르헤임은 중국 신장의 카스가얼로 가는 도중에 보급 문제에 관하여 펠리오와 한바탕 싸운 뒤 원정 기간의 대부분을 혼자 다녀야 했다.

우선 만네르헤임은 영국과 일본 간첩들을 찾아내기 위해 카자크 안내인, 중국어 통역사, 위구르인 요리사 등을 대동한 작은 대열을 이끌고 호탄으로 향했다. 카스가얼로 돌아온 뒤에는 북쪽으로 향해 톈산 산맥을 넘어 고갯길을 측량하고 칼미크인, 카자흐인, 키르기즈인들의 중국 한족들에 대한 태도를 살폈다. 만네르헤임은 신장성의 성도 우루무치에 도착한 뒤 동쪽으로 향하여 투루판, 하미, 둔황을 지나 감숙성에 이르렀다. 하서주랑을 통해 만리장성을 따라갔고, 정체불명의 위구르 족을 조사하기도 했다. 감숙성 성도인 란저우에 도착한 만네르헤임은 남쪽으로 길을 돌려 티베트로 향했다가 라브랑 사원에서 타국인을 혐오하던 승려들에게 돌을 맞았다.

만네르헤임은 중원의 서안, 정주, 개봉을 거쳤다가 열차를 타고 산서성의 성도 태원으로 향했다. 불교의 성산 우타이 산을 오르다가 티베트 독립운동을 막 시작할 무렵의 달라이 라마 13세를 만났다. 만네르헤임은 티베트의 법왕에게 중국인들로부터의 호신용으로 쓰라고 자기 피스톨을 선물로 주었다. 이후 만네르헤임은 만리장성 너머로 가서 전통적으로 몽골 유목민들의 영역인 대초원을 밟았다. 내몽골의 수도 쾨케호타에 도착한 만네르헤임은 부패한 총독이 한족 농민들에게 몽골인의 방목지를 넘겨주며 몽골을 식민화하고 있어 몽골인들 사이에 반란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감지했다. 최종적으로 1908년 7월 만네르헤임은 목적지인 북경에 도착하여 거기서 첩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본을 들렀다가 시베리아 특급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했다. 만네르헤임의 보고서는 청나라의 교육, 군제개혁, 한족의 이민족 식민화, 광공업, 철도부설, 일본의 영향력, 아편 소비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근대화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다. 만네르헤임의 보고서는 신장이 중국과 거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신장 침공의 전술적 사용처를 논하였다.

1909년 러시아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폴란드 민스크마조비에츠키에 주둔하고 있는 제13창기병연대 블라디미르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만네르헤임은 소장으로 진급하며 멸을 달았고 바르샤바에 주둔한 "차르 폐하의 경호친위창기병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황실 수행단의 일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독립친위기병여단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시점에 만네르헤임은 친위기병여단 여단장을 맡고 있었으며, 오헝 제국 및 루마니아 전선에서 싸웠다. 1914년 12월, 오헝 제국군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낸 공로로 4등 스뱌토고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뒤 만네르헤임은 “이제 편히 죽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1915년 3월, 만네르헤임은 제12기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17년 초 휴가를 받아 핀란드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들렀다가 2월 혁명이 터지는 순간을 목격했다. 전선으로 귀환한 뒤 만네르헤임은 4월에 중장으로 승진했고, 그해 여름 제6기병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만네르헤임은 자신을 혁병 비지지자로 간주하는 러시아 공화국 신정부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9월, 만네르헤임은 낙마 후유증으로 골병이 들었음을 이유로 모든 보직에서 물러났다. 예비역이 된 만네르헤임은 오데사에서 요양을 하다가 아예 퇴역을 하고 핀란드로 귀국하기로 마음먹었고, 그해 12월에 그렇게 했다.

핀란드 내전과 섭정직

1918년 1월,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된 핀란드 대공국원로원(당시 제1차 스빈후부드 내각)은 만네르헤임을 핀란드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당시 핀란드는 지역별로 어중이떠중이 민병대(백위대)를 긁어모았을 뿐 제대로 된 정규 군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핀란드 내전이 터지자 만네르헤임은 정부측, 즉 백군의 편에 섰다. 내전은 러시아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촉발되었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은 적핀란드를 지원했다. 만네르헤임은 원로원의 친독일적 행보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백군 총사령관 직을 받아들였다. 그는 바사에 총사령부를 차리고 그때까지 핀란드에 남아있던 구 러시아 제국군 주둔지들(병력 총 42,500 여명)를 무장해제시켰다. 내전 도중인 1918년 3월 만네르헤임은 기병대장으로 승진했다.

내전은 백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러시아를 몰아내고 나니 이제 독일이 말썽을 부렸다. 독일은 본래 핀란드를 군주국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제후국으로 편입시키려는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백군을 지원하러 왔던 독일 동해사단은 내전이 끝난 뒤에도 독일로 귀환하지 않고 핀란드에 머무르며 내정간섭을 했다. 만네르헤임은 페트로그라드와 러시아령 카렐리야를 공격해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은 러시아와 1918년 8월 27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핀-러간 국경을 핀란드 몰래 확정한 상태였기에 핀란드의 러시아 공격을 반대했다. 독일의 영향을 받던 원로원이 만네르헤임의 계획을 거부하자 독일이 핀란드에 패권을 행사하는 것과 자신의 공세계획이 기각된 것에 불만을 품은 만네르헤임은 5월 25일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1918년 10월 9일, 독일의 압력을 받은 원로원과 의회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매제인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를 핀란드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불과 1달 뒤인 11월 11일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패배해 망하면서 동해사단도 독일로 철수했다. 만네르헤임은 1차대전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핀란드 원로원이 취한 친독일 정책에 연합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워했다. 원로원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만네르헤임은 친척들을 방문한다는 핑계로 1918년 6월 핀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갔다.

스웨덴에서 만네르헤임은 스톡홀름 주재 연합국 외교관들을 만나 자신은 핀란드 원로원의 친독 정책에 반대했고 연합국을 지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1918년 10월,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독립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원로원을 대표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했다. 12월, 파리에서 핀란드로 소환된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임시 섭정(핀란드어: Valtionhoitaja, 스웨덴어: Riksföreståndare)으로 선출되었다. 일부 군주주의자들은 만네르헤임을 핀란드의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했고, 이들은 헬싱키에서 대대적인 핀란드 주권 독립 및 만네르헤임 국왕 추대를 내걸고 7월 왕정 운동이 벌어졌다. 만네르헤임의 러시아 군 복무 이력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자, 만네르헤임은 국왕 추대를 담은 공문서에 핀란드식 이름인 "쿠스타(Kustaa)"로 서명함으로서 자신이 핀란드인임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만네르헤임은 프리드리히 카를을 대신하여 핀란드의 군주로서 즉위하게 되었다.

1919년 7월, 만네르헤임은 새로이 제정된 왕국 헌법을 승인하고 사적으로 국민연합당스웨덴 인민당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핀란드 의회에서 이루어진 간접선거의 결과, 국민 진보당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선출되었고 만네르헤임은 그의 총리 취임에 대해 승인하였다.

국왕 재위기 및 전간기

전간기 동안 만네르헤임은 국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면서 휴식을 취했으며, 공적인 정계 활동에 대해서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는 그가 볼셰비키에 공공연한 반대를 표출함으로써 논쟁적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내전에 핀란드가 백군의 편을 들어 참전하기를 원했고,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적대했다. 그들은 만네르헤임을 "백군의 장군이자 폭군"으로 부르며 부르주아 출신이라고 보았다. 또한 만네르헤임은 정당 정치가 핀란드 뿐 아니라 세계 어디든 제대로 된 지도자를 세워줄 수 있는지 의문을 품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조국의 국익이 자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공적인 활동이 제약된 상황을 맞이한 만네르헤임은 대신 인도주의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핀란드 적십자사에 들어갔고(1919년에서 1951년까지 총재 역임), 핀란드를 국제적십자사 위원회 회원국으로 등록했다. 그 뒤에는 만네르헤임 아동복지협회를 만들고, 상업은행인 리토팡키 연합은행(Liittopankki-Unionsbanken)의 감사회 회장직을 맡다가 리토팡키 은행이 헬싱키 은행에 합병되자 헬싱키 은행 감사회로 옮겨가서 1934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또한 만네르헤임은 노키아 이사회의 중역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는 아시아로 가서 열정적으로 여행과 수렵을 다녔다. 1927년의 첫 수렵여행 때는 소련 영토를 피하기 위해 런던에서 캘커타로 배를 타고 갔닫가 거기서 육상으로 버마까지 갔다. 랑군에서 1개월을 보낸 뒤 시킴의 강토크로 놀러갔다. 돌아올 때는 자동차와 항공기를 갈아타면서 바스라, 바그다드, 카이로, 베네치아를 거쳐 귀국했다. 두 번째 여행은 1936년이었다. 아덴에서 봄베이로 배를 타고 가서 인도에 머물렀다. 인도에서 지내면서 만네르헤임은 유럽의 지인들을 인도에서 만났다. 수렵여행을 다니며 마드라스, 델리, 네팔을 방문했다. 네팔에 갔을 때는 네팔 왕 트리부반 비르 비크람 샤에게 호랑이 사냥 초대를 받기도 했다. 만네르헤임은 사람을 두 명을 죽였다고 알려진 신장 3.23 미터의 호랑이를 죽였는데, 이 호랑이의 모피는 헬싱키의 만네르헤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29년, 극우주의자들이 만네르헤임에게 전제군주가 되기를 청하였지만 만네르헤임은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파시즘 정당인 라푸아 운동에게 약간의 호감을 나타냈다. 1931년 섭정으로 선출된 패르 에빈드 스빈후부드는 만네르헤임을 핀란드 방위평의회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동시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에게 핀란드 육군 총사령관직을 맡기겠다는 서면 각서를 받았다. 스빈후부드의 후임 섭정인 퀴외스티 칼리오가 1937년 이 각서의 내용을 재보증했다. 1933년, 만네르헤임은 전쟁원수(핀란드어: Sotamarsalkka, 스웨덴어: Fältmarskalk, 영어: War marshal) 칭호를 핀란드 의회를 통해 수여받았다. 이즈음 되어 만네르헤임은 대중 앞에 다시 나서기 시작했고, 과거 그를 "백군 대장"으로 보았던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는 그를 더이상 적대하지 않았다. 만네르헤임은 정파를 초월한 국가원수이자 국민적 존재가 되어 있었고, 만네르헤임이 내전 때 싸웠던 양측이 화해하여 국가적 통합과 국방에 전념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고 다니면서 이런 인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군수산업을 지지했고, 스웨덴과 군사방위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핀란드 육군의 재무장은 그가 원하는 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만네르헤임 본인도 전쟁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만네르헤임은 여러 내각들과 불화했고, 수 차례에 걸쳐 내각에 대한 불신임을 검토하기도 했다.